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조약을 규탄하는 이상설선생 선양강연회
2005-11-18. 14 : 00
▲지난 11월18일 14:00시 보재이상설선생선양강연회가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재정-사진)
주최로 250여명이 모인가운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성대히 열렸다.
▲이날 이재정기념사업회장은 개회인사를 통해 매국노 이완용 등, 을사5인을 앞세워 11월 18일 새벽에 고종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을 발표한지 100년이 되는 바로 오늘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릇된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12년의 해외광복운동으로 건강을 잃게 되어 연해주에서 48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보재 이상설선생의 애국정신이 뒤안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체 오늘을 맞이하게 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며, 우리민족독립운동사의 뿌리를 새로이 정립하고 잊혀져가는 선생의 위상을 높이고자 열과 성을 다하겠다고 강조하였다......
▲김국주 광복회회장의 축사에 이어 경주이씨중앙화수회 이종찬 총재는 축사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선생은 정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밀사로 참여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때부터 미국, 영국, 독일, 불란서, 러시아 등의 국가를 방문 구국외교를 펼쳤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일제와 독립전쟁을 일어 키려던 그는 48세의 나이에 피를 토하고 한 맺힌 일생을 마쳤다는 설명과 함께 오히려 종기로 수술을 받다가 서거한 이준을 열사로 칭송하면서도 선생의 애국정신은 너무나 초라하게 무쳐버린 체 지나온 과거를 분개 했다.
이날 기념강연회의 연사 인하대학교 윤병석 명예교수는 이상설선생의 생애와 민족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고. 김삼웅독립기념관장은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국제법상의 위밥성" 이란 주제로 통열히 비판하였다.
보재 이상설선생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직마을에서 1870년 이행우와 벽진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7세 때에 이조(吏曹)와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용우에게 양자로 출계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로 익재공파의 팔별집 생원공 휘 타(鼉)의 후손으로 선조와 인조 때의 명신 충익공 벽오 이시발(忠翼公 碧梧 李時發)의 11대손이기도 하다.
선생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취임되면서 일차적으로 조약체결저지운동을 펴면서 을사늑약체결반대의 결의를 촉구하였으나 매국노 이완용 등 오(五) 적신들이 나서서 이또(伊藤)로 하여금 조약의 체결을 선언하도록 하였다.
선생과의 .구국사수를 맹세한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순국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보재선생은 오 적신을 죽이고 조약파기를 선언하라는 요지의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린 것을 전후하여 다섯 번이나 피를 토하는 탄원문을 냈으나 번번 히 허사로 끝나버린다.
이에 선생은 비밀리에 이회영 이동녕 이시영(초대 부통령) 등과 의논하여 국외망명과 구국운동의 새 전략을 세운 후 양부 이용우의 친기(親忌)를 지내고 이동녕과 함께 조국을 떠나 상해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가 연길 용정에 들어가 사재를 털어 최초의 근대민족학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선생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진 및 글>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