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 12. 13. 23:56
▲퇴계 이황의 묘. 죽기 전 유언으로 조정의 예장도 사양했다. 태극훈이 감도는 오룡쟁주형 명당이다.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는 데도 품격과 비하를 담은 용어들이 다양하다. 서거 운명 별세 승화 입적 화천 선종 소천 절명 등…. 종교와 지역, 또는 학덕의 깊이에 따라 정중한 공경어가 원용되기도 한다. 몹쓸 짓을 많이 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자가 사망했을 때는 겉으로야 삼가지만 마음속으로는 ‘뻗었다’고도 한다.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산 사람에 의해 어떻게 불릴지는 스스로 곰곰이 반추해 볼 일이다.
절대 왕권 시절 임금이 진명(盡命)하면 곧 국가의 지각변동이었다. 붕어 승하 훙서 선어 안가 등이 군왕의 몰세(沒世)와 관련된 지칭어들이다.
그런데 제왕의 타계보다도 지고한 수사가 있다. 바로 역책(易?)이다. 증자(506∼BC 436)가 죽음에 임박하여 정갈한 삿자리(갈대를 엮어 만든 자리)를 바꾸어 깔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며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이다. 증자는 내성적 학풍으로 크게 존경받았던 공자의 말년 제자다.
우리 역사에도 역책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으니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다. 단지 깨끗한 삿자리를 바꿔 깔고 죽었다 해서 역책이라 불리는 게 아니고 그에 상응하는 업적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후세 사람에 회자되는 것이다.
퇴계는 자신이 죽기 나흘 전 저승길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조카 영(寗)을 불러 유언과 함께 당부의 말을 챙겼다.
“내가 죽은 후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반드시 사양하라.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본관, 조상내력, 입지, 행장만을 간단히 기록하여라. 그리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문(銘文)을 쓰도록 하라.”
▲한석봉이 선조의 명에 의해 썼다.
▲서울 남산도서관 입구에 세워진 퇴계 이황선생 동상
이황(李滉 1501년~1570년)은 조선 명종, 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황은 연산군 7년(1501년), 경북 예안군(오늘날의 안동)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마흔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7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성균관 사성, 단양 군수, 풍기 군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액을 실현시켰다. 선조 즉위 직후 임금에게 올린 성학십도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낸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南人) 계열의 종주가 되었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광해군 치세인 1609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대한민국의 1000원권 지폐 앞면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 다음 백과사전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