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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예수님의 자기계시1/ 요1:5~6/ 말씀: 하용조 목사님
우리들은 그동안 요한복음을 <사람>중심, <인물>중심으로 공부하며 살펴 보았고,
오늘부터는 <나는 0 0 이다>라고 말씀하신 [I am 씨리즈]를 모아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조명하는 것으로
요한복음과는 구별이 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어떤 관점에서 쓰여 졌습니까?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믿게하고,
또 믿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요21:31)
저는 예수를 처음 믿으시는 분들에게 요한복음을 많이 읽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에 4가지 중요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성경의 주제는 <예수는 그리스도 이다>
우리 믿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2. 둘째, 예수는 인간이지만, 사실은 그 본체가 <하나님>입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에게 믿게 하려고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3. 셋째,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천국은 아무도 가본 사람이 없지만, 예수믿는 사람들은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 합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4. 넷째, 진리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런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입니다.
또 <영원한 생명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 2. 나는 캄캄한 <세상의 빛>이다.
3. 나는 방황하는<양무리의 목자>다. 4. 나는 통과하는 <문>이다.
5. 나는<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6. 나는 나무에 비교하면 <포도나무>다.
그럼, 오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을 먼저 보십시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
여기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본질은 어두움이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태어날 때 부터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원죄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기가 있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이가 자라면서 의식이 생기고, 분별력이 생기면, <죄>를 짓습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본질은 <어두움>이지,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싸우게 되고, 갈등을 겪는 것입니다.
세상은 창조한 그대로 있지 않고, <죄 때문에> 어두워 졌고, 절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죄]가 <세상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죄]를 가져와서 <세상을 점령했기 때문에> 어두움으로 변했어요.
그래서 사람이 그 어두움 속으로 갇히다 보니까, 자신의 자리를 모르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도 모르게 되었어요.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눈>이 떠 질 때에는 죄를 알게 되고, 하나님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은 <사랑>이고, <정의>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실제로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자기 자신이 잘 모르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생기고, 남을 시기하게 되는 거지요.
이것은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예요.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므로, 그냥 세상과 부딪치며 싸우는 거예요.
그것은 본질을 모르니까, 영적인 상황을 느끼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봉사와 같이 눈을 뜨지 못했으니까, 어쩔수 없는 현상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며, 자기의 권세와 능력을 예수님에게 주어서
어두운 세상에 보냈던 거예요.
그 이유는 인간들에게 <빛의 자녀>로 살게 하려고......
그 까닭은 인간들을 사랑하셔서......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낸 거예요.
이 얘기를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어두운 방에 전기를 켜기 전까지는 방안이 캄캄하고 어둡지만,
전기 스윗치를 켜는 그 순간에 방 안에 전체가 환해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몰랐고, 오로지 세례요한,
그 한 사람만 그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에수님의 제자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도 그 사실을 몰랐어요.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것은 새벽이 오면, 어두움이 스스로 떠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자신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예수를 <내 자신>이 받아드리면, <내 안에> 빛이 들어 오게되고,
내 안에 빛이 들어 오면, 내 안에 어두움은 즉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빛이 내 안에 들어오면 광야에서 샘물이 솟아 오르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로 <빛>이 있으면,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거예요.
깊은 산 속에 있는 나무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어떤 일정한 법칙에 따라 나뭇잎이 무엇을 향해 향하고 있지 않나요?
나무가 성장하려면, 모든 잎사귀들이 <빛을 향해> 바라보고 있어요.
이런 원리는 간단해요. <빛>을 받지 못하면, 식물은 죽어버리기 때문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빛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고, 그 속에 <생명>이 생기는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성경의 첫장인 창세기를 보면서 요한복음의 말씀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창1:2)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사건중에서 제일 먼저 창조한 것이 <빛>입니다.
3절을 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창1:3)
여기서 창조의 핵심은 <빛> 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는 <말씀>으로 하셨으니, 천지창조는 <말씀>과 <빛>이 있었던 거예요.
최초의 천지창조를 개역성경을 읽어 보면, 더 자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2) 라고 쓰여 있듯이, 그 땅은 <Nothing>, 전혀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고, 어두움이 깊이 묻혀있었던 가운데,
하나님의 신 =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빛>은 발광체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해요.
********(참고로, 실제로 발광체인 <빛>은 4일 후에나 만들어 집니다.)
요한복음 1장 5~6절을 보십시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추고 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요1:5~6)
그러므로 예수를 받아들이면 어둠에 거하지않고,
<예수를 받아들이면 빛 가운데 살게 된다>고 최초로 증거한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가 오기 전, 6개월 전에 세상에 보내진 사람입니다.
<요한>이 세상에 온 목적은 <오직 빛에 대한 증거를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증인된 삶>이지, <자신이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목사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기가 빛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빛>은 예수님이고, 자기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복덕방>에 불과 한 거예요.
여기에서 이단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고 있어요.
성도여러분!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해요.
그러므로 너무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걱정이 아무리 크고 많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걱정을 녹여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의 영광스런 <빛의 광채>를 바라보고 사십시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빵/예수님의 자기계시2 /요6:48~58, 말씀: 안광복 목사님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세상의 빛>, <생명의 빵>, <선한목자>, <양의 문>, <참 포도나무>, <길이요 진리요 생명>, <선한목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독특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두 번째 시간으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하고, 그 사실로 인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셨다"고 기록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사건이 있은 직후에,
그런 기적 사건을 배경으로 오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했을까요?
마술은 미리 준비한 도구를 이용하여 순간적인 눈속임을 하는 <트릭>이지만,
예수님의 기적은 실제로 <무에서 유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창조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작은 씨앗을 심으면, 그 나무가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또 작은 누룩을 넣으면, 그것이 크게 부풀려 져서,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나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창조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 <오병이어>사건이 군중들에게 더욱 더 관심이 집중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 같은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늘 <먹는 것>을 걱정하는 평범한 빈민들이었기에
그들에게 <먹을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군중들에게 도시락 만한 크기의 물고기 두마리와 빵 5개로 5,000명을 먹일 수 있도록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기적사건>입니다.
