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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 봉사 신공 묘지명 병서(禧陵奉事申公墓誌銘 幷序)
사람들은 항상 “세류(世類)에 관계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나, 이는 다만 정상이 아닌 변고의 경우를 가지고 말한 것일 뿐, 그 실상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람의 명철하고 어리석음은 대체로 조상과 서로 짝하게 되니, 고금에서 찾아보면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옛날 목릉(穆陵, 선조) 때에 장령(掌令)으로 추증된 신공(申公) 급(礏)이 상소하여 송응개(宋應漑)와 허봉(許篈)의 간사함을 배척하고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의 억울함을 밝히자, 성상께서는 비답(批答)을 내려 ‘선비의 기개’라고 칭찬하시고, 또 하교하시기를 “정직하다, 이 사람이여.”라고 하셨다.
그 뒤 백여 년이 흐르자 간사한 무리들이 다시 제멋대로 날뛰어 두 선생을 문묘에서 축출하니, 신공의 현손으로 자가 군미(君美)인 구(球)가 여러 유생들과 함께 강력히 간쟁하였다. 이때 사문(斯文)이 하늘의 큰 액운을 받아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이 조석 간에 화(禍)를 받게 되었는데, 공은 또 화를 무릅쓰고 찾아가 배알한 다음 장령공(掌令公)의 묘지문을 부탁하였다.
28년 뒤에는 공이 상소문을 올려 윤선거(尹宣擧)가 효종을 모욕한 것을 지극히 논하였는데, 말씀한 뜻이 늠름하고 분명하여 의리가 명백하였다. 숙종(肅宗)께서 그의 말씀을 받아들여 윤선거의 관직을 추탈(追奪)하니, 그 무리들의 원한이 골수에 사무칠 정도로 지극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에 이르러 끝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으나, 공은 뜻과 기개를 더욱 가다듬고 몸가짐을 더욱 엄격하게 하니, 함께 귀양 온 사람들도 공경심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명성(名聲) 아래에 헛된 선비가 없다.”
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장령공에게 있어 참으로 이른바 ‘능히 상대가 되어 부끄러움이 없고, 잘 계승하여 욕되게 하지 않은 것’이니, 사람됨이 가문의 출신에 관계됨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은 평산(平山) 사람이다. 시조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는데, 끝내 그 충절이 기신(紀信)에 필적하여 공훈이 모두 찬란하였다.
그 뒤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는 우리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고 별세하여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은 조 문정(趙文正 조광조) 선생을 도와 중망(重望)을 한 몸에 받아 이름이 《기묘록(己卯錄)》에 기재되니, 이분이 바로 장령공의 증조이시다.
장령공은 임진왜란에 목숨을 바쳐 어머니를 구하여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관작이 추증되었으며, 그 아우 판윤(判尹) 신립(申砬)과 병사(兵使) 신할(申硈)은 전후로 왜적을 막다가 싸움에 패하여 전사하니, 삼 형제의 충성과 효도가 이처럼 혁혁히 드러났는바, 공의 선대의 덕이 이러하였다.
공은 4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금상(今上 영조)의 새로운 정사(政事)를 맞이하여, 비로소 방면되어 돌아왔다. 곧바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고 희릉 봉사(禧陵奉事)로 승진하였는데, 얼마 뒤에 간사한 무리들에게 저지를 당해 체직되고 낙향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미음과 죽도 계속하기 어려웠으나 털끝만치도 남에게서 구걸하지 않았고, 제사하여 조상에 보답하고 종족 간의 화목을 돈독하게 함에 모두 마땅하지 않음이 없었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지극한 행실이 유속(流俗)들보다 크게 뛰어나니, 향리에서 옷깃을 여미어 존경하여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사람됨이 키가 크고 몸이 수척하였으며, 미목(眉目)이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농암(農巖) 김공(金公)은 일찍이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신군(申君)은 준엄하고 강직한 사람이니, 너희들은 기억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증조인 경기(景祺)는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였고 조고 육(堉)과 선고 여규(汝逵)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으며, 선비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석봉(石峯) 선생 수(脩)의 현손이다. 공은 처음 이름이 관(綰)이었는데 뒤에 지금의 휘(諱)로 개명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734, 영조10) 3월 15일에 별세하니, 그가 태어난 병오년(丙午年, 1666, 현종 7)과 헤아려보면 69세가 된다.
