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성령님은 누구신가?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성령께서 이 땅에 임하셨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는 그 분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다.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이미 그 때에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고, 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는 성자나 성령께서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엘로힘’은 언제나 복수형으로만 쓰여진다. 그러나 ‘엘로힘’에 수반되는 동사는 반드시 단수형이다. 이는 우리로 하나님을 언제나 성부와 성자,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인식해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또한 세 분이시라는 것이다.
인간은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른 역할을 행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집사이면서 집에서는 아빠이고 남편이며 자식이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순간에 교회에 있으면서 동시에 집에도 있고 직장에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를 포기 하거나 셋 중 둘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또한 세분이시기에 각각 다른 곳에서도 동시에 사역하실 수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한 분으로만 존재하신다면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와 있었던 33년 동안 하늘은 공석이 되고 하나님 없는 이 우주는 혼란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께서는 성자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성부와 성령께서는 각각 다른 사역을 동시에 행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이 본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하나님은 세분이시지만 그러나 한분이시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세 분으로만 존재하시면서 각각 다른 사역만을 행하신다면, 결국 그 세분은 서로 다른 세 신일 수밖에 없다. 그들 세 신이 함께 하는 날이면 불일치로 인한 다툼과 혼란만 야기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분이시기에 서로 다른 사역을 담당하면서도 그 사역은 분열되지 않는다. 성부의 의도와 성자의 구원과 성령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완벽한 일치와 통합을 이룬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하나님께서는 삼위시지만 한분이시라는 말은 태양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은 분명 하나다. 절대로 둘이거나 셋일 수 없다. 그러나 태양은 빛으로도 존재한다. 또한 열로도 존재한다. 태양은 하늘에 떠 있고 그 빛은 우주를 채우고 그 열은 이 땅 위에서 각각 일한다. 분명 하나인데 셋이고 셋이지만 또한 하나이다.
어떻게 한분이시면서 세분이실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규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유일신이시다. 신에 대한 인식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가장 저급한 신관이 다신관(多神觀)인데, 산마다 산신, 마을마다 거리마다 수호신이 따로 있다. 신들이 많은 만큼 그들의 활동 영역이 제한될 수밖에 없고 영역을 벗어나면 신들의 영향력은 상실된다. 조금 발전된 신관이 일신관(一神觀)인데 하나의 신이 한 나라나 민족을 다스리는 신관이다. 이도 국경을 넘어서면 영향력을 상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신관은 유일신관(唯一神觀)이다.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께서 마을과 국경과 지구와 온 우주를 초월하여 그 분 뜻대로 다스리신다는 신관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유일신이 되시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분이시지만 또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기에 온 우주를 통괄하시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하늘에 있든 바다 속에 있든 상관없이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신이시며, 또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라 부르셨다(요14:16). ‘파라클레토스’라 표기되는 이 단어의 뜻은 ‘위로자’ ‘돕는자’란 뜻이다. 성령은 주술적이거나 마술적인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이시다.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어찌 위로자, 돕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성 령과의 사귐을 통해 그 분의 인격을 닮아가야 한다.
-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부르신다(요14:17). 성령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다. 오직 진 리로만 말씀하시고 진리를 통해서만 보이신다. 그러므로 성령과 깊이 교제하는 자는 진리 안에 거하는 자 요, 그 삶을 통해 진리가 드러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 삶 속에서 진리가 구현되어 가는 자다.
성령의 사역
1.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해주신다. 말씀은 영적인 것이기에 영으로 일깨워 주신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신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불신자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요14:26)
2. 책망하신다. 성령은 우리 삶의 잘못된 부분을 꾸짖어 주신다. 성령의 조명 아래 있는 양심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때 내 양심의 주인은 성령이시고,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진리로 찔림 받는 양심만이 언제나 싱싱하게 살아, 남을 살리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요16:7-8)
3. 진리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양심을 꾸짖어 주시는 것은 대단히 귀한 은총이지만, 그것만 있다면 양심의 중압감에 눌려 오히려 고통을 당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책망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신 뒤, 우리를 친히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본질적인 죄에 갇혀 살던 우리가 진리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꾸짖어 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친히 인도해 주심으로 가능한 것이다.(요16:13)
성령의 역사
1. 감 동 (삼상16:13)
성령께서 계시는 곳에는 반드시 감동이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시지 아니하시면 죄 가운데 있던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삶이 가능하겠는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것을 경험하였기에, 성령께서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도 감동시켜 주실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사람을 포기치 않을 수 있으며 또 사람 때문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2. 말 씀 (마10:19-20, 행4:13)
성령은 함께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적인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3. 위 로 (행9:31)
성령은 함께 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신다. 사람의 위로는 ‘빈말’이지만 성령의 위로는 언제나 ‘채움’이다. 사람의 위로는 ‘빈말’이기에 아무리 받아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위로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이기에 언제나 ‘해결’을 의미한다. 어떤 슬픔 속에 있든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위로를 구하려 하지 말자. 사람의 위로에 목말라 할수록 더욱 공허해질 것이다. 성령의 위로를 구하라. 성령의 위로를 빌라. 그 분의 위로만이 해결을 안겨준다. 오직 성령님만 참된 ‘파라클레토스’이시다.
