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개발사와 부동산재벌
강남개발내용
1966이래 김현옥시장이 강남개발계획등을 언급했으나, 실제로 강남개발은 박정희대통령이 1967 선거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고속도로는 제3한강교 현재의 한남대교가 그 기점이 되었다.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토지 보상비인데 이에 무상으로 할 수 있는 영동구획정리사업이 등장한다. 400만평중에서 무상으로 도로용지비 9만평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을 영동구획정리정리사업 1지구라고 한다. 1지구는 다리기준 잠원 방향이다. 곧 영동구획정리사업 2지구라고 하여 잠실쪽에 같은 크기를 지정하게 된다.
1지구는 그간에 선전에 비해서 실망스러운 분위기였다. 2지구는 3만평에 상공부의 대형종합청사가 들어서는 내용이 들어갔다. 손정목박사는 시기가 겹치는 점에서 박종규청와대비서실장이 값을 올리기 위해서 이낙선 상공부장관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윤진우는 아니라고 한다.
규모가 대단지여서 당시 유럽의 구획정리면적을 합한 것보다 더 큰 구획정리사업으로 세계에 유래가 없는 규모다. 손선생은 그 만큼 토지소유자의 귄리가 침해 당하는 황당한 계획으로 본다. (그러나, 얼마 전에 강북지역에 대단위 광역권재개발계획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던 때가 있었다. 전체 도시계획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도로폭을 차가 없는 당시에 넓게 50m로 잡았다. 감보율이 평균 40% 도로인근은 70%로 대단히 컸다. 이런 것들이 훗날 다른 지역에서도 뒤 따르는 선례가 되었다.
당시 땅값
당시 현대사소식지에 67년 교량 착공 1년 사이에 한강변의 땅값이 200원에서 3000원으로 상승하였다고 한다.
68년 교량 공사부진으로 약간 떨어지더니, 70년 초 신사 압구정 4-5천원으로 상승하였다. 이것은 한가마 쌀값이라고 한다. 말죽거리(양재동)는 침수지역으로 2-3천원에 형성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둘 있었다. 각각 40만평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로구 내수동 김형목이 선인능 주변 등 구황실재산을 매입했는데, 매입가가 100원이었다. 너무 싼 불하가격으로 문제가 생겨서 서울시 농지과장이 사퇴되었다. 그리고, 삼성 청담 대치동에 가지고 있었다. 영동백화점 영동고등학교 기부한 강남구청자리나 강남 교육청 해청아파트 청담동의 청실 홍실 아파트가 그의 소유였다.
서대문 정동 조봉구 함경자부부는 역삼 도곡동에 일본인의 귀속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조는 ㈜삼호를 세웠는 바, 보유토지는 문서상 확인된 것이 40만평 실제는 60만평을 가진 것으로 본다. 삼호쇼핑센타 삼호아파트 개나리 아파트를 지었으며 현금소유자순위에서 1,2위, 대기업 순위 7-80위였다. 그러나, 80년대에 도산한다.
정치자금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과 김현옥 서울시장이 대통령의 선거자금마련을 위해서 토지투기를 하기로 하면서 윤진우 도시계획과/국장(스타로 손정목과도 가까워서 나중에 자료를 건냄)이 하수인으로 등장한다. 박정희는 선거비용으로 받을 때에 가서야 알았을 것으로 손, 윤은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박종규가 박정희에게 전혀 보고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70년1월 헬리곱타로 김현옥과 윤이 후보지대상지(과천 서초 강남 잠실)를 돌고, 윤이 박종규에게 강남을 대상지로 건의한다. 박종규는 윤을 제일은행에 보내 2억5천만원이 들어있는 그 동안 출납이 없ㅇ서 오래 동안 이자만 늘어난 예금통장을 찾아 사용하도록 한다.
지목은 임야 답으로 매입가 4-6천원에서 매각가 2만원선이고 잔금까지 가지 않고 계약금 중도금까지만 돈이 들어가고 다시 회전시키는 구조였다.