이런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 본 군중들은 그래서 흥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주여! 그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5:34~35)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은 그 다음에 더 기가막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라는 거예요.
<먹는 문제>는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 입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만들어진 음식 중에서 가장 신기한 음식은 <만나>라고 합니다.
<만나>는 하늘의 양식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처음에 그것을 먹은 사람들은 <꿀섞은 과자>라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 만나를 먹어도 하루가 지나면,
또 다시 배고픔을 느껴서 <다시 먹어야> 합니다.
세상의 음식들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먹습니다.
이런 음식이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지만, 그 음식으로 <생명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죽지않고 살려면 <1회용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지 않고도 배고프지 않는 <생명을 주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자기 자신이 <생명의 빵이다>"는 것입니다.
50~52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나 여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 있는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이다. 그러나 유대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한단 말인가? (요6:50~52)
여기서 몇가지 특징이 나와 있어요.
1. 첫째, 누구든지 이 빵을 먹을 수 있다.
2. 둘째, 이 빵은 <생명의 빵>이다.
3. 셋째,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럼, 그런 빵은 어떤 빵입니까?
그 대답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 사람들은 그 때부터 수군거리기 시작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들은 예수님 한테서 더 큰 충격적인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 53~5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이 있고, 내가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 내 살이야 말로 참된 양식이요. 내 피야 말로 참된 음료다. (요6:53~55)
이런 예수님의 얘기를 듣고, 사람들은 의하하게 생각하여 더 수근 거립니다.
어리둥절하는 사람들에게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는 얘기는 아주 <엽기적인 얘기>로 들립니다. 마치 그들이 식인종과 같아서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도 언뜻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 중에는 <소의 살을 날것으로 먹고(= 육회로), 피를 마셨는데,
그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오해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도 대단히 불편한 얘기로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인종과 같은 행동을 한다>고 수근거렸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살을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까이 간다"는 의미이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받아드리고, 의지 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요1:1)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했어요.
즉, 하나님은 말씀이고(하나님=말씀),
그 하나님이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셨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믿고 따른다."는 의미이고,
둘째로, 그렇게 예수를 믿고 따르면,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밥을 먹으면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과 같이,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를 먹고. 따르고,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57~58절을 보십시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것 처럼, 나를 먹는 사람은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6:57~58)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살을 먹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주 간단해요.
첫째, 예수님의 말씀을 자꾸 듣는 거예요.
둘째, 말씀을 듣다보면, 자기 마음 속에 <예수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예수님와 같이 반응하도록 해야 해요)
우리들의 삶은 매일 매일이 전쟁터와 같아요.
여기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 집니다.
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면서 때로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도 있지만,
어떤 날에는 욕심과 유혹에 사로잡혀서 패배감에 쌓여서 후회하는 날도 있지요.
이렇게 우리의 내면에서는 날마다 치열한 <영적전투>가 벌어 집니다.
그런 내 마음속에 좋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우면,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생기고, 그렇게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쌓이다 보면, 거룩함으로 채워져서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도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의 음식이 있어도,
내가 배가 고파야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합니다.
내가 배가 부르면, 결코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내가 간절히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면, <죄에 대한 욕구>가 줄어 듭니다. 그 Key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입니다.
<생명의 말씀>인 [성경]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는 최고의 <베스트 셀러>입니다.
지금까지 1850 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어있고, 지금도 미국에서 28개 언어로 <날마다 10톤의 성경이 인쇄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미국에서는< 1년에 2억 달라의 성경이 팔린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경을 자주 읽고 접하다 보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시편 19편 7편을 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해서 영혼을 소성케한다."(시 19: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여기서 <소성케 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회복시킨다>는 의미이고, <생기를 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영양소의 발란스가 깨지면, 건강이 불균형이 되어서 병에 걸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도 <영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그 영혼은 성장할 수 없어요.
나의 내면을 거룩하게 채우지 않으면, 내 영혼도 불균형이 되어서,
금방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외로움을 느끼면서 병에 걸립니다.
그 이유는 <영혼의 양식>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나영이 사건의 조두순은 "감옥에서 혼자서 독방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은> 사람이예요.
"화병 속에 예쁜 꽃이 꽂혀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그 꽃은 겉으로는 화려해도 이미 <죽은 꽃>이예요.
그 꽃은 얼마동안 향기도 나지만, 이미 뿌리가 짤려진 <죽은 꽃>입니다.
우리들도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겉으로는 그럴 듯하고 화려하지만, 젊고 탄력있는 육체와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영혼을 들여다 보면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내 자신에게 <영의 양식>을 잘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코드>를 연결하고, <영의 양식>을 공급받고, 영적인 능력을 가꾸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비전을 발견하고, 자기의 능력을 키워 나가야 해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고, 꾸준히 훈련하면, 더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삶에 <영의 양식>을 공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말로 <생명의 빵>을 계속해서 공급받는 방법은 뭐예요?
그 대답은 성경 속에 담겨 있어요.
그 대답은 성경은 <인생의 올바른 안내서>이기 때문이지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서 여러분의 내면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때,
자신의 비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 인도의 <간디>도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옥스포드 대학 도서관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인 <팔복>의 말씀을 보면서 필이 꽃혀서, 그 말씀을 통해서 <조국의 독립과 인권을 위하여 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이룬, 마틴 루터도 구원의 방법을 찾던 중, 로마서 1장 17절인, "복음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시돼, 믿음으로 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기록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롬1:17)라는 말씀을 보면서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게되어, <용기를 내어서 종교개혁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어떤 책이 우리 삶 가운데서 변화를 주겠습니까?
"노벨 문학상을 읽었다"고 해도 그 속에서 진리가 나오겠습니까?
책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구원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 사용 설명서>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은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와 인생의 시작과 끝이 어디에 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이 무엇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책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람은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몽골에 가면 양고기를 먹기 때문에 "항상 양고기 냄새가 난다"고 해요.
한국 사람은 늘 "김치 냄새가 난다"고 해요.
그렇다면 <크리스찬>은 어떤 냄새가 나야 합니까?
