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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10차례에 걸친 39도선 및 38도선 분할 시도!
동서고금 인류 5천년사는 “전쟁의 역사” 이니 이웃한 두 나라의 국력이 비슷하면 평화가
유지되지만, 한 나라는 국력이 커지고 다른 나라는 쇠퇴하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반드시 침략이 일어나는데...... 또 다른 나라인 제3국이 개입해 서로 차지할려고
싸울 때는 타협하기도 하니, A국 과 C국이 B국을 분할해서 차지한 예는 부지기수 입니다.
1. 세계 역사에서 주요 분할
기원전 1274년 5월 12일 “시리아의 카데시 Qadesh” 에서 “이집트 람세스 2세의 2만 5천”
과 “히타이트 무와탈리스 2세의 4만 5천”간에 최초의 세계대전이 벌어졌는데...
카데시 전투는 히타이트가 유리한 가운데 무승부로 끝나니, 싸우는 대신에 혼인동맹으로
평화협정을 맺고 시리아는 히타이트가 그리고 레바논과 팔레스티나는 이집트가 차지합니다.
그후 앗시리아는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왕국을 차지하고 신바빌로니아는 기원전 586년
유대왕국을 차지했는데.... 아시리아는 왕위 계승전 내란으로 국력이 쇠퇴하니 이집트
및 리디아와 동맹을 맺었지만 기원전 612년 메디아, 바빌로니아, 스키타이, 킴메르, 엘람,
킬리키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니네베가 함락되어 멸망하니 영토는 승전국들이 나누어 갖습니다.
로마는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후 두 아들에 의해 동서로마로 갈라졌으며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망한후 동고트족이 침공해 이탈리아는 476년에 동고트왕국이
되는데, 이후 동로마(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 전체를 수복했으나 랑고바르드족이 침공해 북부를
점령하고 568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우니 이탈리아는 랑고바르드 와 동로마령으로 분단 됩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와 연합해 2천년 이어진 왕국인 동로마(비잔틴)제국을
공격해 그 영토를 사이좋게 서로 나누어 가졌고..... 그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주축인 신성로마제국(독일)은 북이탈리아를 차지하려고 8번이나 전쟁을 했는데...
1797년에 북이탈리아는 프랑스 가, 그리고 베네치아 는 오스트리아가 나누어 가집니다.
거란족 요나라에 연운 16주를 뺏기고 시달리던 송나라는 1125년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연합해 요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이후 금나라에 화북지방을 뺏기자
몽골과 연합해 금나라를 멸망시켰는데... 그후 여진족의 후금은 명나라 오삼계
군과 연합하며 농민 반란군으로 베이징을 차지한 이자성의 대순국을 멸망시킵니다.
폴란드는 이웃나라들이 4차에 걸쳐 사이좋게 분할했으니, 제1차 분할은 1772년
8월 5일에 러시아는 벨라루스 지방을 차지했으며, 프로이센은 대폴란드
북부 지방을 얻었고 오스트리아는 소폴란드와 서부포돌리아, 갈리치아를
얻었으니..... 폴란드는 1차 분할로 인하여 국토와 인구의 1/3 가량을 상실합니다.
이웃나라들은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으니... 1793년 1월 23일에 실시된 제2차
폴란드 분할에 따라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백러시아 지방과 서부 우크라이나
지방을 얻었으며 프로이센은 단치히, 토룬, 마조비아의 일부 지방을
얻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혁명 때문에 아쉽게도 분할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1795년 10월 24일 제3차 분할은 러시아는 쿠를란트와 리만강 동부 리투아니아
영토를 얻었으며, 프로이센은 바르샤바를 포함한 마조비아 전역과 리만강
서부의 리투아니아 영토, 오스트리아는 크라쿠프와 소폴란드 지방의
전역을 합병하니 폴란드는 유럽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폴란드여 안녕~
1914년 1차대전때 독일측으로 참전한 오스만 터키와 싸우던 프랑스와 영국은 수백년간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던 아랍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며 참전을 종용하니....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그려진 것 처럼 아랍인들은 독립의 부푼 꿈을 안고
영국군과 함께 다마스커스를 함락하기에 이르며... 영국은 인도에도 독립을 약속합니다.
