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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으로
김 사 량
1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야마다 하루오(山田春雄)는 정말 유별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려 들지 않고 언제나 아이들의 패거리 밖에서 겉돌며 소심하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항상 다른 아이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했지만 남들 안 보는 데서는 자기도 저보다 어린 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을 못살게 굴기도 했다. 또 누가 어쩌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용용 하고 약을 올렸다. 그는 사랑하려 하지 않았고 사랑받는 일도 없었다. 우선 보기에도 머리숱이 적고 커다란 귀에 눈은 흰자위가 많은 편이어서 약간 불길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근처의 어떤 아이보다도 몸차림이 초라해서 이미 가을이 깊었건만 아직도 너덜너덜한 회색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아이의 눈은 한층 어둡고 그늘져 보인다. 묘하게도 그 아이는 자기의 집을 결코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에서 S협회로 돌아오는 길에 오시아게(押上) 역 앞에서 두어 번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가 걸어오고 있던 방향을 보아서는 아무래도 역 뒤쪽의 습지에 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역 뒤에 살고 있니?”
그러자 그는 당황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우리 집은 협회 바로 옆이에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먼 길을 에돌아 여기까지 왔고 야간반이 끝날 때까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밥 짓는 할머니 방에서 밥을 얻어먹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아이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두컴컴한 할머니 방에서 밥을 퍼먹는 아이를 보고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하네.” 나는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한 번 더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그의 모습에서 뭔가 짚이는데가 있는 것 같은데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잔뜩 웅크린 등이며 얼굴, 입 모양, 젓가락질하는 것까지 왠지 낯이 익었다. 마침내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잠자코 아이의 옆을 떠났다. 하지만 그 뒤에도 아이에 관해 그다지 신경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아이와 나 사이에 정말 이상한 일 하나가 일어났다.
그 무렵 나는 S대학 협회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그곳의 시민교육부에서 야간에 두 시간씩 영어를 가르치는 정도였다. 하지만 장소가 코오또오(江東)에 가까운 공장가이고 배우러 오는 이들도 노동자들이어서 두 시간 수업도 힘이 들었다. 낮에 하는 일 때문에 녹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니 이쪽에서 여간 긴장해 있지 않으면 다들 꾸벅꾸벅 졸아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야간반 중에서 활기가 있는 것은 역시 어린아이들이었다. 우리 교실 바로 아래가 아이들 방이어서 언제나 와와 하는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내 반 학생들은 그 소리에 놀라서 자세를 다잡곤 하는 형편이었다. 낡은 피아노가 딩동 하고 울리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일제히 “우리 씩씩하게 어서 자라자” 하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대어 지붕이라도 날려버릴 기세였다.
‘이제 시간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콩이라도 볶는 듯한 소동이 한바탕 벌어진다. 아이들이 앞 다투어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서려던 나는 순식간에 아이들에게 붙잡혀 비둘기 기르는 영감 꼴이 되는 것이다. 한 녀석은 어깨 위로 기어오르고 다른 녀석은 팔에 매달리고 또 한 녀석은 내 앞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는 식이다. 다른 몇 명은 내 옷이나 손을 잡아당기고 뒤에서 소리를 치며 나를 밀어대면서 내 방까지 온다. 방문을 열려고 하면 미리 들어가 기다리고 있던 녀석들이 문을 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쪽에서는 아이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문을 열려고 낑낑댄다. 이럴 때면 으레 옆에서 야마다 하루오가 훼방을 놓는 것이다.
“내버려둬, 내버려두라니까. 아아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내 코앞에서 신나게 익살맞은 춤을 추는 것이다. 마침내 이쪽이 개가를 올리며 방 안으로 몰려들어가면 방 안에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던 여자아이 예닐곱이 와! 하며 기뻐한다.
“미나미(南) 선생님! 미나미 선생님!”
“나도 안아줘요.”
“나도.”
“나도.”
