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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질문자 인사고맙습니다
제가 알고있는 인혁당사건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씀드리지요.
박정희는 유신독재를 하면서
만일 누구든 유신독재에 반대하면 가만 안두겠다고(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면서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했습니다.
국민들 대부분은 박정희가 무서워 아무도 입바른 소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역시 공부 잘하는 서울대에 다니는 똑똑한 학생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유신반대운동에 나섰습니다.
(이를 민청학련사건이라고 부르는데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이철 유인태 등이 그들입니다 )
박정희로서는 시범케이스로 이들을 사형시켜버리고싶었지만
서울대에 다니는 학생들을 죽여버리자니
반대여론이 만만치않을 것같아 망설여지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 만든 것이 바로 인혁당사건인데
그것은 이러했습니다.
서울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공부만 하고 있었는데
인혁당이라는 악질빨갱이집단이 있어서
이들이 순진한 서울대 학생들을 꼬득여서 유신반대투쟁에 나서라고(민청학련 사건) 뒤에서 조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작된 거짓이었습니다. 이철,유인태 등도 인혁당으로 잡혀오신 분들을 교도소에서 처음 뵙게 됐다고 나중에 증언했죠))
그러자면 인혁당이라는 단체가 있어야하는데
마침 오래 전에 비슷한 일로 조사받고 처벌도 끝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처벌도 끝나고 세월도 흘러 이제는 소시민으로 가족들을 먹여사리느라 조용히 살고있는
도예종이라는 분을 비롯한 불쌍한 사람 여럿을 엮어서(멀쩡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만들자니 엄청난 고문이 가해졌지요)
이들이 다시 인혁당이란 단체를 재건했고
또 서울대 학생들을 꼬득여 몹쓸 대모에 내몰았다는 죄목을 씌워
이들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자마자 몇시간만에 진짜로 사형을 집행해버렸지요.
이것은 말이 사형이지 사실은 명백한 살인입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유신독재의 희생양이 되었던 겁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이들의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아~ 역시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뒤에는 항상 빨갱이들이 있구나!" 하고 더욱 반공정신이 고취되겠지요.
어쨌든 이철, 유인태 등 서울대 학생들도 사형언도는 받았지만
이들은 얼마안가 다 풀려났지요.
유신독재가 우리 개인의 삶을 얼마나 지독하게 파괴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백과사전에는...
.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으로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직후 한국인권옹호협회가 무료변호를 맡고 피고인에게 가해진 고문내용을 폭로하여, 1965년 1월 20일 선거공판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도예종(都禮鍾), 양춘우(楊春遇)는 각각 징역 3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판결에 대하여 검찰은 불복, 항소심을 제기하였고, 그 해 5월 29일 열린 항소심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도예종·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6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이후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투쟁을 주도하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배후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했고, 1975년 4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이 구속되었다. 이 중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등 8명은 사형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20시간 만인 4월 9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해외에도 알려져, 국제법학자협회가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펌] 인혁당 사건, 75년 4월 9일, 미망의 기억.
jian
2005-04-10 22:16
'시비걸기'라는 사이트에서 퍼왔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하는 '기억과 전망' 봄호에 게재된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 잡지에 실린 '75년 4월 9일, 그 미망의 기억'입니다. 올해가 인혁당 사건이 있은 지 꼭 30년이 되는 해라고 하더군요. 정권의 사주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으나, 많은 이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가족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하더군요. 그들의 눈물을 우리들이 어떻게 닦아주겠습니까마는 예전에 어떤 분이 해주신 말씀처럼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그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이란 생각에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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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그때 그 사람들'
최근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어서 상영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의 상영금지가처분 소송으로 인해 다큐멘타리 부분이 삭제된채 상영되고 있다. 공인이나 권력자에 대해 블랙코미디가 얼마나 조롱하고, 야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큰 권력은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진 힘을 잘못사용함으로 인해 희생당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어왔다.
사람이 아무리 평생 똑바로 살아 왔더라도 일순간의 실수로 살인을 저질렀다면 우선 그것에 대해 반성을 먼저 한 다음 '그래도 나머지는 잘한게 있다'고 선처를 호소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은 늘 잘살게 해주지 않았느냐는 항변을 하면서 억울하다는 말만 되뇌이고 있다. 정혜신 박사의 '박근혜론'에 보면 예전에 김한길 의원이 토크쇼를 진행할 때 박근혜가 초대손님으로 나왔고, 김한길은 마지막 멘트로 "저는 박근혜씨와 동갑내기로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박근혜씨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청와대의 안주인으로 지내던 즈음에 저는 박 대통령의 긴급조치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던 아버지를 면회하러 다녀야 했습니다"라는 말을 했고, 이에 박근혜는 그 인사말을 빼지 않으면 방송을 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그때 김한길은 "그녀에게 있어 세상이란 박 대통령의 치적만 가득한 장소였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박근혜는 늘 박정희 시대의 공과를 구분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공만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 '그때 그 사람들'에 관한 소송도 세간에는 박근혜의 뜻이 실려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소송당사자의 누이가 한나라당 대표라는 정치적 부담감이 없었다면 그런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건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인민혁명당 재건사건'에 연루된 여덟명의 희생자가 떠올랐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남편 때문에 한이 맺혀 박정희의 사진만 보면 씹어먹었다고 싶었다는 어느 부인의 얘기가 떠올랐다.
인혁당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스러져한 여덟명 중의 한 사람인 우홍선 피고인의 부인 강순희씨는 "나는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는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때까지 약 5년간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어요"라고 말하면서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으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왜 안그랬겠는가, 사건의 진행과정을 짚어보면 유족들로서 그런 심정이 안드는 것이 더 이상했을런지도 모른다. 올드보이에서 15년간 이유도 모른채 갇혀 있던 최민식은 '잘근 잘근 씹어서 세상 어디에서도 시체를 못찾게 만들겠다'고 다짐하던 것과 달리 말한마디 잘못했던 자신의 죄로 인해 자신의 혀를 잘라내게 된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잘못을 찾는 것이 더 위안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희생자들이 아직도 버젓이 살아있는데, 공만을 강변한다면 그건 보통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치 지도자로서는 해서는 안될 일이다. 정혜신 박사의 말대로 박근혜는 자신의 정치지분만큼 아버지 혹은 아버지 시대를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과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소위 인혁당 사건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태와 과정을 통해 정권유지를 기도했던 사건이다. 유신시대 긴급조치의 본질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사형까지 당할 수 있다', 소위 까불면 죽인다는 것이었고, 그 본질에 가장 가까운 사건은 인혁당 사건이었다.
정희성의 시 '유신헌법'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국민되는 요건은
민주공화당이 정한다.'
그때는 그랬다. 국민되는 요건은 민주공화당이 정했고, 아니 박정희가 정했고, 그가 정하는 국민되는 요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시대였다.
이철은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다.