<크리스찬>은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크리스찬은 <예수를 먹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먹다 보니까, <예수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찬은 <예수냄새>가 나야 정상입니다.
그렇게 <예수냄새>가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생명의 빵>인 하나님 말씀을 매일 매일,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거룩한 말씀>을 매일 매일 날마다 읽고, <먹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을 <거룩한 말씀>으로 매일 매일 채우다 보면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생명의 기운>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서, <생명의 기운>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으로 오셨어요.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셨어요.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 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빵 = 생명의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먹고,
그 <생명의 말씀>을 마음 속에 채우면서, <생명의 기운>이 나에게 나타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양의 문/예수님의 자기계시3 /요10:1~10/ 말씀:안광복 목사님
요즘 우리는 요한복음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첫날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
오늘은 세 번째 말씀으로 “나는 양의 문이다”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먼저 <양>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양은 시력이 광장히 약하지만, 그러나 청력이 발달된 동물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소리를 내거나,
양의 목에 방울을 달아 주면 그 소리를 듣고 앞서가는 양의 뒤를 따라가는 습성을 가진 동물입니다.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그 나름대로 공격용 무기를 갖고 자구책을 행사하지만, 양은 전혀 그런 공격용 무기도 없고, 방어용 기관도 없어요. 거기다 다리는 <숏다리>이므로 빨리 빨리 걷지도 못해요.
그래서 양은 <목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아주 <연약한 동물>입니다.
그럼, 이런 양에게 [문]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양을 가두어 두는 <울타리>는 어떤 의미인가요?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두 종류의 [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마을이나 도심지 가까이에 있는 <양의 울타리>는 짐승이나 도둑을 막을 수 있도록 공동으로 관리하는 넓은 울타리에 문이 하나 있는데, 그 <양의 문>의 입구에서 목동이 관리하는 형태입니다.
둘째로, 산간 벽촌의 <양의 우리>는 작은 규모로 만들어져서 돌로 경계선을 구분짓고 있지만, 거기에는 [문]이 따로 없어요. 다만 어느 한 곳을 터서 그곳에서 목자가 스스로 <문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은 장소를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앞부분(1~6절)은 도심지의 <우리>를 말하고 있고, 뒷부분(7~10)은 산간 벽촌에 있는 <우리>를 말하고 있어요.
어쨌든 종합해 보면, 양은 <연약한 존재>로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양의 문>이라는 것은 생명을 지켜 주는 [문]이고, 보호 받아야 할 [문]이며,
양들의 <피난처>요, <안식처>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인간들을 가리켜 <양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사야서 53장 6절에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 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 버렸다” 했어요.
인간은 양면성이 있어요.
어떤 때는 강한 것 같지만, 어느 한 순간에는 눈물을 흘리는 약한 면이 있어요.
또 인간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또 어떤 때에는 아주 추악한 면도 함께 갖고 있어요.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 있지요.
이 소설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어떻게 발견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지요.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 하나는 인간에게 종족의 유지를 사명으로 하는 일반적인 범인(凡人= 일반인)이 있고,
2. 또 하나는 나폴레옹과 같이 사회의 도덕률을 뛰어넘어 "행동하는 강자(强者=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스스로 결론을 짓고,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하여 물질적 궁핍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자신이 강자임을 확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전당포의 할머니는 이자만 챙기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로 사회발전에 쓸모없는 쓰레기로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그를 살해합니다.
그러다 그는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 소냐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전해준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감화 감동을 받고, "죄를 의식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하고 자수를 하여, 시베리아로 유형생활을 떠난다"는 스토리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녀왔던 <서구적 합리주의>의 허구성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특별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결국 자기도 <일반인과 같은 사람>이란 생각을 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이 작품에서 우리는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첫째로,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는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2. 둘째로, 살인을 저지른 후에는 자기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깨달았고,
3. 셋째로, 성경을 보면서 <나는 죄인이다>는 생각을 하는 단계로 <자기 정체성>의 변화를 보입니다.
교우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물중에서 자기 인식이 달라진 사람은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람이었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터 달라 집니다.
자기 자신을 결코 <의인이 아니라>고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인의 괴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는 <내 자신이 약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일입니다.
내 스스로 <나는 선한 존재가 아니고 악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너무나 잘나고 자신감이 있어서, <누군가에 의지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죄성>을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양처럼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양의 문이 되어 주겠다>는 뜻이예요.
여러분? [문]은 어떤 곳입니까? [문]이란 어떤 역할을 하나요?
여기에 들어오실 때 엘리베이터의 [문]을 통과하셨지요?
[문]이라는 것은 양면적인 기능이 있어요.
하나는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연결해 줄 수 있는 기능이 있어요. 이것은 <긍정의 의미>이고,
또 다른 것은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차단시키는 역할도 해요. 이것은 <거절의 의미>이기도 해요.
"그 문이 열렸다”는 것은 <들어가도 좋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 문이 닫혀져 있다"는 것은 <격리하고, 차단한다>는 의미가 되지요.
요한복음 10장 7-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였기에 양들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요 10:7-9)
영어 성경을 보면 “I am The Gate" (나는 [문]이다)라고 정관사 The를 사용했어요.
이 말은 ”나는 바로 그 [문]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유일한 [문]>이므로 ”그 [문]은 유일한 구원을 가져오는 바로 그 [문]입니다“라는 자신감 있는 표현입니다.
자! 보세요. 이 말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의미입니다.
이 땅을 살면서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문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 입니까?
도저히 희망이 없었던 우리들에게 가장 분명한 [길]을 열어 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바로 그 [길]이 <영생의 길>이라면 그것이 은혜이고, 축복이지요.
노아의 홍수 때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 [문]으로 들어가면 죽음을 면하지만, 사람들은 그 [문]으로 들어 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막상 홍수가 시작되자, 그 [문]은 더 이상 열수가 없었어요.
열려져 있는 노아 방주의 그 [문]은 <구원을 상징>하지만,
한번 닫혀진 그 [문]은 <멸망과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싸인이지요.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에도 [문]이 있었어요.
