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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늘 그의 분신이었습니다. 2000년 레드삭스에 입단식을 하던 당시 호텔방에서 기타를 치는 이상훈. |
-미국에선 무엇 때문에 제일 안됐다고 생각하나
▶야구가 안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에 있을 때 기록 한번 보라. 트리플A지만 기록 되게 좋았고, 메이저리그에서 한 달도 나쁘지 않았다. 근데 잘 던지는데 안 부릅디다. 포터켓에서는 50게임 이상 던지면서 방어율 2점대였던 것 같다. 근데 첫 스프링 캠프 때 잘하다 못하다 기복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상훈은 2000년 9월 메이저에서 11이닝 4실점으로 평균자책점 3.06을 기록했고, 2001년 트리플A 성적은 5승2패에 2.09였다.) 처음 보는 선수니 시범 경기가 중요했을텐데.
-왜 그런데 기회가 안 주어졌나
▶이야기해봐야 핑계밖에 안되는데....... 보스턴은 기회가 적다. 다른 데라도 또 운대도 맞아야한다. 나랑 똑같은 놈 있으면 백인 쓰는 것이다. 김병현이 말이 틀린 것은 없다니까. 항간에는 보스턴에서 커브 연마하라는데 내가 말을 안 들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말이다. 당시 보스턴에는 불펜에 왼손잡이가 두 명 있었고 심지어는 로드 벡(샌프란시스코에서 마무리로 맹활약한 투수) 같은 선수가 중간으로 뛸 정도로 불펜이 막강했다. 팀도 잘 만나야 한다.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었나
▶그렇게 문제가 없었다. 사람끼리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최고의 능력으로 붙으면 충분히 해볼만 했다. 꼭 10승을 하고 1년 내내 잘 던져야 하는 것이 우리 식이지만, 우리는 눈이 높아져서 그렇지만 미국 애들은 메이저리그 간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 작은 땅에서 거기에 찍혀서 간다는 자체가 큰일이라고 본다.
-언어나 문화 차이는 힘들지 않았나
▶당연히 힘들었다. 보스턴은 선수들이 굉장히 세더라. 각지에서 게네 다름대로는 완전히 최고들만 모아 모두 자기가 왕이다. 백인들이 특히 심하고 남미계와 흑인들은 괜찮았다. 근데 백인과 남미계가 섞인 애들이 더 심했던 것도 같다. 여러 가지를 보면서 위축도 되고 말도 안 통하고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온다면 뭔가 다르게 하고 싶은 게 있나
▶그런 것은 없지만 훨씬 편할 것이다. 보스턴이 아니었더라면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운명이라는 생각이다. 돈이나 성적 때문에 간 것은 어차피 아니었다.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많다. 어차피 인생으로서는 보고 배운 것이 많았고, 야구적으로도 잃은 것은 없다고 본다.
LG에서 처음 했을 때와 일본에 있을 때 미국에 있을 때 그리고 한국에 다시 왔을 때가 모두 플레이가 달랐다. 미국에 갔다 와서는 마음 자세가 달랐다. 힘들고 어려운데 있다 오니까 그게 밑바탕이 되서 더 강인하게 플레이하게 되더라. 계속 한국에서만 있었더라면 늘 똑같고 발전의 계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훈의 록밴즈 WHAT!은 매 주말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합니다. |
▶난 조금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나가는 건 좋은데 무슨 의식이냐가 중요하다. 요새는 학부모들이 많이 움직이는 것 같다. 무턱대고 나가는 경향이 많은 것 같아 아쉽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텐데
▶열심히 하는 거지 뭐, 그것밖에 없어요. 잘못하면 바보 돼요.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나가더라도 한국에서 조금 야구를 하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부푼 꿈을 가지고 나가는데 계단도 하나 두개씩 올라가야 안 넘어지지. 거기 가도 싱글A부터 시작하는데 거기 애들이 굉장히 험하다고 들었다. 트리플A나 메이저리그도 험한 애들은 정말 험하니까. 주위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원정 가면 호텔 생활이지만 홈에 가면 밥해주는 엄마나 식구가 있어야하고. 한인 사회 한인 사회해야 그건 다른 이야기다. 가족 이상 되는 것은 없다.
갈래면 본인이 야망과 꿈은 당연히 가져야하지만 정말로 차분하게 준비를 하고 떠나야 한다. 스카우트들이야 늘 유혹이 오는 것이고, 가기만 하면 최고의 메이저리거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떠나지만, 고교 졸업하고 간다는 것이 미국 애들도 메이저 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네들은 용병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가장 힘든 것이 아시아 쪽 선수들이다. 남미 애들이야 선수들이 워낙 많지만 우리는 늘 혼자다. 어린데다 그런 환경을 이겨낸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 거기 가면 전쟁터다.
