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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李選] 1632(인조 10)~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택지(擇之), 호는 지호(芝湖)·소백산인(小白山人). 아버지는 우의정 후원(厚源)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고, 1664년 춘당대문과에 급제한 후 검열·정언·수찬·교리·집의 등을 거쳐 1674년 응교로서 노산군(魯山君) 부인의 무덤에 수묘군(守墓軍) 및 제전(祭田)을 지급하자고 요청해 현종의 허락을 얻었다. 1679년 민유중(閔維重)·이유(李濡) 등과 함께 송시열을 섬기면서 군신의 의리를 저버렸으니 귀양을 보내자는 남인계 대사헌 이원정(李元禎) 등의 탄핵을 받았지만 무사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함경도관찰사·대사성·대사간 등을 거쳐 강화유수로 재직할 때 백골징포(白骨徵布)와 아약충군(兒蒻充軍)의 폐해 및 사육신·황보인·김종서의 억울함을 논의했다. 1682년 이후 실록청당상·도승지·경기감사·공조참판·개성유수 등을 거쳐 1689년 호군(護軍)으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들에 의해 송시열의 당(黨)으로 지목되어 정언 송유룡(宋儒龍)의 탄핵을 받고 기장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죽은 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이 회복되었다. 국조(國朝)의 고사를 많이 알아 국자감으로 비유되었다. 저서로 노산군의 시제(時祭) 요청 등을 수록한 〈지호집〉이 있다. 시호는 정간(正簡)이다 ============================================================================= 수리정(愁離亭) ......땅은 사람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게 되고, 사람 또한 땅으로 인하여 세상에 이름을 전하는 까닭과 같이 ...........(중략)...... 이 정자는 이 참판으로 인하여 수리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도다......(후략) - 수리정기(가산 정인준:1858~1933) 中에서 - 부산 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중리 마을에는 ‘수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수리정은 이곳 출신인 숙종조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문세명이 세웠는데, 원래는 ‘집승정’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89년 이조참판이었던 지호(芝湖) 이선(李選)공이 기사환국으로 인하여 기장으로 유배 와서 귀양살이의 근심을 달래는 곳이라 하여 ‘수리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기사환국은 1689년 소의 장씨(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노론] 이를 지지한 남인에 의하여 패배 당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을 말한다. 이 일로 인하여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사되었으며 인현왕후는 곧 폐위되었다. 이때 우암의 문인이었던 지호 이선 공은 기장으로 유배를 오게 된 것이다. 지호 공이 이곳 기장으로 유배 온 때가 그의 나이 59세인 1689년(숙종15)으로, 그는 이곳에 와서 수리정에서 약 50보 남짓한 문세명의 자택에 기거하면서 정자에 올라 서정을 즐기고 유배의 서러움을 견디다가, 4년 후인 1692년 2월 1일 62세의 일기로 이곳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조 당파싸움이 가장 격렬했던 숙종 연간에 활동하면서, 그의 삶은 파란만장한 일생이었으나, 그의 사상은 일관되게 대의명분에 입각한 절의론(絶義論)과 이의 실천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군정개선론(軍政改善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공이 돌아가신 2년 후인 1694년 (숙종20)의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다시 집권하자 지호 공은 신원되어 관작이 복권되었다. 그리고 1854년(철종 5)에는 우의정 조두순의 청에 의하여 「정간(正簡)」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고, 이어서 1856년에는 조두순의 序로 「지호집」13권이 간행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선 공의 저서로는 그의 문집인 「지호집」이외에 「시법총기(諡法聰記)」와 「황강선생실기(黃岡先生實記)」등이 있으며, 특히 기장에서의 4년 간의 유배 생활 중에 송강 정철의 「송강가사」가운데 흩어진 것을 간추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그 빛을 크게 되살린 불후의 작품인 「송강가사 이선본」을 1690년에 찬집하였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 등과 단가 77수를 집대성하였으니, 수리정은 유배의 고독을 위대한 문학의 산실로 바꾸게 된 셈이다. 정자가 있는 이 곳에 대한 고증은 약 100여 년 전의 「가산집(가산 정인준 : 1858~1933)」과 홍영식(1907~1988) 선생 등에 의하여 전해 내려왔고, 지난 1970년 10월 2일자 국제신문에 「송강가사 이선본」에 대한 내용이 공태도[기장 향토문화 연구소장]선생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이곳에 구전되어 오던 것들을 근거로 하여 옛 정자가 있던 터에 「수리정비 (1974)」와 「집승정유허비 (1977)」가 건립되었다. 정자를 다시 세우기 위해 2000년 초부터 이장님과 뜻있는 분들의 참여로 수리정 건립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수리정」에 대한 각종 문헌과 자료를 수집하여 기장군에 건립 건의를 함으로써, 기장 누정 문화의 효시가 되는 이 곳에 육각정자인 「수리정」을 공이 돌아가신 지 313년만인 2005년 12월 19일 비로소 건립하게 되었고, 「수리정」현판은 서예가 장암 이곤순 교수(한남대)의 글씨를 받아 지호 공의 10세손인 이문종 교수(공주대)가 기증하였다. 마음이 울적할 때 수리정에 올라 지호 공의 시를 읊어보며 근심을 달래보는 것은 어떨까요? <지호 이선 공의 한시(漢詩)> 熊村偶吟 *주1) 寬閒同府絶塵喧 한가한 산골마을 시끄러운 속세와 끊어져 있고 日桑麻自一村 햇빛 가린 뽕과 삼밭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 山外不知風雨惡 산 밖의 모진 비와 바람을 알지 못하니 世間今有武陵源 세상에서는 이곳에 무릉도원이 있다 하네. 訪 梅 *주2) 一樹梅花枕碧溪 매화 한 나무가 푸른 시냇물에 걸쳐져 있는데 幾多風雨色悽悽 얼마나 많은 비와 바람에 그 빛이 바랬는지 今來爲剪藤蘿盡 이제 와서 자르려함은 등라를 못 오르게 이고 三嗅淸香到日西 삼후의 맑은 향기도 지는 해에 가까워 가네. *주1) 한양과 천리나 떨어진 온화하고 한적한 산골 마을인 웅촌의 풍경을 뽕밭과 삼밭으로 아름답게 그렸고, 이 마을 산 밖의 시끄러운 세상일을 알지 못하는 이곳이 무릉도원이라 표현함. *주2) 자신을 매화나무에 비유하여 지은 시로 기사환국의 희생자인 자신의 심경과 앞날에 대한 우려를 〈논어〉‘향당’편의 “子路共之 三嗅而作”을 인용하여 나타냄.▣
이선과 수리정.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