토지소유자들 중에 앞에 2사람의 땅이 많았고, 윤이 판 매도처는 개인이 아니라 신탁은행의 자회사인 한신부동산, 공무원년금, 서울시직원상조회등이었다.
가명으로 취득하는데, 인감증명이 3개월에 끝나고, 농지는 3정보초과가 금지되고, 경작등 자격요건이 있는 것이 애로사항이었다.
중간에 자금이 부족하여 박종규가 쌍룡회장이고 당 재무분과위원장인 김성곤의원에게 2억5천만원을 출연토록 한다.
71년 4월 청와대에 20억을 현금으로 진상했는 바,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2.5억이 1년반만에 8배 늘어난 것이다.
김성곤의원에게는 항명파동으로 거세된 이후인데도 6만2천평을 주었다. 이 중 2천평이 태헤란의 1등급이고 6만평은 대치동의 양재 하천침수지역으로 나쁜 곳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도 구자춘시장이 달성군동향인 김성곤의원을 위해서 양제천제방공사를 해 주면서 1급주택지로 변한다.
3천평은 등기명의를 빌려 준 사람 정보부 사람에게 주고 윤 본인도 2천평을 가지라고 하였으나 출세만을 바라보고 사양하였다고 한다.
상공부종합단지와 한전부지
이낙선상공부장관이 상공부종합단지를 강남에 구상하고, 종합단지를 만들 큰 필지를 구입해 주는 일이 시장을 통해서 윤에게 떨어졌다. 무역협회 한전 땅은 조계종 봉은사 땅으로 큰 필지였다. 며칠 전 TV에서는 매각을 둘러싸고 반대하는 봉은사 주지가 사퇴하는 등 진통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재가불교신자회 회장인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유/무언의 압력을 하지 않았겠냐는 질문이 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정론은 동국대가 옆 중앙공무원교육원을 매입, 학교를 확충하기 위해서 땅을 팔았다는 것이다.
상공부에서 거액을 모르는 서울시공무원인 윤국장에게 줄 수 없다고 하면서, 상공부가 자체 매입하였다. 그러면서 국가기관이 매입하는 것이 드러나고, 놀란 조계종이 가격을 올려서 윤이 추진할 때보다 1천원이 상승한 5천원에 매입했다. 현대낙찰가는 평당 4.5억-7.5억(기부체납을 고려한 경우)으로 40년 사이에 10만배이상 뛴 것이다.
강남 개발의 추진
대통령선거까지 서울시는 선거를 의식해서 각종 공사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각종공사로 결국 서울재정이 적자되면서 공사가 중단되고 이에 따라 토지거래가 휴지기에 들어간다.
이에 토지공채발행를 발행했는데, 만기인 2년후에 현금보다는 모두가 토지로 받아가는 바, 시민들이 지가상승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서울시가 개발한 여의도매각이 호조를 보이면서 재정이 돌기 시작하면서 거점방식으로 개발을 진행힌다. 우선적으로 무주택공무원아파트 7천평에 12개동 360가구를 건설했다.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었으나, 생활상의 불편을 이유로 대부분 전매 후 이북으로 이사하여 버렸다.
영동지구에 시영주택단지를 1년에 단층으로 1400동을 건설하였다. 처음에는 선착순이었으나 인기가 커서 추첨으로 바꾸었다. 고층으로 재건축되어서 옛 모양은 남아있지 않고 지금은 3단지 앞 10단지 앞과 같이 뻐스 정거장이름에만 남아있다.
박정희대통령 서울강북억제 방안 촉구
대통령은 전쟁을 대비해서 강남개발이 지방에서 강남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강북의 인구가 억제되어야 함을 강하게 강조하였다.
이에 카바레 나이트 호텔등을 불허가하고
대학 도매시장 고속버스터미날 등 특정시설에 대한 제한구역을 설정하더니
75년 한강이북에 대해서 택지개발금지초지로 토지형질 지목변경을 불허하였다.
