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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세자 -인조, 효종, 현종, 숙종,경종, 탕평책,뒤주사건,혜경궁홍씨,한중록, 정조- 예송논쟁과 환국
인조반정이후 영조까지의
150년 (1623~1776)-서양과 일본에 대비하여
무엇을 했는가?
영조는 아래의 삼종의 시대를 마감한 왕기이에 그것에 대한 자괴감이 강했고 스스로 자긍심이 약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삼종이란 왕후에게서 낳은 자식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인조는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왕입니다, 그리고 후궁이 낳은 사람이기에 명분이 약했습니다,
인조이후 효종 현종 숙종은 왕후가 낳은 사람입니다 ,
이것이 삼종인데 이것을 이어가지 못한 것으로 인해 영조가 늘 자격지심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도 후궁의 자식이기에 미워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1623년 4월에 능양군인 인조는 반정을 일으켜 28살에 임금이된 후 41살에 병자호란이 나고
이 후 5년 뒤에 광해군은 죽고 다시 3년 후 즉 병자호란 후 8년 뒤에 명나라는 망하며 다시 5년 후
즉 병자호란 후 13년 뒤 인조는 26년간을 통치하다 54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그리고 인조가 죽기 5년전에 죽었던소현세자보다 7살이 적었던 효종이 30살로 등극하여 불과 10년만에 40살에 죽습니다.
그리고 인조의 차남인 효종(봉림대군)의 장자인 현종이 18살에 즉위하여 15년간 통치하다
33살의 젊은 나이로 죽자6살에 세자가 된 그의 유일한 아들인 숙종이 13살의 나이로 즉위하여 46년간을 통치하다
59살에 죽으며 경종은 32살에 등극을 하여 4년을 통치하다 36살에 죽습니다.
이때 영조는 경종보다 6살이 적기에 30살에 즉위를 하여 52년간을 통치하다가 1776년4월 82살에 죽습니다,
인조가 등극한 이후 영조가 죽을 때까지 150년간 조선은 정체를 하였습니다,
오로지 당파싸움만 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고 시민혁명이 싹트고 있었는 데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조가 반정을 하여 왕으로서 정통성을 잃었기에 공신들을 견제하기위해 서인중에서도 명분에
침착하는 사림들을 기용하거나 서인의 반대파인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을 기용하는 일에 온 힘을 집중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정묘호란을 겪고도 반성하지 않고 이어서 그 치욕적인 병자호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효종 때에는 북벌이라는 명분에만 집착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현종때에는 예송논쟁이라는
실용적이지 못한 정쟁이라는 결과만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예송논쟁이 격하게 일어났기에 숙종은 사림들이 왕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신하들을 존중하지 않게되고
이 결과 정쟁을 환국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수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분에 대해 자괴감이 많았던 영조는 그냥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집중을 하였던 것같습니다,
영조 이후 그래도 정조가 나타나 조선이 희망을 가지게 되지만 정조도 노론을 장악하지 못한 결과
순조가 외척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에는 조선은 망국의 길로 치닫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인조의 선대와 후대 -선조에서 효종
삼종이란 왕후가 낳은 자식이 왕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효종 전인 인조 광해군 선조 모두가
왕후가 낳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영조로 하여금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합니다.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이 경선군이며
차남인 석견은 경완군이며
3남인 석린은 경안군임
인조반정에 대해 궁금하실 경우에,,,
https://blog.naver.com/hongyw/221976218928
인조반정을 통해 서인은 정권의 완전 장악 기반을 마련함 -
광해군,소현세자, 봉림대군,정묘호란,병자호란,남한산성,최명길,김상헌
무력하고 잔인한 독재자인조반정을 통해 임금이 된 인조는 선조때의 임진왜란을
겪고서도 전쟁에 대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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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이후에 대해 궁금하실 경우에,,,,
https://blog.naver.com/hongyw/221566722501
정조, 순조, 헌종, 철종 - 외척의 시작과 왕조의 몰락 - 드라마 간택,철인왕후
영조의 첫아들(효장세자)이 죽은 후 7년 후 영조가 41살이 되는 해에
제2후궁(영빈이씨)에게서 사도세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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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예송논쟁과
숙종의 환국
인조의 차남인 효종(봉림대군)의 장자인 현종이 18살에 즉위하여 15년간 통치하다 33살의 젊은 나이로 죽자
6살에 세자가 된 그의 유일한 아들인 숙종이 13살의 나이로 즉위하여 46년간을 통치하다 59살에 죽습니다.
