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집이다.
그의 집터는 서울 종로구 수송공원일대라고 추정한다.
이 동네는 박석동 박동으로 불리웠다. 그의 박동 집은 잠시 독일영사관으로 이용되었다.
이 집은 척신 민겸호의 집이었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들 구식군대 천명은 지금의 종로 수송동근처에 있는 민겸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마침 민겸호는 창덕궁에 들어갔다. 민겸호의 하인들이 지붕에 올라 기와를 뜯어 이들 구식군대에 던지먀 대항했다.
이때 병졸들이 머리를 다치고 피를 흘리게 되자 흥분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 군인들은 "죽을 테면 고기값이나 하고 죽자!" 외치며 집안으로 들어가 온통 박살을 냈다.
이어 창덕궁으로 달려가 민겸호를 끌어내 무참히 때려죽여버렸다.
이들은 민씨 세도정권의 최고봉인 명성왕후를 잡으러 궁안을 뒤졌다.
명성왕후는 궁녀복장으로 변복해서 빠져나와 충주로 도망가 숨어버린 채 나오지 않았다.
이 군란후 민겸호의 그 큰 집은 아무도 들어가 살기를 꺼려 텅텅빈 채로 있었다.
나중에 정치고문으로 초빙된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이 집에 살게 된다.
뮐렌도르프가 떠난 뒤에는 엄비의 소유의 땅이 되었다가 엄비가 여성교육을 위해 이 집과 부지를 기부했다.
이곳에 숙명여중고가 들어서게 된다.
명성왕후의 오빠라는 위세 하나로 학교를 세울 만한 엄청난 크기의 집을 소유했던 민겸호는
어느 생각지도 못했던 여름날 권력의 실세에서 구식병졸의 손에 끌려나와 개처럼 얻어맞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신세가 된다.
조선말 민비일족의 전횡과 비리가 너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제국신문(帝國新聞) 발행인과 보성학교(普成學校) 초대 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1858〜1925)의
동상이 종로구 수송동 수송근린공원에 있다. `옥파 이종일선생 기념사업회"가 2001년 8월 13일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이종일 선생의 동상을 3.1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옛 보성사(普成社) 자리인
종로수송근린공원에 설립, 14일 오후 제막식을 갖었다.
동상은 이종일 선생의 모양을 한 청동입상으로 1.7m의 좌대위에 3m짜리 동상이 세워졌다.
옥파 이종일(李種一, 1858년~1925년) 선생은 언론인·교육자·종교인·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858년 충청남도 태안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해 15세에 상경해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1898년경까지는 내부주사(內部主事),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이후 학부(學部)의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 정3품) 위원으로 피임되기도 했다.
선생은 일찍이 실학사상에 심취해 실학의 이용후생정신을 재현해야 한다고 설파했고, 실학을 개화사상과 동학사사의 근원으로
이해하며 이를 바탕으로 독립사상을 형성하게 됐다.
특히 김윤식(金允植)·이도재(李道宰)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개화사상은 1882년 수신사로서 일본을 다녀오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옥파 이종일은 개화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신문 창간, 학교 설립, 하층민과 부녀자의 계몽을 들었다.
이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협회(大韓協會) 등 개화운동 단체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계몽운동에 힘썼다. 조직, 민권의 역량을 모으는 한편 정부의 비정을 비판했다.
이와 함께 순한글판으로 ‘제국신문’을 창간해 하층민과 부녀자들을 계몽하는 등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어 흥화학교(興化學校)를 설립하고 보성학교(普成學校) 교장에 취임하는 등 교육구국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종일 선생은 개화사상을 토대로 각종 활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형성했으며,
이는 한국근대사상에서 주류를 이루는 사상계(思想界)의 커다란 맥락을 형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동학에 입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천도교 조직을 이용해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3·1운동 때에는 초기계획의 수립,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독립선언식의 주도, 조선독립신문의 발행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 3·1운동으로 체포돼 3년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직후 또 다시 제2의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등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출옥 후에는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글맞춤법을 연구한 한글학자이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숙명여고는 고종의 후비(后妃)이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순헌황귀비(嚴純獻皇貴妃)가 희사한 용동궁 터(지금의 수송동 80번지)에 처음 세워졌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개화파 우국지사들이 앞다퉈 ‘식산’과 ‘교육’을 통한 부국강병형 근대국가 건설만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임을 강조하던 때였다. 엄황귀비는 그 무렵 양정고와 진명여고도 세웠다.
숙명여고는 진명여고와 함께 순수 민족자본에 기반한 여성교육 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초창기 숙명여고는 ‘귀족여학교’의 성격이 강했다.
개교에 앞서 신문에 광고를 내고 11~25세의 선비 집안의 딸을 모집했다. 5명의 규수가 입학했다.
주초에 가마를 타고 등교해 일주일간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 다시 가마를 타고 귀가했다.
통학이 허용된 건 그 이듬해인데, 학생들이 들고 다녔던 ‘통장표’가 당시 사회상을 엿보게 한다.
통장표는 등교 시엔 학부형이 집에서 딸이 출발한 시간을 적고, 귀가 시엔 교원이 학생의 하교 시간을 기록해 방과 후 ‘안전하게’ 집으로 곧장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등하교 확인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