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序話)
당신의 입술에선 쓰디쓴 풀맛 샘솟더군요.
잊지 못하겠어요.
몸양은 단 먹뱀처럼 애절하구,
참 즐거웠어요. 여름 날이었죠.
꽃이 핀 고원을 난 지나고 있었어요.
무성한 풀섶에서 소와 노닐다가,
당신은 가슴으로 날 불렀죠.
바다 언덕으로 나가고 싶어요.
밤하늘은 참 좋네요.
지금 지구는 여행을 한다나요?
관좌성운(冠座星雲) 좀 보세요.
얼마나 먼 세상일까요……
그중 넓은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럼
그의 바깥엔 다시 또 딴 마당이 없는 것일까요?
자, 손을 주세요. 밤이 깊었어요.
먼저 쉬세요. 못 잊으려나봐요. 우리가 포옹턴
하늘에 솟은 바위, 그 밑에 깔린 구름,
불 달은 바위 위에서 웃으며 잠들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당신의 붉은 몸.
언제든 필요되거든 조용히 시작되는 그
서무곡(序舞曲)으로 백학(白鶴)의 대원(大圓)
휘파람 하세요. 돌아가 묻히겠어요,
양달진 당신의 꽃가슴으로.
아마 운명인가봐요.
그럼 안녕히.
제1화
그늘 밑 꽃뱀 얽혀 있는
산중에서 산삼을 찾고 있었네.
그날 삼은 보지 못했으나, 여인을 만나,
정성을 다한 씨 심거 주었네.
나락이며 보리며 목화씨며 경지에 뿌리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마다하데. 지구는 이미 먼저
나온 사람들이 한 몫씩 나눠 갖고 말아버렸데.
땅 한 번 디뎌도 세금이 쫓아오데.
바람 마시는 값으론 코를 베어 주었네.
억광(億光) 하늘 아래 절름거리며 지나간
초라빛 나그네 하나 있었다니라.
하여 앞도 뒤도 없는 이야기 몇 맏,
노변(路邊)에 뿌려놓고, 억광 하늘 아래
신명(神明)은 처음으로 그곳서 빛나,
벋은 무지개 우주를 벗어나 스러져갔다니라.
이르노니,
지금 예까지 와 있는 역사의 중량이여.
당신의 보따리 속에 든 인구(人口)며
곤충이며 전통이며 문명이며, 한데 묶어
머리 이고 하늘 향해 앞발 한번 버팅겨보시지.
짖궂은 이야기다.
허허만년(虛虛萬年).
초원이 있고, 냇물이 있고,
양달이 있고, 독사가 있고,
암과 수 쌍쌍이 엉켜 새끼 치곤 죽어져갔다.
제2화
간밤에 밟히어간 가난한 목숨들의 명복을
위하여. 지금 어디선가 아우성치고 있을 못된
아귀들의 진혼을 위하여. 그리고는 내일날
태양빛 찬란히 빛나 있을 사형 집행장,
꽃바람 부는 교외, 잔디밭 언덕으로 끌려나갈
아름다운 인류들의 눈물을 위하여.
내 동리 불사른 사람들의 훈장(勳章)을
용서하기 위하여. 코스모스 뒤안길 보리 사발
안은 채 죽어 있던 누나의 사랑을 위하여.
감옥 돌 묻으러 갈 꽃상여의 길닦이를 위하여.
아프리카 사막서 일사병으로 눈먼 식민지
병사들의 월급봉투를 위하여. 그리고는 먼 훗날,
당신이 서 있을 대지를 쪼개고 솟아나올
시생대(始生代) 암층 깊숙이 우리의 대서사시를
새겨넣기 위하여.
제3화
내가 온달 때 당신은 구름 덮으시더라.
나는 원시(遠視). 그래서 당신은 멀리 있어야
잘 생각난다 일렀더니,
싫어도 당신은 끄덕이시더라.
무엇을 너는 내게 요구코 있는 건가.
나의 간(肝) 말인가?
금이빨 말인가?
귀 말인가?
옛날엔 명실상부 직업전투가가 있었삽니다.