그러고 보니 나는 여기서 어느샌가 미나미 선생으로 통하고 있었다. 내 성은 물론 남(南)가라고 불러 마땅하건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일본 이름처럼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동료들이 먼저 그런 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그런 호칭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은 위선도 아니고 비굴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타이르듯 해왔다. 또한 만일 이 아이들 중에 조선 아이가 있었더라면 말할 것도 없이 나는 고집을 부려서라도 나를 남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리라고 자신에게 변명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조선 아이에게도 내지* 아이들에게도 감정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에.
그런데 어느 날 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데 내 학생 중 하나가 새하얗게 질린 듯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자동차 조수를 하면서 밤에는 영어나 수학을 배우러 오는 이(李)아무개라는 건장한 젊은이였다. 그는 문을 닫더니 싸움이라도 걸듯이 내 앞에 버티고 섰다.
“선생님.”
조선말이었다.
나는 흠칫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험악한 분위기에 기가 눌려 그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자, 나중에 또 놀자. 선생님은 지금부터 볼일이 있거든.”
나는 침착하려 애쓰며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아이들은 고분고분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야마다 하루오의 눈초리만은 이상한 광채를 띠고 뭔가 캐내려는 듯이 나를 말끄러미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희미하게 빛나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게처럼 옆걸음질을 쳐 이곳저곳에 부딪혀가며 마지못해 천천히 빠져 나갔다.
“자, 앉아요.”
나는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조용히 조선말로 이야기했다.
“어쩌다 보니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군요.”
“그래요.”
이군은 선 채로 부르짖듯 말했다.
“나는 사실 어느 쪽 말로 말을 걸어야 할지조차 몰랐어요.”
그의 말 속에는 젊은이다운 분노가 넘쳐나고 있었다.
“나는 물론 조선 사람이오.”
라는 자신의 대답이 어쩐지 약간 떨리고 있는 듯했다. 틀림없이 내 성이 마음에 걸려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태연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비굴한 부분이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나는 약간 허둥거리며 이렇게 묻고 말았다.
“뭔가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었나요?”
“있어요.”
그는 사납게 대답했다.
“어째서 선생님 같은 분들까지 이름을 숨기려 드는 거죠?”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진정하고 앉읍시다.”
“어째서인지 저는 그걸 묻고 있는 거예요. 나는 선생님의 눈이나 광대뼈, 콧등을 보고 조선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죠. 나는 자동차 조수 노릇을 하고 있어요. 오히려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성 때문에 여러 가지 불쾌한 일들을 당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는 감정이 북받쳐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흥분할 이유가 뭘까.
“그렇지만 나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꿀릴 것도 없고 비굴한 짓을 하고 싶지도 않다는 거죠.”
“옳아요.”
나는 약간 신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 말에 동감이에요. 다만 나는 아이들과 유쾌하게 지내고 싶었을 따름이라오.”
복도에서는 아이들이 여전히 소란을 피우며 이따금 문을 열고는 콧물이 매달린 얼굴로 들여다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혓바닥을 내밀어 보이기도 했다.
“만일 내가 조선 사람임을 밝힌다면 저 아이들이 나를 대할 때 애정 말고 다른 것, 나쁜 의미에서의 호기심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뭔가 다른 것이 앞서게 되겠지요. 그것은 우선 선생으로서 섭섭한 일입니다. 아니, 두려운 일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감추려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남들이 다들 그런 식으로 나를 불렀던 거라오. 또한 나도 새삼스럽게 나는 조선인이다,
하고 떠들고 다닐 필요는 느끼지 못했던 거고. 어쨌든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인상을 주었다면 할 말이 없구려…….”
라고 말했을 때,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있던 아이들 속에서 한 아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구나, 선생님은 죠오센징이다!”
야마다 하루오였다. 그 순간 복도는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나도 잠시 동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여하간 다시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이군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나갔다. 야마다를 비롯한 두세 아이가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한순간 나야말로 위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계단 아래서 종소리가 땡땡 하고 울렸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구름떼처럼 몰려 내려가는 소리가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어렴풋이 들렸다.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온 야마다가 등을 구부리고 문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어이, 죠오센징!”