공은 오씨(吳氏)와 최씨(崔氏)와 권씨(權氏) 세 부인에게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 징하(徵夏)를 양자로 삼았다. 징하는 한 아들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최씨 부인은 두 딸을 두어 장녀는 민진하(閔鎭夏)에게 출가하여 아들 진(璡)을 낳았고, 차녀는 진사(進士) 이중욱(李重郁)에게 출가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장지(葬地)는 양주(楊州) 백양곡(白羊谷)으로 오씨와 최씨 두 부인을 합장하였는데, 바로 집 뒤의 산이다. 나는 처음 공과는 그다지 친숙하지 못하였다. 내가 송추(松楸)에 의지하며 살게 되었는데, 공의 거처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
공은 때로 마음 내키는 대로 방문하여, 오랜 시간 하인을 바꿔가며 정담을 나누었는바, 선배들의 고사(故事)와 사론(士論)의 전말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말씀함에 바람이 일고 기개가 상쾌하니, 그가 범상한 선비의 무리가 아님을 나는 더욱 알게 되었다.
나는 항상 말년에 좋은 친구를 얻은 것을 기뻐하면서 도연명(陶淵明)의 남촌(南村)의 교유를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끝나버렸다. 옛날을 추억할 때마다 마음이 서글퍼지는데, 징하(徵夏)가 찾아와서 묘지문을 청하니,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명문은 다음과 같다.
상소하여 강상(綱常)을 붙드니 / 抗疏扶綱
드높은 뜻과 기개로다 / 踔乎志氣
아, 선조를 계승함이여 / 於以述祖
누가 그 거룩함을 다투랴 / 孰爭其韙
양주의 한 골짝 / 維楊一谷
조그만 언덕 빙 두른 곳에 / 短阜邐迆
황량한 무덤이라 말하지 말라 / 莫云荒阡
이 아래 기이한 선비가 묻혀 있다오 / 下有奇士
[각주]
[주01] 세류(世類)에 관계되지 않는다 :
사람의 현우(賢愚)는 그 가문과 무관하다는 뜻이다.《한서(漢書)》권41〈번력등관부근주전찬(樊酈滕灌傅靳周傳贊)〉에 “중니
(仲尼)는 ‘얼룩소 새끼가 색깔이 붉고 또 뿔이 제대로 났다면 비록 쓰지 않고자 하나 산천의 신이 어찌 그것을 버리겠는가.’라고 하
셨으니, 이것은 선비가 그 출신에 관계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仲尼稱, 犁牛之子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言士不系於世類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중니는 공자의 자(字)로 공자
의 이 말씀은《논어》〈옹야(雍也)〉에 보인다.
[주02] 신공(申公) …… 밝히자 :
1583년(선조 16)에 동인(東人)의 중진인 대사간 송응개(宋應漑)와 홍문관 전한(典翰) 허봉(許篈) 등이 병조 판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임금을 무시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각각 탄핵하였는데, 당시 유학(幼學)인 신급이 강력
히 항변하는 상소를 올려, 그들의 본심은 공평하고 충성스러우며 선비들을 화합하는 데에 뜻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宣祖修正實
錄 16年 8月 1日》《宣祖實錄 16年 8月 11日》
[주03] 하늘의 큰 액운 :
원문의 ‘양구(陽九)’는 흔히 큰 액운을 뜻한다. 양(陽)의 액운이 5이고 음(陰)의 액운이 4여서 합하여 9가 되므로 말한 것이라 하나,
설이 분분하여 자세하지 않다.
