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머의 에스프리
박 장 원
체액처럼 유머가 수필 속에 흐른다.
유머는 인체의 실핏줄처럼 고르게 퍼져 있어야 하고, 사유의 미소로 되살아나 신비로운 이미지를 드러내야 한다. 유머는 아침 이슬처럼 눈앞에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수필문학의 영롱한 결정이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체액설」에서 사람의 기질을 혈액(blood), 점액(phlegm), 흑담즙(black bile), 황담즙(yellow bile)으로 나누고서 우울하고 사색적인 흑담즙형 인간은 철학·예술과 같은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한 분야에 적합하다는 진단을 내렸고, 로마의 갈레노스는 이에 기초하여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기질은 단일 체액 내의 어떤 원소의 우세 혹은 체액 간 비율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서양인들은 흑담즙은 주먹만한 크기의 비장에서 분비되는데, 이 장기는 예술을 잉태하는 자궁이며 위대한 작가의 혈관에는 검은 담즙(melanian chole)이 흐른다고 믿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유머란 단어가 기질(disposition), 기분(mood), 특정적 특이성(characteristic peculiarity), 어리석음(folly) 혹은 잘난 체함(affectation)으로 한정되어 희곡 이론과 등장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산문문학이 발달하면서 유머는 풍자와 조롱과는 뜻이 달라 정답고 긍정적인 형태의 희극성을 가리켰으며, 현재는 골계(滑稽)의 일종인 미적 범주의 하나로서 관조에 의해 주관적 대비를 일으키는 용어로 규정하고 있다.
수필의 구성 요소를 소재, 주제, 구성, 서술과 퇴고라고 주장하는 논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다섯 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지 않고는 안부 편지도 어렵기에 크게 틀린 내용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구성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또 다른 문학성을 추구하는 것이 수필의 본령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유머이다.
칼라일은 “참된 유머는 머리보다는 가슴에서 나오고, 경멸이 아니라 사랑이 본질이며, 웃음보다는 깊숙이 놓여 있는 미소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결국 유머는 깊은 영혼의 울림이다. 오감의 오랜 숙성에서 유머가 천천히 걸러지는 것이기에, 마크 트웨인의 “인간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연민의 정을 나타낸다. 유머 그 자체의 은폐된 근원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천국에는 유머가 없다.”는 정의가 돋보인다. 오욕칠정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인생의 관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엄숙의 상징인 공자에게서 우러나는 유머가 최상급이라 하듯이, 유머는 예리한 지성과 온후한 덕성이 겸비된 인격에서 우러나오되 인생을 십분 관조한 결과 생기는 순전한 웃음이며, 참된 자기를 알고 그러한 자기를 객관화시켜 웃을 수 있는 철학적 웃음이며, 단순한 담론이나 문어적 수법의 풍자와도 달라 인간미와 진실성 위에 터 잡으면서 자연스레 뒤따르는 문학적 쾌락이니, 상대방의 급락에 따른 공격성 충족과 억압욕구의 일시적 해발(解發) 및 프로이트적 성욕이 작용되는 코믹과 위트와는 구분되고 있다. 때문에 번갯불처럼 날카로운 빈정거림이 아닌 햇빛처럼 골고루 퍼지는 사랑이고, 금세 시들어 버리는 웃음이 아니라 오래도록 입가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로서 흔히 말하는 기지나 해학과도 차원이 다른 문학의 정수이다.
욱달부(郁達夫)는 현대 산문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유머를 거론한다.
유머는 천성의 일종 취미(趣味)에 근원이 있는 것 같다. 영국 국민은 정치상이나 상업상에는 결코 유머를 쓰지 않지만 문학상에는 어느 작가나 모두 다소의 유머가 들어 있다. 초서, 셰익스피어, 로버트 린드, 버나드 쇼, 에이 밀른, 헉슬리 등이 엄중한 대작품에서나 가벼운 단문에 흥이 사라질 때는 유머를 쓰게 된다. 그러면 자기의 반대론자도 얼굴을 가리고 웃고, 우수에 잠긴 사람도 눈물을 그치고 입을 벌려 웃게 된다.
