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 6월 15일 : 일본 적응하기
새벽 여섯시쯤 잠에서 깼다. 평소에 집에서는 tv 알람으로 일어났었는데, 알람시계도 없는 곳에서 용하게도 잘 일어났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뿌듯했다.(이 날부터 서울에 돌아오는 날까지 손목시계 하나만 가지고 거의 알람시계에 가까운 역할을 해내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아침에 깨워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으니 말이다.) 기상, 세면, 식사, 출근준비 등 새로울 것이 없는 일정을 거쳐 작업실-사무실-로 향했다. 숙소에서 사무실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걸리는 시간은 약 한시간.
일본의 핵심 - 기차와 지하철
숙소의 정거장인 '오미야'역에 처음 들어간 순간, '은하철도 999' 첫 회를 떠올렸다. 111부터 999까지 모든 열차가 모두 정차한 상태, 아홉 열차가 정렬한 모습, 철로는 보이지 않지만 나란히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오미야역에 들어갔을 때, 여러 플랫폼에 여러 열차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에서, 은하철도 999을 연상했다. 기차를 소재로 한 만화인 999는, 일본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만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지하철은 지하철 차량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문이 여섯 개 짜리 차량이 있는 정도이다. 정작 다른 것은 지하철 운용 시스템으로 보였다.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구간이 복선(複線)이라는 것이다. 복선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선이 여러 개라는 소리다.(우리 지하철은 대부분의 구간이 단선이다.) 선이 여러 개가 있는 이유는 동시에 여러 지하철이 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쉽게 말을 하자면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가는데 철로가 하나라면 모든 지하철은 모든 역에서 정차하여야 할 것이다. 둘이라면 하나 걸러 중요한 역만 정차하는 지하철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셋이라면 서울역과 청량리역만 정차하는 지하철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둘의 경우와 셋의 경우는 하나만 있을 때보다 승객이 선택할 수 있는 지하철의 종류가 늘어나게 된다. 물론 이 두 경우는 정차하는 역이 많지 않기 때문에 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효과가 있게 된다. 선로가 복선으로 깔려있는 일본은 보통(local, 모든 역 정차)열차와 쾌속(rapid, 주요 역 정차)열차로 열차를 운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지하철의 특징이 단순하게 철로가 여러 개 있어서 몇 가지의 열차가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목적지를 가려고 할 때, 그 곳에 가는 방법이 찾으면 찾을수록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더 큰 특징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열차 종류, 각기 다른 행선지, 다른 경유지, 다양한 열차 시간 등이 결합되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열차 시스템이 나오게 된다. 처음엔 도리어 막막하지만 조금만 알게되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정말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제외한 일본 지하철의 자잘한 특징은 생각보다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일본 지하철은 대부분 지하로 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하철'이라고는 했지만 정식으로는 '기차'라고 부른다. 몇 몇 구간만 지하로 달리고 나머지는 우리의 2호선처럼 지상으로 철로를 만들어서 달린다.
이외에 영어로 안내방송을 하지 않는 열차가 많다거나, 승객이 기관사를 볼 수 있도록 마지막 칸들에 창문이 크게 달려있다거나, 열차가 좌측통행을 한다거나, 정차할 때마다 기관사가 열차 밖으로 나와서 역의 안내방송을 직접 조정한다거나 하는 것도 일본 지하철의 특징이다.
신주쿠(新宿) - 18일 동안의 중간기착지
사무실은 도쿄 신주쿠에 있었다. 신주쿠는 한국인 유학생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인 가게도 많고 한국 관련 물품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길을 걷다가 주변에서 한국말을 쉽게 들을 수도 있다. 물론 신주쿠가 한국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주쿠는 '일본 환락가의 중심지'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에 대해 여행서적에서 언급한 것을 조금만 인용해 본다.