지성소를 향한 곳에 [문]이 있지만, 그 곳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했어요.
<양의 문>도 마찬가지 예요.
<양의 문>을 통과한 양들은 그곳에서 생명의 보호를 받으며 밤시간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지만,
밤이 되어도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 양의 운명은 들판을 헤매거나 맹수의 밥이 되겠지요.
이렇듯 [문]은 긍정적인 기능과 부정적인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생에 이르는 문>과 <구원에 이르는 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생활하면서 잘못된 [문]으로 들어 갔을 때, 그것을 알게 되면 무척 후회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여러분?
고속도로 진, 출입로에 하이페스 Line을 통과하면, 아주 쉽게 쉬지 않고 그냥 통과 합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는 <양의 문>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 자기의 인생길이 쉬워 집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도둑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10:1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서> 오셨어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하고,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게 했어요.
그러나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 평안>이 이루어져서,
천국과 같은 영적인 혜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내 마음 속의 주님으로 모시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는 천국이 형성되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 보험은 사고를 내기 이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자동차 사고가 나는 순간부터 보험의 혜택이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보상받고자 사고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보험 드는 마음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잘 믿고,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마음 속에 천국을 누리며 살다가
나이가 들어 죽게 되면, 그 때에 천국에 가는 것은 <보너스의 축복>으로 생각 하십시요.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엄청난 혜택이 주어졌는데, 우리 자신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풍성한 삶>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천국과 같은 <더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밤마다 의식적으로 <한가지 일>을 하는게 있지요?
그것이 뭐예요? 그것은 바로 <핸드폰 충전 하는 것>이지요.
핸드폰에 밧데리가 부족하면, 그때부터 불안하여 하루종일 안절부절 합니다.
이와 같이 <육체적인 건강>도 마찬가지 예요.
그 전날 밤에 잠을 설치게 되면, 그 다음날에 하루종일 리듬을 찾지 못하고, 멍해요.
그러면 <풍성한 생활>을 할 수 없어요.
여러분? <영적생활>도 마찬가지 예요.
내가 <성령충만 하지 않으면>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육신의 소욕>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되고, 알면서도 우리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접속하며> 함께 지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신다면, 풍성한 하나님에게 <플러그 인>해 보세요!
충만한 은혜를 갖고계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다 보면,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접속>이고, <다운로드>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내 마음 속에 은혜가 사라지고 사람과의 관계에 각박한 마음이 드신다면,
하나님과 더 가까이 와서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과 접속하세요.
주님의 사랑은 <영원한 샘물>과 같아요.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그 문이 되겠다>고 하셨어요.
그런 <풍성함>을 경험해 보세요.
그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접속해서 다운로드 받으시고, <풍성한 은혜>속에 지내시기 바랍니다.
선한목자/예수님의 자기계시4/ 요10:11-18/ 말씀: 안광복 목사님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자기계시>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했어요.
[문]은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어요.
하나는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연결해 주는 기능과, 또 하나는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차단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문]이란 이렇게 양면적인 두 가지 기능이 있으므로 그 [문]을 통과하면 안전하게 쉴 수 있지만,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맹수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문]을 통과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 [문]을 지켜 주는 사람이 바로 <목자>입니다.
양은 스스로 보호능력도 없고,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좋은 목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두 종류가 있어요.
오늘은 이 두가지 목자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셨는데,
1. 첫째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다른 점은 어떤 것일까요?
먼저 <선한 목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먼저 <선한 목자>에 대해, 요한복음 10장 11절을 보십시요.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 놓는다.”(요 10:11)
여기서 “선하다”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착하다, 성실하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목자를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가치는 <생명>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가치인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목자라야 진짜 <선한 목자>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삯꾼 목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12-13절을 보십시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달아난 것은 그가 삯꾼이므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요 10:12-13)
<삯꾼 목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평소에는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므로 양들을 잘 다스리지만, 이리 떼가 다가오면 자기의 욕심을 먼저 채우기 위해 <도망가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비유해서 예수님이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삯꾼>은 나쁜 뜻으로 사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Hireling>으로 고용인, 일용직 노동자, 아르바이트 직원을 의미하고, 이들은 정당한 <댓가를 받고 일해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
그러니까 경멸적인 의미로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니까, 맹수의 공격이 시작되면 "어차피 <내 양>이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며 자기를 위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래서 이들은 <돈 받은 만큼만 일을 하려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인과 삯꾼은 평소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위험이 발생하면 판이하게 다릅니다.
<삯꾼>은 양 보다는 <자기의 생명>을 더 중요시 하므로, 이리떼가 몰려오면 도망갑니다.
그러나 <선한목자>인 [주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생명이 위험해도 맹수들과 맞서서 싸울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삯꾼 목자>는 싸워보다가 힘이 부쳐서 도망가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싸울 생각도 하지않고,
자기 생명만 보호하려고 하니까, <멀리서 이리 떼가 온다>는 사실을 느끼면 즉시 그냥 도망갑니다.
그럼, 양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럴 때에 [양]들은 맹수가 다가오는 것 조차도 모르고 있거나, <삯꾼 목자>가 도망간 사실도 모르고 있을 꺼예요. 그 이유는 도망가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해 주었겠습니까?
뒤늦게 양들이 그런 상황을 알아 차릴 때에는 이미 맹수들에게 당하고 난 다음이 될 것입니다.
<삯꾼 목자>는 양들에게 관심이 없는게 아니고,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에게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교우여러분!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세상에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선한 목자>가 될 수가 없어요.
그것은 인간들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선(善)하지 않아서 그런게 아니고, 그들이 연약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요.
그들이 악(惡)해서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보다 약(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럴 때에 하는 말이 “나도 같은 처지인데, 누구를 지켜줄 수 있나요?”
"평상시에는 나도 도와줄 수 있지만, 하지만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은 “최선을 다 했다”고 말은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사랑한다”고 얘기하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못된 인간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은 너무도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한목자>이신 예수님과 늘 <접속>하여, <영의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선한 목자>의 특징은 뭘까요?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내 놓는다.” (요 10:14-15)
<선한 목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잘 압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양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잘 알고 있어요.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을 잘 알듯이, 목자가 양들을 모르면 인도할 수 없습니다.
