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이날 중앙청 광장에서는 오전 11시,
커다란 태극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이란 현수막을 내걸고
수많은 국민이 자리를 함께한 가운대 성대한 축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군정기간 중 미 군정은 온건파인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통해 좌우 합작,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장악에서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김구, 윤치영, 박헌영, 허헌 등의 반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뒤 제2차 미소공위 마저 결렬되어버리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로 이관하여 남한내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었다.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김규식, 조소앙 등에 김구가 합세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 등 추진하여 노력하였으나,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여
사실상의 정부화하였고 남한에서도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한 정부 수립론이 나타나면서 사실상
남북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하게 된다,
김구가 암살이 되면서, 남북협상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48년 1월부터 한반도의 정국은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 협상을 통한 정부 수립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군을 창건하면서 분단은 사실상 불가피하게 되었다.
결국 38도선 이남에서만 1948년 5월 10일 제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탄생하였고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초대 헌법인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구성되었다.
7월 22일에는 국회의 간접 선거에 의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으며, 그해 12월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되었다.
한편,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군정이 실시되다가
1946년 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졌고 9월 9일경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유엔임시한국위원회가 관리하는
선거가 실시된 지역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한국 주민 대다수의 의사로 탄생한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반도 북부에서 사실상 독립한 것
혹은 한반도 전체의 통치권을 주장하는 것은 불법적인 것으로 보고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보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다른 한편, 일본에 강제체류중이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이승만에게 귀국의사를 밝혔지만
대한제국의 황실이 국민들에게 지지받을 것을 두려워한 이승만은 냉담한 태도를 보였고
영친왕은 1963년까지 귀국을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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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光復節)
한반도가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국경일 및 공휴일로
법제화함으로써 매년 양력 8월 15일에 기념하고 있다. 해방년도인 1945년을 광복절 원년으로 계산한다.
8.15 광복은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이 일본방송협회(현재의 NHK) 라디오로 옥음방송을 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을 선언하며 식민지 조선(대한민국)이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의 통치에서 벗어난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양력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하였으며,
북한에서도 해방절이라 하여 이날을 기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날을 종전기념일이라고 기리고 있다. 일본 제국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은
1945년 9월 2일이며, 실제로는 천황이 서명한 것이 아니라, 천황 및 일본 정부의 명에 따라,
그리고 대본영의 명에 따라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와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 및 공휴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전국적으로
각종 경축 행사가 거행되며, 공공기관,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달아 기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아울러 광복으로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서울 필동에 있는 한국의 집.
이곳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로 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이 이곳에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출처:위키백과)
광복이후 상황
해방소식을 듣자 친일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 일본군들은 해방을 환호하는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국준비위원회 명의의 전단을 뿌렸다.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뜻있는 청년들로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지방의 경우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이념을 떠나서 지방의 유력한 유지들과 지주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준에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혹한 압제로부터의 돌연한 광복은 과격한 흥분상태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
여운형 계통에서는 안재홍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급조하여 한민당과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방해로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 미·소 양군은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고 점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처음 조만식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게 하고 군정 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했다.
미 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언명했다.
그리하여 송진우 등은 '한국민주당', 안재홍 등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였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귀국하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