-하다못해 에이전트라고 긴밀하게 도와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개인 에이전트가 각별한 사이라면 모를까 솔직히 등쳐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 아닌가. 미국 에이전트들이야 계약만 해주면 끝이니. 나도 IMG가 에이전트사였는데 그저 계약만 해주고 그만이었다.
-이제 야구는 완전히 접었나? 지도자는?
▶지도자요? 이 머릴 누가 지도자를 시켜줘요? 머리 기르면 선수도 하기 쉽지 않은데(웃음). 프로 생활 2년쯤 지나고 나서 나는 선수 생활로 야구는 끝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자는 아니고 그저 어린 학생들과 함께 야구를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도 같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함께 즐기고 어울리는 것은 좋을 것도 같다. 던졌냐? 쳤냐? 잡았냐? 그러면서 노는 것 말이다.
-머리 긴 것이 편한가?
▶편하기는 뭐, 기르는데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치만 길러놓으면 1년에 두 번 정도 파머나 하면 되니까.
-예전보다 야위어 보인다
▶어제 술이 좀 과해서(웃음). 야구 그만둘 때 10킬로쯤 빠졌다. 그 때 스트레스 무지하게 받았다. 원래 95킬로 정도였는데 그만두고 나니 85킬로더라. 지금은 87킬로 정도.
-운동 그만두면 보통 살 많이 찐다는데 음악이 힘든가보다
▶아니 운동할 때는 먹기도 많이 먹는다. 지금도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먹지만 그때 같지는 않다. 그때는 식사도 불규칙하고 야구 끝나고 자기 전에 야식도 많이 먹고 그랬다.
-음악은 힘들지 않은가
▶좋아하는 것 하는데 뭐가 힘든가. 야구 할 때도 힘든 것은 없었다. 육체적으로야 힘들지만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음악해서 먹고 살 돈이 나올 것 같지 않은데
▶안 나오지. 옛날 야구 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난 내 용돈 벌이하죠. 돈 쓸 일도 없고 아껴 쓰면 되니까. 음악을 하면서 적은 벌이가 있어요. 그걸로 기름값하고 그러죠. 나 코란도 타고 다녀요. 나 알던 사람들은 망했냐 그러기도 하지만 기름 넣고 잘 가기만하면 되는 것 아닌가. 차 욕심은 전혀 없다. 차랑, 옷 입은 걸로 사람 판단하고 그러지만 나랑은 무관하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지 모르지만 난 요즘 삶이 편하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음악을 즐기면서 살고 있다.
-록 음악은 나이 먹어도 계속 하긴 힘든 것 아닌가
▶나이와 상관있을 수도 있다. 에너지가 많아야 하는데 에너지가 떨어질 때까지 해야죠. 4명 멤버들이 모두 열심히 잘 해요. (이름이 WHAT!인 그의 밴드는 최근 3집을 냈다.)
4명의 멤버로 구성된 WHAT!은 최근 3집을 내고 활발하게 활동중입니다. |
▶리드싱어라기 보다 기타 보컬이라고 한다. 노래는 나 혼자만 하고. 모두 모여 곡을 함께 만든다. 노래는 전부 우리 곡이고 사회를 풍자한 노래들이 많다. 워낙 오래 했으니까 1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정기적으로 연습하고 거의 매 주말 공연을 다닌다. 서울 외에 부산, 인천, 광주, 대전, 대구, 전주 등 지방도 많이 다닌다. 그 외에도 원하는 곳이 있으면 간다. 지난 주말은 부산에서 공연이 있었다.
-돼지가 제목에 많다. 썩은 돼지, 돼지의 꿈...
▶한 단어가 이렇게 전달이 되면서 또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새로운 단어가 쓰여 지고, 하다보니 그렇게 되더라.
-오랜만에 만나 즐거웠다. 긴 시간 고맙다. 공연 한번 보러 가겠다.
▶원하는 인터뷰가 됐는지 모르겠다. 한 때 유명한 야구 선수였지만 이제 난 언더그라운드 로커가 됐다. 로커의 자존심을 지키며 음악을 열심히 하면서 살 것이다. 나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에겐 늘 감사하다는 마음은 전하고 싶다.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02년 오클랜드 에이스의 스프링 캠프를 끝으로 국내로 복귀하고 2002년 LG 돌풍의 주역이 되고, 2004년에는 논란 속에 SK로 트레이드, 그리고 2개월 만에 전격적인 은퇴 선언. 야구를 하며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우리나라 최고령 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자신의 마운드에서의 모습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서 월급 6000만원은 물론 FA가 되면 얼마가 될지 모를 거액을 뿌리치고 야구를 접은 선수. 사실 몇 년간은 더 뛸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야구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아, 단 하나 당초 생각대로 LG에서 그냥 그만두었더라면 하는 생각은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선수시절 평소에도 늘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기타를 늘 손에서 놓지 않아도 되는 프로페셔널 로커가 된지 벌써 3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젠 음악과 가족이 그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