인도인 수십만명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안고 참전해 이라크로 진군해 바그다드를 함락하는
데 엄청난 희생을 냈지만... 전후 사우디아라비아 정도만 독립했을뿐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무색하게도,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이라크와 요르단에
팔레스티나는 영국이 차지했으니....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에 대한 "독립 약속은 무시" 합니다.
한국인들은 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되어 1919년 3.1만세 운동을 벌였으니 일본
이 세계 여론에 굴복해 물러갈줄 알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시리아와 요르단을 차지했듯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에나 통용되지 일본은 영국, 미국과 동맹국으로 1차대전의 승전국
인데, 세상에..... 승전하고도 영토를 내놓은 것은 인류 5천년 역사에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 영국에 배신당했던 인도인들은 2차대전때 또 수십만명이 참전해서 버마전선에서 인도를 침략
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무수히 죽은 다음에야 독립을 얻는데... 인도차이나를 차지한 프랑스와
인도, 말레이시아를 차지한 영국이 태국을 놓고 싸우다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중간지대로
협의하지만 그래도 영국은 자작극을 벌여 삼키려고 하는데, 주윤발 주연 “왕과 나” 영화에 나옵니다.
2. 한반도 분할 시도
1) 신라와 당나라가 한반도를 분할
1,300년간 한반도는 10차례의 분할 시도가 있었으니 첫 번째는 7세기로.... 642년에 대야성을
뺏기고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죽는등 백제의 침공에 시달리던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
와 왜국에 갔으나 구원병을 얻는데 실패하고, 648년에 중국에 건너가 당태종과 밀약하니
힘을 합쳐 두나라를 멸망시킨후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하기로
서로 약조하고는.... 660년 신라 김유신의 5만과 당나라 소정방의 13만은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복신의 백제 부흥군과 왜군 3만 2천 구원군을 패퇴시켰으며 668년 신라는 북진해 당군에 보급을
대면서 함께 평양성을 함락시켰는데, 당나라가 백제 영토까지 욕심을 내며 황해도를 공격
하자 신라는 석문전투에서 대패해 서라벌이 위태로워졌으나 문무왕이 사죄 국서로 시간을
번후.... 토번이 당나라 국경선을 침범해 들어오니 당나라는 본토가 침공당한 상태에서는 2개
전선을 유지할수 없는지라 대동강 이북으로 철수하니 한반도는 39도선에서 남북으로 분단됩니다.
2) 고려때 21년간 남북으로 분단되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신라는 백제땅을 차지해 39도선상에서 분할되자 19세기
들어 열강들이 한반도의 분할을 고려할 때 자신들이 ‘한반도의 목 (neck of the
Korean Peninsula)’ 이라고 부르는 이 선을 분할선 후보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저서 ‘외교’ 에서 “1950년 가을에 유엔군이 38도
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던 때 저 39도 선에서 멈출 수도 있었다” 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이 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함으로써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으니... 평양으로 진격하지 않고 멈췄다면 중공군의 참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고려 후기에도 이 선에 근접한 북위 38도 5분의 선에서 분할된 일이 있었으니...
원종 10년인 1269년 서북면병마사영 (西北面兵馬使營) 의 기관(記官)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켜 오늘날의 평양인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 의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의 황해도 6개 성을 탈취한 뒤 원(元) 나라에 귀부합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자비령을 경계로 이북을 “동녕부” 라 명명하고 원에 내속시킴과 동시
에 최탄을 동녕부 총관으로 임명한 것인데... 고려는 그때로 부터 21년이 지난 충렬왕 16년
인 1290년에서야 원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며 여러차례 간청해서 겨우 이 지역을 돌려받습니다.
1258년 몽골이 침공하자 동북면 병마사 신집평이 저항했지만 조휘와 탁청이 병마사 십진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치며 몽골에 투항하니 조휘는 쌍성총관부 총관으로 탁청은 천호에 임명되었
는데.... 1356년 공민왕때 유인우가 공격하자 천호 이자춘과 아들 이성계는 원나라를 배반하고 고려
에 내응해 탈환했으나, 훗날 명나라가 총관부를 설치하려고 하자 정도전은 군사를 육성하기도 했습니다.