이에 술집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지가가 상승될 수 밖에 없었다.
구자춘시장은 박대통령의 지시를 받들어 73년 강남에 고속뻐스터미날지구를 지정하였다. 그리고, 개발촉진아파트지구를 지정하여 구획지구의 1/4에 건축행위를 금지시켰다. 이때 처음으로 반포지구 압구정지구란 말이 생긴다.
아파트개발계획은 근린주구 개념을 도입하여 단지내부에 관련없는 통과교통은 아예 통과하지 못 하게 한다.
강남 개발의 힘은 아파트지구 바깥으로도 뻗어나갔다.
75년 삼호가 방배삼호 방배소라등을, 78년 한보의 정태수가 대치동 은마아파트 4,400가구 85년 미도아파트 2400가구를 지었다. 80년 12월 택지개발촉진법에 의해서 주공 개포지구 260만평이 주공에 의해서 262개동 13천세대가, 89년 수서지구가 지정되어 92-4년 40만평에 141동 1만가구가 개발된다.
말죽거리 신화 63년을 기준 1로 볼 때 출처 토지개발 ‘80년 6월호
70년 79년
종로신당 용산후암 10 25배
학동 20 1333
압구정 25 875
신사 50 1000
국립묘지 앞에서 내려서 말죽거리까지 걸어가서 투기했는데, 전기 전화시설을 갖춘 복덕방이 간판없이 장사하였다.
부동산재벌의 등장
본격적인 아파트단지는 한강제방공사로 조성된 폐천부지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크게 봐서 60년후반 지은 동부이촌동, 여의도, 그리고 영동1,2지구에 포함되는
강남반포동 압구정동, 잠실매립지역을 포함하는 잠실 지구로 이어진다.
동부이촌동 서빙고지역의 넓은 강변백사장을 ‘67년 수자원공사가 개발하여 9만평
의 택지를 공무원아파트외에 한강맨션 27-55평 외인아파트등 당시로
서는 사치스러운 아파트를 짓는데, ‘71년 아파트 붐이 일면서 삼익, 현대, 한양,
신동아의 이름이 등장한다.
여의도에 택지가 조성된 후에도 한강의 침수가능성을 걱정하여 시민들의
반응이 좋지 않고, 건설업자는 개발을 꺼렸다. 전망이 어두운 상태에서 양태식
손정목이 이상적인 당초의 여의도 도시계획을 분양성이 있는 계획으로 바꾼 뒤에
서울시가 직접 24개동 1500가구의 시범사업을 힌다. 성공하여 프레미엄이
붙으면서 ‘74년 삼익, 한양이 각각 4개동 360가구를 시작으로 삼부 라이프가
들어온다.
제방축조나 매립공사는 건설회사로서는 겨울철 비수기에 유휴장비로 모래사장에
제방을 쌓고 다음해 비수기에 모래를 팔고 성토를 하면 되는 것으로 맨 땅 위에
헤엄치는 사업이었다.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정치자금 뇌물의
출처였는데, 반포지구에 현대 대림 삼부가 경인개발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매립사업에 참가한다. 대외적으로는 한 회사같으나 내부적으로는
개별회사로서 공사를 하고 다만 대외적으로 한 회사같이 한 일종의 독점
카르텔이다. 16만평을 개발해서 주공에 매각해서 99동 3650세대가 건설된다.
한강 압구정변에 현대가 제방공사를 하면서 폐천부지위에 75-77년 건설
한 것이 구현대아파트다. 처음 공사목적은 콘크리트공장이었으나, 대지조성으로
바뀌었다. 하천부지에 등기부상소유자가 현대를 상대로 보상소송을 제기한다.