바로 이 현종시절의 예송논쟁에서부터 시작한 당파싸움은 선조때부터 잉태된 당파들이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고도 이를 반성하지 않고 권력을 잡기 위해 자기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이념논쟁은 숙종시절에 와서는상대방을 죽여서 정치판에서 싹 쓸어내는 환국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현종때의 예송논쟁과 숙종때의 환국에 대해 궁금하실 경우에...
https://blog.naver.com/hongyw/221562284912
예송논쟁과 사색당파- 효종 현종 숙종
임금이 될 자격이 없었던 인조는 죽어서도 문제를 발생합니다,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의 어머니인 인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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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후손 밀풍군은
영조4년 이인좌의 난으로 사사됨
3남 인평대군의 장남의 후손인
안흥군이 대원군 아버지 직계선조이며
차남 복창군과 3남 복선군, 4남 복평군은
경신환국때 남인의 역모에 관련되어
복창군 복선군은 바로 처형되었으며
복평군은 유배되었다가 사사됨
귀인조씨의 후손인 동평군은
숙종때 장희빈 오빠와 관련되어 사사됨
숙종에서 순조까지
인조이후의 당파들을 살펴보면
인조는 반정공신들을 누르기 위해
산당 계열 송시열등과
남인계열을 등용하기 시작함
효종이후의 예송논쟁
효종이 장자이냐 차자이냐를 두고 논쟁함
서인과 남인간의 싸움
예송논쟁의 개념
서인은 왕과 사대부가 같으므로
효종이 차자라고 주장함
왕족과 사대부가 하나인가 아닌가하는 문제
서인은 왕과 사대부가 같다고 주장하나
남인은 왕과 사대부는 다르다고 주장함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집권함
이로써 숙종초기에는 남인이 집권함
이런 이유로 경신환국 전까지는
남인이 정권을 장악할 수가 있었음
숙종때의 환국 - 서인과 남인간의 싸움
숙종시절의 이야기
- 환국을 중심으로
숙종 초기엔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숙종6년(19살)에 서인은 남인의 허적(70살)이 반란을 꾀한다고 하여
처형시키고 정권을 잡습니다, 이것이 경신환국입니다,
이때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자식들인 차남 복창군 3남 복선군 4남 복평군이 남인과 연루가 되었다고 하여
이 3형제 모두가 사사됩니다,이들은 숙종의 삼촌뻘로 20살정도 많습니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다시 3년 후송시열(당시 76살 그리고 6년 후 82살로 죽음)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당시 54살 그리고 31년 후 85살로 죽음)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집니다.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내수외양, 즉 민생안정과 자치자강을 강조하였으며,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개척을 주장한 점에서 정책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서인이 정권을 잡는 경신환국 때 숙종이 9살에 같은 나이로 결혼을 했던 인경왕후가 19살의 나이에 죽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20살의 숙종은 6살이 적은 14살의 인현왕후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숙종보다 2살이 많은 장희빈을 좋아하게 되어 숙종이 27살 장희빈이 29살에 경종을 낳는데
이때 인현왕후는 21살입니다.
그리고 경종이 태어나고 1년 뒤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단계에서 서인의 송시열은 반대하다가 처형당하고
다시 남인이 집권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환국인 기사환국입니다,
이 때 인현왕후는 22살의 나이에 폐서인이 됩니다, 그리고 1년 후 장희빈은 31살의 나이로 왕후가 됩니다,
그러나 장희빈이 왕후가 된 후 4년 뒤 숙종나이가 33살에 35살의 장희빈이 싫어집니다,
그래서 장희빈을 왕후에서 강등시키고 폐서인이 된 후 5년만에 27살의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오게 합니다.
