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광한루 나들이>/구연식
아침 텔레비전을 켜니 휘황찬란한 화면과 요란스러운 음향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남원 광한루 주변 여러 특설무대에서 오늘부터 7일간 「제94회 남원춘향제」가 열린다고 한다. 아내한테 가보자고 하니, 끄덕이며 환한 미소로 답한다. 부랴부랴 김밥집에서 김밥 세 뭉치와 생수 두 병을 구매하여 배낭에 넣고 흥얼거리며 한가한 국도로 내려가고 있다.
아직 농번기가 일러서인지 길옆 논밭에는 농부들의 일손은 뜸하다. 어쩌다가 먼 논에서는 트랙터로 못자리와 모내기를 준비하는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써레질이 한창이다. 겨우내 잠자던 땅을 뒤집어 놓으니, 백로와 텃새들이 용케도 알아채고 먹이 주워 먹기에 한창이다. 야산의 아카시아 꽃과 가로수 이팝나무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단내가 물씬 풍겨 게으른 사람들에게 봄의 정취를 맞보게 한다. 이렇게 들녘을 벗어나 남원 시내에 도착했다. 남원 하늘은 각종 애드벌룬이 경쟁이라도 하듯 하늘을 뒤덮어 해님이 안간힘을 다해 애드벌룬 사이로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거리는 현수막으로 터널을 이루고 있어 축제 분위기가 설레게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주차장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일 것 같아, 가급적 외곽 지역으로 멀찌감치 공영주차장을 찾아서 주차했다. 하늘에는 공군 블랙이글스 에어쇼가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폭음을 내고 무지개색의 연막을 수놓으면서 곡예를 부려 눈과 귀를 호강하게 한다. 음속보다 빠른 비행기 촬영은 매번 헛바퀴만 돌게 한다. 소리 나는 쪽을 보면 이미 비행기는 사라지고 연막만 남았다. 주차장에서 30여 분 걸어서 광한루 부근에 도착했다.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쉴만하고 시원한 장소는 모두 차지하여, 자리 나는 곳만 살피고 있었다. 드디어 자리가 생겨 잽싸게 앉았다. 시간을 보니 12시가 훨씬 넘어 시장기가 든다. 광한루 앞 요천 변 뚝 벤치에서 김밥과 음료수를 먹었다. 이런 때 아는 사람이 있어 나누어 먹자고 해도 혼자만 먹고 싶을 정도로 너무 맛있어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춘향제의 메인 행사는 오늘 시작하는 「춘향제향」과 초파일에 실시하는 「글로벌 춘향 선발 대회」가 있다. 「춘향」은 조선조 숙종과 영조 시대에 판소리의 춘향전을 소설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판소리계 문장체 소설도 있고, 한문 소설도 있다고 한다. 소설의 이본(異本)이 무려 120여 종으로 춘향전군(春香傳群)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시대부터 유교를 중시하던 제래 풍습임에도, 유독 춘향제만은 여성이 제관이 되어 제향을 치르는 것은 양성평등 사상과 춘향 정절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우리의 춘향전과 비견할 수 있는 100여 년이 앞선 「로미오와 줄리엣」은 애틋한 순애보를 기성세대들이 젊은 청춘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비극으로 내몰았다. 우리의 고전 소설은 권선징악과 행복을 결말로 끝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춘향전은 성차별, 신분 차별을 탈피한 인간 모럴을 중시하며 몇 세기를 앞선 파격적인 해피 엔딩 소설로 볼 수 있다. 참으로 단군 성조(聖祖)의 홍익인간 정신이며 선견지명의 민족이다. 춘향제의 하이라이트는 「춘향 선발제」이다. 춘향제 날짜는 춘향의 생일날인 음력 사월 초파일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 부처님 탄신과 같다. 아마도 부처님께서 성춘향을 점지하셔서 이 땅에 내려 보낸 것으로 믿어진다. 그래서 부처님 덕분에 춘향 생일도 겹쳐서 온 국민이 뜻 깊은 공휴일로 보내고 있다. 춘향사당에 들렸더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작은 슬로건이 있다. 새롭게 제작한 춘향 영정을 두고, 화가들의 사조나 정서에 반하는 것이라 하여 반대 견해를 주장하는 내용이다. 후세인들 중 누가 그려도 춘향의 정서에 가깝게 그린 추상화일 테지만, 중립적인 나의 입장에는 조금은 언짢았다. 광한루를 한 바퀴 돌고 있으니 변 사또가 춘향한테 못된 짓을 저지른 봉건사회 벼슬아치들의 횡포와 서민들의 절규가 광한루 기둥마다 서려 있는 듯하다. 오작교를 건너서 연못가를 거닐고 있다. 잉어 떼들이 얼마나 크던지 이무기 같아 섬뜩했다. 주변 버드나무 꽃가루가 첫눈처럼 사뿐히 연못에 내리고 있다. 잉어들은 먹이로 착각하여 앞 다투어 수면으로 나와서 꽃가루 받아먹기에 바쁘다. 오작교 연못에서 키우는 것인지 원앙(鴛鴦) 한 마리가 관광객에게 익숙해져 전혀 의식 없이 물갈퀴 질을 유유히 하고 있다. 색깔이 고운 것을 보니 수컷 원(鴛)인 것 같다. 아마도 춘향이가 잠시 친정에 가서 홀로 있는 이도령 같아 외로워 보였다. 오작교 연못을 지나서 춘향 친정 월매집에 들렀다. 마당 앞 구석에는 뒷간이 있고, 그 옆에는 둥우리가 있고 홰가 있는 닭장이 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아마도 이몽룡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아 몸보신시켜 줄 월매 아주머니가 정성 들여 키우는 닭장처럼 보였다.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어느덧 오후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지친 몸을 질질 끌면서 주차장으로 힘겹게 걸어서 도착했다. 아마도 그 옛날 이몽룡이 한양에 가기 위해 말을 타고 갔던 길을, 나는 애마를 아내와 같이 타고 300여 년 전의 춘향 님을 그리면서 석양을 뒤로하고 완산 고을을 향해가고 있다. (202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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