"1972년 10월 17일 박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했다. 말하자면 박대통령의 영구집권 계획이었다. 그 후 1년도 되지 않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에서 10·2 데모가 일어났다. 사실 그때까지는 그 엄청난 계엄령 아래서의 유신을 깨뜨리는 저항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0월 2일 반유신데모가 처음 터지자 정국은 또 다른 어떤 변수, 말하자면 유신에 대한 어떤 저항도 이제 나올 수가 있다는 그런 분위기의 일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10·2 데모 이후에 정국은 아마도 내년, 그러니까 74년 봄 상황이 된다면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이 굉장히 격렬해질 것이라는 예상을 했고, 또 학생들도 그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유신정권과 군부,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학생, 이렇게 대별되는 시기에 학생세력은 반유신 거사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겠는데, 나중에 발표된 그런 반국가단체는 아니었다.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발표되었지만, 학생들은 반유신 시위를 전국적으로 일으키자는 그런 계획에 착수했다. 73년말부터 74년 봄까지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동원한 연락체계, 조직이라는 그런 단계가 아닌 단순한 연락체계로서 전국적인 반유신 봉기, 저항, 그러한 계획을 했던 것이 나중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4월시위를 계획했던 것이 민청학련 사건이었다. 그 뿐 아니라 나의 배후세력이라고 그려놓은 세 분류가 있었는데, 첫 번째가 인혁당이었다. 여정남씨를 통한 인혁당이 나의 배후라고 했지만, 그 당시까지는 인혁당이 뭔지도 사실 몰랐다"
이철의 증언대로 유신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의 조직되려고 할 무렵 박정희 정권은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 하부 조직에 불과했던 여정남을 비롯한 국내혁신계를 배후로 만들어 처형을 한다.
이에 대해 저널리스트 이상우는 '긴급조치, 그 발동과 도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은 국내외로부터 많은 연대적인 동정을 받았다. 그 대부분이 젊은 학생이었다는 점, 기독교 관계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일반인들도 전직 대통령이라든가 대학교수, 그리고 교회와 성당의 교직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에 대한 정부 당국의 발표 여하에도 불구하고 반감보다는 동정을 받은 흔적이 짙었다. 특히 국제적인 여론은 압도적으로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인혁당계만큼은 달랐다. 국민들은 학생이나 대학교수, 성직자 등 다른 관련자들과는 어느 모로 살펴보나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인혁당 관련자 22명의 낯선 이름을 보고는 정부 발표대로 그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아 정부 전복을 음모하여 학생들을 배후조종했다는 사실에 별로 의심을 품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끝내 광범위한 동정을 받지 못했고, 결국 1천여명이 넘는 민청학련 관련 혐의자 가운데서 유일하게 처형당한 그룹이 되었다"
처음부터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은 분리가 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왜 1천여명이 넘는 혐의자 가운데 여덟명에게만 사형이 집했되었고, 하필이면 그들이 모두 대구 경북 지역의 혁신계인사들이었을까.
당시 정권은 74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반공법·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23명을 기소한다. 그리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바로 다음날인 75년 4월 9일 사형언도가 확정된지 20시간이 채 안된 상황에서 사형을 집행해버렸다
서도원(52. 무직.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51. 삼화토건회장), 하재완(43. 양조장 경영), 이수병(37. 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39. 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 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송상진(46. 양봉업), 여정남(31. 무직. 전 경북대학생회장) 이 여덟명에게 가해진 폭력을 살펴보면 과연 누구를 위한 독재였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2. 마지막 인혁당 임구호 선생과의 대화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한 증언을 듣기 위해 임구호 선생을 만났다. 임구호(林久鎬ㆍ48년생)씨는 대구 대륜고와 경북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대구 정화 여중에서 1년간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대구 고려학원에 강사로 있던 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징역15년을 선고 받았다. 그 후 7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82년 3월 특사로 석방돼 故 서도원씨의 딸과 결혼했으며, 5년여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87년 대구경북지역 민통련 상임위원을 맡아 6월 항쟁에 간여했고, 한겨레민주당에 들어가 조직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전민련, 국민연합 등에 몸담았다. 사회운동연구소 등의 재야활동에 이어 탄핵직후인 2004년 총선때 열린우리당 경북지부 수석부지부장을 역임했고, 최근에는 대구경북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창립준비위원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소위 인혁당 사건은 1, 2차로 나뉘어진다. 1차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과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거셌던 시기에 터져나왔다. 그 시위는 갓출범한 박정희 정권에게는 상당한 위협요소로 등장해 6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8월 4일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던 혁신계 인사들과 지식인 그룹, 학생운동의 리더들을 구속했다. 세칭 2차 인혁당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유신체제가 출범한지 2년만에 민주화와 개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들이 시작되려던 무렵에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 2호를 발표했으나 3월 개학과 함께 유신반대 분위기가 확산되고, 4월 3일 서울시내 각 대학에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뿌려지고 동시다발적인 집회가 열렸고, 그 날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었다. 그로부터 3주후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다.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 민청학련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내용이었다.
흔히 고문하면 김근태 현 보건복지부 장관을 떠올린다. 그가 1985년 12월 민청련 의장으로서 재판을 받을 당시 공판 진술을 통해서 했던 "그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라는 증언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때 고문을 받던 김근태는 지금 장관이 되어 있다. 그래서 정치범에 대한 사형은 폐지해야한다고 본다. 정권이 바뀐 후 얼마든지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혁당 사건 역시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 대표적인 사례다. 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이었던 유봉인씨는 당시 수사관과 교도관 등의 진술을 공개했는데, 이 가운데에는 "하재완이 탈장이 돼 고환과 창자가 빠져나왔다고 이야기하면서 의사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했다. 하재완씨는 아랫배가 불룩했고 온몸이 고통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임구호씨도 "인혁당이라는 말을 중앙정보부 조사 때도 듣지 못했고 검찰에 가서야 처음 들었다. 순전히 그 조직을 만들어주기 위해 고문을 당해야 했다.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는 연일 계속되고 조사 때마다 90㎝ 길이의 각목으로 허리와 엉덩이를 맞았다. 맞다가 쓰러지면 눕힌 채로 때리더라. 척추 꼬리뼈 부근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맞아야만 했다. 지금도 걷기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장애 5급으로 매달 병원과 한의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은 참 많이 당했어요. 나 같은 경우에는 사건 내용상 내 하부가 없고, 내가 제일 하부였기 때문에 내 위하고의 관계만 확인하는 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지다보니까 수사, 고문의 압력이 적었고, 그 다음에 자기들이 요구하는 조서를 내가 거절하느냐, 안하느냐의 과정에서 구타는 많이 당했죠. 그때 잘못 두드려 맞은게 척추뼈가 부러져가지고, 척추이탈현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당했던 것에 비해서 저는 당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가장 하부여서 별다른 고문을 안당했음에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재완은 법정진술을 통해 "무조건 아는 사람의 이름을 20여명만 대라고 하여서 정신없이 횡설수설한 것을 기록하여 진술서 내용도 보이지 않고 강제로 타의에 의해서 지장을 찍게 하였다. 그리하여 죄없는 사람을 불러 준대로 잡아들여 15∼20년의 형을 받게 했으니 괴로워 잠도 오지 않고 미칠 지경이다"이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렇게 들어온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일부는 무기징역에서 징역15년까지 선고받기도 했다.
그들의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남겨진 유족들의 고통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왜 안그랬겠는가? 이유도 모른채 끌려간 남편이나 가족을 1년동안 한번도 면회하지 못했고, 법정에서 뒷모습을 보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정권과 우리 사회의 태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맹찬영, 이충원 연합뉴스 기자가 쓴 '인혁당 사건의 재조명'을 보면 구명운동을 한 유족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나온다.
