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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續五[名流]
황해도 관찰사 심공 신도비명 병서(黃海道觀察使沈公神道碑銘 幷序)
우리 현종(顯宗)과 숙종(肅宗)의 시대에 맑고 편안하고 돈후하고 소박한 선비가 있었으니 바로 오탄(梧灘) 심공이다. 공은 휘가 유(攸)이고, 자가 중미(仲美)로 그 선조는 청송부(靑松府)에서 나왔다.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우리나라의 명망 높은 집안으로, 본조에서는 정안공(定安公) 덕부(德符)와 안효공(安孝公) 온(溫)과 공숙공(恭肅公) 회(澮) 3대가 모두 상상(上相 영의정)에 올라 가문이 매우 빛났다.
공숙공의 손자인 순문(順門)은 의정부 사인이고, 사인의 아들 달원(達源)은 사림들 사이에서 매우 명망이 높아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과 충암(冲菴 김정(金淨)) 같은 여러 어진 선비들과 친하였는데, 선발되어 옥당에 들어갔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모진 시련을 당해 생을 마쳤다. 2대를 내려와 휘 우정(友正)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이르렀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다.
조고 휘 집(諿)은 예조 판서이고, 선고 휘 동귀(東龜)는 홍문관 응교이며, 선비(先妣)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첨지 수렴(守廉)의 딸이자 좌의정 명원(命元)의 손녀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시구(詩句)를 내뱉을 때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과장(科場)에 나갔을 때에는 그 명성이 더욱 높아서 동류들 중 감히 대항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23세에 진사가 되었고, 31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선발되었으며, 승정원 주서(注書)로 옮겼다.
공은 영화로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마치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일처럼 여겼기 때문에 한원(翰苑)에 천거되었으나 극구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마침 조고 판서공과 선고 응교공이 죄가 없는데도 관작(官爵)을 삭탈당하자, 공은 매우 가슴아파하여 벼슬길에 대한 미련을 더욱 갖지 않게 되었다.
성균관 전적과 병랑을 거쳐 용안 현감(龍安縣監)으로 나갔다. 현종 초년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자 바로 상소하여 판서공의 억울함을 아뢰니, 성상에게 보고되었다. 얼마 후 부친상을 당하고, 복제(服制)를 마친 후에 정언으로 있으면서 전에 했던 말을 거듭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외직을 청하여 김제(金堤)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공을 시기하는 자 때문에 오랫동안 편배(編配)되었다.
공은 장령, 헌납, 사간, 집의를 역임하고 중간에 직강, 사성, 사도시 정이 되었으며 또 옥천 군수(沃川郡守)로 나가게 되었다. 공은 전에 부임한 군읍에서 모두 치적(治積)이 뛰어나다는 칭찬이 있었는데, 이때 흉년을 만나 한결같이 마음을 다해 진휼(賑恤)하니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지어 그 아름다움을 알렸다.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대각에 들어가고 삼자함(三字銜 지제교)에 선발되었으며 호남(湖南)의 향시(鄕試)를 관장하였다. 사복시 정, 필선, 보덕이 되었고, 나가서 안변부(安邊府)를 다스리고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공은 언관의 자리에 있을 때에 일을 만나면 곧장 어전에 나아가 간언하였으니, 비록 성상의 뜻을 심히 거스르게 되더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재상 허적(許積)이 명을 받고 사신으로 갔다가 성상에게 허물이 돌아가게 하고 청나라가 트집을 잡게 만들었다. 이에 여러 대간들이 허적을 논핵하다가 유배되자 공이 명을 거둘 것을 강력하게 청하였다. 또 유명(儒名)을 가탁하여 정도(正道)를 더럽히는 허적의 무리를 유배 보낼 것을 논하였다.
아울러 탐욕스럽고 마음이 검은 황헌(黃瀗)과 권우(權堣), 살인을 저지른 이온(李溫), 과장(科場)에서 부정을 저지른 이원정(李元禎), 간사하고 사특한 이태서(李台瑞)의 죄상과 이삼석(李三錫)이 사헌부 관원으로 적합하지 못한 실상에 대해 논하였다. 또 별전(別殿)을 조성하는 일의 부당함과 환관의 교만한 횡포를 마땅히 징벌해야 함을 말하였다.