3) 임진왜란 히데요시 조선 남부 4개도 분할 요구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위 대마도주 종의지를 통해 부산왜관의 조선 무역으로 엄청난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지라.... 자칫 매국노로 몰릴수도 있는 이적 행위인 조선에 조총 2자루를
선물하며, 가공할 위력을 가진 일본군의 침략을 피할려면 사신을 보내 협상하라고 요구
하며 국서까지 위조하며 전쟁을 막을려고 동분서주했으나 실패하니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를 제치고 선봉을 맡아 동래성 함락후 포로 울산 군수 이언성을 조선
조정에 보내 평화협상을 하자고 요구했으나, 처벌을 겁낸 울산군수가 전달하지 않고 도주해 불발
되었지만 계속 보내니 역관을 통해 이 사실을 접한 조선 조정은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와 화의 교섭을 했던 이덕형을 보냈으나 충주성이 빨리 함락되는 바람에 발길을 돌립니다.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널까 두려워 더 이상 진군
하지 않고 화의를 모색하는데... 조선의 구원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환관들의 발호에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하고, 토지가 세력가들 손에 들어가니
농민들의 봉기와 몰골족의 반란까지 겹쳐 제 코가 석자라 파병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만력제는 명나라 4대 암군 중에서는 물론이고 전세계를 통틀어 최악의 형편없는 군주인데
후한 영제, 사마염, 수양제, 당의종, 송휘종, 금 해릉왕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
의 무능한 황제로..... 청나라 정통사서 명사에서 조차 명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서술하니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 였다.' 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만력제는 30년간 업무를 거부하는 초유의 파업을 벌였으니 꾀병, 병, 정신 질환, 정치에 대한 환멸
등 이라는데... 몸의 윗부분이 곱추였고 왼쪽 발이 짧은 기형이 있었다는데, 30년 동안 업무
거부를 하며 타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이러한 기형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며.... 재위 초반 10년은 장거정의 섭정기간이었으니 사실상 임진왜란 7년 동안만 일한 셈입니다.
어전회의에 불참하며 국사는 팽개치고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던 만력제는 꿈에 관우가 나타나 너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왕은 장비의 환생이니라 일러준 다음날.... 조선 사신 유몽정이 흰옷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나타나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며 통곡 하면서, 선조가 "조선은 천조상국의 아들
이며 어버이 천조국의 황제폐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간청" 한다며 울부짓다가 기어이 실신합니다.
조정 대신들 모두가 함결같이 조선 파병을 반대하는 가운데 홀로 병부상서 석성만이 찬성하는
데... 야사에는 조선 역관 홍순언이 연경의 기방에 갔다가 기녀가 몰락한 명문가 딸인
것을 알고 가진 돈을 털어주고 그냥 나왔는데, 기녀는 후일 석성(石星)의 애첩이 되었으니
이런 사연으로.... 석성은 다른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파병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력제는 당장 조선에 파병할 수는 없었으니 주력인 이여송군은 몽골족 발배의 난을
진압하는 중이라 금한 김에 조선에 엄청난 양의 은을 군자금으로 보내는데, 선조는
이 돈으로 병사를 키운게 아니라... 왕비와 후궁, 왕자와 의주까지 호종한 대신 및 환관
들에게 나누어 주어 인심을 썼으니 왜군을 몰아낼 군대는 조선군이 아니라 명군이니
명군에게 원병을 청하러 가고 접대할 사람들에게 돈을 쓰는게 더 낫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선조의 이런 생각은 이순신 판옥선 30척 보다도 더 많은 40척 이상의 판옥선을 가진 부산 경상
좌수영 박홍이 겁에 질려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못하고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를
불지른후 1만 수군을 해산하고 도주했고, 경상 우수영 원균 역시 배를 불지르고 달아
났으며..... 경상 좌병사 이각과 우병사 조대곤은 한차례 전투고 없이 왜군을 피해 도주했습니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저항했다지만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단 몇시간만에 허무하게 함락
당했으며, 제승방략으로 대구에 모인 장부상 10만 대군도 총사령관 이일이 서울에서
300명 병사를 모집하지 못해 사흘이나 출발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흩어졌고, 상주성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던 이일은 1시간만에 전멸했으며 충주성 탄금대의 1만 6천 신립군도
불과 두세시간 만에 전멸하니 대부분은 왜군이 아닌, 도주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한강 방어군 이양원은 왜군이 배가 없어 한강을 건너지 못하는 가운데 답답한 왜군이
기마병 몇기가 물에 뛰어드는 시늉을 하니.... 그 쇼에 기겁을 하고는 대포를
강물에 밀어넣고 도주했으며... 한성 수비군 김명원은 밤새 병사들이 슬금슬금
성을 빠져나가 사라진지라 결국 사령관도 달아나니 왜군은 서울에 무혈입성 했습니다.