"사형당한 김용원씨의 부인 유승옥씨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각서를 강요당하면서 경험한 일은 인혁당 사형수 가족들에게 가해진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씨는 '정보부 수사관들이 구명운동을 그만두라면서 남편이 공산주의자라는 각서를 쓰라고 다그쳤다. 그런데 취조를 받던 중 목이 말라 수사관이 건네준 물을 마신 뒤 성적 흥분과 몸이 꼬이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 수사관이 불러주는대로 내 남편은 간첩이라는 글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고 증언했다. 뒤늦게 환각상태에서 깨어난 유씨는 남편을 간첩으로 인정했다는 자책감에 아이들 셋과 함께 극약을 마시고 자살을 하려다 때마침 찾아온 친정어머니의 만류로 죽음을 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정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한 달후에 죽었고, 15년을 선고받은 황현승의 부인 안보형은 89년 7월 자살했다. 가족들은 끊임없는 감시를 받고, 취직도 할 수 없었으며, 이웃 아이들이 자신의 자식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간첩의 자식'이라며 총살시키는 놀이를 지켜보면서도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는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임구호씨의 아버지는 "남의 하늘 아래(일제시대)에서 살 때보다 더 혹독한 삶을 살았다"고 했고, 임구호씨는 이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선 내 밑에 큰 여동생은 독일 베를린에서 간호사로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저 때문에 귀국을 포기했고, 밑에 큰 남동생은 석방운동을 하다가 조사를 받고, 수배생활을 좀 했구요. 그 밑에 둘째 남동생은 석방운동을 시작하다가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 구속되고, 5.18때는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징역을 살았습니다. 그 밑에 둘째 여동생은 고등학교부터 시작해서 대학교 내리 학생과나 경찰로부터 요시찰 대상이었고, 부모님들은 시골에서 일반 마을 사람들이나 이런 등등으로부터 일종의 빨갱이 집안이라고 해서 그 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특히나 선거나 정치계절에는 고립되는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던 모양입니다. 동생들 문제, 제 문제 때문에 경찰이 수시로 저희 집을 찾아오다보니까 아버지는 상당히 어려웠던 모양이죠. 제가 출소한 후에 포항에서 삼계탕집을 할때 친구들 중에서도 '그 집 가지마라. 빨갱이 집인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고초들을 가족들이 겪었겠죠"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때문이었는지 임구호씨는 억울함보다는 자책감이 크다고 말했다. "제가 7년 10개월이나 옥살이할 정도로 박정희에 대한 저항운동이 컸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오래 산 것은 뻥튀기되어 있는 거죠. 대구경북지역에서 능력이상으로 신화화된 부분이 있어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준 것도 모자라 남은 가족들까지 인간 이하의 대접을 했던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그들은 그게 진정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고 세뇌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공판조서까지 조작되었었다고 하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그래서 임구호씨는 과거사청산문제에서 사법부가 빠져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실 유신정권 시절 사법부가 정권의 시녀로서 저질렀던 사법살인들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시 재판정 분위기도 강압적이었다. '고문에 의해서 거짓자백을 했다'고 증언하면 법관이 '그렇게 말하는 자체가 고문을 안당했다는 증거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이 말은 완전히 '니가 덜 맞았구나'하는 말과 뭐가 다르다는 것인가? 임구호씨는 재판정에서 "검찰 신문을 받을 때 '네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놓고 법정에서보니 나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선물을 주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 선물을 되돌려주고 싶다"고 하고 난 다음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임구호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의문사진상조사위에 응했던 이모라고 하는 법정기록서기의 증언에 의하면 법정에서 한 피고인들의 진술하고 달리 기록된 것이 많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다음에 김종길, 박성섭, 한승헌, 함용호 변호사 등이 공판정에서 피고인의 진술과는 반대로 공판조서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확인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판조서가 피고인들의 진술과는 달리 반대로 조작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예는 조선조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거든요. 암만 역적이라고 해도 공초에서 그 사람이 한 진술들을 정확하게 기록해뒀거든요. 조선조 왕조 국가도 아닌 유신정권 하에서 그런 일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이미 유신정권 자체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권이 아니고, 완전히 부패하고 타락하고 사악한 정권이라고 하는 것을 단정하는거죠". 그리고 그렇게 조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판조서상으로도 불일치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조금만 유심히 공판조서를 기록했어도 이런 상호불일치는 이내 점검이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에서도 그런 것이 하나도 걸러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 "대법에서 그게 확인되지 않고 일방통행식으로 재판이 이루어졌거든요. 거기에서 제가 안타깝고, 황당했던게 뭐냐하면 당시에 유죄 판결에 참여했던 한환진이라고 하는 대법원 판사가 재작년 12월달에 의문사 조사위에서 발표가 있고난 이후, 그러니까 30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당시의 판결문을 봤다는 거거든요. 대법 판결문을. 그렇다면 자기가 서명한 판결문을 자기가 보지 못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자기는 대법 판결에 참여해서 거수기 역할만 했지, 법리적으로 따지거나 판결문이 어떻게 작성되느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죠"라고 얘기하는 임씨는 "자기들이 유죄평결한 결과로서 8명이 처형이 되고, 시노트 신부와 오글 목사 같은 분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직자들이 외국으로 추방된 사건이 일어났고, 전국을 그렇게 시끄럽게 한 그런 사건의 판결문을 작성하면서 자기 입으로 30년이 지난 이후에 처음 봤다고 하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결국은 당시의 대법원이 박정희 권력에 충성하는 한두사람에 의해서 이 재판을 진행했지, 다수는 판결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사람이 징역 5년 받아야할 것을 7년 받았다면 말도 안해요. 8명의 생떼같은 생명이 스러져버린 사건인데, 사형을 언도한 재판관이 판결문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무슨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의 판결은 국제적으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되었으며, 살인정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유신정권이 끝날때까지 박정희를 옥죄었을 것이다. 임구호씨는 과거청산이 없이는 화합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국사회 특히 경상도 지역에 정서가 답답한 듯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의 경우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잖아요.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안느꼈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 경상도 지역에서도 뭐냐하면 자기한테 부담되고, 싫으면 인종청소를 해야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런 종류의 인간들, 그런 종류의 인간들에 기반한 정권이라든가 정치세력 입장에서 봤을 적에는 사형제도를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고, 사법계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조선조 시대보다는 사법제도가 현저히 발전하고, 민주적이고, 인간적이여야 한다는 사람들은 사실한 공판조서, 최후 진술까지 조작한 당시 비상 긴급조치 재판정과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재판한 대법원에 대해서 심각한 분노를 느낄 것이고, 우리가 조선조 시대의 재판제도보다 나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판조서가 조작되고, 대법원이 좀 잘못 판단했다고 해도 있을 수 있는 일 아니겠느냐'고 보는거죠"