이 기(旗) 저 기 팔려다니며 성문지기,
호랑이잡이, 이마에 뿔 돋치고 양 어금니
째져 나온 불쌍한 종족들이 살었댑니다.
오늘날 그들은 출세도 했습니다.
내성(內城)에 들어와 옥좌를 마련코,
부족(部族) 눕혀 구중궁궐 쌓아올리고
백성 목덜미 위 군림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나도 물론 만족(蠻族)전쟁엔 나가보았습니다.
창 들고 도끼 들고 코걸이 하고 귀걸이 하고.
닥치는 대로 대갈통을 바수어 함지박처럼
머리에 엎어쓰고,
가슴팍을 꿰어선 나무에 매달아 두고.
못난 짓 버릇 가운데 몸을 담그고
오랜 세월 숨 쉬어 간 사람들이여,
도끼는 신기해도
손재주가 만든 것이며.
비행기는 비싸도
땅에서 뜨는 것이다.
떡쇠의 입에는 쌀이 하루 세 사발,
수상님의 대장(大腸)에는 비계가 하루 세 사발,
대헌장(大憲章)은 존엄해도 개호주의 안경이다.
못난 짓 그릇 가운데 몸을 담그고
오랜 세월 버둥겨 간 사람들이여,
까마귀는 내려와 선달이 가슴 위에
구더기를 쪼아서 주둥일 닦을 게고
장군님의 존안(尊顔) 위에 평소히 앉아서
눈깔을 빼 먹고선 갸웃거릴 것이다.
내 고향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일까.
봄, 가을, 여름, 내 생지(生地)에 펴나는 꽃은
무슨 꽃일까. 두견이, 패랭이, 들국?
거짓말이다.
그런 꽃은 내 고향 산천에 펴나지 않는다.
들길을 가로질러 달구지가 지나갔다.
낯익은 얼굴들이 호박처럼 매달려
메마른 돌밭 위에 부숴져가고 있었다.
벗이여, 눈보라 쌓이는 밤
이리의 겨드랑에 손을 넣으면,
다스운, 다순 피가 안 돌고 있을 것인가.
벗이여, 광막(廣漠)한 원시림.
인간 된 거죽 홀홀이 찢어 던지고
산돼지 되어 두더지처럼 살아갈 순 없단 말인가.
아름다운 바람 하늘 높이 흘러가고
억만년 햇빛 머리 위에 퍼붓는다.
어디를 흘러가는 싸움떼이게
그 많은 다툼에도 시비가 남았느뇨.
어디를 흘러가는 목숨들이게
양 뿔이 빠지고도 꼬리마저 잘려 있느뇨,
하면, 오늘밤을 어떻게 할 테란가.
‘박애’로운 폭약이여, ‘정의’로운 침략이여.
메마른 공분모(公分母)가
화려한 문명시(文明市)엔 유세스런
장막(帳幕)이고, 이도령은 당신네
호랑이굴 아구리에 네 다리로 막고 서서
꽂혀오는 화살은 등가죽으로나 헤이고?
산과 산.
산과 산,
모과나무 가지엔 무엇이
걸레처럼 발기발기 찢어져
걸려 있었고.
돌베개,
바위 그늘.
땀으로 세수하고
이슬에 목 축이며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오늘에 미친 사람
내일로 바람 자게,
내일로 죽힌 사람
모레에 환생하게.
하여 원수(怨讐)로 죽은 사람
원수로 더불어 복수케 하며,
독엔 독으로.
창엔 창으로.
바퀴엔 바퀴로.
태양 밑에 있고 싶은 자 있게 하고
없고 싶은 자 없게 하라.
싸우고 싶은 자 저희끼리 싸우게 하고
독존하고 싶은 자 철창 속에 독존케 하라.
투구를 쓰고 싶어하는 자
쇠항아릴 만들어 깊숙이 씌워주라.
영웅이 되고파 서두르는 자 로켓에 매달아
대기 밖으로 내던져 버리라.
무엇이 남겨졌고
무엇이 돌아갔는가.