문곡(文谷) 김공(金公)이 주의(注擬)로 인하여 엄한 책망을 받고, 대신(臺臣) 조세환(趙世煥)이 이 일에 대해 말하다가 견책을 받았는데,
공이 이들을 위해 시비를 바로잡아 구원하기를 매우 정성껏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군주의 덕을 권면하고 언로(言路)를 열 것을 청하였으며 공주의 집이 백성들의 전답(田畓)을 널리 점유하는 폐해를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강직하였다. 이 외에도 올린 봉주(封奏)가 또한 많았으니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사편(史編)에 기록할 만하다고 하였다.
갑인년(1674, 현종 15)에 숙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소인배들이 권력을 잡고서 예(禮)를 논한 일을 빌미로 삼아 거짓으로 우암을 모함하니 재앙의 불씨가 크게 일어났다. 공이 마침 사간원의 사간으로 있다가 인피(引避)하고 말하기를, “송시열은 효종(孝宗)으로부터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우(知遇)를 받아 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접을 받았으며, 효종을 위하는 송시열의 정성은 신명(神明)에게 물어도 수긍할 만큼 대단하였다.
예를 논의하는 사이에 비록 견해는 같지 않았으나 결코 우암이 자기 마음대로 예제(禮制)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니 절대로 죄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이를 트집 잡아 유현(儒賢)을 죄에 빠뜨려 조정을 뒤흔들고자 하니 도대체 무슨 심보란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이 당시 성상의 노여움이 한창 대단하여 사람들이 모두들 두려워하며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홀로 붓을 휘둘러 간사한 자들의 흉계를 파헤치니 안팎이 크게 복종하였다. 성상이 이미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하라는 명을 내렸는데도 간사한 자들은 다시 전일에 공이 지방관으로 있을 때의 일을 거론하면서 광주(廣州)로 편관(編管)되도록 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 6)에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고 상을 마친 후에 곧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가 교리와 응교로 옮겼고 사인(舍人), 사간, 집의가 되었다. 동부승지로 발탁되어 차례대로 승진하여 우승지에 올랐으며 체직되고 병조 참지와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서 한창 교화를 새롭게 하고 있었는데, 하찮은 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여러 번 대사간, 대사성, 이조ㆍ예조ㆍ호조ㆍ형조의 참의가 되었다.
공은 평소에 편당(偏黨)을 일삼지 않았다. 일찍이 요로(要路)에 있는 자에게 이〔蝨〕처럼 달라붙는 사람들의 행태를 논하였고, 윤증(尹拯)을 구제하려는 간관(諫官)을 논척하였다. 문곡이 정승을 선발하는 일로 인해 성상의 뜻을 거슬러 조정을 떠나고 외재(畏齋) 이공(李公)도 이 일로 인해 성상의 심한 박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공은 부제학으로서 입대(入對)하여 두 신하가 충심을 다하였을 뿐 다른 뜻이 없음을 힘써 아뢰며, 반복하여 늦은 밤까지 간절히 말씀을 올렸다. 성상의 뜻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지만 또한 성상이 공의 곡진한 충심을 헤아려 주어 일의 기세가 차츰 진정되었으니 이는 공의 힘이었다.
이 당시 궁중의 법도가 엄하지 못하여 고약한 무리들이 안팎에서 번갈아 일을 꾸미고 선동하여 훌륭한 사람들을 먼 시골로 물러나게 만들어 우환이 한창 커지려 하였다. 공은 국가의 흥망이 여기에서 결판날 것임을 명확히 알고 어전에 가까이 나아가 차근차근 아뢰어 자신의 생각을 모두 진달했는데, 공의 말이 기사년(1689, 숙종 15)에 이르러서 모두 징험되었다.
공은 평소 명분과 의리를 스스로 지킬 뿐이어서 세상에 휩쓸려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으니, 갑인년(1674, 현종15)의 일과 이 일이 가장 큰 대절(大節)에 해당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공은 만력(萬曆) 경신년(1620, 광해군 12)에 태어나 69세가 되던 무진년(1688, 숙종14) 7월 6일에 별세하였다.