그 사건은 사법사상 초유의 변호인 구속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강신옥 변호사는 "인혁당 사건은 정식재판을 받았더라면 반공법 위반으로 2, 3년 형쯤 받았을 사람들이 정권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이라면서 이 재판을 사법살인으로 규정하고, '내가 만약 변호인이 아니라면 저들과 같이 하고 싶다'는 변론으로 인해 구속이 되어서 10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당국은 유언까지 조작했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당국이 유언이라고 가족들에게 전해준 내용은 기가 막혔다고 한다. 원본은 빼돌리고, 한 사람에 16절지 한 장씩 유언을 정리해놓았는데, '첫째 가족이 보고 싶다, 둘째 할말 없다, 셋째 종교의식을 거부한다', 이 세가지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故이수병님의 미망인 이정숙씨는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유언은 공통적으로 들어있었는데, 이는 당시 가톨릭 쪽에서 구명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임구호씨는 "그거는 사형집행에 참여한 교도관들이 잘 알겠죠. 교도관들이 유언장을 조작했다고 하니까"라면서 참 지독하고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본질적으로 하나인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이 분리된 사건처럼 느껴지게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막상 저질러 놓고, 정치적인 부담이 된 박정희 정권과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오히려 민주화운동 진영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한 민주화 운동 진영의 조심성이 합작이 된 것하다. 거기에 대해 임구호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초기에는 민청학련의 반유신, 자유민주주의 투쟁을 호도하고 왜곡시키기 위해서 인민혁명당 재건 단체를 배후로 만들어서 선전을 했는데, 자기들이 4월 9일 8명을 처형하고부터는 인민혁명당이라고 하는 단체가 자기들에게 오히려 정치적으로 올가미가 되고, 부담이 되기 시작하니까 이걸 자꾸 빼고, 민청학련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그렇게 분위기를 몰아갔었거든요. 민청학련하고 인혁을 자꾸 분리시키려고 유신 정권에서는 했죠. 그때는 워낙 반공 냉전 이데올로기가 (특히 월남 패망 이후에)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기 때문에 이쪽의 자유주의 진영이나 민주 인사들도 사실상 인민혁명당 재건단체 사건을 들고 나서기에는 부담스러웠다구요. 그래서 민청학련쪽하고 인혁이 그런 유신정권의 의도와 이쪽의 두려움이 맞아 떨어져가지고 일정하게 분리되는 그런 형태를 취하긴 했었거든요"
그러나 사건 내용이나 사건 진행과정을 보면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한 사건이 해결되면 나머지 사건도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다. "우선 재판받은 재판정이 긴급조치 2호에 의해서 결성된 비상긴급조치 법정이었고, 그 다음에 1, 4호라는게, 1호가 유신헌법 반대 비방이고, 4호가 민청학련 아닙니까? 민청학련을 처벌하는 조항인데, 긴급조치 1, 4호 위반을 처벌하는 과정에 민청학련도 있고, 그 배후인 인민혁명당 사건도 있거든요. 엄밀한 의미에서 민청학련 사건을 떠나서 인혁당 사건을 분리해서 취급할 수도 없고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민청학련에 적용된 국가보안법 위반, 반국가단체에 대한 조항이 인민혁명당 하부조직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적용된거거든요. 그런거 등등으로 봤을 때 민청학련하고 인혁은 법률적으로도 그렇고, 정치적으로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문제가 풀려나가기 시작하면 양쪽은 다 같이 해결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구요. 특히 처형된 8명 중에 여정남 선배의 경우에는 죄명이나 사건 분류에서 민청학련 쪽입니다"
그러면 처음에 하부조직이었던, 인혁당이 왜 배후조직이 된것일까? 임구호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월 25일 중간발표란게 있습니다. 그 중간발표가 있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유인태, 이철의 배후로서 하야까와 다찌가와라고 하는 일본 공산당 출신이 있고, 국제콤하고 연계가 되었다고 하는 이 부분이 먼저 설명이 되고 부각이 됩니다. 그리고 유인태, 이철의 배후가 아니고, 연락관계나 하부조직으로 여정남 선배란 사람이 설명이 되고, 여정남 선배하고 연계되어 있는 국내 혁신계 그룹, 불순한 혁신계 인사들이 설명이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인태, 이철을 중심에 두고, 일본 공산당이 배후고, 하부지방조직인 여정남 선배와 여정남 선배하고 연결되어 있는 소수의 국내혁신계 인사들 이런 형태가 중간 발표때 설명된 뉘앙스거든요. 이것이 5월 27일 최종 발표할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첫째가 일본에서는 공산당을 했더라도 전향을 해버리면 좌우 어느 진영에서도 전향한 사실을 인정을 하고, 그 사람을 더 이상 공산주의자라고 치부하지 않습니다. 하야까와 다찌가와라는 사람이 전향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도 입국할 수 있었고 그렇거든요. 하야까와 다찌가와를 가지고, 이철, 유인태를 좌익으로 몰아가는데는 국제적인 한계가 와버린거죠. 그래서 그 카드를 거둬들이면서 여정남 선배와 국내 혁신계 그룹들을 부상시킨 것이 5월 27일 최종발표입니다".
전형적인 짜맞추기 수사였던 셈이다. 그럼 왜 하필이면 대구경북지역의 혁신계 8명을 처형했을까? 7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가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임구호) "71년 7대 대통령 선거때 박정희가 72만표 정도 차로 김대중 후보를 이겼는데, 그때 모든 부정선거, 부패선거의 방법이 다 동원됐거든요. 개표 과정에서도 투표함 바꿔치기라든지 이런 것들이 꾸준히 일어났습니다. 특히 대구경북에서는 야당원들이 투개표 감시나 투개표 참관을 제대로 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 자신이 어떤 얘기를 하고 다녔느냐하면 '대통령은 경상도, 국회의원은 신민당' 이렇게 얘기를 하고 다녔다구요. 대구 경북지역의 야당의원들 거의 태반이 이미 공화당 쪽에 매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대표적으로 드러나는게 경산지역 투개표인데, 경산지역만 유일하게 재야인사들이 투개표 감시를 나갔다구요. 그래서 경산지역은 김대중씨 표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오죠. 7대 선거를 그런 형식으로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 정도의 표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박정희가 공정한 게임에서는 졌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다음으로 7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사회가 부패공화국으로 변질되고, 이것이 부실경제구조로 이어지면서 박정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민주화 쪽보다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공포정치였다는 것이다.
"7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 사회는 완전히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그런 사회가 되간다구요.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파탄하거든요. 그래서 기업들 거의 대부분이 부실기업이 되고, 부실 경제구조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걸 만회하기 위해서 71년 8.3 기업사채 동결조치를 취하잖아요. 사채동결조치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시장경제, 사유재산제도를 침범하는 강압적인 조치거든요. 퇴직금을 받아서 기업에 돈을 빌려 준 사람이 하루 아침에 자기 재산을 압류당하는거 아닙니까? 사유재산권을 제한당하는 건데, 그렇게 할 정도로 한국 경제가 어려워져간다는 말이죠. 거기에다가 73년도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파탄 직전에 처하게 된거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월남전이 패색이 짙어가면서 반공냉전이데올로기가 퇴색되어 가고, 그것이 흔들리는 상황이 조성된다는 말이죠. 또 71년도에 김대중씨 납치사건, 그것으로 해서 미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고, 외교적으로도 유신정권이 고립화되어간단 말이죠. 이런 상황이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이 맞은 국내외적인 난관이었거든요.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해나갈 것인가, 이 난관을 돌파해나가기 위해 결국 박정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민주화 쪽보다는 아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공포정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그리고 대구경북지역은 4.19 이후부터 소위 박정희 독재에 대한 저항 운동 또는 저항의 조직적 대오가 만만치 않았던 곳이고, 이게 전국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컸었기 때문에 영남지역을 지역 감정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장악을 하기 위해서 대구경북지역에서 자기들에게 저항해오는 상당한 영향을 갖춘 인사들을 제거해야되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맞물려서 소위 인혁당 재건단체사건을 조작하면서 여덟명을 처형시키는 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원래 해방 이후 대구지역은 한국의 통일운동이나 진보변혁 운동의 메카였다. 그 후 여러 탄압이 있었고, 인혁당 사건과 같은 탄압을 겪으면서 상당히 수구화된 측면이 있다.