양들이 언제 목이 마르는지? 어디로 가야 좋은 물을 먹일 수 있는지?
어디에 푸른 초장이 있는지?, 이 모든 것들을 알아야 양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 중에서 여러분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남편이나 아내입니까?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도 잘 모를 때가 있어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야,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때로는 <자기>가 자기를 모를 때도 있어요.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도, 부모의 심정을 잘 몰라요.
이게 <인간의 한계>예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가 꼭 필요해요.
우리의 상황과 우리를 제일 잘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므로, 그를 만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때로는 내 가족이 몰라라 하는 일들을 우리 주님은 잘 알고 계시므로, 나를 안전하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분과 <접속하여> 자꾸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주님!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그럴 때에 그분은 정답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물어 보고, 우리의 몸을 맡겨야 해요.
그러면 우리들의 진로를 그 분이 알려 주실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선한 목자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내게는 이 양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는데,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역시 내 음성을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내가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해 생명을 내 놓았기 때문이다.(요10:16~17)
<선한 목자>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한 양들에게 더 관심이 있어요.
이것이 <선한 목자>의 비전입니다.
<선한목자>는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사랑하지만, 그 보다도 밖에 있는 양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선한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우리 안에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선한 목자>의 비전을 이해하고, 우리는 그 <비전>에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의 비유는 요즘 유행하는 <리더십>에 관한 얘기입니다.
여기서 <목자>라는 말은 현대적인 의미로 표현하면, [리더]입니다.
<좋은 리더십>은 한나라와 그 민족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나쁜 리더십>을 만나면 여러가지로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말할 때에 <양>을 짐승으로 보지 않고,
그래서 목자가 양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리더십의 열쇠는 <사랑>입니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남겨두고, 위험을 무릎쓰고 한 밤중이라도 찾아 나섭니다.
실제로 이 말은 경제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잃어버린 그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 나섭니다.
이런 리더가 <선한 목자>입니다.
마지막으로 18절을 보십시요.
"누가 내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놓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 놓을 권세도 있고, 또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 계명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요10:18)
이 말씀 중에서 중요한 단어는 <스스로> 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하여야 합니다.
타율적으로 어쩔 수 없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율적으로 스스로 내가 좋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은 원망을 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은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은 절대로 후회하거나,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봉사하는 일도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결정하면, 봉사하면서도 신바람이 납니다.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일을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자랑스럽고, 즐거움과 기쁨이 두배로 더 커짐을 느낍니다.
우리도 언제나 스스로 결정하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접속하여 지내시기 바랍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다/예수님의 자기계시5/ 요11:25~26/ 말씀: 안광복 목사님
오늘은 예수님의 자기계시, 다섯 번째 시간으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생명과 감사>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첫 번째로,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이 위대한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합니까?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무었을 뜻할까요?
또 <부활과 생명> 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첫째, 누구든지 이 말씀은 자기에게 적용되고, 모든 사람에게 이 문제가 해당되기 때문에
<부활과 생명>은 관심이 있는 말씀입니다.
둘째,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방법과 능력을 말하므로,
죽음을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셋째, <부활과 생명>은 가장 엄청난 결과를 약속해 줍니다.
"죽어도 살 것이다." 또는 "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믿기만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가지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 <태어난 날= 생일>이 있고,
둘째, 그가 <세상을 떠나야 할 날= 죽는 날>이 있습니다.
묘지에 가면 묘비가 있는데, 그 묘지의 비석마다 각인되어 있는 글자를 보게 됩니다.
그 묘비를 자세히 보면, 한가지로 공통적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그것은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요.
그것은 "그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태어난 날>이 있고, 우리가 세상을 떠나야 할 <마지막 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날>은 언제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날>을 알고 사는게 좋을까요?, 아니면 그냥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까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며 삽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단호하고, 그리고 분명하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 말씀은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그 분의 실체와 그 분의 존재를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다 보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믿습니까?
하지만, 혹시 이런 확신이 없으시다면, 오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으신 분들은 분명히 <믿음의 확신>을 갖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같이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대고, 제가하는 말씀을 따라서 읽어 보세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그동안 저는 하나님없이 살아 왔습니다.
겸손히 예수님 앞에 나의 <죄인된 모습>을 고백합니다. 내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나의 <구세주> 이심을 믿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세요. 나의 인생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 내가 감기가 걸렸을 때에, 감기 바이러스가 언제 내 몸속에 들어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기도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내 몸 속으로 <쑥> 들어 옵니다.
이때부터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좌정하고, 나를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런 고백을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평생 나를 도와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죽음 이후의 약속이지만,
실제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미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달라 집니다.
여러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과 그렇지않은 사람과는 무엇이 다를까요?
죽음을 초월한 사람의 특징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확신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평안함>이 존재합니다.
그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항상 <불안해> 합니다.
즉,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해> 합니다.
여러분!
수술 하기전에 전신 마취를 하는데, 마취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러나 마취후 <확실히 깨어난다>는 보장이 있으면, 누구나 거부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밤에 잠자리에 들어갈 때, "내일 아침에 깨어난다"는 확신이 있기에,
편안히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일 아침에 내가 깨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런 잠자리에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속에 <평안함>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때문에 우리는 <평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시고, 언제나 강물과 같은 <평안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감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미래에 보장이 있으면 <감사함>을 표현하며 사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보장이 없으면, 절대로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큰 은혜를 받으면, <감사하다>고 말해요.
누군가 나를 도와서 나를 구출해 주었다면, 평생 그를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었으나, 그 분은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감사하다>는 어원은 "생각하다" <Think>에서 파생되어, <Thanks가 나왔다>고 합니다.
<감사>는 제때에 <감사하다>라는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제때에 놓치면, 그것은 "김 빠진 맥주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자! 여기서 저는 여러분에게 금년 일년을 뒤돌아 보면서 어떤 <감사>가 있었는지?