4. 사 랑 (롬5:5)
성령과 함께 하는 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다. 하나님은 사랑이신즉 하나님의 성령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사랑을 힘입어 우리는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때는 늘 사람보다 물질이 먼저 보이므로 가장 작은 것도 나눌 수가 없다. 성령께서 사랑을 부어 주시므로 사람을 내 위주가 아닌 상대방 위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고 사람에 대한 도리를 하게 되며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나눔도 가능하다.
5. 소 망 (롬15:13)
성령은 함께하는 자에게 소망을 부어 주신다. 지금 나의 형편이 암울하고 절망 중에 있어도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말씀으로 우리 심령을 가득 채워주시기 때문에 죽음의 사막이라 할지라도 소망이 터져 넘친다.
6. 거 룩 (롬15:16)
성령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나팔꽃은 줄을 타고 오른다. 일단 줄에 매달린 꽃머리는 줄의 더 높은 부분을 잡을 때까지 계속 떨게 된다. 이 떨림, 이 흔들림, 이 갈등 없이는 더 높은 곳을 붙잡지 못한다. 그 흔들림이 멈추는 순간 꽃머리는 땅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책망, 즉 거룩한 갈등이 없거나 멈추어 버린다면 거룩하고 구별된 삶은 사라져 버린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은 우리로 불신자들을 위한 거룩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게 하려 함이다.
7. 자 유 (고후3:17)
성령과 함께 하는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를 얻는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아름다운 선으로 마무리 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됨이 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또 성령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거룩하게 하시므로 우리는 죄로부터도 자유를 얻는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참 자유가 있다.
8. 능력 (삿14:6, 15:14)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인 것이나 그를 결박한 줄을 불탄 삼과 같이 끊어버렸던 것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요 능력이었다. 성령은 당신과 함께 하는 자들을 당신의 능력으로 도우신다. 그것은 홍해를 가르셨던 능력이요, 여리고를 무너뜨리셨던 권능이다.
성령은 오늘도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 그분은 창조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세우시고 붙드신다. 그러나 인간이 이 능력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성령께서는 그 사람을 거부하신다. 이는 성령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는 것이요, 그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필요에 따라 베푸시는 능력이다(행8:17-23).
9. 열 매 (갈5:22-23)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자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사랑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인격의 변화 없이도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인격의 변화 없이는 절대로 맺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열매는 인격의 터 위에서만 거두어지는 열매이다. 우리 영혼의 변화는 거룩하신 성령을 힘입음으로 가능하다. 사람은 더불어 사는 자의 인격에 동화되는 법이다. 우리가 거룩하신 성령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질 때 성령의 거룩하심을 닮아갈 것이고 변화되어 가는 삶속에서 성령의 열매는 맺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격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계속 해야 한다. 이러한 영성이 가족 간에, 성도 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화평을 누리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을 떠나서 우리는 바르게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는 자에게 이 귀하신 성령이 임하시는가?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중에 성령을 받았고(행2:1-4), 어떤 이는 회개함으로(행2:38-39), 또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행5:30-32), 혹은 안수를 받음으로(8:17), 말씀을 듣다가(10;44) 각기 성령을 받았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12:3절에는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성령께서 임하신 증거라 말씀하신다. 사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던 대적자였지만 단지 하나님이 사랑하시므로 성령을 그에게 보내어 주셨고, 그에게 임하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다(히2:4).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보혜사이시다. 그분을 인정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영접하여 그분과 하나 되지 못하면 무력하고 불편하며, 원망스런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시고 도와주길 원하시지만 그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이다. 그러나 선택이 우리의 자유인만큼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