"인혁당 사건을 통해서 상당부분 목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죠. 결국 운동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철저히 솎아냈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 견디지 못해서 서울이나 타 지역으로 옮겼고, 그래도 끝까지 남아서 한게 남민전 사건인데, 모두 구속되어서 힘들어졌죠"라는 것이 임구호씨의 증언이다.
탄압이 있을수록 저항이 더 거세질수도 있지만 탄압의 강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달랐을 것이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도 저항은 줄어들었다.
"70년대 중후반에도 대구 지역에서 저항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5공때도 저항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5공 이후부터는 광주가 우리의 민주기지로서 저항운동의 중심에 서면서부터 지역감정에 의한 역작용도 나타나고, 무차별적인 탄압에 의한 인적손실도 작용을 하고, 그 다음에 경상도 지배이데올로기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연결되면서 이 지역의 민주화 운동이 많이 약화되었죠. 인적인 약화보다는 대중적인 약화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사형까지 당하는 것을 보면서 '잘못하면 저렇게 되겠구나'하게 되고, 주변의 사람들이 고생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이 정치적인 걸 외면해야지만 자기가 견딜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타협을 하는 것이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물신숭배와 권력에 대한 추종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5년이나 선고받고, 7월 10개월을 옥살이한 임구호씨는 학생시절 자신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1학년때부터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한 이념서클인 正思會 5기 회원이었고, 69년도에는 3학년이니까 부회장을 했었구요. 69년에 3선개헌반대 경북대학투쟁위원회 대변인을 했었죠. 70년대에는 정사회가 정진회로 바뀌어 가지고, 정진회가 창립되었는데, 71년도에 정진회가 해산되고, 한국풍토연구회라고 하는 서클이 새로 생깁니다. 그 다음에 졸업 후 71년도에 민주수호 경북협의회와 관계를 가지면서 민주수호 경북청년협의회를 전만희 선배하고 준비를 해서 그걸 만들려고 시도한 적은 있었습니다. 69년도에 같이 3선개헌 반대 데모하다가 제적되어 가지고, 군대갔다가 복학한 정화영이라는 친구하고 한풍회 회원인 임규영, 황철식 같은 후배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 73년 11월 5일 경북대 학생 시위 전에는 채택한 선언문을 100여장 가지고, 부산에 내려가서 부산대 책으로 되어 있던 김재규씨(전 부산민공원관장) 그 양반을 만나서 전달하면서 경북대학이 하니까 부산에서도 시위를 좀 조직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쪽 형편도 듣고 그렇게 올라왔죠. 그런 역할들이 당시 제가 하고 있는 역할들이었고, 데모하고 도피하는 학생들을 도피시켜주고, 관리하고 하는게 제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정화영부터 시작해서 후배들이 데모하고 도피를 하니까 경찰이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죠. 그래서 결국 저한테 오면 제가 그 사람들이 어디 가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학교로 찾아들 왔었죠. 형사들이 교감실에 죽치고 앉아 있으니까 학교에서 그러더라구요. '신문기자하고, 형사는 상주러와도 싫다. 선생님이 여기 있으니까 우리가 불편해지니까 그만둬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학교도 그만두게 되고, 정진회가 71년 4월 9일 4.19 제11주년 기념 전국대학서클 학술토론대회를 하면서 채택한 반독재 구국 선언문을 빌미로 경북대총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이 되는데, 인혁당 사건때 임구호씨는 여정남 선배, 친구 정화영과의 관계로 인해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박정희의 강박관념은 당시 현상금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간첩에 대한 현상금이 30만원인가 하던 시절, 이철, 유인태, 강구철 등 학생운동의 리더들에 대해 각각 200만원씩의 현상금을 걸어서 평범한 학생이던 그들을 전국적인 거물로 만들어주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졸업생, 재학생으로 분류해서 재학생은 민청학련으로 소속시켰고,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일부 졸업생은 인혁당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거물들은 역설적으로 빨리 풀려나게 되었고, 명예회복이나 보상도 빨리받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그들이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임구호) "결국 윤보선 대통령 이하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 이런 쪽은 자유주의자고, 또 국제석방운동하고도 쉽게 연계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이런 분들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기 쉬운 그런 인물들이었구요. 그 다음에 이쪽 혁신계쪽은 결국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정치적 탄압을 하기가 쉽고,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재료라고 할까요? 좌파 내지는 좌파적 경향을 가진 사람이나 운동에 대한 정치적 탄압 내지 활용이었죠"
거기다가 대구경북지역의 특수성 탓에 유인태하고 이강철은 실제 둘다 졸업생이고, 둘다 적용된 법이 똑같은데, 유인태는 4년 몇 개월정도 살고 석방시키고, 이강철은 1년 더 살리고 내줬다고 한다. '영남지역에는 가능하면 저항 인물이나 이런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정치적인 복선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왓다는 것이다. 당시 왜 영남지역의 저항운동이 거셌고, 어떤 움직임들이 있었을까?
(임구호) "첫째는 대구경북뿐만 아니라 부산경남까지 합쳐서 영남지역이 인민군 미점령지역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죽은셈이죠. 더구나 항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 사회운동을 해 온 분들이 덜 죽었는데, 이승만 정부, 그 다음에 친일 정권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호남이나 충청도 이런데서는 많이 학살당하거나 자기 고향을 떠났고, 대구 경북 지역은 그런 면에서는 인적 구성이 다양하면서 두터웠던 셈이죠. 더구나 재수없을라니까 사라호 태풍이 영남지역을 지나가잖아요. 거기에 대한 민심이반 현상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사실상 4.19가 영남지역에서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4.19 민주혁명이 성공하니까 그걸 토대로 해서 이쪽 지역의 저항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거죠. 교원노조건설운동도 대구에서 시작하고, 이대학보 반대 투쟁도 대구에서 시작하고, 피학살유족회도 대구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에 김말용씨가 이끈 노동조합 시협의회, 이일재 선생님이 이끈 노동조합 시연맹 이런 것도 대구에서 시작합니다. 노동조합 시연맹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에는 최초로 메이데이 행사를 하거든요. 61년 5월 1일날, 그런 일들이 대구에서 이루어졌고, 그 다음에 민자통도 대구에서 시작합니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하는 학생회담 슬로건이 대구에 계신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내상 선생이 창작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학생 민통련이라고, 학생들이 통일운동을 하는 서울 지역의 인맥들도 보면 대구경북고 출신들, 대구 출신들, 부산경남 출신들이 서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이런 것들로 인해 4.19 이후 정국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저항전선을 대구경북이 중심에 서서 짜나가게된거죠"
당시 대구경북지역은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이철 전 의원도 '유신반대전국시위에서 대구 광주는 주요 거점도시였으며, 경북대와 전남대는 중요한 학교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고 여정남씨와 민청학련과의 접촉이 있게 된 것이고, 학생운동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유신으로 철퇴를 맞고, 73년 다시 복원이 된다.
