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시인을 만나다 - 정숙 시인 편
제목 “흰 소의 울음을 찾아“
‘이 가슴속엔예 아직도 용암이 펄펄 끓고 있어예
언제 폭팔할지 지도 몰라예...
그래도 지는 살랑 살랑 부는 봄바람 이라 예....‘
그 열정과 넘치는 끼를 온몸으로 때론 봄바람처럼 시로 풀어내시는 풍류인 정숙시인님!
“징이 울리는 ‘징한 소리’는 징채가 아니라 징인 나한테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자리를 일어설 때 까지 내담 객들에게 행복을 대바구니 철철 넘치게 담아주고 처용의 아내가 역병을 끌어안고 바람을 피웠듯 자신의 운명에 간 크게 다가왔던 시를 안고 질펀하게 바람피운 이야기들, 천년을 오가며 시간여행을 시켜주었던 시인 정숙시인님과 함께 시간(詩干)열차를 타고 길을 나서보기로 한다.
서둘러 여름비가 ‘도솔천’을 적시는데 밤불을 훤히 밝힌 주막엔 술상들이 오가는 사이
초대시인 정숙 시인님이 대구의 정하해, 장혜승 두 시인님과 함께 도솔천으로 들어오셨다.
첫 대면 상견례라 하지만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흰 베레모에 중년의 멋진 여성시인이었다. 미리 글 소식으로 나눈 마음들이라 함께 참석한 분들 모두가 반갑게 건배주를 돌리며 시작된 정숙시인님과의 만남은 천년고도 경주의 도솔마을이라는 토속음식점에서다.
♦ 선생님께서는 경북 지역에서 태어나셨고, 현재까지 이 지역을 떠나지 않으신 채 활동하고 계신 줄 압니다. 또한, 경북대학 국문학과 출신이신 데다가 직장까지 여기 경주의 월성중학교에서 재직하셨던 경험도 계신데 이러한 지역을 떠나지 않고 살아오신 환경에 대해 어떤 감회가 남아계신지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국문학을 특별히 공부 해야겠다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저는 경산군 자인면에서 과수원집 셋째 딸로 자랐어요. 그 당시 과수원 속 언덕 길, 원두막, 찔레, 장미, 냇물 등 집 주변 환경이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특히 내 기억으로 아버지께서는 참 부지런하셨던 것 같아요. 화단이며 과수원들 아버지 손에는 무엇이든 만지면 멋있게 되었던 같았어요. 여름이면 포플러 잎들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들, 키 큰 귀리들, 코스모스, 홍수지면 냇물에서 하는 피리 낚시며, 겨울엔 사냥총을 들고 개를 몰고 나갔던 사냥의 기억, 저녁 무렵 노을 속에 소 풀 뜯어먹는 소리와 새벽길 들국화 꽃잎에 앉았던 이슬들... 이 모든 사실들을 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지요.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서 노래 밖에 부를 수 없었어요. 돼지 뭐하는 소리로 말이죠. 외딴 곳이니까 마음껏 부르기도 했지요. 그런 습관이 남았는지 시집살이를 하는 중에도 슬프거나 기쁘거나 부엌에서 장독간에서 그냥 흥얼거리는 소프라노를 한 곳씩 뽑아내기도 했지요.
실은 그런 것보다 아마 아버지께서 절 은근히 글 쓰는 사람 쪽으로 부담을 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인 출신 소설가 전숙희 얘길 하시면서 아마도 제가 구석에 숨은 『사상계』나 신문, 책, 있는 대로 끄집어내어 읽는 걸 보고 당신께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를 일이죠. 아무튼 말없이 어딜 가도 전 읽기만 했으니까요. 친구도 없이 자라면서, 마거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은 다음, 평생 소설 딱 한 권만 쓰자고 의지를 굳히지도 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오히려 글을 더 쓰지 않았어요.