하며 혓바닥을 쏙 내밀어 보이고는 쫓기듯이 달아나버렸다.
그때부터, 야마다는 점점 더 심술궂게 나를 괴롭혔다. 내가 그 아이에게 한층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이날 이후였다.
하긴 그러고 보니 그 아이는 벌써 오래전부터 의혹의 눈으로 나를 감시하느라 내게 달라붙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다 내가 이야기 도중에 말꼬리 같은 것에 걸려 혀가 제대로 돌지 않는다든가 할 때 그것을 흉내 내며 웃어대곤 하는 것도 그 아이였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언제나 내 곁을 맴돌고 내 방에 와서는 곧잘 말썽도 부리곤 했다. 그것은 아이가 나에게 일종의 애정 같은 것을 느끼고 있어서였을까? 그런데 그 일 이후 아이는 나를 몹시 경원하는 듯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으면서 주변을 빙빙 도는 것은 전보다 더했다. 언제든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지르기만 하면 한쪽 구석에서 좋아하려고 심술궂게 노리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에 못지않을 애정 어린 태토로 그를 대했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달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아이를 연구하여 서서히 지도해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우선 이렇게 생각했다. 가난한 그 아이의 집은 지금까지 조선에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 그때에 아이도 외지(外地)에 건너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비뚤어진 우월감을 길러가지고 돌아왔을 것이 틀림없다고. 그러나 마침내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발대발 화를 내고 말았다. 그때도 나는 아이들 방으로 내려와 그들과 함께 놀고 있었는데 야마다는 부러 그러는 것처럼 내 쪽을 두어 번 살피더니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내면서 옆에 있던 어린 여자아이를 잔인할 정도로 팔을 휘둘러가며 때렸던 것이다. 여자아이는 울면서 달아났다. 야마다는 그 아이를 쫓아가며
“죠오센징 자바레, 자바레!”
하고 소리를 쳤다.
‘자바레’는 잡아라라는 뜻으로 한 말이겠지만 이는 조선에 사는 일본 이주민들이 곧잘 쓰는 말이다. 물론 달아난 여자아이는 조선인이 아니었다. 나더러 들으라고 한 소리일 것이다. 나는 달려가서 야마다의 멱살을 잡고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따귀를 후려쳤다.
“못된 놈 같으니라구,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야마다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등신같이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울지도 않았다. 그저 거친 숨을 씩씩거리면서 빤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난히 눈자위가 희어 보였다. 아이들은 내 옆을 둘러싼 채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문득 눈물 한 방울이 맺히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는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죠오센징, 바까(바보)!”
2
원래 S협회는 테이꼬꾸(帝國)대학 학생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일종의 사회사업단체로 그 안에는 탁아부라든가 어린이부를 비롯하여 시민교육부, 구매조합, 무료의료부 등이 있어서 이 빈민지대에서는 친근한 단체였다. 젖먹이들이나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일상 솅활의 자질구레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끊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어머니들 사이에는 ‘어머니회’도 조직되어 있어서 서로 정신적 인 교류나 친목을 나누기 위해 한 달에 두어 번씩 모이곤 했다. 하지만 야마다 하루오의 어머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친 적이 없었다. 자기 아이가 밤늦게까지 여기 와서 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다른 어머니들처럼 관계되는 대학생들에 대한 따스한 감사의 정이 있어서는 아닐망정 부모로서 자기 아이가 걱정되어서라도 가끔씩 얼굴을 내밀지 않겠는가. 나는 이 유별난 아이에게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이러한 그의 가정부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사흘 연휴가 있는 주말을 이용해서 어린아이들이 어느 고원(高原)에 야영을 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야마다를 내 방으로 불렀다. 나는 이 아이가 지금까지 이런 기회에 한 번도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때, 너도 갈래?”