하천이 흐르는 곳은 등기되어있더라도 보상이 필요 없다는 것이 당시 법이었는데
현대가 이긴다. 현재는 보상을 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건대 쪽 구의지구는 서울시가 강변도로를 만들기 위해서 제방을 만들고 폐천부지
에 쓰레기를 채우게 된다. 땅 속에서 내 뿜은 가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한참 후인
86년에 가서야 아파트부지로 사용하게 된다. 그런대 현대가 산 경희궁터와 서울
시의 구의지구를 교환하게 되는데, 현대는 경희궁터를 110억에 사서 7년만에 500
억에 파는 이익을 보게 된다.
우리는 정주엉회장과 이명박사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이 분들이 누리는 영예
의 적지 않은 부분이 부동산 사업의 성공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는 그보다 덜
알려진 우성건설을 소개한다.
최우진은 보도브럭사업을 하고, 차남 최승진은 갖 대학을 졸업한 23세로 태능에서 5층짜리 아파트 1동을 건설한 경험이 전부였다. 그는 서울시로부터 설계용역을 받은 천일기술의 전 서울시 환지계장을 찾아가서 우성건설이라는 아파트재벌이 된다. 대금은 자금 분양계약서롤 담보로 주택은행에서 대출해주니 건설회사로서는 땅위에서 헤엄치기였다. 최우진은 서울대 명예농학박사 10년간 서울대총동문회장, 차남은 사격연맹이사 평통위원으로 명예를 향유한다.
잠실매립공사를 대가로 김학열 기획원장관은 건설회사에 정치자금을 요청한다. 김현옥시장은 자기권한이 침범 당했다고 반발했으나, 와우사건으로 사퇴하고 후임 양시장은 체념하고 문제삼지 않는다. 여기에 앞에 반포지구에서 결성된 경인개발외에 삼부 동아가 참가하여 78년 64만평의 대지가 만들어 진다. 이를 핵심으로 340만평 인구 25만의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다. 이 지역은 강이 많이 흐르는 저지대여서 국유지가 많아 50만평이나 있었다. 그래서 공공용지율이 40%로 다른 지구의 2배, 감보율도 60%나 되었다. 14.4% 62만평의 체비지를 그것도 집단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주공이 1-4단지 5단지를 개발하였는데 특히 후자는 10만평의 대단지로 잠실대교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좋은 위치에 15층 고층아파트로 지었다. 집단체비지에 무허가주택이주대책으로 서울시가 6천가구를 지었다. 그리고 사업주체는 물론 상업지역등 요지를 차지하였다.
78년주택경가가 최고에 달하였다. 그러면서 자재 노임상승 프레미엄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서울은 개인주택에서 아파트로 변하였고 도시가스 중앙난방이 일반화되면서 주부들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입주아줌마는 시간제 파출부로 바
뀌었다. 79년 제2차 오일쇼크가 오면서 주택경기도 한 풀 껵였다.
한보의 정태수회장
초등학교만을 졸업하고 세무사 주사로 퇴직하여 172 소규모아파트를 짓고, 대치동에 480가구를 성공시킨다. 그리고, 79년 침수지에 4천가구의 은마아파트로 주목을 받게 된다.
전두환의 장인과 가까운 것을 이용하여 ‘84년한보철강을 세우고, 효성이 자연녹지여서 개발 못하던 곳을 사서 미도아파트를 건설한다.
그의 사업철학은 부동산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것이다. 그것도 지목변경등이
어려워서 남들이 피하는 곳을 좋아했다. 두번째는 공무원이나 금융기관에 뇌물을
잘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88년 4월 서울시가 건설부에 구획정리를 신청했는데(한보에 서울맨이 있어서 개발정보를 알고서 얼마 전부터 토지매입을 한 것으로 의심된다), ‘89년 3월 건설부가 공영개발로 지정한다.
한보는 공영으로 지정되는 89년 3월 전에 3.5만평을 구입하고, 공영개발발표가 된 후에도 5만평을 구입한다. 그리고는 직장조합을 결성해서 예외수의분양을 추진했다. 공영개발 발표 전에 14개조합 650명에 불가한 것이 26개조합 3360명(나 중에 무주택자등 실제 자격자는 100명이하로 판명되었다)으로 늘었다. 공무원조합등 모두가 서울시청에 힘을 쓸 수 있는 조합으로 구성하였다.