이후 왜군이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배가 없어 건너지 못하자 기토 기요마사가 꾀를 내어
군막을 불사르고 후퇴하니... 전공을 탐한 한응인이 적의 간게라고 만류하는 군사들
의 목을 베고 도강을 독려하니 조선군이 건너갔다가 매복한 왜군에 전멸하는지라....
조선군은 왜군이 임진강을 건너려고 하자 김명원과 한응인등 모두 전투 없이 도주합니다.
선조는 평양성에서 명군이 올 때 까지 버티기로 하고 군량 10만석을 거두어들이는등
수비태세를 강화하는 중에 전라관찰사 이광의 남도근왕군에 기대를 걸었으니...
전라도 4만에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 1만 4천과 경상도 관찰사 김수등 5만
5천은 북상하며 지방군을 흡수해 7만으로 불어나 1592년 6월 3일 용인에 이릅니다.
수군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초전에 경상도 양 수군이 전투없이 와해되어 버리자 수군으로
는 더 할 일이 없으니.... 배를 버리고 육군이 되어 북진해 자신은 1천명으로 서울에 주둔
하고 부장 와타나베 시치에몬등 6백명은 용인 산채에 배치했는데, 광주유수 권율은 그냥
지나가자고 했으나 이광은 병사가 40배가 넘으니 서전에 승리로 사기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이광이 6월 4일 백광언에게 공격을 명하자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서울에서 내려와서 보강된 문소산을
6월 5일 2천이 공격했으나 패했으며, 6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왜군 1천 6백명이 아침밥을 짓던
조선군을 향해 돌격해 내려오자... 급습당한 7만 조선군 은 달아나느라 밟혀죽고 깔려 죽으니 후퇴해
집결한 부대는 “권율의 1천” 뿐으로 7만에 가까운 남도 근왕군이 한 싸움에 흔적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실망한 선조는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치는데.. 그래도 광해군과 도원수 김명원, 윤두수, 이원익이 4천으로
지키는 중에 윤두수는 음력 6월 14일 새벽에 고언백을 시켜 400명으로 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
을 했으나 오히려 패배했고, 퇴각하면서 배를 찾을 여유가 없자 왕성탄으로 걸어서 퇴각하니 왜군이
건너오기 시작하자 전투없이 도주했으니..... 선조는 이런 조선군을 이제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병부상서 석성은 시간을 벌기 위해 심유경을 보내 거짓으로 강화회담을 하는데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전쟁 전부터 강화회담에만 정신이 팔렸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여기에 현혹당해 강화회담으로 조선 4도를 얻을수 있을거라는 희망
으로 회담에 몰두하는 중에 이여송은 발배의 난을 진압한후 3천리를 달려서 조선으로 옵니다.
음력 1593년 1월 6일 부터 사흘간 평양성 전투가 벌어지니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16,000명
이고 연합군은 조선군 8,000명, 승병 2,000명에 명군 43,000명등 총 병력 53,000명인데...