이때 영조의 엄마인 숙빈 최씨는 26살이며 영조를 낳았습니다.
그렇지만 인현왕후는 다시 왕후가 된 지 7년 만에 34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이 죽게 하였다고 믿었기에 장희빈을 사사합니다.
이때 장희빈의 나이가 42살이며 숙종은 40살입니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합니다.
이것이 세번째 환국인 갑술환국입니다.
42살의 장희빈이 죽을 때 영조의 엄마인 숙빈 최씨는 31살이고 영조가 7살이며 경종은 13살입니다.
그리고 이 숙빈 최씨는 숙종이 죽기 2년 전에 48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이때 영조가 24살인데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이 숙빈 최씨는 숙종보다 9살이 적고 인현왕후보다 1살이 적으며
장희빈보다 11살이 적었으며 영조를 24살에 낳았습니다.
이 영조를 낳았을 때가 장희빈이 왕후에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후로 돌아오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숙빈은 영조를 낳기 1년 전에 첫아들을 낳았으나 2달만에 죽었습니다.
숙종에서 순조까지
그런데 숙종에게는 또 한명의 왕후가 있는데 이 왕후가 영조가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인현왕후가 34살에 죽고 7년뒤 42살의 장희빈마저도 사사한 후 그 다음해에 41살인
숙종은 26살이나 어린 15살의 인원왕후를 맞이하여 이 왕후와 18년을 살다가 59살에 죽습니다.
이 왕후도 인현왕후처럼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이때 경종이 14살 영조가 8살이므로 이 왕후가 아들을 낳았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원왕후는 소론파임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가까운 영조를 무척 좋아하여 나이가 7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래서 영조가 임금에 등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왕후는 숙종의 사후에는 노론으로 돌아서고 영조가 임금이 되는 것을 보고서도 33년을 더 살다가
70살의 나이로 죽는 데 이때 영조도 63살입니다.
이 인원왕후가 죽을 때 사도세자가 22살이며 사도세자가 죽기 5년 전입니다.
이 왕후가 죽자 사도세자를 보호해주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숙종도 장희빈이 죽고 19년을 더 살다가 59살에 죽습니다,
영조엄마인 숙빈 최씨도 이미 2년 전에 죽었고 옆에는 33살의 인원왕후가 있었습니다.
숙종의 아들로는 경종이 32살이며 영조는 26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숙종에게는 경종과 영조 외에 또 다른 후궁이 나은 아들인 연령군이라는 아들이 한명 더 있었는데
나이는 경종보다 11살이 어리며 영조보다는 5살이 어립니다.
이 아들은 너무 효자라서 숙종이 아플 때 숙종의 변을 맛볼 정도여서 숙종이 무척이나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연령군이 숙종이 죽기 1년 전에 20살 젊은 나이로 후사가 없이 죽었는데 아마 죽지 않았다면
이 연령군이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이 삼종이란 왕후의 소생으로 왕이 된 시기를 말합니다,
이 삼종 위로 선조 광해군 인조는 후궁의 소생이고 그다음 경종 영조도 후궁이며 정조는 손자이며
순조도 후궁이며 헌종은 정조처럼 손자이며 철종 고종은 곁다리출신이며 유일하게 마지막 순종만은 왕후의 소생입니다,
숙종이 46년간 통치를 하다가 59살에 죽자 32살의 경종이 등극을 하여 4년을 통치하다 36살에 죽습니다.
영조는 경종보다 6살이 적기에 30살입니다,
경종시절의 이야기
- 소론과 노론의 대립
경종은 숙종이 병을 앓아서 등극하기 3년 전부터 대리청정을하고 있었습니다, 이 경종은 왕비가 중요합니다.
첫째 왕비가 단의왕후 심씨인데(이 사람은 세종의 장인 심온의 후손임) 11살의 나이로 자신보다 2살이
적은 경종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몸이 약해서 경종이 등극하기 2년 전에 32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경종이 문제인지 왕후가 문제인지..경종은 후궁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숙종은 30살의 경종보다 17살이나 적은 13살의 선의왕후를 며느리로맞아들입니다.