대학을 전공하고도 묻혀두었던 문학의 꿈은 확실히 배우지 않고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집살이 15년 뒤에서야 대구문학 아카데미에서 박주일 시인을 만나면서 시(詩)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시고 경주에서 월성중학교에 제직하시다가 그만두셨는데 어떤 이유라도 있습니까?
♢요즘 같으면 참 좋은 직장을 누가 그만 두겠습니까만 그 당시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추세였지요. 특히 제 남편은 사대부 유교집안에 삼대독자 아버지에 6남매의 장남이라 더욱 그래야 했지요.
♦선생님은 그런 삼십년 동안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훌륭한 가정을 꾸미시고 수 세월을 묵혀 두었던 문학의 꿈을 내안에서 끄집어내고 귀한 시들을 만나 발표하게 되었는지요?
♢삼대독자 시아버지에 6남매의 맏며느리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았지요. 거기다가 시할머니 층층시부모까지 뫼셨다고 생각하면 참 내 자신도 대견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가장 힘 드는 일이었듯이 저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도 한 때는 화병이 났을 정도로 힘 드는 시기가 있었지요. 그러나 그냥 웃었지요. 제 성격으로 그걸 끌어안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 귀머거리삼년 벙어리삼년을 실천하는 것이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에 대한 책임이라고 알고 뭐든지 수용하고 사랑하고 억지라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그 파장이 참 컸던 것 같아요. 내가 행복해지니 온 집안이 살아나고 결국 내가 건강하게 잘 사는 비결이었지요. 내 시에 등장하는 처용 아내가 화병과 연애하는 묘사가 잠재한 나의 내성에서 나온 건지도 모르지요. 물론 다른 의도도 있지만요. 그런 가운데 아이들도 크고 내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 내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나를 그냥두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어릴 때 꿈꿔왔던 소설을 써야겠다고 찾아간 것이 대구문학 아카데미고 소설을 쓰려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우연히 신경림 시인의 ‘갈대‘라는 시를 읽고 이리 짧은 시 한편이 소설이 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의 꿈을 바꿔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하셨지만 뒤늦게 시작한 시공부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더욱이 가정주부로서 시 작업 하시면서 첫 시집<신처용가>을 내기까지의 어떤 일들이 있었고 시의 세계는 어떻게 구축하셨는지요?
♢그래요. 모든 것이 만만치 않았지요.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하지만 다시 뒤늦게 시작 한 시 공부라 많은 어려움과 서러움도 있었어요. 어렵게 등단이라는 것을 해보니 더욱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썼지요. 그러다가 시와시학사 주간이신 김재홍 교수님께서 조그만 문방구가 아닌 백화 점 같은 시집을 내려면 연작시를 써야 한다고 깨우쳐 주셨지요. 그러다 보니 한 가지를 깊이, 내면을 파고 들어가는 습성이 생겼어요.
먼저 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달은 일이며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짧은 한 생애, 어떻게 보람 있게 보낼 것인가’ 이런 화두들이 나를 재창조하고 새롭게 정의내리면서 시인은 모든 창조주가 될 수 있다는 자긍심이 마음에 신풍을 넣었지요.
처음에는 내 안에 어떤 울분이 ‘때밀이의 일기’같은 정치적 연작시를 많이 쓰고 있었는데 어느 잡지에 발표된 시에 처용의 아내를 화냥년이라는 표현을 해놓은 것을 보면서 같은 여자로써 처용의 아내를 내가 살려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신처용가>를 쓰기 시작했어요.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해서 처용아내의 넋두리로 처용가를 패러디하게 되었어요. 기존사고관념에 대한 반발성이나 자신의 눈으로 정의 내려 보려는 자세 같은 것이 끊임없이 나의 고정관념을 깨뜨려나갔다고 봐요.
그러다 보니 처용의 자료를 찾고 서원섭교수의 처용가 해석이 기억에 남았는데 그 처용과 아내의 연관성을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내가 처용의 아내가 되어 요즘 세태를 풍자해 보고자 했던 것이지요.