[주04] 28년 …… 논하였는데 :
이 상소문은 이 글의 주인공인 신구가 경기ㆍ충청ㆍ전라의 유생 60명과 함께 1716년(숙종 42)에 올린 것으로, 송시열과 효종(孝
宗)을 모욕한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 부자(父子)의 처벌을 주청하였다. 《肅宗實錄 42年 7月 25日》
[주05] 시조 …… 찬란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880년(추정)~927)은 홍유(洪儒) 등과 함께 태조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하였고, 태조가 팔공산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의 군대에 포위되었을 적에, 태조로 변장하여 태조를 구하고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하여 개국 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으며,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신숭겸이 태조를 구한 일이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장수 기신(紀信)이 형양(滎陽)에서 고조를 구한 일과 흡사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기신은 항우(項羽)에게 포위 당해 위기에 빠진 고조를 구하기 위해 고조인 것처럼 위장하여 항우에게 항복하고 그 틈
에 고조를 탈출시켰는데, 자신은 항우에게 화형(火刑)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漢書 卷1 高帝本紀》
[주06] 기묘록(己卯錄) :
기묘사화에 관련된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한 책으로, 김육(金堉)이 1638년(인조16)에 간행하였는데 일명 《기묘제현전(己卯諸賢
傳)》이라고도 한다. 김정국(金正國)의 《기묘당적(己卯黨籍)》과 안로(安璐)의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를 바탕으로 하고
일부 인사들을 추가한 것으로, 218명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주07] 송추(松楸) :
소나무와 개오동나무로 주로 묘소 주위에 심었기 때문에, 전하여 무덤이나 선영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08] 오랜 …… 나누었는바 :
원문은 ‘화지경복(話至更僕)’이다. ‘경복(更僕)’은 하인을 차례로 교대시키는 것인데, 오랫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뜻한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선비의 행실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갑자기 말씀드리자면 그 수를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다
말씀드리자면 오랫동안 앉아 있어 모시는 하인을 바꾸어도 마칠 수 없습니다.〔遽數之, 不能終其物, 悉數之, 乃留更僕, 未可終
也.〕”라고 대답한 말씀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儒行》
[주09] 도연명(陶淵明)의 남촌(南村)의 교유 :
남촌은 도연명의 고향이자 은거하던 마을인 율리(栗里)를 이른다. 도연명의 〈이거시(移居詩)〉에 “예전부터 남촌에 살고 싶었으
니, 좋은 집터 찾아서가 아니었네. 들으니 깨끗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 많아, 아침저녁으로 자주 만나려고 해서라오.〔昔欲居南村,
非爲卜其宅, 聞多素心人, 樂與數晨夕.〕”라고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김창효 이정은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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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人有恒言曰: “不係世類。” 此特言其變耳, 其實有未必然者。 人之哲愚, 大率與祖先相配, 求之古今, 不可一二數。 在昔穆陵之世, 贈掌令申公礏疏斥漑、篈之奸, 以伸栗、牛二先生誣, 御批褒以士氣, 又敎之曰: “直哉若人!” 其後百有餘年, 邪黨復逞, 黜二先生文廟享。 申公玄孫球君美偕諸生力爭。 是時斯文陽九, 尤菴宋先生朝夕及禍, 又冒火色往拜, 托以掌令墓文。 後廿八年, 抗章極論尹宣擧衊辱孝廟, 辭意凜截, 義理明白, 肅廟納其言, 追削其人職。 其徒怨毒次骨。 至壬寅, 竟竄之巨濟島中, 公志氣彌厲, 操持益嚴, 同謫者亦起敬曰: “名下無虛士。” 公之於掌令, 眞所謂克對而無羞, 善繼而不忝者, 則世類之係, 豈不信然矣乎?
公平山人。 鼻祖壯節公崇謙, 翊麗祖統合三韓, 終媲節紀信, 勳烈竝耀。 其後文僖公槩相我世宗, 致太平, 卒配廟庭。 文節公鏛左右趙文正先生, 有重望, 名載《己卯錄》, 寔掌令公祖父也。 掌令公當壬辰倭難, 捐生救母夫人, 旌閭貤爵。 其弟判尹砬、兵使硈後先禦倭, 戰敗死之。 昆季三人, 忠孝赫著, 公之世德然也。
公在謫四年, 値今上新政, 始放還, 卽除英陵參奉, 陞禧陵奉事。 亡何, 爲奸徒齮齕, 遞職下鄕。 家酷貧, 饘粥不繼, 而一毫不干人。 報本敦宗, 磬無不宜, 孝友至行, 超絶於流俗, 鄕里莫不斂衽推服。 爲人長身竦瘦, 眉目稜稜, 有不可犯之色。 農巖金公嘗戒其子曰: “申君峭直人也。 爾輩識之毋忽。”
曾祖景祺, 長興奉事: 祖堉, 考汝逵, 俱不仕。 妣淸州韓氏, 石峯先生脩玄孫。 公初名綰, 後改今諱。 以甲寅三月十五日卒, 距其生丙午爲六十九歲。 娶吳、崔、權三氏, 俱無子, 以兄子徵夏爲後。 徵夏有一子, 幼。 吳氏有二女: 長適閔鎭夏, 生子璡: 次適進士李重郁, 生一子三女, 俱幼。 公葬在楊州白羊谷, 以吳、崔二配祔, 卽家後山也。
余始與公未甚熟, 及來依松楸, 與公居比近, 公輒隨意過訪。 話至更僕, 先輩故實, 士論源委, 無不歷歷剖判。 談論風生, 氣岸崷奕, 益知其不爲凡士儔匹。 常喜晩得好友, 擬爲淵明、南村之交。 今已矣, 追思每爲之愴然。 徵夏又來請誌墓, 其何忍辭! 銘曰:
抗疏扶綱, 踔乎志氣。 於以述祖, 孰爭其韙? 維楊一谷, 短阜邐迤。 莫云荒阡, 下有奇士。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