이 나이에 자식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2년 뒤 숙종이 죽고 경종이 등극합니다.
이때 왕후의 나이가 15살이 됩니다, 그렇지만 숙종이 죽기에 동침을 못합니다.
그리고 경종은 4년 후 36살로 죽는 데 이때 왕후는 불과 19살입니다.
(경종이 아이를 못 낳는 것인지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는 듯합니다,)
이 경종은 6살아래인 아우인 영조를 좋게 본 모양입니다, 하여튼 영조가 경종 2년부터 대리청정을 합니다,
그러다 2년이 지난 경종은 통치한지 4년만에 36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19살의 선의왕후를 두고서 말입니다,
사실 이때 경종이 왜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수락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영조를 왕으로 만들려고 했던 노론 세력이 죽게 됩니다.
이런 명령을 내린 경종이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대리청정을 한 그 다음해에 경종을 암살하려고 하는 역적이 있다고하여 노론이 대대적으로 죽습니다,
이것이 결국 영조 등극 후 이인좌란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이 경종을 지지한 소론 중에 영조를 그나마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던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 세력을 영조가 등극한 후 기용을 합니다, 이를 두고 탕평책이라고 합니다,
노론에 대응하기 위한 소극적인 대비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조가 큰 뜻을 가지고 편 정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나마 소론을 살려주었던 것도 영조 등극 4년 후 이인좌란 이후에는 소론은 거의 몰살하게 되고
그 후 27년뒤 나주벽서사건 이후에는 소론 자체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역사의 사실인데 역사가들이 영조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기용했다는 탕평책을
사용했다고 평가를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경종1년과 2년때 일어난
노론과 소론과의 사화
영조를 왕으로 만들려는
노론들의 극심한 반발
그런데 이 19살의 선의왕후는 11살이나 많은 시동생인 30살의 영조가 음흉하게 보인다고 하여 많이 싫어하여
영조의 등극을 방해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조가 등극한 후 일어나는 이인좌난를 보면 이 선의왕후가 영조보다는
소현세자의 자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밀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숙종의 마지막 계비였던 37살의 인원왕후가 영조를 등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선의왕후는 경종이 영조가 가져다준 음식을 먹고 죽었다하여 독살설을 주장하다가
영조가 등극한 후 일어난 이인좌란에 연관되었다 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 왕후의 나이가 불과 25살인 것입니다.
(저 개인적 생각으론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련이 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합니다)
바로 이 경종의 선의왕후가 살았던 전각에서 사도세자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의 씨앗이 되는 모양입니다.
경종이 36살에 죽자 30살의 영조가 즉위를 합니다, 이 영조는 52년간을 통치하다가 82살에 죽습니다,
이 시기에 조선 왕조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뒤주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여기서도 왕후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영조에서 사도세자 와 정조
영조는 10살에 자신보다 2살이 많은 정성왕후와 결혼을 합니다,그런데 이 왕후를 보고 영조가 손이 곱다고 말하자
고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답변을 하니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엄마가 생각이 나서 이 왕후를 싫어하였다고 합니다,
이부분에서도영조의 생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왕후의 자손이 아니면 아들이라도 왕후의 자손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왕후와는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조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식이 없이 이 정성왕후는 65살에 죽는데 이 해에 숙종의 마지막 계비로서 영조가 왕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숙종의 마지막 왕비인 인원왕후도 70살로 죽습니다,
결국 사도세자를 밀어주는 두 왕후가 같은 해에 죽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성왕후가 죽은 뒤 2년 후 65살의 영조는 자신보다 무려 51살이나 적은 14살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데
사도세자(혜경궁 홍씨와 나이가 같음)보다 10살이나 적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불행의 시작이 되어 정순왕후가 들어와서 3년 후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습니다,
영조는 당초 첫째 후궁에서 25살에 첫아들인 효장세자를 보는 데 이때는 아직 숙종이 죽기 1년 전으로
숙종에게는 첫손자입니다, 이 아이가 9살에 죽습니다.