신선한 지적이지만, 유머가 위트 언저리에 머문 것이 아쉽다.
한국의 조지훈은 유머에 대해 기염을 토한다.
슬픔과 한의 뒤에는 멋과 유머가 붙어 표리를 이루고 있다. 멋과 유머가 어찌 슬픔과 한을 바탕으로 삼을 수 있는가. 그러나 진실로 이 멋은 슬픔이 초절된 경지이다. 슬픔과 고뇌를 체득한 자의 한바탕 춤이 비로소 멋이 되듯이 유머의 바닥에는 눈물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한국의 유머는 중국과 영국으로 더불어 비견할 수 있는 고차의 유머라는 것을 이에 유의한 이는 진작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며 깊은 밤 정거장에 모닥불을 놓으며 둘러앉아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농담, 또는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임시 유치장에서 밤을 새우며 주고받는 농담, 나는 몇 차례 이런 경우를 겪으면서 한국인의 유머족으로서의 관록을 재인식하였다. 역경에 안여(晏如)하는 그 뱃심에는 유머가 가득 들어 있음을 발견하고 미소를 머금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의 유머는 기발하기보다는 은근하고 슴슴한 숭늉 같으면서도 버리기 어려운 운치가 있고, 눈물이 스며 있고, 달관과 농세(弄世)가 있어 좋다. 자자분하고 얌치없는 것이 아니고 아주 의젓하면서 실소(失笑)와 홍소(哄笑)를 금할 수 없게 하는 그 맛이란 천하일품의 것이다.
슬픔과 한 그리고 멋과 유머가 겉과 속을 이루고 있으며, 슬픔의 달관 그리고 버리기 어려운 운치까지 정곡을 찌른다. 그러나 고차의 유머라고 하면서도 스스로 농세(弄世)라며 본질을 비껴 간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유머의 장황하고 너저분한 보기는 흔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만큼 유머의 이론과 실제가 다른 셈이다.
유머란 이론적으로는 접근이 가능해도 실제에 있어서는 쉽게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김광림은 『현대시학』에서 일본의 야마노구치 바쿠[山之口暲]를 “아픔을 유머로 푼” 현대 시인으로 소개한다.
자학이나 반항·신랄함을 시에서 표출할 때에도 유머라는 오블라토[膠匣]에 싸 가지고 때로는 지독히 웃기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그의 모종의 서비스 정신과 자기 시에 대한 강한 신념과의 양쪽에서 오는 듯하다. 서비스 정신은 그의 서민적 성격의 슬픔과 공동애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첨이나 타협은 결코 아닌 것이다. 한편 유머는 그의 시의 또 하나의 특질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그의 사상과 사는 법과의 다짐이 있으며 의식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부연에서 인간의 분노까지도 유머에 싸여 문학으로 승화되고 그러한 테크닉은 삶의 퇴고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결정일 것이다.
이걸 부탁한다고 말하며
보자기에 싸 온 것을
거기에 쏟아 보이자
전당포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
어떻게 안 되겠는가고 거듭 부탁하자
전당포 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살아 있는 것 따윈 도저히
맡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죽으면 난처하기 때문에
…
여기서 간신히 내 눈이 뜨였다
등불을 켜자
방금 거기에
보자기에서 막 굴러 나온
딸애 아내가
잠들어 있었다
야마노구치의 「한밤중」의 일부이다.
딸을 차마 굶겨 죽일 수가 없어 꿈에 전당포에 잡히러 간 처절한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표출되어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한참 망설이게 하는 작품이라고 김광림은 이해를 도왔고, 수차에 걸쳐 그의 유머와 풍자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비록 날카로운 현실 비판에서 유로되는 풍자 정신은 주목을 받을 만하지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미묘한 감정은 엽기적 파토스에 가깝지 달관의 정서로 촉발되는 유머로 규정하기엔 미흡하다.