빛나는 여름,
구슬 뿌리며
산맥을 넘어간.
소녀들의
흰 발이여.
지금은 바람 잔
언덕 위.
패랭이,
민들레,
들노래처럼
사라져 간
그리운,
이름,
이름이여.
제4화
어두운 대지 한 가닥 서기(瑞氣)있어,
무릎 모으고 일어앉는 그림자. 헝클진 앞가슴
아무려 여미며 비녀는 입에, 두 손은 머릴
간조롱이고, 동 트는 대지 계곡과 들녘에
한 올기 맨발 벗은 육혼(肉魂은)은 살어.
태백 줄기 고을고을마다 강남제비 돌아와
흙 물어 나르면, 산이랑 들이랑 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인데……
맛동 마을 농사집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딩굴벙굴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거둬들일 때 거둬들일 듯,
이웃 마을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짤랑 꽃가마도 타보고,
환갑잔치엔 아들 손주 큰절이나 받으면서
한평생 살다가 묻혀 가도록 내버려나 주었던들.
흙에서 나와
흙에로 돌아가며.
영원회귀 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나고.
자넨 저만큼,
이낸 이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땅 위에 눕고.
사람과 사람과의
중복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로 흩어져 돌아갔을,
인간기생(寄生)을 모를
사람들.
산정(山頂)의 제왕……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나의 발아래 저렇게 많이
산의 경사(傾斜)를 좇아 무진한 돌들이
천꼴 만색으로 붙어 있지 아니한가.
대지에는 지열(地熱)도 영천(靈泉)도
솟는다 하데마는,
짐(朕)이 디디고 있는 이 산은 인육으로 구축된
말하자면 기생탑일세.
해서 그들의 등가죽엔 강물이
흐르지 않는단 말야.
헌데 건 그렇고. 우스운 이야기는
땅에 붙어사는 그 버섯들의 살림살이 말일세.
그들이야말로 이런 따위,
저희끼리 눈 감고 아웅 하는 격,
왕궁과 통치권엔 아랑곳없으니까.
이차대전 저물어가기 얼마 전의 이야길세.
두만강변 어느 촌락을 지나던 길
한 할아버지로부터 이런 이야길
들은 일이 있네.
우리하고 글쎄 무슨 상관이 있단 말요.
왜 자꾸 와 귀찮게 찝쩍이냐 말요.
내 멀쩡한 사지로 땅을 일궈서
강냉이, 고구마, 조를 추수하고
옆 마을 해삼 장 점북과 바꿔오구,
시집보내구, 장가보내구, 잘 사는데,
글세 뭘 어떡허겠단 말이랑요.
그러나, 그들의 마을에도, 등가죽에도.
방방곡곡 벋어온 낙지의 발은
악착스레 착근(着根)하여 수렁이 되었나니.
그렇다 오천 년간 만주의(萬主義)는
백성의 허가 얻은 아름다운 도적이었나?
제5화
가리워진 안개를 걷게 하라,
국경이며 탑이며 어용학(御用學)의 울타리며
죽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넣어라.
하여 하늘을 흐르는 날새처럼
한 세상 한 바람 한 햇빛 속에,
만 가지와 만 노래를 한 가지로 흐르게 하라.
보다 큰 집단은 보다 큰 체계를 건축하고,
보다 큰 체계는 보다 큰 악을 양조(釀造)한다.
조직은 형식을 강요하고
형식은 위조품을 모집한다.
하여, 전통은 궁궐 안의 상전이 되고
조작된 권위는 주위를 침식한다.
국경이며 탑이며 일만 년 울타리며
죽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넣어라.
제6화
없으려나봐요. 사람다운 사낸. 어머니, 어쩌면
좋아요. 이 숱 많은 흰 가슴, 텃집 좋은 아랫녘,
꽃잎 문 입술...... 보드라운 대지 누워 허송
세월하긴, 어머니 차마 아까워 못 견디겠네요.
황원(荒原) 말발굽 달리던 황하기(黃河期)
사내 찰코 그리워요.
어데요? 그게 어디 사람이에요? 기술자지.