처용이 열병에 걸려 누워있는 아내를 보면서 역신과 바람피우는 것으로 보는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에 그것이 나의 역상(易想)을 낳게 했고 당시 유행 했던 간 큰 남자 시리즈나 경상도 사람들의 특유의 삶을 풍자하면서 90년대 개구리 소녀. 휴거, 등 우리시대 삶을 내 시 속에다 응축시켰지요.
특히 저의 아버지의 고향이 월성군인데 처용이 태어난 곳과 가깝기도 하지요. 어릴 때 기억으로 고모부님이 두 분 계셨는데 정말 한량이었어요. 아마 그분들의 억양이나 모습들이 내 시에 많은 영향도 주었던 것 같아요.
그 동안 시집살이 하면서 내 안에 응축 되었던 답답한 가슴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 속이 후련했어요.
♦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은 신이지만 상당히 인격을 갖추고 있는 남성우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에는 여성을 옹호하는 남녀평등의 시각에서 시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신처용가>가 그런 의도에서 시작된 시집들이라면 좀더 구체적인 의도성의 설명을 해 주시고 선생님께서는 신라시대 성(性)에 대한 가치관은 어떻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신처용가>에 무대는 신라 처용의 헌강왕 시절과 90년대 전후를 배경을 오가며 쓴 시들인데 당시 삼국통일이 끝나고 태평성대시절이라 감포 거리(월궁카바레)에 풍악이 넘치면서 여자들 허리춤에서 놀아나며 남자들이 칼을 내려놓은 풍경이 요즘 시대 고개 숙인 남자들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보여 지는 세태가 비슷하게 느껴졌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칼이 무뎌지면 나라를 침범 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긴장을 버린 탓에 남성적 권위가 떨어지고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간 큰 남자 시리즈 과정을 작품을 통해 훑어본 거지요. 그리고 시에 악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대부분 성적인 묘사를 이미지화 하고 있어요. 가야금의 12현을 여자의 몸으로 대금의 소리가 갖는 색시함과 아쟁의 소리는 여자의 잔소리로 해금소리는 남자들 바람피우는 내용 등으로 나타냈지요.
처용아내가 장구 잡이를 찾아가서 춤추는 장면은 바람피우는 장면을 연상하게 되는데 저의생각으로도 당시의 신라시대는 성이 자유로웠을 것이라 봅니다.
그 당시 처용아내는 바람피웠을 가능성도 많지만 저로선 현대적인 처용 아내를 말하는 겁니다. 바람을 피웠더라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걸 따져본 거지요.
이 시들을 쓰는 동안에 정말 신이 났어요. 내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내게로 다가왔거든요.
♦<신처용가>가 한국낭송문학회 창작시극 <신처용가>(부제; ‘봄날은 간다’)를 공연했는데 시극을 만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 언젠가 대구문협회장 문무학 선생의 모친 상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시 이병훈 회장은 시극 극본을 찾고 계시던 중이었고, 나도 언제라도 시극을 한 번 근사하게 공연해 보고 싶은 꿈이 있던 참이었습니다. 서로 딱 맞아 떨어진 거지요. 25분간의 창작시극무대였는데 정말 화려하게 연출되었어요. 이병훈 회장님이 사비를 들여 공연한 셈이지요. 아주 반응도 좋았고 연극 무대에까지 올리고 싶어 할 정도였지요. 제 시들이 거의 연작시 라 시극 극본이 된 것이 많습니다.
♦ 선생님의 시를 보면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를 많이 구사하고 있습니다. 사투리를 구사하는 시인들이 많지만 특히 평안도 방언을 많이 썼던 백석 시인의 영향이 보이지 않나 저대론 생각되는데요. 선생님의 시 ‘봄바람을 위한 소네트’에서는 ‘두레밥상’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백석 시의 ‘비’에서 보면 ‘누가 아카시아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디선가 물비린내가 난다.’라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볼 수 있거든요?