왜군은 따뜻한 규수 출신으로 음력 4월에 부산에 상륙했으니 여름 베옷을 입고 있었는데,
보급을 받지 못했으니 겨울 엄동설한에 병사 절반 가까이 동상에 걸려 전투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왜군을 추격하던 이여송 기마대는 벽제관에서 왜군의 매복에 걸렸는데 대포를 가진 보병이 뒤쳐졌으니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다음에는 전투의지를 상실했고, 강화회담을 간절히 바라던 고니시 유키나가
가 심유경과 다시 회담하니... 행주산성 전투에서 권율에 패한후 재차 공격하려고 하자 권율은
재빨리 북쪽 명군쪽으로 후퇴하니 보복도 못한데다가 보급이 안되는지라 서울에서 버틸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명군의 희생을 원치 않은 이여송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니 고니시 유키나가
는 협상을 더 진척시키갰다는 심유경의 말을 믿고 서울에서 철수해 남해안 왜성으로
물러갔으며..... 이후 3년여 회담을 진행하며 중국에서 사신을 불러오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애당초 명나라는 조선 4도를 내줄 의향이 없었던지라 회담은 결렬됩니다.
그러니까 6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7개항 조건을 제시했으니..... 조선의 경기도와
경상· 전라· 충청 4도를 자신에게 할양하고 그 나머지를 조선이나 명이 통치해도
좋다는 뜻을 밝힌 것인데, 명나라 조정에서는 웨이쉐썽(魏學僧)을 중심으로 이 제의
에 잠시 관심을 보였지만...... 그러나 최종적으로 명나라는 이 요구를 거부한 것입니다.
4) 정유재란 히데요시 남부 3개도 분할 희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협상을 통해 조선 남부 4개 도를 할양받을수 있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말에
현혹되어 3년 이상 회담에 매달렸으나 결국 속은 것으로 판명되자 화가 머리 꼭지까지 차서
1597년에 14만 대군을 보내 침략하니, 이번 전쟁의 목표는 경상도, 전라도 및 충청도 3개도를 할양
받는 것이라 점령 대신에 무차별 살육과 방화를 통한 초토화를 자행하고 철수하는 장기전을 택합니다.
임진왜란때 보급이 안되고 혹한으로 고생한데 교훈을 얻고는 봄이면 공격해 충청, 전라도를 휩쓸어
죽이고 불태우며 가을에는 따뜻한 남해안 26개 왜성으로 돌아와 휴식하며 재정비한후... 다음해
늦은 봄에 다시 공격하기를 몇년 되풀이 하면 조선은 농사를 짓지 못해 굶어죽을 것이고, 멀리서 와
보급이 어려운 명나라군도 철수하면 기진맥진한 조선이 하삼도를 할양할수 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병사들에게 조선인을 죽이고 코(귀) 한되씩을 바치라는 엄명까지 내렸지만 두가지 이유로 무산
되니... 첫째는 명군 장수들이 명나라 재정도 어려운 중에 막대한 전비를 쓰며 멀리까지
대군을 인솔해 왔으면서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탄핵당해 삭탈관직은 물론 죽을수도 있기
때문에 병사들을 얼마든지 희생시켜서라도 전공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선 것입니다.
두 번째는 200여개의 나라로 갈라진 일본을 전쟁과 외교로 간신히 통일한 히데요시가
1598년 봄에 병이 깊어져 여름에 죽으니,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왕조가 굳혀지지
않은지라 후계자 문제가 급하니.... 6살 어린 히데요리를 두고 일본의 주인이
되기 위한 내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으니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지라 철수한 것입니다.
정유재란은 일본군 14만에 조선군은 3만 8천이고 명군은 11만 7천인데... 경리 양호는 29개
왜성 중에 1597년 음력 12월에 울산 도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자, 놀란 서생포
왜성의 가또 기요마사가 달려오는데 축성을 시작한지 2달도 채 안된지라 미처 완성
되지도 못했으니 성 안에는 아직 우물이 없는데다가 급히 오느라 식량과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양호는 명군 2만을 양산에 보내 부산 쪽에서 올 일본군 원군에 대비케한 후 자신이 직접 제독
마귀와 함께 명군 3만 6천에, 권율의 조선군 1만 1천 5백등 4만 7천 5백 연합군으로
울산성을 공격하는데... 가토 기요마사는 성에 우물이 없으니 말을 죽여 피를 마시고
소변을 받아 마시며 악천고투하며 버텨 왜군 7만이 구원오자 명군은 패퇴해 경주로 달아납니다.