통진(通津) 문수산(文殊山) 선묘 아래에 장사지내고, 부인 이씨(李氏)를 합장하였다. 부인의 계통은 국성(國姓)에서 나왔으니, 사의(司議) 명설(命說)의 딸이자 판서 성중(誠中)의 증손녀이다. 인자하고 은혜로워 베풀기를 좋아하니 온 문중에서 내조를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4남 3녀를 낳으니, 아들 한주(漢柱)는 군수로 아들 목사 봉휘(鳳輝)를 낳았고, 한장(漢章)은 아들 정랑 봉의(鳳儀)를 낳았다. 또 한서(漢瑞)가 있으며, 한규(漢規)는 직장으로 아들 봉위(鳳威), 봉일(鳳逸), 봉인(鳳仁), 봉관(鳳觀)을 낳았다.
딸은 각각 첨정 이홍정(李弘廷), 사인(士人) 정도진(丁道晉), 도정 이세정(李世禎)에게 출가하였으니, 이재필(李載泌)과 정오신(丁五愼)과 이명좌(李明佐)ㆍ명회(明會)ㆍ명진(明晉)ㆍ명협(明協)ㆍ명익(明翼)이 사위들의 소생이다.
감사 성희(聖希)ㆍ현희(賢希)ㆍ사희(士希)ㆍ도희(道希)ㆍ태희(泰希)ㆍ현희(顯希)ㆍ원희(元希)와 공헌(公獻)ㆍ공유(公猷)ㆍ공언(公彦)ㆍ공량(公亮)은 공의 증손과 현손이다. 아직 어린 자손들과 외손들은 매우 많아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공은 가정에서의 행실이 순박하고 도타웠는데, 선대의 원통함을 풀지 못하자 피눈물을 흘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숙종이 정국을 일신시킬 때에 이르러 대로(大老)가 연석에서 이 사실을 아뢰고여러 공들이 이를 도와 오랫동안 쌓여있던 원통함을 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공의 정성과 효성에 상하가 모두 감동한 결과이다.
대부인(大夫人)을 섬길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매우 부지런히 노력하여 기애(耆艾)의 나이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형제들과도 우애하여 강굉(姜肱)과 강중해(姜中海)의 풍모가 있었다. 백씨(伯氏)가 일찍 별세하였는데 오래된 상자에서 유고(遺稿)를 발견하고는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형제들이 분가할 때에는 비옥한 토지는 차지하지 않고 척박한 곳을 취하며 말하기를, “나는 녹봉(祿奉)을 받으니, 어찌 빈곤한 것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런 마음을 미루어 친척에까지 미쳤으니 내외의 친인척들과 차이를 두지 않고 화목하였다. 마음가짐이 진솔하고 화락하여 이해(利害)를 따지거나 권모술수를 부리는 습속을 멀리하였다.
벼슬하면서는 정직하고 충후(忠厚)하여 각박하게 따지고 과격하게 들춰내는 논의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큰 시비가 났을 때에는 의연하게 한칼로 잘라 버리듯이 하여 화(禍)와 복(福)에 의해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 경신년(1680, 숙종 6) 이후 여러 음모가 사라지고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이 크게 열리니, 인재를 선발할 때마다 반드시 공을 제일 먼저 천거하였다.
성상 역시 공의 근신(勤愼)함을 자주 칭찬하였고, 또 공이 문학으로 명성이 있으니 주감(冑監 성균관 대사성)에 적합하다고 전교하였다. 그러나 공은 도리어 뒷걸음치고 사양하면서 한결같이 담박하고 고상함으로 스스로를 신칙할 뿐이었다. 거처하는 집과 의복과 거마(車馬)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물리쳐 멀리하고 죽을 때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선배들이 늘 공을 두고 칭찬하여, 도량이 넓고 풍취가 고상하여 보통 사람들은 미칠 수 없다고 하니 논하는 사람들이 지당한 말이라고들 하였다. 시인이나 뛰어난 선비들과 더불어 강호(江湖)에서 시가를 읊조리기를 즐기며 초연(超然)히 얽매임이 없어서 거의 형해(形骸)를 모두 잊은 듯하다가도 시사(時事)가 어지럽다는 소식을 들으면 번번이 술잔을 거두고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공이 평생 동안 수립한 대절(大節)의 근본이다.