그 <감사의 제목>들을 한번 종이에 적어 보세요.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면, 감사할 꺼리를 많이 찾을 수 있어요.
하나의 예로써, 겨울이 되면 나뭇잎은 모두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지만,
땅에 떨어진 나뭇잎은 썩어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봄이오면 나무에 싹이 돋아나는 원동력을 주지요.
여기서 나뭇잎의 가치는 그 나무에게 영양분을 보충해 주므로 숲은 더 풍성해 지는 거예요.
이렇게 <감사할 내용>을 우리의 주변에서 찾아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감사의 제목>을 잘모르고 지나가거나, 시간이 지나서 그것을 발견하였다면,
우리는 <그때에 너무도 감사했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내요.
우리는 일이 잘되어도 감사할 수있지만, 그 반대로 <일이 잘못되어도> "하나님, 일이 더 이상 잘못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하는게 교인이예요.
마지막으로 경기도 안산에서 시무하시는 고 훈 목사님의 <추수감사>라는 시를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즉석에서 감사합시다.
은혜받은 것을 모른다면, 깨달아 감사합시다.
깨달으면, 모든 것이 <은혜>요
깨닫지못하면, 모든 것이 <원망>이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아가고,
불평은 <사탄>에게 영광이 돌아 갑니다.
감사는 <구원>을 가져오고
불평은 <멸망>을 가져 옵니다.
주여!
이 가을에 우리의 몸을 <감사의 재물>이 되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예수님의 자기계시6/요14:1~6/말씀: 안광복 목사님
오늘은 예수님의 자기계시의 말씀으로 6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오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주제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는 석상에서 자기가 죽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해 주겠다"고 얘기하지만,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14장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두었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와서 너희를 내게로 데려 갈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도마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저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요(14:1~5)
여기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도마는 솔직하게 예수님께 질문하는 거예요.
의심많은 도마의 이런 태도는 솔직하고 훌륭하기도 합니다.
다른 제자들의 맹목적인 믿음보다 도마의 솔직한 회의가 더 돋보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한 사실을 믿고 있는데, 도마는 의심하면서 "자기는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지를 못하겠다"고 얘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6절을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 (요14:6)
사실 도마가 의심이 많아서 그런 질문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런 유명한 말씀을 그 자리에서 하시게 된 동기가 된 것입니다.
1. 첫 번째로,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했어요.
6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중에서 <Iam The way> "나는 길이다"라고 말했어요.
[길]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 <The> 가 붙어 있어요.
이것은 "나는 바로 그 [길]이다"라는 표현이예요.
나는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그 [길]이다>라는 말 입니다.
[길]이란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거예요.
첫째, "어딘가로 가는 통로가 된다" ( = 천국으로 행하는 통로가 된다)는 의미이고,
둘째, 갈수 없는 길도 가게 만들고, 뺑뺑 돌아가던
길도 직선으로 연결해 줍니다.이렇게 [길]이 만들어 지면 우리에게 여러가지 <편리함>을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 인천대교는 6차선의 길이고, 1조 3천억원을 투자해서 만들은 거대한 [다리 길]입니다.
그 길이 생기면서 기존 도로를 통과하는 것 보다 "40분이나 시간이 단축 되었다"고 합니다.
스웨즈 운하를 아시지요? 유럽과 아세아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이 운하가 만들어 지기 전에는 아프리카의 남단인 남아공의 희망봉을 돌아서 멀리항해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멀리 돌아가므로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지불되므로, 스웨즈 운하를 이용할 경우는 크게 절감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에 많은 [길]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길은 어떤 [길] 일까요?
그것은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기에, 이 세상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국으로 이어 주는 [길]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이 길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볼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길] 입니다.
둘째, 이 길은 값으로 따질수 없는 [길] 입니다.
이 [길]은 실제로 값을 지불하지 않지만, 가치로 보면 <가장 비싼 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값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들까요?
아마도 계산할 수 없지만, 가장 값이 많이 들어가는 [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가장 많은 희생을 치루고 <얻었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 길은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길]입니다.
이런 놀라운 [길]은 예수님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길]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구약에서 홍해 바다 사이에 길을 만들어서 건느셨고,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모세가 가는 [길]을 인도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바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오산 비행장으로 입국하셨어요.
보통 사람들은 인천공항을 통해서 들어오지만, 미국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것은 힘이 있는 분이기에 가능했고, 그런 분이기에 없는 길도, 길을 내고 들어 오는 거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길을 만드는 분>입니다.
이런 [길]은 사람이 절대로 만들수 없는 길이지만, 예수님이 지나가면 길이 만들어지고,
예수님이 지나 가시면 그 곳이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터진 길을 가다가 갑자기 길이 없어지면, 방황하게 되고 당황해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바른 [길]을 찾고 계십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으십시오.
[길]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길]을 따라서 똑바로 나가세요.
그 분은 <생명의 길>이므로, <진리의 길>로 우리들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진리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무리 좋은 [길]이 뚫려 있어도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요즘은 세상이 발달하다 보니까, 너무나 빨리 돌아가서 그것을 모르면 대화가 안 통할 때가 많습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한결이 일정하고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럼, 진리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 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는 진리다>라고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굉장히 평안하고, 진리를 아는 사람은 두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진리>란 변함이 없기 때문이지요.
진리는 누구나 예측이 가능하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고 살아간다면, 평안을 얻고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이 말씀은 <주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비진리>에 속박되어 살아 갑니다.
진리에 얽매이면 자유를 박탈당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오히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그 <비진리>에 매여서 살아 갑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적 가치관에 매여 살아가므로, 답답할 수 밖에 없어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점을 보고, <굿>을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진리되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하고, <자유함>을 맛 보시며 살기 바랍니다.
3. 세번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했어요.
"I am The life" ( = 나는 생명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살아서 움직이고, 그 곳에서 꽃이 피어나고, 생기가 돌아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면, 죽어가는 사람도 그 <생명>으로 인해 살아나요.
그러므로 귀신이 떠나가고, 죽은 사람도 살아 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스의 신화에 <마이다스>라는 신을 아십니까?