1598년 9월 중병을 앓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으로 철수 준비를 하던 왜군에게 조명 연합군이 또
다시 진격해오니 4로 병진으로.... 동로군은 울산성으로 ,중로군은 사천성으로, 서로군은 순천성
으로 또 이순신 장군과 진린의 수군은 순천만으로 4방면으로 공격하자 일본군은 철수를 중지 합니다.
1598년 음력 9월 22일에 울산 도산성은 마귀의 명군 2만 5천과 김응서와 선거이의 조선군
1만 5천 합계 4만 대군이 공격해오니 제2차 울산성 전투가 벌어지는데.... 항왜병 사야가
김충선 이 맹활약을 하지만 조선군의 대장 선거이가 전사 하는등 공격은 순조롭지 못합니다.
한편 진린과 이순신의 순천만 공격 장도해전은 수심이 얕은지라 조선수군의 대형 판옥선이 기동
하는데 불리하고, 진린의 함대가 썰물때 좌초되어 왜군의 공격으로 불타는 등 실패로 돌아가
결국 철수했으며 서로군 유정은 순천 왜교성 공격에 소극적인 가운데 전투는 소강상태가 됩니다.
중로군 3만 7천 명군 동일원과 3천 조선군 정기룡등 4만 대군은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지나
사천성을 점령한후 8천명 시마즈 요시히로군이 수성하는 사천신성 (선진리왜성)을 공격
하다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대참패를 당하고 혼비백산해 경북 성주까지
달아나고 28개 왜성은 조명 연합군의 방해 없이 평화롭게(?) 철수하는데...... 순천 왜성
의 고니시 만큼은 이순신 장군이 막아서니 시마즈씨 등이 구원군으로 오니 노량해전입니다.
5) 청일전쟁 직전 영국이 청나라와 일본에 한반도 분할 제의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7월 22일 영국 외무장관 킴벌리경은 조선의 북쪽을 청이 점령하고
조선의 남쪽을 일본이 점령하는 조건 아래 두 나라가 전쟁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구상을 두 나라에 제시했는데, 그는 점령의 선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만일 두 나라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그 선은 대체로 북위 38도선이었거나 거기에 근접했을 것입니다.
청은 만일 자신의 점령지에 조선의 수도 한양이 포함된다면 그 제의에 응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일본은
수십년간 군대를 서구식으로 육성한지라 승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 제의를 물리쳤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완전히 배제돼 그러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 왜 영국이 중재안을 내놓았는지를 생각해 보는데..... 해양국가인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고 지원하고 있었는데... 영국이 보기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영국은 일본을 도울려고 우선 절반이라도 차지할수 있게끔 분할안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6) 아관파천의 시기 일본에서 38선으로 분할 제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조선은 대륙 세력인 러시아의 힘을
끌어들여 해양 세력인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으니, 이러한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의 선봉에 민왕비가 있었는데... 일본의 대응은 민왕비 시해였고 이에 놀란 고종은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해 공사관 안에 친러내각을 세우니 친일내각은 붕괴합니다.
당황한 일본은 1896년 5월 26일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대사원에서 거행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국왕의 특사로 육군원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파견해 6월 9일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세이
로바노프에게 조선의 분할을 제의하게 했으니... 38도선 이북 조선을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두고
이남은 일본의 영향권 아래 두도록 합의하고자 했으니 38도선이 분할선으로 제시된 최초의 경우입니다.
로바노프 외무장관은 이 제의를 거절했으니 러시아는 경상남도 마산포(馬山浦·러시아어
Mozampo)를 비롯한 남해안의 부동항들에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왕과 정부가 자국의 공사관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도 자국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계산했던 것이니 조선을 일본과 갈라먹을 필요가 없다는?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는 조선에서도 궁내부특진관 겸 전권특명공사 민영환을 단장으로 윤치호를
단원으로 하는 사절단이 참석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흥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는데...
당시 서구문명을 처음 접하게된 민영환등 사절단의 관심은 딴데 있었으니 역관 김득련의 기록입니다.