문사(文詞)를 짓는 일에 있어서는 시에 더욱 뛰어나서 성당(盛唐) 시기의 이태백(李太白)을 표준으로 삼아 청일(淸逸)하고 속되지 않았으니, 그 사람됨과 같았다. 이 밖에 변려문도 서릉(徐陵)과 유신(庾信)의 격법을 갖추었다. 문집 몇 권이 세상에 간행되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켜 / 孝格穹蒼
양대(兩代)의 억울함을 씻었고 / 雪兩世之幽鬱
포의 때의 소박한 마음을 지켜 / 心持布素
끝까지 한결같은 절개를 닦았네 / 厲一節乎終始
국세가 위태로울 때에 / 當國勢扤隉
어진 이를 돕고 세상을 부지하는 좋은 말을 올리니 / 又進佑賢扶世之昌言
공의 늠연함은 멋대로 흐르는 물이 한창 성할 때 / 凜然如橫流方盛
홀로 우뚝 선 지주와 같았도다 / 砥柱獨峙
만일 공이 마음을 독실히 닦지 않았더라면 / 苟使公無本地之篤修
어찌 이 같은 공을 세웠으리오 / 曷以見樹立之若此
내가 곧은 돌에 명(銘)을 새겨 / 我琢貞石
영원히 먼 후세에까지 고하노니 / 永詔遐禩
나중에 이 글을 읽는 자들은 / 後來讀斯文者
이분이 우리 당의 큰 인물이며 / 尙識其爲吾黨之魁彦
밝은 조정의 훌륭한 선비였음을 익히 알 것이다 / 明廷之吉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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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이때에 …… 삭탈당하자 :
1644년(인조 22)에 심유(沈攸)의 조부 심집(沈諿)과 부친 심동귀(沈東龜)가 심기원(沈器遠)이 일으킨 모반에 연루되어 죄를 받은
일을 말한다. 심기원이 좌의정으로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게 되자, 이를 기회로 심복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서, 광주 부윤
(廣州府尹) 권억(權澺) 등과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기로 모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심동귀는 이 사건에 연좌되어 장흥으로 유배당해 십여 년간 금고 상태로 있다가 효종(孝宗) 초에 석방되고 현종(顯宗) 때에 신원되
었다. 심집은 이 사건으로 지병이 악화되어 별세하고, 직첩을 환수 당했다가 숙종(肅宗) 때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에 의해 신원
되었다.《仁祖實錄 22年 3月 21日》
[주02] 편배(編配) :
도형(徒刑)이나 유형(流刑)에 처한 죄인의 이름을 도류안(徒流案)에 기록하여 넣는 것을 말한다.
[주03] 재상 …… 청하였다 :
1665년(현종 5)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안추원(安秋元)이란 자가 탈출하여 돌아왔는데 비국에
서 이를 청나라에 보고하지 않고 감춘 일이 있었고, 1666년에는 최선일(崔善一)이란 자가 염초를 몰래 매입하다 발각된 일이 있었
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사신이 들어왔는데, 특히 안추원의 일을 특별히 더 문제 삼아 조선의 대신들을 사율(死律)로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현종(顯宗)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감형을 요청하였다. 허적(許積)이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진주사로 파
견되었는데 청나라에서는 감죄의 대가로 벌금을 요구하였다.