윤오영은 “슬프다 기쁘다 하기보다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정서가 있다. 이런 것은 상당히 미묘한 감정이며, 이러한 감정은 미묘한 구상과 미묘한 표현이 아니면 구상화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연암 박지원을 그는 이렇게 평한다.
그의 문장이 우리를 끌고 항상 읽혀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느 글에서나 일관되어 흐르는 그의 산문정신에 있다. 평소에 쌓인 온축(蘊蓄)과 박학(博學)이 완전히 융화하여 체질이 되고 생활이 되어, 사물을 볼 때마다 자기의 독특한 리듬을 타고 위트와 유머를 풍기며 퍼져, 혹은 풍자도 되고, 혹은 우화도 되며, 고비마다 새로운 기축을 열되, 어느 때 어느 줄을 퉁겨도 거문고는 거문고 소리, 비파는 비파 소리를 잃지 않는 것이 곧 산문정신의 가장 높은 경지다. 연암 문장의 진가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
얼마 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에는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행복함·싫어함·두려움 그리고 화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감정 인식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컴퓨터가 밝혀냈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꼭 집어 유머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슬픔을 뛰어넘은 멋이 그 웃음에 배어 있고, 깊은 영혼의 속삭임이 오욕칠정의 오랜 숙성에서 천천히 걸러지는 것이라 규정한 것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미소’라 하지 않고 ‘슬픈 미소를 머금은 모나리자’라고도 한다. 즉 모나리자 눈가에 번지는 ‘슬픔’과 입가에 매달린 ‘웃음’이라는 상반된 이미지가 끝내 신비로운 미소로까지 승화되었다는 것이 미술평론가들의 분석인데, 슬픈 웃음의 만남이 재미있다.
연암은 목하 넓게 펼쳐지는 요동 벌판에서 ‘한바탕 울음’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천고의 영웅은 잘 울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지만 불과 두어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이 그저 옷깃을 적셨을 뿐이요, 아직까지 그 울음소리가 쇠나 돌에서 짜 나온 듯하여 천지에 가득 찼다는 소리를 들어 보진 못했다.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칠정 중에서 ‘슬픈 감정[哀]’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를 것이다. 기쁨[喜]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怒]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樂]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愛]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惡]이 극에 달하여도 울게 되고, 욕심[欲]이 사무치면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것이요, 복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뭐 다르겠는가?
사람들의 보통 감정은 이러한 지극한 감정을 겪어 보지도 못한 채 교묘하게 칠정을 늘어놓고 ‘슬픈 감정[哀]’에다 울음을 짜 맞춘 것이오. 이러므로 사람이 죽어 초상을 치를 때 이내 억지로라도 ‘아이고’, ‘어이’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하고 참다운 소리는 참고 억눌리어 천지 사이에 쌓이고 맺혀서 감히 터져 나올 수 없다.
― 「도강록渡江錄」 중에서
“즐거움이 극에 다다르면 슬프다[樂極悲].”라는 성어는 귀에 익지만,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를 것이다.”라는 자연에 대한 호방함과 인생에 대한 투시력은 분명 예사로운 경계가 아니다. 그러나 북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하고 참다운 소리인 웃음과 울음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자신의 유머로 표현한 그는 진정 자유로운 방관자이다.
조금 술이 취하자 인하여 운종가(雲從街)로 나와 달빛을 밟으며 종각(鐘閣) 아래를 거닐었다. 이때 밤은 이미 삼경하고도 사 점을 지났으되 달빛은 더욱 환하였다. 사람 그림자의 길이가 모두 열 길이나 되고 보니, 자기가 돌아보아도 흠칫하여 무서워할 만하였다. 거리 위에선 개 떼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고 있었다. 오견(獒犬)이 동쪽으로부터 왔는데 흰빛에다 비쩍 말라 있었다. 여럿이 둘러싸 쓰다듬자,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을 서 있었다.