“청중이 모인 자리에 웬 신사가 목살에 힘줄이 돋칠 정도로 소리를 지르니(성악 테너)
모두들 그를 우러러 보더라. 서양에서 군자 노릇 하기란 원래 저리 힘든가 보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는 빙빙 돌며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발레) 가녀린 낭자를 학대하다니 서양 군자들은 참으로 짐승 이로구나.”
“양반 진지상에 웬 쇠스랑(포크)과 장도(나이프) 는 등장하는가? 입술이 찢기지 않으면서
접시의 물건을 입에 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구나. 희고 눈 같은 것(설탕) 이
달고 달기에 이번에도 눈 같은 것(소금) 을 듬뿍 떠서 찻종지에 넣으니 그 갈색 물
(커피)은 너무 짜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더라!”사신들 참으로 곤혹 스러웠겠습니다?
7) 아관파천의 이후 러시아에서 38도 선으로 분할 제의
그때로 부터 2년이 지나 고종은 러시아공사관 생활을 청산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온 이후,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격상시키면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니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일본의 영향력은 점차 커집니다.
새로운 전환을 목격하면서 1898년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알렉세이 드 스페이에는 조선 주재 일본공사
에게 평양을 포함하는 조선의 북부를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양을 포함하는 조선의 남부를 일본이
차지할 것을 제의했지만... 이미 군비를 증강해 러시아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거절합니다.
8)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에서 39도 선으로 분할 제의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해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맺고 미국 협력으로 전쟁을 준비하자 러시아는
조선을 분할해 일본을 무마시키고자 했으니, 1903년 10월 3일 주일 러시아 공사 로만 로마노비치
로젠 남작은 일본 정부에 (1) 39도선 이북의 조선을 어느나라도 군대를 보내지 않는 중립지역
으로 만들고 (2) 그 이남 조선에 대한 일본의‘특별한 이익’ 을 러시아는 보장한다는 안을 제의합니다.
러시아가 4년 전에 비해 상당히 양보한 이 제의에 대해, 일본은 한만(韓滿) 국경을 경계로 삼아
양쪽에 각각 50㎞의 중립지대를 설치할 것을 역 제의했으니... 이것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
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뜻을 담고 있었기에, 러시아는 이 제의를 거부
하자 일본은 1904년 2월 10일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했으며 이듬해 러시아를 굴복시킵니다.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러시아 함대가 영국의 영향아래 있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러시아 군함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빠져
나오는 긴 항해 과정에서 러시아군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막상 결전장 동해에 당도
하면서...... 예기(銳氣) 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일본군에게 일패도지(一敗塗地) 하고 맙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쟁이 임박한 시점 또는 전쟁이 일어난 시점에 분할이 거론된 이유는 한반도를
다른나라가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자신도 참여해 분할함으로써 절반이라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계산했기 때문인데...... 청나라를 패배시킨데 이어 러시아마저 굴복시킨
일본의 완승 앞에 한반도를 독점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억제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게 됐습니다.
9) 1945년 미국과 소련 한반도를 분할하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2차대전에서 일본과 싸우면서 미군 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불가침 조약 중인 소련에게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을 침공해 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으니, 유럽전선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을 전쟁을 시켜 연합국들이 재미를 톡톡히 본 때문 입니다.
2차대전 사망자를 보면 미국 29만명, 영국 35만명, 프랑스 56만명, 일본(조선인 약간 포함)
군인 130만 + 민간인 67만명, 중국 군인 205만 + 민간인 775만, 독일 군인 350만 +
민간인 280만명 에 폴란드인 300만명인데 비해, 소련은 군인 1,370만 + 민간인
700만명 으로 전세계 희생자 절반을 차지하니.... "2차대전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 입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 원폭이 떨어진 이후라 늦었지만 그래도 소련군이 일본군
과의 전쟁에 참가했으니, 미국은 사전 약속에 따라 전리품을 주어야 하니
38도선으로 한반도가 분단됐는데.... 한반도 분할을 피할수 있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니 한국인들이 미군의 목숨을 구한 전투 실적이 있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1941년 12월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미군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
하는데 선봉이 되어 총알받이로 미군 대신에 죽어갔으면 가능한데.... 광복군은
겨우 400명 정도로 숫자도 적을뿐더러 미군과 함께 싸운적이 없고, 재정이 열악
하니 단독으로라도 일본군과 단 한차례도 전투를 하지 못했으니 “실적이 전무” 합니다.