"가부끼쬬(신주쿠 안에 있는 거리 이름)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화려한 네온사인과 야한 포스터, 말초적인 단어로 장식된 간판이 가득하다. 이와 더불어 행인에게 광고물을 나눠주는 사람과 삐끼들까지 가세해 시끌벅적한 거리에 환락가의 분위기를 더해준다. … 전화방, 훔쳐보는 방, 성인용 비디오방 등 낯뜨거운 내용이 적힌 각종 선전물을 한아름 받게 된다. … - 일본 100배로 즐기기"
그런데 내가 본 신주쿠는 생각보다 환락가가 아닌 듯 했다. '환락'이라는 말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그곳을 바라보아서 그런지 '약하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점은 밤에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내가 '약하다'라고 느낀 것은 기대감이나 선입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곳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그렇게 느낀 것이다. 우리가 이곳을 환락가의 중심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삐끼와 야한 포스터와 낯뜨거운 호객행위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것들은 숨기고 싶어하는 부류의 것들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많은 우리의 환락가-청량리, 미아리 등-는 그 장소의 이름을 듣는 것조차 민망해하기도 하고 밤에는 지나가는 것을 무서워하기도 하고 불결하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일본 사회가 성에 개방적이고 성에 대한 것을 담담하게 여기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불결하고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엄청난 환락가로 보이는 곳을 그들은 단순히 노는 곳으로 보는 듯 하다. 단순히 노는 곳으로 보는데 '환락가'가 '약하고 강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신주쿠가 대단한 환락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나쁜 곳은 아니다. 아니, 나쁘고 좋고의 판단 자체를 할 수 없다.)
아무리 약하다는 느낌이 들어도 신기한 것이 많기는 했다. 지하철역에서 사무실까지 걸리는 15분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디오방, 도박장(파친코, 속칭 빠찡꼬), 러브호텔, 이상한(?)가게 등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신주쿠의 특이한 가게들은 나중에 천천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의 첫 점심과 시부야
신기한 것들을 거쳐 사무실에 도착하니 정말 막막했다. 1차로 이미 기사를 작성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나도 적응이 되면 어느 정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때는 그것조차 막막하게 느껴졌다. 일단은 무엇을 해야할 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무실에서 처음 한 것은 이미 신문에 나갔던 기사들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조금씩 보긴 했지만 모든 기사가 모여있는 것은 이날 처음 봤기 때문이다. 기사를 조금씩 둘러보고 있을 때, 조기자님(주 : 스포츠 투데이 진짜 기자. 나 같은 가짜 리포터가 아닌)이 각자의 앞으로 기사 아이템(기사거리)을 제출하라고 했다. 집에 있을 때 어느 정도 기사거리에 대해서 준비를 하긴 했지만 막상 그것을 찾아서 해보려니 참 답답했다.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끄적거리며 아이템 정리를 하다가 밥을 먹을 때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일본에서 처음 일본의 밥을 먹는 때가 온 것이다. 일본의 밥이라고 해서 보통 밥과 무엇이 다르겠냐고 하겠지만 처음 먹어본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두근거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_- 어쨌든 같이 간 일행들 모두 같이 먹기로 했다. 아마 다들 어색하고 떨려서 그랬을 것이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도 막막하고 말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우리가 들어간 곳은 '규동'집이었다. 우동하고 발음이 비슷하지만 우동은 아니었다. 덮밥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들어가서 버벅거리고 있는데 다행히 종업원이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덕분에 밥을 먹는데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날 처음 먹어본 일식 - 규동. 490엔이었다. 우리 돈으로는 무려 4900원이다. 이까짓 것이 무슨 4900원이나 하냐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 때는 몰랐지만 굉장히 싼 축에 드는 음식이다. 이 음식은 밥에 고기 볶은 것이 얹힌 것이다. 그런데 나오는 것은 밥에 고기 얹힌 그릇 하나 뿐이다. 물이 나오긴 하지만 반찬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것이 일본 음식의 특징이다. 시킨 것만 나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어색한 취재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취재를 하러 나갔다. 어제 한국과 일본이 동반으로 16강 진출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뭔가 그에 대한 반응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구체적으로 어떤 반응이 있는지 확인해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난 철우형과 진용이(주 : 같이 간 리포터 중 한 명. 대학 4학년으로 rotc 임. 매우 건장하고 성격 좋음. 여자친구 無)하고 같이 가기로 했다.