(중략)
무관(懋官)이 술에 취해 ‘호백(豪伯)’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잠시 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무관은 구슬프게 동쪽을 향해 서서 마치 친구라도 되는 듯이 “호백아!” 하고 이름을 부른 것이 세 차례였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시끄러운 거리의 개 떼들이 어지러이 내달리며 더욱 짖어 댔다.
―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 중에서
연암은 당대의 지식인이자 출중한 인물이었지만 찬밥 신세였다. 끼니가 없어 사흘을 굶는 것이 다반사였던 그 주변에 세월의 축객들이 모여들었고, 무관 이덕무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몇 잔의 탁주를 걸치고 밤거리를 떠돌던 그들 주위에 비쩍 마른 커다란 오견(獒犬)이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을 서 있다. 이덕무는 괴상한 것을 만나도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업신여김을 당해야 비로소 으르렁거리는 ‘오랑캐 흰둥이[胡白]’를 ‘걸출한 형[豪伯]’으로 패러디하여 세상을 비꼰다. 그렇지만 그 떠돌이 개도 금세 그들 곁을 떠난다. 무관은 동쪽을 향해 구슬프게 떠나 버린 새로운 만남을 세 번씩이나 외치자 모두가 크게 웃는다.
연암의 산문은 정교한 그물망이다. 어디 한구석 예사로운 데가 없다. 그들 곁을 떠난 떠돌이 개처럼 그들 자신도 떠날 시간이 서서히 다가옴을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애감 속에는 감정의 균형이 내재되어 있다. 순간 어렵고 서러운 삶과 시대의 슬픔과 고뇌가 깊은 영혼의 속삭임처럼 멋이 되고 그 멋은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호탕한 웃음으로 허공을 수놓는다. 그 웃음은 농세를 통한 홍소(哄笑)이자 깊숙한 내면의 파토스가 엇갈린 미묘한 감정의 유로 곧 유머다.
유머의 정신에서 문학은 팽배해진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회의적이면서 부정적이 아니고 유머러스하면서 풍자적이 아닌 에세이 아니, 삶의 행간에서 스며나는 개성으로 찰스 램은 독특하고 매혹적이다. 그의 모방자가 많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감흥을 재생한 사람이 없었다는 지적에서, 그가 유머를 구현하였다는 것과 그런 유머는 아무나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새삼 김승우(金承禹)의 연암과 램의 연결이 흥미롭다.
박 연암이 살았을 적에 열 살도 안 되었던 찰스 램을 연암이 또한 알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연암과 램은 너무도 비슷한 데가 많다. 이는 다 같이 인생의 한계를 깨달은 그들이 슬픈 운명을 희화화하고 고독과 슬픔을 풍자하여 아이러니로 뒤바꾸어 놓은 기경(奇警)한 비평 감각의 소유자들이었다는 데서 온 우연한 일치점일 것이다.