소년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아이는 이런 경우 이쪽에서 아무리 다정 하게 굴어도 항상 의심하려 들었다.
“이번엔 너도 가자, 응?”
“……”
“왜 그래? 너도 어머니를 한번 모시고 와. 아버지라도 좋고. 아무튼지 학부형이 오셔서 승낙을 하면 되니까.”
“모시고 올래?”
야마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안 갈 거야?”
“……”
“비용은 선생님이 대줄게.”
아이는 공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하자.”
“……”
“아니면 선생님이 너희 집에 함께 가서 이야기해줄까?” :
아이는 당황한 듯이 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흘씩이나 자고 오는데 아버지 어머니의 허략을 받아야할 거 아니니?”
“선생님도 산에 가요?”
그때에야 소년은 뜬금없이 물었다.
“안 가요?”
“응 선생님은 못 가. 이번엔 여기 남아야 할 것 같거든.”
“그럼 나도 안 갈래요.”
아이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그건 또 왜?”
그러자 아이는 히이 하며 이를 드러내고 백치처럼 턱을 쑥 내밀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언제부터 한번 그 아이의 집을 찾아가고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결국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이는 웬일인지 그럴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내 토요일이 되어 S협회 어린이부의 백여 명의 아이들은 기쁨에 설레며 줄을 지어 우에노(上野)역으로 갔지만 그 시간이 되도록 야마다는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볼일이 있어 옥상에 올라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빨랫줄을 매어놓은 기둥에 기대어 선 야마다 하루오가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인기척을 듣고 돌아본 아이는 몹시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어깨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저기 좀 보렴. 애드벌룬이 떠 있지?”
“예.”
아이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검게 그은 굴뚝들과 칙칙한 건물들 너머로 멀리 보이는 우에노공원 언저리에 꼬리를 끌며 애드벌룬 두어 개가 떠 있었다. 나는 문득 아이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얘, 하루오야, 이제부터는 선생님도 한가하니까 우리 함께 우에노에라도 갔다 올까?”
아이는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자, 가자. 선생님은 학교에도 볼일이 있으니 마침 잘됐다.”
학교에 볼일이 있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만큼 나는 내심 야마다를 껄끄러워하며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아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선생님도 테이꼬꾸대학이란 말예요?”
아이는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조선인도 넣어줘요?”
“그럼,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지. 시험에만 붙으면…….”
“거짓말 마세요. 우리 학교 선생님이 그랬어요. ‘요놈의 죠오센징 어쩔 수가 없군. 소학교에 넣어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라.’ ”
“원, 세상에 그런 말을 하는 선생님도 있어? 그래서 그 학생이 울었니?”
“울기는 왜 울어요? 안 울었어요.”
“그래? 그 아이 이름이 뭐니? 언제 한번 선생님에게 데려오렴.”
“싫어요.”
아이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 애 없어요, 없다구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아무한테나 말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는 열심히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려 들었다. 정말 묘한 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어쩌면 이 아이가 조선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나는 놀란 듯이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이는 얼굴이 굳어져 경계하듯이 뒷걸음질쳤다. 그러고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 외쳤다.
“가서 모자 쓰고 올게요.”
나는 그저 고개를 흔들며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내가 현관문 가까이까지 계단을 내려왔을 때 아래쪽에서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의료부의 의사와 간호부, 구매조합의 남자들이 숨을 죽이고 밀치락거리며 현관문에 붙여 세워놓은 자동차에서 초라한 옷차림의 한 아낙네를 들어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를 조수인 이군이 몹시 흥분한 듯이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낙네의 머리는 피투성이가 된 채 뒤로 툭 떨구어져 있었다. 하루오가 그 옆에서 부들부들 떨며 몇 걸음 따라오다 말고 나를 보더니 흠칫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서둘러 이군 쪽으로 다가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를 갈듯이 하며 외쳤다.
“남편이 칼로 찔렀어요.”