♢ 작품을 쓸 때만해도 저는 백석시인에 대해서 알지 못한 때라 백석시를 보지 못했어요. ‘두레밥상’은, ‘두레상’이라고 경상도에서는 많이 쓰는 방언이지요. 그래서 사용했지요. 시의 배경이 신라 시대 지역적으로 경주이기에 지역 방언을 사용했고 사투리는 당시 경주가 나라의 중심인 만큼 표준어라 생각하며 그 당시 삶의 현장성을 더욱 실감나게 나타내려고 의도 했지요. 내 입장엔 소설 같은 연작시를 쓰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영남지방에 내방가사의 맥을 이었다고 가사문학을 연구하시는 김주곤 교수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 때 쓰여 진 방언들이 김재홍 평론가님의 시어사전에 많이 들어갔지요. 오탁번 선생님이 ‘휴화산이라예’에 쓰인 ‘기생‘이라는 단어를 보시고 기생은 조선시대에 등장한 단어라며 그 당시는 기생이 아니라 ’기집’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신적도 있을 만큼 방언을 시로 승화시킨 획기적 사건이었지요.
내가 어느 장소에서 시낭송을 했는데 송수권 시인님이 ‘전라도 사투리만 창이 되는 줄 알았는데 경상도 사투리도 창이 되네.’ 하시던 기억도 나네요.
♦ 근래 생물학적인 성(性)으로 인한 모든 차별을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지지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런 신념에 근거해서 일체의 불평등하게 부여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여성운동을 흔히 ‘페미니즘’에 포함시키고들 있는 가 봅니다. 이같이 여성들의 권리회복을 위한 운동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페미니즘’이 1890년대부터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나 관점, 세계관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운동적인 페미니즘의 사고가치를 선생님의 시 속에도 적지 않게 의도하고 있다고도 느껴지는데, 이런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신처용가>에는 등장하는 남성은 명분만 있는 칼이었다면 후반부는 칼을 버린 무능한 남성의 상징으로, 그리고 <향피리>는 남자들의 삶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고 보여 지는데 이런 남성의 세계를 두개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경계인으로서의 느낌은 어떠했고 어떤 의도성을 기자고 쓰셨는지요?
♢ 저는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릅니다만 유교적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성의 균형을 누구 보다 민감하게 생각하는데 성 차별성을 없애고 인간성 회복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썼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남성이 아니라서 시각의 한계성도 있을 수 있겠지만 시대에 걸 맞는 환경에서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생각해요. 여성의 기(氣)가 드세어지고 남자가 칼을 버린 뒤 여성이 ‘손톱칼’을 갈고 있다는 풍자와 해학이지요. 저는 가정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었어요. 물론 여성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 연관성이 있지요.
♦선생님은 신작 시리즈로 ‘향피리’를 연작하셨는데 ‘향피리’에 대한 특별한 창작 동기라도 있습니까? 이어『위기의 꽃』이나 『불의 눈빛』등 시집을 내셨는데, 첫 시집과 연관성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니면 각각의 의도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요?
♢<신처용가>시집 이후에 갑자기 많이 알려졌지만 인기에 연연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향피리’는 2000년 『현대시학』에 ‘신작 소시집’편으로 발표되기도 했는데 <신처용가>는 좀 거친 말투로 꾸짖는 풍이었다면 ‘향피리’는 IMF로 실추된 남성의 권위를 부드럽게 속삭이듯 어루만지는 내용입니다.
그 후 좀더 심도 있는 고전문학에 관심을 가졌어요. 『위기의 꽃』은 현대시적 형식에 향가나 고려가요, 가사문학을 접목시켜 국문학과 출신으로서의 제 특성을 살려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의 눈빛』은 ‘깨달음’, ‘참여성’, ‘묘사 위주’, ‘나의 가정사’ 등을 주제를 다루고 잇는데 여성 평등이란 명목이 사실 여성에겐 고단한 삶이지요. 가정생활을 돌보는 것은 여자의 몫이고 또한 사회적 지위나 차별을 받으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중적 잣대가 아직 여성 권리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런 여성의 여러 모습을 『불의 눈빛』에서 다루었습니다. 특히 『불의 눈빛』은 시 공부 하시는 분들을 위해 묘사의 시 또는 깨달음의 시 등등 시의 여러 가지 모습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한 분이 그걸 알아보고 말해 주더군요. 시인이고 소설가로 갓 등단한 정한희라는 분인데 <불의 눈빛>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교본이 되는 시집이라고요. 정말 반가웠어요.