(이 효장세자의 릉이 파주에 있는 영릉 즉 공순영릉입니다.
공릉과 영릉은 한명회의 두 딸 즉 예종의 왕후와 성종의 왕후의 릉).
이 때가 영조는 34살로 즉위한지 4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경종의 마지막 계비인 선의왕후가 관련되었다는 독살설이 있습니다,).
이 아들 즉 효장세자가 죽은 해에 영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의 후손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이인좌난
(남인과 소론이 주도, 이인좌는 세종대왕의 4째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임)이
일어나며 이로부터 2년 뒤 선의왕후가 25살의 나이로 아무 병명도 없이 죽습니다.
이인좌는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9대손
이인좌란에서 새로운 임금으로 내세운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
그리고 영조의 첫아들(효장세자)이 죽은 후 7년 후 영조가 41살이 되는 해에 제2후궁인 영빈 이씨에게서
사도세자가 태어나는 데 바로 이 사도세자가 경종의 마지막 계비였던 선의왕후의 거처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아마 영조가 소론을 껴안다는 제스쳐라고 생각합니다,)
영조는 나이가 들어 자신이 55살이 되자 14살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지만
( sbs 비밀의 문이라는 드라마 이야기가 시작하는 부분임, 대리청정 시작 후 3년 뒤에 정조가 태어남)
13년이 지나 영조가 68살이 되고 사도세자가 27살(혜경궁 홍씨도 27살)이 되는 해 뒤주사건으로 사도세자는 죽게 됩니다,
이 뒤주사건이 일어날때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나주벽서사건이라는 것이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한 후 6년이고 뒤주사건으로 죽기 7년전에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소론 중 영조를 비판하는 파들이 영조가 부당한 임금이라는 글을 붙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소론은 몰살을 당합니다, 이 사건으로 그나마 겉으로 생색만 냈던 탕평책으로 말하는 정책이 말살됩니다,
소론의 처벌을 거부한 것은
사도세자라기 보다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영조를 왕으로 만들었던 노론 세력들은 사도세자의 대치청정을 더 이상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영조는 고심을 하였을 것입니다 , 자신을 왕으로 만들은 노론 세력을 무시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던 것이 아닐까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이 나주벽서사건 후 2년 뒤에 첫번째 왕후로 영조가 그토록 싫어했던 정성왕후가 죽고
그 2년 뒤에 노론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정순왕후를 맞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년 뒤에 사도세자가 죽게 됩니다,
이때 즉 사도세자가 죽을 때 정조는 10살이고 영조의 제2계비인 정순왕후가 17살로 왕후가 된지 3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이것을 보면 정순왕후 집안들의 계략도 많이 작용한 듯합니다).
이 사건 후 12년 뒤 영조는 몸이 아파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그 2년 후 82살에 죽습니다.
이때 그 정순왕후는 31살이며 혜경궁 홍씨는 41살이었으며 정조는 24살이었습니다.
사도세자는 노론의 집요한 공작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무너진 측면도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후궁 한명을 취하는 사건입니다, 이 후궁은 숙종의 마지막 계비인 인원왕후
(영조의 양엄마임, 영조와 7살 차이 밖에 안나며 영조를 많이 좋아하였고 영조의 등극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침)의
나인이었습니다.
이 때가 사도세자가 22살이며 바로 인원왕후가 죽었던 해이며 사도세자가 죽기 5년 전입니다.