의료부 입구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저 아주머니는 조선 사람이고 남편은 내지인인데 이게 완전히 악당이에요.”
그러면서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려던 그는 한쪽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야마다 하루오를 보더니 무서운 기세로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이 녀석이야. 이 녀석의 애비라구.”
그는 야마다의 멱살을 잡아 비틀면서 마치 범인이라도 잡은 듯이
“이놈의, 이놈의……”
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짖었다. 그 소리는 흥분 때문에 거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야마다는 몹시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러가며
“아니야, 아니라구.”
하고 외쳤다.
“죠오센징 같은 건 우리 엄마가 아냐! 아니라구, 아냐!”
남자들이 사이에 들어 겨우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이군은 격노해서 다시 달려들더니 야마다의 등짝을 힘껏 걷어찼고 하루오는 비틀거리며 나에게 안겨왔다. 그러더니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죠오센징이 아니야. 나는 죠오센징이 아니에요, 그렇죠? 선생님.”
나는 아이를 꼭 껴안아주었다. 내 눈에 뜨거운 것이 괴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군의 악에 받친 듯한 난폭함도 또한 이 소년의 애처로운 울부짖음도 나는 어느 쪽도 나무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일단 하루오를 데리고 나가자 겨우 그 자리가 가라앉았다. 이군은 여러 사람 앞에서 고함지르듯 말했다.
“저 녀석의 애비란 작자는 사람 축에 못 끼는 도박꾼이오. 바로 얼마 전에 감옥에서 나왔지. 그동안에 저 가엾은 아주머니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오. 그동안 이웃사촌이라고 늘상 우리 집으로 밥을 얻으러 오곤 했죠. 그런데 그 악당 같은 놈이 감옥에서 나오더니 제 여편네가 우리 집에 다녔다고 트집을 잡아서는 저 꼴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살아나지 못할 거예요, 못산다구요.”
그는 힝 하고 코를 풀었다. 의료실에서 사람이 나와 조용히 하라고 했다. 나는 그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며 물었다.
“야마다 하루오네 집을 알고 있겠군요?”
“알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는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그놈도 역 뒤의 습지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정말 지독하군요. 그런데 자네 집에 다녔다고 해서 왜 저런 짓을 한 걸까요?”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 그건 우리 어머니가 조선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조선인의 집엔 가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흥, 꼴값을 하느라고, 같잖게. 그 머저리 같은 전과자 녀석이 뭐 잘났다고. 기껏해야 저도 튀기인 주제에.”
하더니 눈앞에 상대방이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 나쁜 자식, 기억해둬. 내 눈에 띄었다 하면 모가지를 비틀어놓을 테니. 이 한베에 (半兵衛) 란 놈!”
“뭐라구? 한베에?”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래요.”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정말 나쁜 놈이에요. 잔인한 녀석이죠. 흥, 하지만 이번엔 내가 그냥 안 둘걸. 나쁜 자식! 마누라를 죽인 살인죄를 지우고 말 테니까.”
“한베에라.”
나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건 생각할수록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한베에, 한베에.”