어데, 그건 뭐 또 사람이에요?
제이급치차(二級齒車)라고
명패까지 붙어 있지 않아요? 어머니두.
저건 꼭두각시구, 저건 주먹이구, 저건 머리구.
별수 없어요, 어머니,
저 눈먼 기능자(技能者)들을
한 십만 개 긁어모아 여물솥에 쓸어넣구
푹신 쪼려봐주세요. 혹 하나쯤 온전한
사내 우러날지도 모르니까.
해두 안되거든 어머니, 생각이 있어요.
힘은 좀 들겠지만 지상에 있는 모든 수들의 씨
죄다 섞어 받아보겠어요. 그 반편들 걸.
욕하지 마세요.
받아넣고 정성껏 조리해보겠어요.
문제없어요, 튼튼하니까!
제기랄, 빈집뿐일세그려. 주인은 없는데
하인 객(客)들이 얼싸붙고 닭 잡아라,
절 받아라, 난장이니 썅.
비로소, 말미암아, 바야흐로다?
거북등에 가 집 짓고 늘어붙는 소라.
잠자는 코끼리 등에 올라 국경을 그어
놓고 다퉈쌓는 개미떼.
깊은 지옥의 아구리에 백지 한 장 깔고
행복한 곰의 눈.
쇠기둥과 가시줄로 천당을 지어놓고
문 지키는 수고.
귀부인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해주고
밥 얻어먹는 전문가.
해 저문 바닷가의 구두 수선가 씨,
단애(斷崖) 위의 이발사(理髮師) 선생,
산록(山麓)의 수렵가 박사.
그만 돌아들 오시지,
삼간초옥(三間草屋) 등 비친 창문이
기다리고 있는데.
매미는 언제까지 뜻 모를 소리만 울어예는가.
온실 속서 올어예는 매미는 무엇을 먹고
살아쌓는가.
노동은 머리 위에 나비꽃이나, 한 마리 매미를
달기 위해, 열두 해 긴긴 세월 밭 가는 돼지?
돼지는 노래하라,
발을 갈면서.
씨를 뿌리라 한 알 한 톨
피 맺힌 말씀으로.
돼지는 말씀하라,
발을 갈면서.
예보하라, 날씨도.
실업(失業)게 하라, 왕(王)도.
한 알 한 톨,
피 맺힌 말씀으로.
후화(後話)
숱한 봄, 여름, 가을, 잊어진 세월
양지(陽地)바른 분지(盆地) 잡초(雜草)의 떼는
무성케도 이루어 쓰러져갔다.
무너진 살림살이 해마다 쌓여
마흔아홉 두께의 비옥(肥沃)한 층을 입었을 때,
그곳에선 육신(肉身) 같은 미끈한 줄기가
아름다운 향기(香氣)를 사지(四地)에 뿌리며
하늘거리는 요화(妖花)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한그루 불전(佛典)을 꽃피우기 위하야
선사(先史) 오천 년은 묻히어갔고.
한 그루 피어난 성서(聖書)의 지층(地層)에는
구십구억(九十九億) 창세인민의
몸부림 든 사상이 썩어 있었다.
우리들이 돌아가는 자리에선
무삼 꽃이 내일(來日)날 피어날 것인가.
잡초의 무성을 나래 밑에 거느리며
칠천 년 늙어온 몇 그루 고목(古木),
당신네 말씀도,
지혜(智慧)의 법열(法悅)도,
문명(文明)의 행복도, 그대네 작업(作業)도,
늘어붙어 지층 이룰 갑충(甲蟲)의 무덤.
정신을 장식한 백화만상(百花萬象)이여
몇 만 년 풀밭 이룬 인종(人種)의 가을이여,
흐무러지게 쏟아져 썩는 자리에서
무삼 꽃이 내일날엔 피어날 것인가.
우주(宇宙) 밖 창을 여는 맑은 신명은
태양(太陽)빛 거느리며 피어날 것인가?
태양빛 거느리는 맑은 서사(敍事)의 강(江)은
우주 밖 창을 열고 춤춰 흘러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