♦ 시집 『위기의 꽃』에서는 고려가요의 후렴구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의 내용과 후렴구와 어떠한 연관성은 있는지요. 실제로 고려가요 후렴구가 가진 형식적 기능만 가지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 ‘봄밤’의 경우는 남녀상열지사라는 시집 전체의 주제와 연관해볼 때 그러한 의미가 잘 드러나는 시이지만, 끝부분에 있는 ‘정과정곡’의 한 부분은 ‘님이 나를 하마 니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셔서’ 같은 부분의 의미를 지닌 시행을 그래도 인용한 것은 어떤 의도인지 궁금합니다.
♢ ‘하마 니즈시니잇가’란 뜻이 ‘벌써 잊었느냐’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봄밤’, 그 자체가 벌써 덧없게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아닐 런지요. 그런 의미에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용적으로 ‘봄밤’이란 작품과 인용한 옛 싯구절 사이에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덧붙여,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 특히 잃어버린 옛 단어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이 저에겐 있는데요, 탈고할 때, 같은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할지라도, 사장된 옛 우리말 중에서 적절한 것이 없을까 늘 찾곤 합니다.
♦ 덧붙여, 선생님의 요즘 시 쓰기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까?
♢ 지금은 ‘바람다비’ ‘아름다운 법문’ ‘성냥불’ 시리즈로 좀 더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내면을 몇 겹 벗겨보고 뿌리를 찾아 그 원형과 본질을 찾아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려 합니다. 좀 더 짧은 시로 (요즘 수필 같은 시에 대한 반발로) 긴장미와 함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벚꽃이 피었을 때 아름답다. 라고 경탄만 하다가 어느 날 그 꽃송이들이 뿌리의 땀방울로 보이기 시작했지요. 고드름이 하늘과 땅의 거리를 좁혀주는 다리 역할을 하려고 점점 길어지고 있다고 보이는 겁니다.
♦요즘 시들이 묘사로만 머물러 시가 더 어려워지고 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시는 묘사에만 끝이 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방법일 수는 있으나 끝내는 어떤 공통점을 찾아 공감을 줄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묘사를 잘하려면 직관력 훈련이 필요합니다. 시에도 등급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순히 사물에 대한 추억이나 경험의 재생을 위한 재생력상상과 이미지 묘사 즉 비유적 표현을 찾아내는 생산적 상상인 연상 상상력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자기만의 새로운 체계를 갖춘 창조적 상상력에 따라 등급을 나누기도 합니다. 2000년 대구 모 신문에 당선작인 ’의자‘라는 시에서 보면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라는 묘사가 나옵니다. 단순한 의자를 생존의 관계를 위해 자리다툼 하는 짐승으로 본 시각이 신선한 상상력이라 볼 수 있겠지요. 어떻게 보면 시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면서 사고를 많이 해야 된다고 봅니다.
학창시절부터 철학을 좋아했고 소설을 쓰려고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이 시 쓰는데 많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 쓰는 일은 자기 감각을 키우는 훈련이 많이 필요한데 다양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건방진 생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깨닫는 일이기도 합니다. 구도자의 자세가 필요하지요.
요즘 발표되는 어떤 시들은 상상력은 기발한데 무언가 메시지가 없어 감동을 주지 못하는 시들이 있어 안타깝지요.