(임구호) "혁신계 선배들은 서울, 대구, 경북, 부산, 경남, 광주 서로 왕래를 하면서 자기 지역의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해서 논의들을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은 69년 3선 개헌 반대데모를 치르고, 70년 5월 1일 전후지 싶은데, 고려대학교 한맥회가 주관하는 학술토론회가 있었습니다. 그 토론회에서 1박 2일간 각 대학팀들이 서로 토론도 하고, 유대를 강화하거든요. 거기서 일정하게 앞으로는 학생운동을 서로 도와가면서 조직적으로 해야되지 않겠느냐는 논의들이 있었구요. 그때 중점적으로 논의된 것이 당시 한일협정 이후에 일본 자본의 한국 침탈,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 이런 것들을 자료로 가지고 한일백서라는 형태로 유인물을 만들고, 그것을 대학간에 교환하면서 서로 네트워크를 강화시켜 나가죠. 그래서 거기에서 고대토론회가 끝나고, 그날 저녁에 뒷풀이들을 하면서 서로 논의들을 하고, 선언문을 채택하고 헤어졌는데, 그때 약속했던 것이 뭐냐 하면 '70년 10월 경북대학교 물리대 학술토론회에 대거 조직적으로 참여한다'고 하는 것을 서로 약속을 하죠. 그게 실천이 되어가지고 10월달에 경북대 물리대 학술토론대회에 서울지역하고 다른 지역 학생들이 대거 참여를 합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71년 4월 9일날 정진회 주최 서클대항 학술토론대회가 열리고, 거기에 또 전국 서클의 대표들이 참여하거든요. 거기서 독재구국선언문도 채택하고 하는데요. 그런 과정을 통해 각 대학에서 69년 3선개헌 반대데모까지는 고립적으로 진행되어온 저항운동이 70년 들어와서 교련반대, 전태일 추도식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그렇고, 서로 학술토론대회나 이런 것을 통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유기적으로 관계들을 건설해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렇다보니까 서울 물리대는 누구, 법대는 누구 이런 형식으로 교류를 하게 되는데, 그게 인제 72년 10월 유신으로 타격을 받아요. 그때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고, 정남이형 하고 나하고는 포고령 위반으로 잡혀들어가서 고문도 당하고, 징역도 살고 나오고 이런 과정이다보니까 그런 네트워크가 파괴되어버렸는데, 그걸 73년도에 다시 복원을 하죠. 그때 고대 쪽이 검은 10월단 사건하고 이런 것 등등 때문에 고대 팀들이 많이 구속되고 수배중이어서 그쪽은 직접적 규합이 안되고, 저하고 정남이형 두사람이 서울 올라가서 유인태, 서중석이를 만나서 서로 조직적 관계를 강화해서 앞으로 저항을 하는데 있어서 조직적으로 대처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다음에 연계망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는 것까지 다 논의가 되죠. 이철은 군대갔다가 복학해왔으니까 학생이고, 경북대학 같은 경우는 정화영이나 임규영이 학생이고, 학생은 학생끼리 교류를 하고, 이철하고 유인태하고 연계를 갖고, 정화영하고 저하고 연계를 갖고, 저는 이철을 만나지 않지만, 나하고 유인태하고 연계를 갖고 이런 형식으로 조직적 시스템을 만드는거죠. 만들다가 73년 10월 2일에 서울 문리대 반유신데모가 있고, 11월 5일 경북대학교 반유신데모가 있는데, 이것은 조직끼리 연계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서울 물리대가 먼저 해가지고, 그때 유언비어와 대남방송에서 이게 나오니까 우리가 이걸 빨리 따라잡아서 한판을 해야된다고 해서 경북대에서 총동원을 해서 11월 5일 시위를 하게 되고, 그게 성공을 했어요. 그게 성공을 해가지고, 이백여명이 가두시위까지 하고, 그래서 이게 동아일보하고, 대구매일신문에 처음으로 기사화됩니다. 서울대 문리대 시위는 기사화가 안되었었죠. 우리가 처음 기사화되고, 그때부터 전국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해서 한달동안 각 대학을 휩쓸었죠. 그러니까 12월 5일날 정부에서 휴교령 내리고 조기방학에 들어가죠. 휴교령 들어가면서부터 각대학간의 관계가 강화됩니다. 각대학간의 연락책이 선출이 되구요"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이 법률에서 규정되어 있는 반국가 단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민청학련이라고 하는 이름을 썼을 적에는 하나의 조직체 이름이니까 민청학련의 조직적 성격, 민청학련이라고 하는 조직의 구성원 이런 것들이 구성되고 난 뒤에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되는데, 그게 전혀 없었다는 거고, 단지 유인물에 넣는 명칭으로서만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것이다.
임구호씨는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민족주의자라고 규정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개발정책의 허구를 한국농업 문제에 대한 고민을 통해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 3선개헌을 하고, 장기집권을 하려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3선개헌 반대데모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사회 5기 회원으로 입회해서 거기에서 스터디 활동이나 그런 걸 할때 주로 한국 농업 문제를 중심에 두고 공부를 했어요. 한국 농업을 공부를 해보니까 아주 재밌더라구요. 집에서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데, 농사를 지으면서도 형편이 풀리지 않고, 좀 허덕이는 그런 원인이라고 할까, 그 이유를 한국농업을 공부해보니까 알겠더라구요. 그때 당시에 제가 자료를 검토하고, 정리를 하다보니까 저농산물, 저임금 이 매커니즘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 공업화 정책이라고 하는게 당시 80%에 달하면 한국 농민들을 강제 구조 조정해서 그 농민들을 농촌으로부터 도시의 빈민으로 쳐박아놓는 그 결과로서 한국의 공업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끼게되었고, 그렇게 값싼 노동력을 계속 공급해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저농산물을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이런 것들을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죠. 박정희가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니 뭐니 해도 완전히 사기라고 생각한겁니다."
박정희의 개발정책이 우리에게 꼭 좋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꼽기도 하고, 경제개발의 공적은 인정해야된다고 말하고 있다. 지만원씨 같은 경우는 '박정희로 인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박정희를 욕하는 걸 보면 숟가락을 빼앗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박정희 현상에 대한 임구호씨의 의견은 단호하다.