재작년 겨울에 나는 치이프사이드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여느 때처럼 황급히 걸어가다가 미처 보지 못한 얼음판에 넘어져서 대번에 길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고통과 수치 때문에 어쩔 줄 모르며 일어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 이 어린 재주꾼들 중의 하나가 악동처럼 힐쭉 웃고 있는 광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저만큼 서서 구경꾼들에게, 특히 자기 모친인 듯싶은 초라한 여인에게 내 꼴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것이 기막히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이기까지 하였다. (중략) 순진한 소제부가 힐쭉 웃어 보일 때 그 속에 악의라고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는 법이다. 나로서는 신사의 체통이 그것을 견디어 낼 수만 있다면 한밤이 될 때까지라도 거기 누워서 그의 웃음거리나 조롱의 대상이 되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 「굴뚝 소제부를 예찬함」 중에서
램의 수필 속에는 생활인의 예지가 번득이고 있으며 거의 모든 수필의 기저는 인간성에 대한 열렬한 탐구와 영원한 동경이라고 한다. 그의 수필에서 나타나는 파토스는, 그의 체질과 생활에서 오는 애수와 감상을 능히 억제할 만한 지혜와 유머를 가지고 있었고, 감상에 빠져 거의 눈물이 날 지경에도 그것을 웃음으로 제지함으로써 양자가 교묘하게 혼합되어 독특한 풍미와 향취를 보여 주기도 하고, 불우한 가정환경과 미천한 성장 과정에서도 심미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해한 천부적인 소질로 감상과 비애에 흐르지 않고 리얼한 묘사와 유머러스한 터치로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예찬은 오래도록 이어져 온다.
낭만주의의 거장 콜리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램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얼굴이 검은 어린 굴뚝 소제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길거리 얼음판에 커다랗게 나뒹군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린 소년은 눈가에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웃어 대자 신사의 체통을 벗어던지고 웃음거리가 되어 주겠다는 천진난만함에는 인간성에 대한 영원한 동경이 반짝일는지 몰라도 다소 작의적인 웃음을 거론하기에 아무나 구사할 수 없는 고차적인 유머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유달리 한(恨)이라는 정서에서 우러나는 슬픔의 이야기를 한국인은 많이 가지고 있고, 슬픈 언어에 우리 삶의 멋이 배어 있기에 그 슬픔과 한 그리고 멋과 유머가 겉과 속을 이루고 있으며, 슬픔의 달관 그리고 버리기 어려운 운치까지 정곡을 꿰뚫는다는 조지훈의 시선이 폭넓다. 그래서 슬픈 언어를 함축시킨 파토스가 없는 곳에는 유머도 없을 뿐더러, 정념을 억지로 추구하다가는 정을 상하기 일쑤이고, 가슴을 축축이 적신다고 정감 어린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니, 정한으로만 넘치면 실없고 감흥으로만 버무리면 가벼운 것이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은 유머에서야 문학의 주제이다. 작가들이 이것을 형상화하면 유머지만, 그렇지 못하면 파토스로 끝나는 것이다. 때문에 파토스도 어렵지만 유머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희극 속에 가장 슬픈 비극이 배어 있듯이 서정의 맵시가 날렵한 가운데 슬픔이 쾌락으로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생의 진한 파토스는 유머에서야 빛을 발하며, 탈속한 파토스가 양념이라면 고아한 유머는 최상의 고명인 것이다.
때문에 수필가는 인생사 저녁 그늘 같은 비애감을 행복한 얼굴로 바꾸어야 한다.
위대한 수필가는 냉정한 꾸짖음 속에서도 포근한 미소를 머금는 유머의 행로에 시선을 모아야 한다. 결국 삶의 관조 속에서 또 다른 미소를 창조하는 바에야,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유머는 독특한 리듬을 타고 흐른다. 누구라도 그것의 자취는 흔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평생 유머의 모습을 한 작품에라도 새길 수 있다면 수필가로서 최대의 행복일 것이다. 사실 독자들은 수필을 접하면서 이런 자취에 시선을 모으고 있으며, 수필가들도 조용한 미소를 그윽하게 우려내고자 난감해 하는 것이다.
유머는 수필의 체액이다.
체액처럼 유머가 수필 속에 흐른다.
수필은 유머로 윤택해진다.
머리보다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유머가 깃들이는 수필은 정의 함축이다. 세련된 감정의 추구에 유머가 어린다. 정을 배제시킨 유머가 있을 수 없고, 차분한 정이 배어 있는 유머에서야 삶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수필의 얼굴이다. 감치는 정서와 아스라한 유머가 형상화되면 그제야 미래 문학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니, 유머의 에스프리로 가는 여정은 그렇게 평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