이 사건으로 영조는 대노를 합니다, 아마 이 일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영영 멀어지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영조에게 닦달을 당하는 사이 이 후궁 경빈박씨를 사도세자가 죽입니다,
심지어 그 아이마저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아이가 은전군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반란을 세우지 않았나하는 추측도 합니다. 이것이 결국은 뒤주사건으로 갑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장소인 문정전- 창경궁내
아버지 영조가 자신의 거처인 경희궁에서 사도세자의 거처인 창경궁으로 찾아가서 죽이는 것을보면
사도세자가 아버지마저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합니다,
사도세자의 친엄마인 영빈 이씨마저 영조에게 아들이 큰 문제라고 고하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은 전체 4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 사도세자에 대한 글은 정조도 죽은 뒤인 순조 5년에 작성한 것으로 사도세자에 기술이 정확하다고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조를 옹호하기 위해 사도세자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밝혀야 하기에 말입니다,
이 시기에는 노론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혜경궁 홍씨가 노론에게 해가 되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중록은 역사적 사실로서 신뢰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중록 제1편은 1796년 정조 재위 19년에 쓴 것이고으로, 서두에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작성한 글이라고 밝히고 있다.
홍씨 자신의 출생과 조부모 등 친정집안 사람들의 청렴함과 덕행, 효심 등에 대한 찬사를 나열하였고,
자신이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뒤에 겪은 궁중생활과 주상(정조)을 출산했던 일 등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부친 홍봉한의 실각 및 좌의정을 지낸 작은 아버지가 사사되고 친정집안이 화를 입고 몰락하는 전말을 서술하였으며,
친정 집안 사람들에게 알리는 당부의 글로 마무리합니다,
제2편은 1801년(순조1)에 쓰여진 글로, 당시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자신의 친정 집안이 홍국영의 모함으로
당한 화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소상하게 밝히고 사면을 호소하는 목적에서 작성한 글이다.
특히 좌의정이었던 작은 아버지(홍인한)가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막았다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 자신에 대한 모함과 동생 홍낙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제3편은 1802년(순조2)에 쓰여진 글이다.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는 사건)으로 겪은 비통함과
더불어 부친 홍봉한은 이와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고,
아들 정조의 효행과 외할아버지의 충절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고 친정 집안의 신원을 약속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또한 사도세자의 병환이 위중했던 것은 사실이며 당시에 일어난 비극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4편은 순조 재위 5년인 1805년에 쓰여진 글이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의 전말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병환이 망극하고 종사의 존망이 다급하여 어쩔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 못하고 산 것은 애통하지만 도리와 의리 때문이라고 심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세자는 정조 외에 3명의 아들을 두었는 데은언군(정조보다 2살 어림), 은신군(정조보다 3살 어림),
은전군(정조보다 7살 어림)입니다, 막내 은전군은정조1년 17살에 반란에 휘말려 정조에게 사사를 당합니다,
둘째 은신군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출궁을 당하여 어렵게 살다가 사기사건에 휘말려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서 16살에 죽습니다,
영조에서 순종까지
대원군의 선조 가계도
대원군자손의 가계도
그런데 후사가 없어 이 은신군의 후사로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생부인 진사 이병원(李秉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남연군이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남연군이 바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입니다.
사도세자의 후손들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기에
사도세자의 서자들이 왕위를 이어받게 됨
서자로서 첫째인 은언군은 동생 은전군과 함께 탄핵을 당했지만 살아남아서 정조가 복직을 시키는 데
바로 홍국영과 휘말려 자신의 아들을 홍국영의 누이인 정조후궁의 양자로 보내는 것을 수용하였다가
홍국영이 실각할 때 같이 탄핵을 당해 정조가 간신히 강화도로 유배를 시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죽여야 한다고 하여도 정조가 형제로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라서 보호를 합니다,
그러다 순조 때에 천주교 사건에 휘말려 47살에 죽습니다,
바로 이 은언군의 손자가 바로 철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순조이후의 철종 고종 순종은 왕족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영조가 82살로 죽자 이미 대리청정을 2년간 하던 정조가 24살로 등극을 합니다,
이때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31살이며 혜경궁 홍씨는 41살이었습니다.
정조의 초기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당연하다는 벽파와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파와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영조를 이어서 왕이 된
정조 이후에 대해 궁금하실 경우,,,,,
https://blog.naver.com/hongyw/221566722501
정조, 순조, 헌종, 철종 - 외척의 시작과 왕조의 몰락 - 드라마 간택,철인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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