처음에 간 곳이 신주쿠에 있는 유명 음식점인 '대사관'이었다. 더 이상 어색할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하게 대사관 관계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차차 나아지겠지만...다음에 간 곳은 신주쿠에 있는 대형 노래방(가라오케)이었다. 이 곳은 노래방이기도 했지만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물론 돈 받고 보여준다. 이 곳에서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어제 경기와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명함을 보여주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답을 해주었다.
우린 아예 다른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간 곳이 '시부야'. 시부야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첫인상은 '명동'과 비슷했다. 여기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 각종 일본 16강 진출 기념 이벤트였다. 포인트를 두 배로 적립해주기도 하고 축구 관련 물품을 세일해서 판매하기도 했다.
첫 기사 작성
오늘 취재한 것을 정리해서 기사로 쓰기로 했다. 하나는 8강진출 결정전에 대한 여러 곳의 반응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16강 진출 기념 이벤트에 관한 것이었다. 국어교육이라는 내 전공이 글을 많이 쓰는 분야이긴 하지만 기사문은 처음 써보는 것이라서 제대로 써지질 않았다. 긴 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겨우 문장 하나를 쓰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나마 쓴 것도 앞뒤가 맞질 않았다. 매일 접하는 신문기사이지만 쓰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아무리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평소에 다른 분야의 글을 많이 써왔기 때문에 더욱 이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사문은 다른 글과 너무 달랐다. 결국 쓰긴 썼다. 우여곡절 끝에 쓴 기사였다. 후련하기도 하고 찜찜하기도 했다. 내일은 좀 잘 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기사를 쓰면서 기자님들이 평소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취재한 것이 많으면 그것들만 늘어놓아도 충분히 기사가 된다는 말이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기사 하나를 써보니까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작은 기사는 모르겠지만 큰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취재가 있어야 했다. 겨우 두어명 인터뷰하고 몇 가지만 찾아와서는 큰 기사를 쓰려고 하니 쉽게 써질 리가 없었다.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인터뷰의 방법이었다. 상대방이 퉁명하게 하면 퉁명한 것을 잘 이용해서 인터뷰를 해야 했다. 상대방이 인터뷰에 잘 응해 주지 않는다고 인터뷰를 건성으로 하면 제대로 된 기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인터뷰의 묘를 빨리 익혀야 좀 수월하게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숙소로....아니 집으로....
기사를 끝내고 저녁에 집으로 오는 길은 독특한 마음이었다. 알 수 없는 기분이다. 오는 길에 라면 집에 들러 일본 라면을 먹으며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맛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다른 모습으로 밥을 먹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혼자 먹는 모습과 혼자 먹도록 되어있는 식당의 구조 같은 것 말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무엇인가 다른 일본. 무엇이 우리와 다르고 같은지 또,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싶었다. 내일부터는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혼자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다녀야 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일부터는 일찍 일어나서 신나게 돌아다니련다.....^^
☆한줄 답변글☆
박수연(7/10,13:10):헤이...천재~! 책을 출판하면 어때? 오늘 점심에 모 먹었는지 격 하기도 힘든 나에겐 이 모든 것이 격속에서 나온다는게..,게다가 전문적인 해설까정...@-@
주성혜(7/10,14:37):잘 읽었어요 감동~~ 저 이틀째를 떠올릴려고 하는데,,, 전혀 생각이 안나네요tt 오빠 20일날 진주온다구요! 히~ 맛데마스(기다릴께요^^)
김정열(7/11,0:13):재영~~~가~~와~~이 얘기가 없군. 섭섭하네.......하지만 글 한번 쥑인다..죽여..
허재영(7/11,4:20):ㅎㅎㅎ
서진경(7/12,13:37):대단~대단~ 오빠 신주쿠에 있던 게이 오빠야들 이야기두 없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