"우선 박정희 시대를 살지 못했던 후배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다음에 지금 우리가 말하는 서민이라고 하죠. 50∼60대라고 할지라도 서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시 박정희 시대로 돌어가서 살라고 하면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몇 안되요. 실제는 몇 안되는데, 그때는 자기들이 젊었고, 잘못된 환상이라고 할까, 우리가 군대 가서 되게 빠따 맞고 고생하고 와도 회상을 하고 그러면 즐겁고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50대 이상만 보더라도 그때 당시에 하나의 짜여진 군대 조직과 같은 규율사회에서 직장생활을 밑에서 한사람들, 그 사람들이 여전히 지금도 자녀들의 취업걱정, 자기 노후걱정을 하고 있거든요. 그때 당시 하부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 역시 하부에 있다는겁니다. 이 사람들이 과거 회상과 관련지어서 잘못된 박정희 신드롬에 감염이 되어 있구요. 또 하나는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게 경상도에서는 지역감정 하나하고,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해서 박정희 시대에 사회경제적으로 치부를 하고, 진출을 한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위의식 여기에 특히 영남지역 사람들이 많이 감염이 되어있죠"
그리고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의 허상은 김우중의 대우그룹 붕괴가 상징적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대우는 정경유착의 전형적인 기업으로 국제적인 환경이나 이런게 IMF 이후에 변하니까 하루 아침에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박정희 개발, 박정희 경제의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물이며, 이런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가 부실경제, 부패공화국으로 마무리될 수 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사실 경제가 호황을 맞은 시기는 전두환 시기였다고 한다.
"요행스럽게도 전두환 시대에 3저 현상이라는 세계적인 호기를 맞으면서 뻥튀기가 되기 시작한거죠. 거품경제가 확대된겁니다. 그렇다보니까 사실상 지금 엄밀하게 말하면 특정 경제를 일으킨, 발전하는 그런 시기를 담당했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 시기라고 그렇게 보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경제를 개발시키고, 경제의 기초를 닦았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박정희 정권에 참여하고, 정경유착하고, 또 그 당시에 자기들의 사회적인 진출, 경제적인 부를 형성한 집단들의 현실호도 정책이라고 보고 있고, 그 호도정책이 일반 대중들이나, 그때 상황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염되어 있다고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물론 국제적인 환경으로 인한 요행이긴 하지만, 전두환의 광주학살이 없었다면 전두환 시기의 경제적인 발전, 호황을 전두환 정권의 하나의 복이나 행운으로 평가해줄 수도 있었는데, 광주학살 때문에 그 정권 시기의 그러한 것들을 인정안해줄래다 보니까 그 공이 박정희한테 넘어가는 결과가 됐지 않느냐'고 임구호씨는 분석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은 실패한 것이며, 정경유착으로 인해 기업은 부실화되고, 기업가들도 개인적으로 치부하는 상황에서 그 부실을 만회하기 위해 취한 8.3 사채동결조치는 심지어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찬양하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좌파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해 임구호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가해자로서는 과거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에게는 이 자체가 현실이고, 미래입니다. 소위 진행형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보니까 우리가 우리 민족의 생활 공동체라고 할까요. 이 부분을 발전시켜낼 수 있는 추동력이 어디에서 와야 하느냐 하는 부분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분석이 필요하거든요.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으면 내부적인 분열과 갈등이 존재하게 되고, 그것이 뭐냐하면 우리 민족의 생활공동체를 건설해나가는 힘, 원동력을 훼손해나간다구요. 이게 훼손된 상태에서는 경제적인 발전, 사회적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거든요. 우리가 경제를 올인한다고 했을 때, 경제에 올인한 결과가 국민 모두에게 돌아간다고 하는 신념이 있을 때만이 구성원 전체가 경제에 올인할 수 있는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어느 특정한 집단에게만 귀속되고, 나머지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을때는 그만한 추동력은 발휘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노력한만큼 과실이 돌아가는 것이 과거사 청산을 통한 사회적 정의이며, 결국 과거사 청산은 바로 경제개발이나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정치권이 제대로 풀지 못하니까 국민적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대표 같은 경우 과거사 청산을 반대하는 정치적인 상징처럼 되고 있는데, 그러면 '그러면 자기도 망하고, 자기 아버지가 혹 가지고 있었던 통치자로서의 긍정적인 면도 파괴하는 그런 결과가 온다'고 강조한다.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는 열린우리당도 과거사 청산이라고 하는 것의 정치적인, 사회적인 내용을 명확하게 정리를 못하고 있는 것 같고, 그 다음에 한나라당이나 수구쪽 사람들은 한국 사회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고 할까, 이 부분에 대해서 전혀 예측을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 까막눈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라고 말하는 임구호씨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을 분열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과거사 청산을 왜곡시키고, 좌절시키기 위한 아주 교활한 언사거든요. 그럼 지금 현재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국민간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고 하는 것은 가해자들이 회개하고, 이걸 제대로 청산하고, 정리하고 넘어가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로 가는 것이죠. 그래서 분열과 갈등은 과거사 청산을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사 청산을 하지 않으면 분열과 갈등은 치유가 안되죠"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가 남긴 후유증에 대해 임구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배고픈 자유를 선택할래? 배부른 돼지가 될래?'가 강요된 시기 아닙니까? 결국 배고픈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은 징역살고, 요시찰 인물이 되고 그러다가 보니까 이름없이 죽은 사람도 많고, 배부른 돼지를 선택한 사람들은 사실상 직장생활이고, 사회생활이 거의 준 군대생활이거든요. 직장에서 완전히 부하로서만 존재했지,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접을 못받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주어진 것은 주색잡기의 자유만 주어졌지, 그 사람의 양심의 소리, 어떤 인간의 소리는 사회생활에서 거의 불가능했잖아요"
그리고 그 세대는 IMF 때문에 조기퇴직해서 실업자되서 빌빌하고, 자기 자식들은 취업안돼서 힘들고, 그렇다보니까 자기 노후가 힘들어지는 그런 세대인데, 아직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자기 삶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까, 자기 고찰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이성적으로 안되다보니까 현재 자기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저능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병이 치유될 수 있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우려를 덧붙이고 있다.
"이게 20∼30대한테 감염이 되는 것이 문제예요. 특히 대구경북지역의 감염정도는 심합니다. 내가 등산을 가거나, 상가나 이런데서 이삼십대 젊은 사람들이나,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를 빨갱이라고 하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을 빨갱이라고 할때 기가막혀서 빤히 쳐다본다구요. 저런 판단력이라고 하면 앞으로 우리 한국 사회에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실제 히틀러가 독일의 독점재벌들을 위해서 경제 정책을 사용하잖아요. 그래서 독일이 1차대전 이후의 대공황에서 독일의 기업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인 불황을 히틀러 방식으로 극복되도록 해주잖아요. 그런 면에서 철저히 히틀러는 기업편이고, 재벌편인데, 히틀러에게 표를 찍어주는 것은 서민들이었다는 말이죠. 제대한 군인들이라든지, 룸펜, 저소득층이 히틀러를 찍어 줬다구요. 대구에도 가만히 보면 실제 한나라당이 내놓은 경제정책, 민생정책을 보면 전부 대기업이나 재벌들, 가진자들을 위한 정책들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경북에서 못사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니까 히틀러 시기하고 흡사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을 가끔 느끼죠. 요새는 김대중씨에 대한 부분은 긍정적인 평가도 나타나고, 완화가 되어 있는데, 요새는 노무현 정부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때까지는 '전라도 놈 아니냐'는 식으로 모든 문제를 정리하고, 전라도냐, 아니냐는 이분법으로 문제를 봤는데, 이제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니까 '좌파냐? 아니냐?' 이렇게 가는데, 그런 측면에서는 이야기할 여지가 많아지기는 했어도, '좌파냐, 아니냐'고 하는게 상식적인, 근거 있는 판단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쪽으로 완전히 매도하고, 공격하고, 중상모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니까, 친일배들이 해방정국때 좌파냐, 우파냐 가르던 그 기준을 경북에서는 흉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불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인혁당에 대한 진상규명없이 국민화합은 없다.
