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강 상류의 팽나무동네를 삼켜버린 괴물 같은 장흥 댐을 찾았다. 굴렁쇠를 굴리며 달리던 신작로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데 먼 산들은 아련한 옛 모습이다. 멍멍 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일렁이는 수면위로 동구 밖 정경을 그려 보려는 순간 팽나무정자가 반기는 듯이 다가선다. 우람하게 자란 고목이었지만 가지들이 사방으로 잘 뻗어있어 삼복더위엔 그늘이 좋았고 팥알 만 한 초록열매가 잔득 열렸다. 시누대로 만든 딱총에 열매를 넣고 쏘아대는 전쟁놀이를 하느라 팽나무는 여름 한철 머슴애들의 아지트였다. 신작로 쪽으로 뻗은 가지에는 그네가 메어 있었지만 길목에 메어있는 천 씨 네의 늙은 숫염소가 훼방을 부렸다. 염소를 무서워하는 누이동생을 위해 뿔에 받히지 않을만한 거리에서 딱총을 쏘아대고 침을 뱉을 내뱉는 후에 그래도 용을 쓰는 놈을 작대기로 물리치곤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팽나무 아래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밭일하던 부인네들이 점심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아기를 찾아 젖을 먹인다. 따라온 여자애들이 아기를 업고 비켜서면 금방 물렸던 함지박 같은 젖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로 오수에 빠져들고 있었다. 엄마들이 깨어나 밭으로 나가면 팽나무는 아이들의 차지가 됐다. 여자애들은 아기를 그늘에 눕혀놓고 그네를 타고. 남자애들은 다른 쪽 가지에 올라 열매를 따면서 자동차 달리는 시늉을 내느라 부르릉부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밑에 있는 가지를 발로 굴러댔다. 나는 위엣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떨어져 다리와 이마에서 피를 흘렸지만 늘 달고 사는 일상이었다.
우리 동네는 탐진강 상류의 동쪽에 있다 해서 강동江東이지만 팽나무동네로 통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오를 수 있는 팽나무정자를 타 동네 아이들이 부러워했다. 면 소재지인 송정리에 속해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만 모여 살아 자유 분망한 동네였다. 물 건너 둘째 고모님 댁의 공수평 장씨 마을에는 행동거지를 반듯하게 위엄을 보이는 어른이 계셨다. 우리 동네보다 배나 크고 느티나무가 정자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열매가 열리지 않고 그네가 없었다. 그래서 여자나 아이들이 쉴만한 장소가 아닌 듯 할아버지들 차지였다. 윗동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 동네 팽나무에 오르며 놀다가기를 좋아했고 그 중에는 동산리에 사는 고재봉(후일 남다르게 알려진 분)이도 끼었었다.
팽나무동네사람들은 성씨가 각각 달랐다. 팽나무 정자를 기준으로 웃 강동과 아래 강동으로 나누어 있었다. 아래쪽에는 영암 댁이라고 부르는 우리 집을 포함해 일곱 집이 살았다. 바닷가 강진에서 왔다는 강진 댁, 더 멀리 안동에서 왔다는 안동 댁과 하동 댁 등 모두가 타관사람들이라 대대로 마을 어른들이 주관하여 행사를 치루는 이웃 동네로부터 하대를 받기도 했다. 위쪽에 사는 네 가구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동네 앞에는 숯과 장작을 실러 오는 일제목탄차가 덜컹대며 지나다녔다. 커브를 돌아 냇물을 건너려고 주춤 거릴 때 뒤에 메어 달리다가 떨어져 다치기도 하고 조수에게 붙잡혀 얻어맞으면서도 그 짓을 계속해댔다.
팽나무동네 건너편 공수평 뒷산 너머의 엉골 깊은 골짜기에는 곰과 호랑이가 산다고 했다. 그 초입에 외가 문 씨들의 제각과 관리하는 집이 몇 채있었다. 노루목이라는 이 작은 마을에서 한겨울을 보내는 중에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신라 때 불교의 선종이 인도와 중국을 거쳐 제일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된 곳이 봉덕리 가지산이었다. 울창한 비자나무 숲 아래로 흐르는 냇물을 막아 보림사라는 절을 세우려할 때였다. 깊은 물에 살고 있던 용이 쫓겨 가면서 가로 막힌 바위산 줄기를 처서 생겼다는 용소龍沼 앞 용문리는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이었다. 꼬리를 다친 용이 피를 흘리며 넘어갔다 해서 생긴 피재를 넘으면 장흥군 장평면이다. 장흥읍내와 보성군 벌교로도 가는 길목인데 해방 전에는 산적들이 웅거해 있다고 했고, 이후에는 빨치산들의 출몰이 잦다고 해서 통행을 꺼리는 곳이었다.
팽나무동네 앞에는 어설프게 놓인 콘크리트 다리가 무너진 채로였다. 우마차가 그냥 물길로 어렵게 다녔고 물속에 잠긴 다리는 물고기들의 서식처가 됐다. 동네 애들과 고기도 잡고 돌출된 부분에서 다이빙을 즐겼다. 위쪽에 있는 보의 물이 수로를 따라 동네 앞으로 흘러 팽나무 옆 실개천과 합쳐지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도록 놓인 작은 섶 다리 밑에는 수초가 우거져 있어 붕어와 새우, 징거미가 바글댔다. 바구니로 그것들을 훌쳐서 잡아가면 어머니는 햇감자를 넣어 조림을 맛있게 해주어 물고기 잡는데도 열심이었다. 팽나무 열매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에는 딱총놀이를 접어두고 군것질 서리를 하는데 열중이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또래들이 팽나무 아래로 모여 고구마와 풋콩을 서리한 후에 옆 개울에서 가재를 찬거리로 잡아 구워먹느라 누가 어찌된다 해도 모른다 할 지경이었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뀌었다. 유년시절 잠간은 즐거웠었지만 이념투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지내다 생긴 트라우마가 더 진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해방이 된 이듬해 봄부터 활동했던 밤사람(야산대)들과 여순 반란군 잔당들이 합세하고 인민군 패잔병들까지 끼어든 빨치산들의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팽나무동네에서 그들의 살벌하고 극단적인 투쟁을 보고 겪으며 군경토벌작전으로 처참하게 소멸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그때의 기억들이 치근대는 바람에 팽나무동네가 사라진 물가를 찾아가곤 한다. 아물아물 거리는 편린들 속에서 천국에 가신 부모님을 뵙고 년 전에 뒤따라간 누나와 누이동생을 만났다. 그리고 부잡스럽게 팽나무에 오르내리는 아이들과의 뒤로 뿔난 염소와 빨치산들의 이글어진 모습이 어른거린다. 201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