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에서는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자녀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이거 사람의 창자를 비트는 아픔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1절)
4절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절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대부분의 집에는 다 문제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기도하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런 장치를 해 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도 속죄를 받아야 할 빌닷이 이 말을 한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사실 처음 욥의 상황하곤 전혀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욥은 의인이요
큰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이 다 잃어버리고 나니 빌닷이 와서 선생 노릇을
합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입니다. 이런 목사가 있다면 당장 계급장을 떼야죠.
이렇게 하면 회복하리라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성령 안에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실력이 있었다면 욥이 승승장구할 때에 찾아와서 그의 껍데기뿐인 신앙을 지적했어야죠.
저는 지금 욥과 같이 번드르르한 그리스도인들을 구박하느라 엄청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빌닷 같이 뒷북치는 사람이 많이 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3절을 보면 빌닷은 하나님의 뜻이 뭔지도 모르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 욥을 심판하고 있으며 공의로 대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명분론자입니다.
어디서나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욥은 이런 일을 다 행한 사람입니다.
사실 아무 전제 조건 없이 ‘처음은 미약하지만 하나님이 너를 창대케 하리라’(7절)고 해야
하는 겁니다. 완전히 망한 욥에게 와서 이 말을 하는 건 명분 뿐입니다.
이 말씀은 새 언약 안에서 십자가의 도와 연결이 됩니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심으로 그 분과 함께 하는 나는 창대하게 되리라 이렇게 나와야죠.
주님께서 그분이 보내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주와 하나가 되고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께서 이루시며 주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곧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이 ‘네가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아니 결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5절과 같이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라고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빌닷이 지금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을 환하게 터득하고 말을 할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라 그리하면 만나리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리의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6절을 보면 네가 최선을 다해 청결, 정직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필요성을 무시하고 맙니다. 요즘 말로 하면 기도해봐 왜 기도를 안 해 기도를
안 해서 그런 거야 이런 식입니다. 잘못하면 우리도 빌닷처럼 하나님도
우리하기에 달렸다는 식으로 남에게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적인 믿음은 동참(참예)의 믿음입니다. 곧 믿어 순종(롬1:5)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해서 됐어 하고 의롭게 여기시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대속의 사역과 성령의 보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따라 동참하는 것입니다.
욥기는 인생이 무엇인가 논쟁을 벌이는 것뿐입니다. 그야말로 개똥철학입니다.
지금도 이런 말을 주일마다 쏟아내는 교회가 얼마나 많을 까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 중에 날마다 기가 찬다는 유튜브를 하는 목사가 인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인은 여기지만 그가 진리를 가로 막고 생명의 길을 막고 있는 줄
본인이 모릅니다. 참으로 기가 차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지금 1대3으로 편을 갈라서 서로 뺨 때리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개혁에
목숨을 걸고 다른 교회를 비판하고 나섰다고 말하는데 제가 보기엔 목회를 50년이나
한 그가 아직 에베소서교회의 비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되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웁니다. 함부로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사실 생떼를 쓰면서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속이 상합니다.
솔직히 쫓아가서 패 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철학은 인간의 입장에서 만물을 논합니다.
신학은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논합니다. 신앙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참 신앙은
계시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과 만물을 보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므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막11:22 ‘하나님을 믿으라’하심의 원뜻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라'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서 자신과 만물을 보아라는 의미입니다.
8절 “청하건데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곧 옛날 성현들의 지식을 따르라는 전통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9절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절 “그들이 네가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래서 나온 말이 11절 “왕골이 진펄 하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고 말하는 겁니다. 지식은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땅에서 땅으로 전수되면 지식이 되고 하늘에서 땅으로 전수되면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고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미국도 보니까 나름대로 신앙의 혈통을 자랑하는 것을 봅니다. 한국교회가 밤낮 신앙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20절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하나님이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빌닷은 자기가 나름대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빌닷 자신의 신학지식일 뿐입니다.
지금도 세상의 신지식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 안에 비치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고후4:4)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엄위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준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자비와 긍휼의 아버지로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호6:3 ‘여호와를 알자’합니다.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자고 외칩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할 교훈으로 여기고 자기의 하나님이
항상 고정되어 있음을 봅니다. 앞에서 말한 그 목사가 그런 유형의 스타일입니다.
부부가 평생 살아도 서로 모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서로 모른다고
말들을 합니다. 인간들끼리도 서로 모르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고전2장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이신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빌닷 같은 사람의 설교는 들어보면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의 대부분의 설교가 이렇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처음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을 말씀합니다.
세상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지 세상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를 ‘어떻게 고칠까’ 그 구체적인 방법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시고 그의 십자가로 우리를 개혁하시고 성령과 진리로 완성하실 완벽한
설계와 구원의 로드맵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복음과 로마서와 히브리서가
한국교회의 교과서가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 제대로 해석이 되어야죠.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 ! !
ㅇ!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함께 구원의 주를 찬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