프리자의 왕 디오리소스가 마이다스에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얘기하자
"내가 손에 닿는 곳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어요.
드디어 그 소원이 이루어 졌어요. 처음에는 신이 났지요.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것이 불행으로 변했어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 음식을 만지니까, 황금으로 변했어요.
사랑하는 딸을 안아주려고 딸을 껴 안으니까, 황금으로 변했어요.
이 얼마나 엄청난 비극입니까? 마치 이런 것과 똑 같아요.
예수님이 접촉하는 곳마다 생기가 돌아서, 그런 거에요. 즉, <생명>이 들어 갔어요.
왜냐하면 그 분안에 꺼지지 않는 <생명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생명>을 주신 주님에게 나아 가십시오.
그러면 그 분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전이되어서, 여러분 안에 들어올 꺼예요.
우리들의 병든 마음속에 <생명>이 들어와서, 건전한 삶을 살도록 해 주실 꺼예요.
*******************************************************
지금, 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을 모두 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설교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을 결혼식에도 자주 인용하지만, 장례식장에서도 이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번 어느 장례식장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을 전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좀 거만하게 느껴지지 않으시나요?"라고 물어보니까,
그곳에 계신 분들의 반응이 <아주 의외>라는 반응이고, 내 말에 동의하는 눈치예요.
물론, 저도 목사이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좀 거만하게 느껴진다"고 일부러 강조하니까, 그 자리에 계시는 분들이 마음을 조금 푸시는 것을 느꼈어요.
예 그렇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이 좀 지나치게, 자신있게, 좀 거만하게, 말씀했지요.
그러나 그 예수님이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러분, 꼭 예수님만 통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진리>는 대체로 일방적이고, 독선적이고, 편파적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한다"고 변할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때로는 불편하고, 억울해도, 고칠 수 없는 거예요.
<진리> 앞에 고집 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므로, 그냥 <진리> 앞에 순응하고 따라야 해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전에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이해가 가는 거예요.
모든 것이 <원리>를 알면, 쉽게 수긍이 가는 거예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그 수모를 견디시고, 돌아 가셨어요.
그렇게 죽으시고,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셨어요.
그렇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기에, 이런 말씀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말씀은 "예수님은 <나는 죽음을 이기는 그 [길]과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예요.
그런 분이니까, 이런 얘기를 자신있게 하는 거예요.
나는 진리다*** 진리는 변하지 않고, 진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 분은 다시 살아나신 거예요.
나는 생명이다***예수가 생명이신 분이니까,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요.
어두움이 어떻게 <빛>을 이깁니까? 사망은 절대로 <생명>을 이길수 없어요.
겨울이 아무리 춥다고 해도, 3월이 되면 따뜻한 <봄의 기운>을 막을 수 없어요.
여러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는 예수님의 자신에 찬 말씀에,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끼시던 분들도 점점 이 말씀에 동의하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해요.
반대로 <나를 통해야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말도
"예수님을 통하면 분명히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위대한 예수님의 선언을 우리는 분명히 믿고, 그런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도 이 말씀을 계속 묵상하면서, 주님 안에서 평안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참 포도나무/예수님의 자기계시7/ 요15:1~11/말씀: 안광복 목사님
예수님의 자기계시 일곱 번째 시간으로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나는 참 포도나무다." 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나는 무엇 무엇이다." 라고 계속해서 7주동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말씀은 한가지로 <생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면,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알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기록된 목적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하고, 또 믿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하기 위함입니다."(요20:3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예수님은 <그리스도>이고,
2.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3. 셋째, 그 분이 <메시아>이고, 그 분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셨고,
4. 넷째, 그 분은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셨고,
5. 다섯째, 그런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사실을 믿으면 "이 땅에서 영생을 얻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된다." 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이고,
생명과 연관되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생명의 싹>이 그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을 보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자르실 것이요,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손질하신다." (요15:1~2)
여기를 보면,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다."라고 말씀했어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들은 <가지>입니다."
나무 <가지>에는 세 종류의 <가지>가 있어요.
첫째, 나무에서 떨어져 분리된 가지----- 짤려진 가지
둘째, 나무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으나 온전치 못한 가지----- 병이든 가지
셋째, 튼튼하게 나무에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 건강한 가지.
<가지>는 나무에 튼튼히 붙어있는 가지가 <좋은 가지>입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건강하지 못하면, 농부는 <가지치기>를 통해서 베어 버립니다.
오늘 말씀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비유>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대한 <설정>입니다.
<비유>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나무와 가지의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4절에 나옵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수 없다. (요 15:4)
개역 성경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고 했어요.
여기서 <거하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머물러 있으라" 는 뜻입니다.
이 말은 "어느 공간에 머물러 안주해 있다"는 뜻입니다.
<가지>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무에 달라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의 사명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가 가늘고 휘어져 있어서 목재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이 좋지 않아서 가구로 쓸 수도 없어서 포도나무의 유일한 기능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사명은 <열매를 맺는 일>인데, 그 가지가 포도나무와 떨어져 있다면 어떻게 열매를 맺겠습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과 같다>는 비유입니다.
오늘의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
여러분.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과 같아요.
요한복음을 보면,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를 못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헛수고!>라는 것을 말해 주는 거예요.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사람들은 너무나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그들은 보통 <Two Job = 두가지 일>을 갖고,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또 주말이면 파트 타임으로 또 다른 일을 찾아서 3 Job으로 일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회의감를 느끼고, 고민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동안 자신은 열심히 일을 했는데, "무엇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고,
또 일만 하다보니 자식들과 대화 소통이 어려워 <허망한 생각>이 드는 거지요.
성경에는 이와 같은 <비유>가 여러가지 나와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떠나고 그들이 만든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 옷>을 걸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들끼리, 자기 생각으로 만든 그 옷은 얼마나 어설프고 허접한 작품입니까?
하나님 없이 만든 그 옷은 보나마나 그저 그렇겠지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집단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항거와 도전이예요.