허적이 돌아오자 집의 이숙(李䎘), 장령 박증휘(朴增輝)ㆍ신명규(申命圭) 등의 대간들이, 책무를 다하지 못해 성상에게 책임이 돌
아가게 하고 나라가 치욕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진주사 허적, 부사 남용익(南龍翼), 서장관 맹주서(孟胄瑞)를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顯宗實錄 5年 8月 12日, 7年 1月 15日, 2月 6日, 5月 28日, 7月 10日ㆍ17日, 8年 1月 12日ㆍ29日》
《顯宗改修實錄 8年 2月 6日》
[주04] 문곡(文谷) …… 받고 :
문곡 김공은 김수항(金壽恒)으로, 당시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승지를 의망할 적에 김우석(金禹錫)과 이익(李翊)이 청선(淸選)인 승
지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의망하지 않았는데, 이 일로 가벼운 벌을 받게 되자 정고(呈告)하였다. 그러자 현종(顯宗)이 신하의
도리에 마땅하지 않다고 하며 추고를 명하였다. 《顯宗實錄 8年 9月 15日, 20日》
[주05] 갑인년에 …… 일어났다 :
1674년(현종 15)에 효종(孝宗)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효종의 모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두
고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고 남인(南人)은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예송(禮訟)이 일어났
는데, 결국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 송시열은 관작(官爵)이 삭탈되고 유배되었으며,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 정권
이 성립하였다.
[주06] 편관(編管) :
죄인을 변방의 고을로 귀양 보내면 해당 고을의 수령이 편호(編戶)로 편성하여 죄인을 관리하던 것을 말한다. 편호는 호적이 없는
사람이나 외국인을 호적에 올려 일반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07] 문곡이 …… 있었다 :
외재(畏齋) 이공(李公)은 이단하(李端夏)이다. 1687년(숙종 13) 5월에 숙종(肅宗)이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좌의정 이단하를
명초(命招)하여 복상(卜相)하도록 하였다. 이때 숙종은 당시 이조 판서로 있던 조사석(趙師錫)을 임명하기를 원하였는데 김수항과
이단하가 조사석을 의망하지 않으므로 계속하여 다시 복상하게 하였다.
김수항과 이단하는 차례로 이숙(李䎘), 이민서(李敏敍), 신정(申晸), 여성제(呂聖齊) 등을 천거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조사석을 품
지(稟旨)하여 정하게 되었다. 조사석은 평소에 인망(人望)이 모자랐고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어미와 유착관계가 있었으므로 당
시의 여론이 이 일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결국 김수항은 이를 계기로 사직을 청하고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肅宗實錄 13年 5月 1
日, 7月 24日》
[주08] 기사년에 …… 징험되었다 :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기사환국은 기사년(1689, 숙종 15)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西人)들이 숙원
(淑媛) 장씨(張氏)의 소생인 왕자 윤(昀)의 원자(元子) 책봉을 반대하자, 이에 분노한 숙종(肅宗)이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
과 김수항(金壽恒) 등을 사사(賜死)하고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실각하였던 남인(南人)들을 다시 등용한 사건이다.
[주09] 갑인년의 일 :
1674년(현종 15)에 효종(孝宗)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효종의 모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두
고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고 남인(南人)은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예송(禮訟)이 일어났
는데, 결국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 송시열은 관작(官爵)이 삭탈되고 유배되었으며,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 정권
이 성립하였다.
[주10] 대로(大老)가 …… 아뢰고 :
대로는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1681년(숙종 7) 2월에 송시열이 입시하여 숙종(肅宗)에게 아뢰기를, “옛날에 심동귀(沈東龜)
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아비 심집(沈諿)은 인조(仁祖) 조 병자년 후에 판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효종(孝宗) 조에 이르러 상신이 잘못 계달(啓達)하여 삭탈의 죄를 받게 되자, 심동귀가 신원(伸寃)할 수 없는 것을 이유로 지
극히 비통해하면서 일찍이 가인(家人)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어도 반드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죽은 후에 눈을 감지 아니하니, 그 아들이 손으로 쓸어보아도 감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효행이 뚜
렷하게 드러난 자는 심동귀 한 사람뿐입니다. 그 억울함을 품게 된 곡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그 일의 시비를 따져서 다시
처분을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肅宗實錄 7年 2月 11日》
[주11] 기애(耆艾) :
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60세를 기(耆)라 하고, 50세를 애(艾)라 한다.《예기(禮記)》〈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艾)라 하
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세를 기(耆)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
고 하였다.