♦ 선생님께서는 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하신 후, 현재 대구문학아카데미 시 창작반 현대시 강의와 특히 요즘은 인터넷 ‘포엠토피아’에서 ‘포엠스쿨 정숙 반’ 운영도 하고 계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인터넷 보급으로 인한 시의 확산이 엿보이고, 이런 움직임이 새로운 문학의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입니다. 이러한 인터넷을 통한 문학의 확산이 시의 수준을 낮춘다는 견해도 있고 오히려 다양한 문학 소비가 문학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도 하는데, 거기에 따른 장단점이 있을 텐데 선생님은 어떤 견해를 가지시는지요?
♢ 일부 인터넷에서 무작정 시인을 늘리려고 사업을 하는 단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시 한편 옳게 쓰고 싶어 밤잠을 설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분들께 조금이라도 등불이 될 수 있다면 길잡이가 될 수 있어 즐겁기도 합니다.
♦ 시를 공부하려고 하는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시고, 특히 선생님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여성시인들을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까?
♢ 시는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자세가 되어야한다고 봅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야지 정말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 있는 시 한편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늘 “이를 악물어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여성이 자신의 작품을 옳게 평가받기도 어려운 현실이지요. 온갖 구설수가 나돌기 십상입니다. 조금 이름이 나면 온갖 루머가 떠돌기도 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작품이 옳지 않으면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만의 색깔 있는 시를 찾으려 온갖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저도 아직 초보자란 생각으로 늘 노력하는 자세로 시를 쓸 것입니다.영원히 남을 시 한 편을 위해
♦ 미래사회는 정보화·다원화·국제화·인간화되어가는 사회라고 합니다. 특히 'dream society', 즉 인간의 꿈과 감성적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사회가 미래사회의 선진국의 척도라 합니다. 이러한 사회에 가장 요청되는 것이 순수 문학적 감성과 예술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생님 같은 인간 근본의 내면과 순수성을 건져내어 사람들의 감성을 아름답게 만드는 분들이 미래에 가장 대접받고 존경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 문학을 선생님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하시고 또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때로 독자를 위한 시를 쓸 것인지, 아니면 더 함축된 깊이 있는 시를 쓸 것인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시는 일반 독자를 위해 더 쉽게 쓰려고 노력하기도 하는데 시안(詩眼), 직관력, 상상력, 묘사력 훈련을 거듭하여 자기 몸속에, 또 마음속에 ‘징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겠지요. 한번은 징 전시회에서 참여했는데 그 징을 하나 집에 사다놓고 밤새 그 징을 두르기며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만져보면서 느꼈던 것이 ‘징’은 자신이기도 하고, 또 ‘바람’이랄 수도 있는 ‘상대방의 말’이 또한 ‘징채’이기도 하고, 이 모든 것들을 속에서 잘 삭여 떨림이 큰, 울림이 있는 ‘징소리’를 한 번 울려야겠지요. 그러기 위해 계속 쓰고 생각하고 따져 보고 죽음의 소리까지 들을 것입니다.
저는 보통 일주일에 한 두 편의 시를 쓰려고 애씁니다.
시인은 매일 시 쓰는 감각을 갈아야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고 무뎌지지 않는다고 봐요. 풀을 베려면 숫돌에 낫을 갈 듯이 말이지요.
다작을 하다보니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연작시가 많이 밀려있어요.
이것저것 정리를 여러분들에게 또 다른 정숙의 시세계로 초대하는 시집을 만들 계획입니다.
그리고 뒤늦게 멋진 로맨스를 만들어 볼까도 생각중인데...(웃음)
♦ 그래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열어주신 선생님의 시세계를 성심껏 정리해서 가을호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내객들 모두가 멋진 로맨스를 만들어 보기로 하고 선생님의 시간(時干)열차의 여행을 마치고 아쉬운 자리를 일어서는데
문밖 처마 밑에서 깨금발 딛고 내내 기웃거리며 우리들 이야기를 듣던 낙숫물도 돌아갔는지 담장에 기댄 능소화가 불그레 웃으며 작별인사를 대신 한다.
반가운 인연에 다시 만나자며 손 한 번씩 꼭꼭 잡으며 어여들 가라며 떠나는 모습은 어머니 모습처럼 아쉬웠다.
<신작시 10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