서울시는 녹지지역으로 당초 주택이 안 되는 곳을 취득했고, 공영개발이 안되는 것을 알고 취득했음으로 불허했다.
그러자 ‘89년 9월 12에서 54일사이에 37회의민원과 기자들의 괴롭힘 집단시위가 행해졌다. 정회장은 청와대 비서관을 통해 10억을 상납하고, 청와대비서관 고건시장 건설부 차관의 협의가 있었다. 법률상 불가로 고건시장 반대해서 끝난 중 알았는데 청와대에서 공문과 전화가 왔다. 증거가 남는 서면은 흠이 안 잡히게 분명한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으나, 전화는 구체적으로 공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하였다.
당정협의회가 열리고 시장대신 참석한 부시장이 반대하자, 야당에도 청탁 평민당에서 공문요청이 오고, 여야가 참석하는 국회청원소위원회가 열렸다. 건설부는 법률상 문제가 없으며 서울시가 요청하면 승인하겠다는 입장이고, 이에 서울시는 국회에서 요청하면 동의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공문이 국회가 아니라 소위원회명의로 국회의장이 아닌 국회사무총장이 보내자 국회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이유로 서울시에서 불복하였다.
정회장은 90년 9월 청와대에 30억을 상납하더니 11월에는 노태우를 안가에서 만나 100억을 전달한다. 이때 노태우는 청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고시장이 민원심의위원회를 통해서 기각하자 노대통령은 올림픽위원으로 하키위원장인 정과 잘 아는 사이인 박세직을 서울시장으로 교체한다.
91년 서울시에서(그 전까지는 건설부 소관이었으나 건설부가 골치가 아파 하부로 위임했다) 택지수의계약여부에 대한 관계관회의에서 건설부국장 강남구국회의원등 외부인사는 전부찬성이고, 서울시 관계국장등 내부인사 3인이 모두반대하자 시장 혼자만 결재한다. 정의 로비자금은 300억 수서 이익 1670억으로 추산된다.
이를 추적 조사하던 세계일보 편집국장이 터뜨리면서 외압이 있었으나 통일교재단이라 버틸 수 있었고, 다른 신문들도 연일 보도하면서 여론이 크게 악화하였다..
박시장이 언론에 이미 고건 전시장도 같은 방침이었다고 거짖 해명한 것에 대해서, 기자가 고건시장을 인터뷰를 하면서 사실이냐고 물었다. 고전시장이 박시장의 주장을 부인하면서 고건의 시립대 총장계획도 무산되었다.
벌금 2억이상 청와대 비서관> 국회건설위> 강남구여당의원순이고 야당의원 3천만원 선고받았는 바, 권력의 서열을 보여 준다.
아파트재벌의 몰락
85년 매출액 90년 90전반 90년후반 특히 망한 이유
한양 31위 66 망 중동에서의 과다경쟁 부실시공
삼호 83위 망 동일
우성 61 망 미쉐린타이어와 합작
한신 51 망
경남 60 망
이외에 삼익, 진흥 모두 망했는데 유일한 예외가 현대산업개발이다. 모두가 90년대 땅값 침체와 금융부담으로 망하였다.
이상 손정목 서울도시계획이야기 한울 2001에서
토의주제
1. 왜 아파트재벌은 모두 90년대에 망했는가?
2. 강남이 강북에 비해서 땅값이 많이 오른 이유는 무엇인가?
3. 부동산재벌이 되는 유형
4. 건설 토목등 부동산업이 정치 내지 행정과의 유착없이 큰 사업을 할 수 있는가?
5. 정치자금마련을 위해서 박정희처럼 부동산투기를 하는 것과 노태우처럼 뇌물을 받는 것 중 어는 것이 더 나쁜 것인가?
6. 영동개발의 요인
7. 개발업자로서 정태수에개 침을 뱉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