[주12] 강굉(姜肱)과 강중해(姜中海)의 풍모 :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함을 말한다. 강굉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자가 백회(伯淮)인데, 그의 두 아우인 강중해, 강계강(姜季江)
과 우애가 지극해서 잠을 잘 때 반드시 한 이불을 덮고 잤다고 한다.《後漢書 卷53 姜肱列傳》
[주13] 서릉(徐陵) :
507~583. 남조(南朝) 양(梁)ㆍ진(陳) 때의 사람으로, 자는 효목(孝穆)이다. 유신(庾信)과 더불어 서유체(徐庾體)라고 불리는 궁
체(宮體)의 시를 일으켰으며, 양나라 태자(太子) 소강(蕭綱)의 명으로《옥대신영(玉臺新詠)》을 엮었다. 저서로는《서효목집(徐
孝穆集)》이 있다.
[주14] 유신(庾信) :
513~581. 남북조(南北朝) 때의 학자로 자는 자산(子山)이다. 처음에는 양(梁)에서 벼슬하여 태자서인(太子庶人)이 되었고 뒤에
북주(北周)에서 벼슬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 되었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정통하였으며, 학문이 매우 해박하
고 문장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 그의 변려문(騈儷文)은 육조(六朝)의 집대성(集大成)이라고 불린다. 저서로는《유자산집(庾子山
集)》이 있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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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黃海道觀察使沈公神道碑銘 幷序。
蓋當我顯、肅之世, 有淸恬敦素之士, 曰梧灘沈公。 其諱攸, 其字仲美, 其先出靑松府。 靑松之沈, 爲吾東望族。 本朝定安公德符、安孝公溫、恭肅公澮, 三世俱陟上相, 門戶赫舃。 恭肅孫順門, 議政府舍人。 舍人子達源, 名重士林, 與靜菴、冲庵諸賢友善, 選入玉堂, 遘己卯禍, 挫揠以終。 二世而諱友正, 擢魁科, 官至驪州牧使, 公之曾祖也。 祖諱諿, 禮曹判書。 考諱東龜, 弘文館應敎。 妣慶州金氏, 僉知守廉女, 左議政命元孫也。 公幼穎秀, 出語驚人, 遊場屋, 聲名藹鬱, 曹偶莫敢抗。 年二十三, 成進士。 三十一, 登第選槐院, 轉注書。 公視榮途若浼, 薦翰苑, 固辭不就。 會判書、應敎二公, 以非罪削爵, 公痛迫, 益無心進取。 由典籍、兵郞出監龍安縣。 顯宗初服, 拜持平, 卽疏白判書公冤, 報聞。 已丁外艱, 制盡, 以正言申前言, 未徹。 復丐外得金堤, 中忌者編配久之。 歷踐掌令、獻納、司諫、執義, 間爲直講、司成、司䆃正。 又出爲沃川郡守, 公前所更郡邑, 俱有治譽, 至是値歲侵, 單心賙賑, 尤菴宋文正公爲文而著其美。 還復入臺閣, 選三字銜, 掌試湖南, 爲司僕正、弼善、輔德, 出莅安邊府, 錄玉堂選。 公在言地, 遇事直前, 雖重咈聖意而不顧。 相積奉使, 歸過於上, 致虜喝。 諸臺論劾被竄, 公力請收還。 又論竄積黨之假儒名醜正者, 論黃瀗・權堣貪墨、李溫殺人、李元禎科場用奸、李台瑞邪慝、李三錫不合臺憲。 又言不當營建別殿、官豎驕橫宜懲。 文谷金公因注擬被嚴責, 臺臣趙世煥言事獲譴, 俱匡救甚至。 又陳箚勉君德, 請開言路, 論主家廣占田土, 語極切直。 至它封奏亦多, 朴公長遠以爲可入史編。
