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어 기도하라(참된 준비)
2023. 10. 15. 주일오후예배
저는 지난 한 주간 주님 모시고 지내오면서 밤낮으로 생각되어진 한 가지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는 중에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보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신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지구촌이 한 영역 안에 있어서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연관성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우리가 느꼈듯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은 마치 ‘이스라엘판 9.11테러’와 같습니다. 지난 10월 7일 토요일 새벽 6시 반에 전격적으로 이스라엘 국경을 뚫고 팔레스타인 가자기구의 무장테러 집단 하마스가 초막절 마지막 날 축제를 즐기고 있던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급습해서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살아있는 자랑인 정보기관 모사드도, 미국의 정보기관 CIA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치밀한 작전 속에서 이루어진 이번 테러였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사자성어 중에서 ‘유비무환’이 생각났습니다. 준비를 잘하면 어려움을 막는다. 반대로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준비 안 하면 당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주님 모시고 갖추어야할 참된 준비는 무엇일까요? 오늘날도 우리의 삶의 전선에서, 휴전선에 있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실 전선에 있습니다. 주님 모신 참된 준비, 그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것에 해답이 있습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 우리가 기도하는 자리까지 왔다고 해답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리, 겟세마네까지 왔지만 제자들은 잠들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버리면 기도할 수 없고요,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버리면 주님과의 관계가 시험에 들고, 삶에도 시험에 들고 형제와의 관계도 시험에 들고, 본인의 영혼뿐 아니라 가족, 교회, 나라, 세계 곳곳의 일들이 꼬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잠들어서는 안 됩니다. 늘 깨어 있어 기도해야 될 줄 압니다. 오늘 심부름꾼 회의 때에도 나라를 위해 더욱 깨어서 기도하자고 온 교회 식구님들께 소식을 전했지만 정말 그러한 때인것 같습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므로 시험에서 이깁니다. 사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구원입니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깨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고 영광의 섬김의 기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겟세마네 기도에서 그런 중심으로 기도하셨지요.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승리하셨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기신 그 십자가의 근거 위에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근거 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고 성도들은 그 근거 위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근거 위에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깨어서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이 기도문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문을 열고, 기도의 귀를 열고, 기도의 눈을 열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깨어서 기도하라 하실 때는 결코 빈말이 아니지요.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이고 최고의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역사적인 일들 중에서 임진왜란을 좀 생각해보았습니다. 시간이 짧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정유재란까지 합해서 약 7년간의 전쟁을 치루면서 이 땅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에 율곡 이이는 이조판서였는데 당시 14대 조선의 왕 선조에게 간절히 부탁한 청원이 있었습니다. “북방 여진족들의 침입도 있고 왜구의 침입도 있으니 10만의 정병들을 양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태평 시대지만 갑자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게 됩니다. 정예군사 10만과 군량미를 준비해서 이 평화 시에 국가의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했는데 선조는 명나라의 눈치를 보고 또 이 평화 시에 무슨 군사가 필요하겠느냐는 어리석은 신하들의 간언에 의해서 그 상소를 유야무야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율곡 이이는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고 8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선조가 마음을 열고 바른 마음을 가진 대신들이 있었더라면 역사는 바뀌어졌을 텐데 말입니다. 난세에 영웅을 부른다고 그 선조 시대에 영의정이 류성룡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영국의 처칠 수상처럼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류성룡을 조선의 처칠로 불렀습니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그의 외교적인 책략, 나라의 정쟁을 막고자 애썼던 그 인품, 그에게는 적이 없었습니다만 그는 스스로를 각고하고 나라를 어떻게 하면 바르게 세워볼까 노심초사했던 사람입니다. 