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시첩(詩帖) 이난영 노래
요약 : 이 음반의 이난영의 <진달래 시첩>과 장세정의 <역마차> 모두 히트했다. 특히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의 <역마차>는 1956년 한국 대중가요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번안곡으로 소개됐다.
작곡가 김해송의 역작 <역마차>
이 음반은 데이코쿠축음기주식회사 오케레코드에서 1941년 2월 신보로 발매했다. <역마차>를 작 · 편곡하고 <진달래 시첩>을 편곡한 김해송은 이 음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진달래 시첩>을 노래한 이난영은 그의 부인이고, 작곡자 이봉룡은 이난영의 오빠, 즉 김해송의 처남으로 김해송의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다. 장세정은 김해송과 호흡이 가장 잘 맞았던 가수로,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부터 김해송의 작품이었다. 김해송은 민요, 재즈, 서구 고전음악 등 폭넓은 음악 자원을 활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이 음반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충분히 드러내 특징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역마차>는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다른 대중가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구조적 특성이 있다. <역마차>의 노래 부분 선율은 약간의 변형을 가미한 A-A-B-A 형식인데, 이러한 예는 1930~1940년대 한국 대중가요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 이후에나 이런 형식의 작품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1960년대가 되어서야 한국 대중음악에 보편화했기 때문이다. 김해송은 대중음악가이면서도 작가주의적인 면이 있었으므로, 다른 대중음악 작곡가들에 비해 당시 음악 환경의 제약을 뛰어넘는 시도를 활발하게 해왔다. <역마차> 간주에 인용된 브람스 <헝가리 무곡>도 같은 선상에서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작사가 조명암의 월북으로 인한 금지곡 지정
진달래 시첩 / 역마차 앨범 뒷면
<역마차>는 1948년 <울어라 은방울>, 일명 <해방된 역마차>라는 후속작이 나올 만큼 1940년대를 풍미한 곡이었다. 하지만 <진달래 시첩>과 마찬가지로 작사자 조명암의 월북으로 금지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이 음반에 수록한 2곡을 포함한 금지곡 리스트가 발표됐다. 1960년대 초에 다시 녹음한 10인치 LP 음반에서는 작사자의 이름과 가사를 모두 바꿔야만 했다. <진달래 시첩>은 L.K.L레코드에서 발매한 LP 「이난영 추억의 노래집」에 박남포 개사로 실렸고, <역마차>는 같은 음반사에서 제작한 「연락선은 떠난다」에 역시 박남포 개사로 수록되었다. 게다가 <역마차>는 김해송이 아닌 이봉룡 작곡으로 표기되었다. 김해송은 조명암과 달리 납북됐으나, 반공 이데올로기로 경직된 당시 사회 분위기 탓에 김해송의 이름도 지워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개작에도 불구하고 1965년 이후로는 방송윤리위원회와 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서 두 곡을 모두 금지곡으로 재확인했고, 월북 작가 중에서 마지막으로 조명암의 작품이 해금된 1992년에서야 최종적으로 금지에서 풀려났다. 이것은 금지 대상으로 처음 언급된 지 40년 만의 일이었다.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한국 대중가요
<역마차>는 한국 대중가요에서 최초로 미국에 번안되어 소개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1940년대 말에 잠시 활동했던 옥두옥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 교포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한 그녀는 Moon Kim이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재개했다. Moon Kim은 1956년 미국 빅타레코드(RCA Victor)에서 <East of Make Believe>, <Kanda Kanda> 2곡을 싱글 음반(음반 번호 47-6667)으로 발표했다. 바로 <고향 만리>와 <역마차>의 번안곡이다. <East of Make Believe>는 영어 가사와 한국어 가사가 섞여 있으나, <역마차> 가사 중 ‘간다 간다’ 대목에서 제목을 따 온 <Kanda Kanda>는 모두 영어 가사로 되어 있다. 2곡에 대한 당시 미국 시장의 반응이 뜨거운 편은 아니었고 Moon Kim, 즉 옥두옥도 가수 활동을 오래 이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시스터즈가 1959년 미국으로 가기 전, 이미 한국 대중음악이 미국에 첫 걸음을 디뎠다는 점만큼은 충분히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출처:(가요앨범 리뷰)
2024-04-07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