甲寅, 肅宗幼沖嗣位, 群小用事, 駕論禮誣捏尤菴, 火色熾發。 公適亞諫省, 引避曰: “宋時烈荷孝廟不世之遇, 待以賓師之禮, 時烈爲孝廟之誠, 神明可質。 議禮之際, 見解雖不同, 固非創意而定制, 決不可罪之。 而必欲因此搆陷儒賢, 搖蕩朝著, 抑獨何心?” 時天怒方震, 衆疑懼不敢言, 公獨奮筆剖破姦臟, 中外聳服。 上旣命削黜, 而奸黨復鉤摘前日在邑時事, 編管廣州。
庚申, 遭母夫人憂。 旣吉, 卽拜弘文修撰, 轉校理、應敎, 爲舍人、司諫、執義, 擢同副承旨, 序陞至右, 遞拜兵曹參知、禮曹參議。 出爲黃海道觀察使, 化理方新, 微文坐罷。 婁爲大司諫、大司成、吏・禮・戶・刑曹參議。 公素不事黨比, 嘗論蝨附當路人情狀, 斥諫官營救尹拯者。 文谷因枚卜忤旨去朝, 畏齋李公亦被上厭薄, 以副提學入對, 力言兩臣赤心亡他, 反覆陳列, 懇款終夕。 上意雖不甚契, 亦亮其眷眷之忠, 事機得以稍緩, 公力也。 是時宮闈不嚴, 一種不靖之徒表裏交煽, 以致家髦遜荒, 憂端方大。 公灼知國家興喪之判在是, 乃造膝納約, 磬其愊臆, 其言至己巳而悉驗。 蓋公雅以名義自持, 不隨世軒輊, 甲寅事與此一著, 最爲大節, 可傳於後世云。
公生於萬曆庚申, 至六十九歲戊辰, 以七月六日卒。 葬于通津文殊山先兆下, 與夫人李氏合祔。 夫人系出國姓, 司議命說女, 判書誠中之曾孫。 仁惠好施與, 一門稱爲賢助。 育四男三女 男漢柱, 郡守, 生子鳳輝, 牧使 漢章, 生子鳳儀, 正郞 漢瑞 ・ 漢規, 直長, 生子鳳威、鳳逸、鳳仁、鳳觀。 女適僉正李弘廷、士人丁道晉、都正李世禎, 而李載泌、丁五愼、李明佐・明會・明晉・明恊・明翼, 其出也。 監司聖希、賢希、士希、道希、泰希、顯希、元希、公獻、公猷、公彦、公亮, 公之曾玄。 而幼稚外派, 繁不盡錄。 公內行淳篤, 以先冤未暴, 血泣如不欲生。 至肅廟更化, 大老筵白, 諸公協贊, 得伸久鬱之幽枉, 此公誠孝孚感上下之效也。 事大夫人, 晨夕服勞, 至老艾弗懈。 友于昆季, 有肱、海之風。 伯氏蚤喪, 得遺什於故篋, 執之流涕。 當析箸, 舍饒取薄曰 “我有祿食, 何患貧匱” 推之宗䣊, 姻睦亡間。 秉心眞率樂豈, 而絶利害權機之習; 立朝正直忠厚, 而惡刻核激訐之論。 然當大是非, 毅然如一刀斷截, 禍福無所動。
庚申以後, 群陰掃盡, 賢路大闢, 凡遇遴柬, 必推轂公居前。 上亦亟稱其謹愼, 又敎以文名可合胄監, 公顧逡巡退讓, 一以澹雅自勅。 居室服御, 屛絶華忕, 終其身亡易。 先輩諸公每賞其襟度曠遠, 風韻高爽, 人自不可及, 論者以爲知言云。 喜與騷人勝士嘯詠江湖之上, 超
然無累, 幾乎形骸俱忘, 而聞時事擾攘, 輒停杯浩歎, 泣數行下。 其愛君憂世之心有如此者, 斯其爲平生所樹大節之本也歟爲文詞, 尤長於詩, 以盛李爲準, 淸逸不俗, 如其爲人。 溢而爲騈語, 亦得徐、庾格法。 有集若干卷行于世。 銘曰。
孝格穹蒼, 雪兩世之幽鬱, 心持布素, 如一節乎終始。 當國勢扤隉, 又進佑賢扶世之昌言, 凜然如橫流方盛, 砥柱獨峙。 苟使公無本地之篤修, 曷以見樹立之若此我瑑貞石, 永詔遐祀。 後來讀斯文者, 尙識其爲吾黨之魁彦, 明廷之吉士。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