두번째는 전쟁은 보급으로 하는 것이니 한국인이 일본에 쌀과 콩이며 면화 공출을 거부하고 징용을
거부하며 총궐기 했으면... 일본군 50만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을 3년간만 한반도에 붙잡아
두었으면, 한국인 십수만명이 죽고 수십만명이 부상당하며 수백만 이재민이 발생해 한반도는
초토화 되었겠지만 태평양전선의 일본군을 약화시켜 미군 1만명의 생명을 구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자의는 아니라도 쌀을 공출하고 탄광에서 석탄캐며 군수공장에서 무기를 만들어 일본군에
쟁물자를 보급하고, 조선인이 건설한 활주로에서 일본 전투기가 미군 함대를 폭격했으며.... 자의나
타의로 10만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입대해서 미군및 동맹국인 중국군(홍군 포함)과 싸웠으니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적국이라.... 38선 분할을 거부할 실적(미군 목숨을 구한)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은 한국을 독립시켜주자고 제의하니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작성한
초안에는 한국의 독립을“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라고 적었지만, 처칠이 이의를 제기하고 루즈벨트
도 같은 생각이라 “ 적절한 절차를 거쳐 in due course” 로 최종 수정됐으니..... 루즈벨트는 25년간
신탁통치를 생각했는데 스탈린이 반대해 5년으로 확정되지만 한국인은 뒷부분 “독립” 만 주목했습니다.
10. 6. 25전쟁시 중공군에 충청도 선에서 분할 제의
6. 25 때 유엔군이 참전하니 영연방 군대는 영국 56,000명, 캐나다 25,800명, 호주 8,400명에 뉴질랜드
3,800명등 94,000명인데, 영연방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이승만과 맥아더
가 우겨 38선을 넘습니다만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엔군이 39도 선에서 멈출 수도 있었다고
말했으니 즉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함으로써 전쟁을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중국은 강대국 미군이 자국과 국경선을 마주하고 압록강변에 주둔하는 것을 절대로 용인할수 없었으니
임진왜란때 왜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파병을 결정했듯,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하자 압록강을
넘어오는 것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해서 임진왜란에서 교훈을 얻어 중국이 강대국과 완충지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생각해 황해도와 원산선에서 진격을 멈췄다면 중공군은 참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김일성은 우상화 하기 전이니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을 것이며 평안도
와 함경도의 북한은 훗날 소련이 무느질 때, 한국이 영세중립국 스위스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화해해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4대국 신탁통치 군대를 철수시킨 오스트리아
처럼 영세중립국이 되겠다고 설득할수만 있었다면 북한을 흡수통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 보면 중공군이 서울을 지나 평택에 이르니 영국과 캐나다 및 호주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국에 압력을 넣어 현 전선에서 휴전하지 않으면 영연방 군대는
철수하겠다고 위협하니.... 고심 끝에 미군은 "일주일 기한부로 휴전을 제의"
하는데 모택동이 고민하자 주은래는 휴전제의를 거부 하자고 제안하니 전투는 재개됩니다.
주은래의 생각은 조금만 더 밀어 붙이면 부산 까지도 진격할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데.... 나무위키에 보면 당시 UN군은 전선이 금강까지 밀리면 한반도를
포기하는 전략을 세웠으니, 200만명을 제주도로 이주시키고 중국의 대만 처럼
후일을 도모하는 옵션도 검토했다고 하니 얼마나 상황이 절박했는지 짐직힐만 합니다.
휴전제의가 거절된후, 리지웨이의 미 8군은 1월 23일 선더볼트 작전으로 엄청난 물량의 융단폭격으로
중공군을 밀어 올려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수복 하는데... 제공권을 유엔군이 완전 장악한 상태에서
중공군은 본토로 부터 보급이 불기능하니 37도선에서는 버틸수 없었던 것인데, 만약 주은래와 모택동
이 휴전 제의를 받아 들였으면 대한민국의 휴전선(국경선) 은 충청도 ~ 경상북도 선이 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