문명이 발달하여 자기들 끼리 탑을 쌓으면, 하늘에 닿을 줄 알았으나 그 하늘이 얼마나 높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없이도 노력하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인간의 무능력을 그대로 노출시킨 결과로 끝나고 말았어요. 이런 것들이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해 줍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집나간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는 돼지의 주염 열매를 먹고 살았으나, 나중에는 그것 조차도 얻기가 어려워 지자, 결국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어디까지 몰락할 수 있는 것인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예레미아 2장 13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저질렀다. 생명수의 원천인 나를 버리고, 스스로 물 저장소를 파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을 담지 못하는 <깨진 물 저장소> 였다. (렘2:13)
여기를 보면 두가지 <사례>가 나옵니다.
첫째, 생명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둘째,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우물을 팠는데 "<터진 웅덩이>를 팠다"는 거예요.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무의미한 일이다>라는 거예요.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허무하고, 헛된 목숨>입니다.
떨어져 나간 <가지>들은 그 종말을 맞이하는데, 어떻게 될까요?
6절을 보십시요.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쓸모없는 가지처럼 버려져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속에 던져 태워 버린다. (요15:6)
떨어져 나간 가지들은 어떻게 되나요?
첫째는 버려지고, 둘째는 말라 버리고, 셋째는 불속에 버려 집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당분간 별일없이 지내지만, 결국에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마지막에는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예요.
죄를 지으면 처음에는 잘 모르고 지내지만, <결국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결과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해서 <심판 받는 것>이 아니고,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순간부터 <이미 심판은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를 짓기 때문에 심판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떠난 순간부터 심판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의 운명은 불속에 넣어져 불 쏘시기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죄(SIN)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하타>라고 하는데, "표적(과녁)에서 벗어났다, 실패하다."는 의미입니다.
죄는 처음부터 조준을 잘못하여 (시위를 떠날 때 부터) 시작부터 잘못된 것을 말합니다.
죄는 결과적으로 과녁을 벗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위를 떠날 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는 농부이고, 너희는 가지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가지>는 나무에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듯이, <우리도 주님과 떨어지면 안된다>는 말이고,
또 우리가 주님과 떨어지면 안 되듯이, <주님도 우리와 떨어지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 안에 거하라>는 애틋한 <당부의 말씀>이기도 하고,
"나도 너희 안에 머물겠다"고 우리에게 <허락해 달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어요.
이것은 조건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너희 안에 머물수 있도록,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달라"는 <애원>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잘 아는 최일도 목사님의 <내 안에 그대 머물듯이>라는 시를 읽어 보세요.
내 안에 그대 머물듯 그대 안에 나 있기 원하오.
그대의 모습 내 가슴에더 깊이 새겨지도록 나 항상 준비 한다오
내 안에 그대의 모습 살뜰히 담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잠들기까지
가장 깊은 음성으로가장 경건하게 그대 이름 부르노니
사랑하는 이여...사랑하는 이여...
그대 위해 내 목숨 내 놓을 수 있음은 사랑이 목숨보다 위대함이요
이 세상 잔인한 삶의 한 끝 고뇌의 오지에서나그리움의 숲속에서도
사랑의 아픔을 견디어냄은 사랑으로 죽을 수 있음보다 사랑으로 살 수 있음이 강하기 때문이니
사랑하는 이여...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은 그대의 영원한 집이라오
그대의 영광처럼 그대의 약함도 소중한그대의 영토라오
그대 품에 안기듯 나 그대를 안음은내 안에 그대 머물듯
그대 안에 나 있기 원하기 때문이니
사랑하는 이여...사랑하는 이여...
교우여러분!
그 분에게 시간을 드리세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그 분에게 마음을 열고, 실제적인 시간을 내어 드리세요.
그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에 <그대 안에>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요즘 세상이 힘들다보니, 믿음 안에서 살기가 정말로 어려워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믿음의 논리>를 세우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내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세상 속에 쉽게 함몰되어 휩쓸려 가게되요.
우리 모두는 포도나무에 가지가 달려있듯이, 주님에게 <딱> 달라 붙어서 주님과 접속해야 해요!
바다에 살고 있는 <삿갓조개>라는게 있어요.
그 <삿갓조개>는 시멘트보다 더 강한 접착력으로 바위에 붙어서 살아요.
우리는 <삿갓조개>처럼, 주님과 함께 접속되어 살아야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지킬수 있어요.
이것은 <열매를 맺는 문제>가 아니고,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한 거예요.
<삿갓조개>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안에 확실하게 거하세요!
그럼, 어떤 결과가 나오나요? 7장을 보시면 그 대답이 나옵니다.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의 안에 있으면,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 15:7)
이 말씀 가운데 <전제 조건>이 중요 해요.
그것은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이라는 <전제 조건>이 성립되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인 "무엇이든 구하라,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 거했느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한다면 그 분은 우리의 간구를 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금년 한해동안 <기도 제목>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정말로 바라시던 <기도제목>이 얼마나 이루어 졌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이미 하나님이 다 들어 주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진정으로 기도를 하다보면, 하나님은 모두 다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No]하셨다면, 아마도 <다른 방법을 찾고>계시거나,
조금 더 시간을 갖고 <기다려 보라>는 의미가 있을 거예요.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열매를 맺으면 내 제자가 되고, 이것으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요 15:8)
우리에게 열리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 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만 지나면, 열매가 <저절로 맺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그 분 안에 접속되어 붙어 있으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그 분 안에 거하게 되면, 그 분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그 분 안에 접속하면, 그 분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떠난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 반대로 그 분에게 밀착되고 붙어 있으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예수님이 말씀하신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막9:23)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열매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은 능력의 유무가 아닙니다.
세상은 남들과 비교해서 더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그런 비교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나에게 주신 잠재력을 개발하기 바라십니다.
개발되지 않은 유전처럼, 또 캐지 않은 무한한 광산처럼, 우리의 능력을 개발하기 바라십니다.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내게 능력을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메세지를 주고, 나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나의 재능과 내 능력을 무한히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나이가 많으시다고 나이에 관해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이런 <풍성한 열매>가 우리에게 맺히기 바랍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을 끝내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생명의 능력>을 각자 체험하시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열매>가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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