1590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일본이 춘추전국시대처럼 갈라져 있는 일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일본 전국이 통일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그 넘치는 에너지를 밖으로 표출할 것이라는 것은 상식적인 생각만 해도 알게 됩니다. 일본이 조선을 거쳐서 명나라를 친다는 소문도 들려서 선조는 고민 끝에 통신사 두 명을 일본으로 파견하게 되지요. 말이 통신사이지 정탐꾼입니다. 한 사람은 돌아와서 일본은 이제 평화 시대라 우리에게 쳐들어올 것 같지 않다고 보고했고 또 한 사람은 일본의 칼끝이 조선의 목을 노리고 있은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전쟁을 대비하자고 했는데 조정 대신들의 의견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에 두 장군을 선조 왕에게 추천해서 임명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전라 좌수사로 이순신 장군을 추천하였고 또 한 사람은 수도 한성을 지키는 장수로 권율 장군을 추천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의 한수였지요. 류성룡이나 이순신이나 권율이 없었다면 조선은 처절하게 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긍휼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뒤늦게 참가한 명나라가 우리를 도와주었지만 20만 일본군에 비해서는 명나라 4만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도에 죽었습니다. 일본인들의 특성상 대장이 죽으면 사쿠라꽃이 일제히 떨어지듯이 일본군사들은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그 테러 사건 때 가뭄 속의 단비처럼 느껴지는 한가지 소식이 들렸습니다. 곳곳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변경을 다 습격하고 초막절 축제를 즐기고 있는 음악 축제에도 아비규환을 만들어서 250명을 사살하고 그런 즈음에 가지기구에서 1.6km 떨어져 있는 한군데 마을은 피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그곳에도 하마스 대원들이 쳐들어왔지요. 그런데 스물다섯 되는 한 여성 보안요원이 깨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른 폭발음의 소리를 듣고 신속 대응팀에 비상 연락을 취했습니다. 무기고를 열어서 무기를 지급하고 각자의 매복 위치에서 적들을 기다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마스 대원 25명이 철책을 넘어서 쳐들어왔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었지요. 하마스 대원 25명은 다 쓰러지고 말았고, 그 신속대원팀의 피해는 하나도 없었고, 또한 마을 사람들도 전혀 피해를 보지 않은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깨어있음으로 마을 전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보면 한 사람의 기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보존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시대 때 기도하는 사무엘의 그 한 사람의 깨어있음으로 인해서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사무엘상 7장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도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또 열왕기하서 6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한 것이지요.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아람 왕은 자기 군대를 이스라엘에 자주 보냈는데 보낼 때마다 신기하게도 또, 억울하게도 그 보낸 곳곳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경계해서 아람군은 결국 지고 또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엘리사만 그러했습니까? 엘리야도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깨어 기도하는 한 사람이 서 있으므로 인해서 전쟁의 판도는 달라진 것입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우리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리기를 우리 목사님은 대한민국의 병거와 마병이셨습니다. 지금 우리 몸 된 교회가 나라를 위해서 깨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애국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때마침 ‘전선에 부치는 편지’가 전방 군인들뿐만 아니라 삶의 최전선에 있는 많은 영혼들에게 전달되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조용하고도 참된 부흥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편지만 전해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저들의 눈이 열리도록, 귀가 열리도록, 마음을 열어서 주님을 만나도록 기도해야 될 줄 압니다. ‘지금까지 잘 지내왔기 때문에 괜찮겠지’ 하면서 방심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틈새를 주면 안 됩니다. 마귀를 이기려면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몸이 약할지라도 깨어 기도했던 엘리사를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몸이 힘들어도 잠들지 않기 위해서 일어서서 기도합니다. 거실을 다니면서 기도합니다. 허리가 아파도 기도는 합니다.
느헤미야가 생각납니다. 고국 이스라엘의 그 처참한 상황, 예루살렘의 성벽이 다 무너지고 남은 자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는 그곳에 느헤미야는 바사(페르시아) 왕의 허락을 받아서 파견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지 삼 일만에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과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벽을 살펴보면서 ‘주님 어떻게 이 일을 할까요’하고 주님과 의논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 이루어지도록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 기도하는 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고 기도하는 그 한 사람에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있기를 기원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