올해는 인혁당에 관련되어서 처형당한 분들의 30주기가 되는해이다. 진상규명을 원하는 측에서는 기념행사를 치러야 하는데, 여러 가지 고민들이 많은 듯하다. 그렇게 거대한 폭력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유족들 사이에서도 '명예회복 신청할 필요도 없다, 심사위원들이 우리 남편들을 무슨 기준으로, 무슨 자격으로 심사한다는 말이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진상규명의 일환으로 명예회복 신청을 적극적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혹시 '국가에서 보상이 나오더라도 보상금을 수령하지 말자, 재심을 통해서 국가배상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좀 어렵고, 힘들기때문에 '보상금 자체가 떳떳하다면 받을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한다.
임구호씨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상당히 많은 자료들, 2만쪽이 넘는 자료들을 확보를 해서 정리를 하고 있는 상태고, 이번에 국정원에서도 조사를 하면 일정한 자료들이 나오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국가가 어느 정도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드러나면 나는 민청학련, 인혁 사건에 대해서만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주체가 되어서 사과하고, 반성해야된다고 보고 있거든요. 왜그러냐 하면 당시에 긴급조치 1호 발표를 할때 대통령의 담화문에 보면 '항간에는 인민혁명전략에 의해서 정부를 전복하고, 적화통일을 하려고 하는 불순세력이 준동하고 있다'고 하는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75년 각 정보부처 연도 순시때 인혁당 사건이 사실이니까 홍보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지시를 하고, 법부무 장관도 김지하씨 등을 구속하면서 강압적으로 나오거든요. 그 다음에 4월 9일날 전격적인 사형집행을 했는데, 대통령의 재가에 의한 사형집행 아닙니까? 이런 거로 봤을 때 이거는 하수적인 역할이라고 할까, 실무적인 역할을 정보부에서 했다손 치더라도 실제 이 것을 지휘하고, 조정하고, 감독하고, 집행한 것은 대통령과 청와대라고 보고 있거든요"라고 말하면서 대통령과 청와대가 나서서 이 사건에 대해서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할 건 사과해야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법원이 당시 저지른 죄업들이 있으니 결자해지 차원에서 빨리 재심을 해야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사형이 집행된 날 당국은 일부 시신을 강제로 화장시켜서 유족들에게 돌려주었다. 1년이 지났어도 남아 있는 고문의 흔적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항의하던 문정현 신부는 다리를 다쳐 아직까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니신다. 당국은 유족들이 그들을 추모하는 일까지 막았다. 첫 추모제는 1년이 지난 76년 4월 9일 대처승이던 여정남의 아버지가 주지로 있던 절에서 가족들끼리 모여 숨죽인 채 치러졌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평가 및 명예회복 움직임은 14년이 지난 89년에야 대구, 경북 지역 재야단체와 대학 총학생회가 사형당한 8인을 위한 공동추모제를 열면서 시작됐다. 그 후 천주교 인권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다시 활발하게 일고 있는 진상규명 움직임은 1998년 4월 9일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대책위원회'가 발족하면서 큰 걸음을 내딛었고, 유족들은 국민의 정부에서만큼은 진상규명의 염원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현재 '국정원의 7대 조사사건'으로 민청학련사건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이 인혁당에 연루된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들은 민청학련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각 그룹인 학생운동권으로 1969년 3선개헌운동시 강제 징집된 후 복학된 이들(서중석, 유인태, 안양로, 정윤광, 이철 등)과 70, 71 학번을 주축으로 한 후배그룹, 1970년 중반부터 교회운동에 투신한 기독학생회그룹(서경석, 나병식, 황인성 등), 종교계의 지학순 주교 및 원주팀(박재일 등 농민운동그룹과 종교계, 그리고 김지하 등), 박형규 목사, 졸업생 선배 그룹(유근일, 김지하, 이현배, 장기표, 조영래 등), 정계(윤보선 등), 재야원로(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문학계와 학계(김동길, 김찬국, 백낙청 등) 그룹 어디에도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조차 회고록에서 "그들 8명은 정부에 비판적이되 국제적인 연관관계를 가지진 않았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박정희는 국제적 말썽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계산하고 이들을 속죄양으로 본보기삼아 처형함으로써 국민들이 더 이상 반항을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라고 증언했겠는가?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대해 민주화 진영조차 소극적이라는건 안타까운 일이다.
김지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조직운동은 자금이 가장 중요하다. 수사를 할 때 자금원이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지도명제가 무엇인가도 문제다. 그러나 인혁당의 자금은 2천원이든가, 죽은 여정남씨가 유인태씨든가 이철이든가 막걸리값 하라고 준 것이 조직자금, 공작금으로 되었다. 그러니까 비교가 안되지 않느냐. 그래서 발표가 나중에 뒤집어졌다. 인혁당이라고 그랬는데, 발표는 재야세력과 인혁당 양쪽 조종으로 돼 있다. 그러니까 복잡한 사건이다. 이것은 분명한 거다. 재야민주세력이 지원한 거고, 배후가 있다면 나나 지학순, 박형규, 윤보선씨가 배후세력이고, 인혁당은 조작하기 위해 끌어댄 거다. 무고한 사람 붙잡아다가 완전히 날조한 거다. 2천원 막걸리 값이 공작금이 된 것이다"
송상진씨의 아들 송철환씨는 "인혁당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서는 박정희 정권과 유신시대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국민화합도 요원하다"고 말했는데, 이 말만큼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이 없을 듯하다. '까불면 죽는다'고 협박했던 긴급조치의 본질을 이 사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무엇인가? 게다가 온갖 반칙에 야비하기 짝이 없는 술수까지 동원했던 사건이다.
박찬욱 감독은 '언젠가 인혁당 사건을 다루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취재는 하고 있는데, 조심스럽네요.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것을 어떻게 정리해 내야 될지도 모르겠고, 더 큰 문제는 일단 유족분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지, 너무 위대하고 결점 없는 인간으로 그려지면 영화가 재미없잖아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겁이 나서 계속 망설이고 있는 중이에요.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면 기대하실테고, 사실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요. 70년대는 사극 찍기보다 돈이 더 들어가거든요. 의상, 장발 이런 거 다 만들어야 되고, 거리의 간판이니 이런 거 다 바꿔야 되고, 돈이 많이 들어가요. 그럼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내는 만큼의 상업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하는 과정에서의 훼손이나 변질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여덟분이나 되는 사형수들을 공평하게 다룰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 더 포커스를 줄 것인지도 결정하기 힘들구요"라고 했는데,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여러가지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조성되어서 그 영화를 빨리 볼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첫댓글 우와~~~~~~~~~~~~
엄청 긴글 다읽느라 눈은 가물가물 목은 뻐근
암튼 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