나는 몇 번이나 되뇌어보았지만 머릿속에서 빙빙 돌 뿐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때 의사인 야베(矢部)군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로 다가가 경과를 물었다. 그의 이야기로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너무나 심하게 찔렸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 달간은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으니 의식이 돌아오는 대로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겠다는 것이었다. 이군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이라는 작자가 땡전 한 푼 없는 알거지 한베에니 입원이라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다, 살려주는 셈치고 나을 때까지 여기 누워 있게 해달라며 사정을 했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죽 같은 건 제가 끓여올 테니까, 선생님……”
하지만 사실 이곳은 의료부라고는 하지만 뜻있는 의대생 두어 명이 낮에 와서 간이치료를 해주는 정도였지, 중상을 입은 환자를 입원시킬 만한 곳은 못되었다. 야베군도 암담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더러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금세 가까이의 소오죠오(相生)병원의 윤의사가 생각나 그쪽에 전화를 걸어 부탁해보기로 했다. 그 병원은 빈민구제의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의 가난한 주머니에서 그 자금이 나오고 있는 만큼 조선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있었다. 마침 빈 침대가 있어서 이야기가 순조로웠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들려 나왔다. 머리와 얼굴에는 하얀 붕대가 여러 겹이나 두껍게 감겨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날개를 뜯겨버린 잠자리처럼 비참했다. 그녀는 우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소오죠오병원으로 옮겨졌다. 수술대에 눕혀졌을 때도 조금밖에 의식이 없었다. 그녀는 두어 마디 신음소리를 냈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몸집이 작고 가냘픈 여자였다. 밀랍처럼 창백한 손끝을 보니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수술대 옆에 선 윤의사는 야베군의 말에 귀를 기울여가며 여러 가지 의료기구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다시 그녀의 붕대를 풀려는 것을 보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날씨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등나무 덩굴의 이파리들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병원에는 한베에도 하루오도 나타나지 않았다.
3
저녁 무렵이 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더욱 사나워졌고 비는 점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한 기세로 퍼부었다. 창문이 덜컹거리고 전등도 깜빡깜빡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다만 이층에서 수학 수업 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식당에서 두어 명의 동료, 그리고 밥 짓는 할머니와 함께 앉아 야영 간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뇌리에는 좀전의 사건에서 받은 충격이 불에 덴 자국처럼 남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따져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그것이 주는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눈을 가리고만 싶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요란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탕! 하며 부엌문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렸다. 다들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문 쪽으로 다가갔던 할머니가 악! 하고 소리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달려가보니 문짝은 날아가 뒹굴고 비바람 속에 야마다 하루오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때마침 번갯불이 번쩍거려 아이는 마치 유령처럼 흔들려 보였다.
“웬 일이니? 하루오.”
나는 아이를 안고 들어와 그대로 이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홈뻑 젖은 옷을 벗기고 타월로 몸을 닦은 뒤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덜덜 떨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주니 몇 잔이고 벌컥벌컥 받아 마셨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좀 기운을 차려 서글픈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녹아내리고 따스한 감정이 절실하게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 소년은 또 무슨 까닭으로 이런 폭풍우가 치는 한밤중에 나를 찾아온 것일까?
“병원엔 다녀왔니?”
아이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갑자기 이잉 하는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같이, 울긴.”
“아니, 병원엔 안 갈래요, 안 간대두요.”
“응, 괜찮아.”
나는 쉰 듯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다구.”
“예.”
아이는 곧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따듯하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다리를 펴고 고개를 움츠려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이 더할 수 없이 귀여웠다. 아이의 눈은 반짝이고 입가에는 방긋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 것이겠지. 나는 아이의 내면에도 이런 아름다운 것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만 하더라도 그렇다. 어째서 유독이 소년에게만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단지 이지러져 있을 뿐인 것이다. 나는 이웃 사람들에게서 수모당하고 따돌림을 받고 있는 동족의 한 여인을 상상했다. 그리고 내지인의 피와 조선인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한 소년의 내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원적인 것의 분열이 가져온 비극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어머니의 것’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 이 두 가지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빈곤의 고난 속에 몸을 두고 있는 아이이고 보면 그저 순진하게 어머니의 사랑에 젖어들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아이는 드러내놓고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조차 없다. 하지만 ‘어머니의 것’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 속에는 역시 어머니에 대한 따스한 숨결이 고동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조선 사람을 볼 때마다 충동적으로 “죠오센징, 죠오센징” 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조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으면서도 내내 나를 쫓아다니지 않았던가. 그것은 틀림없이 나에 대한 애정이 아니겠는가. ‘어머니의 것’ 에 대한 무의식적인 그리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의 굴절된 표현임에 틀림없다. 사실은 어머니의 병실을 찾아가는 대신에 나를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찾아가는 마음과 무엇이 다르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비길 데 없는 슬픔에 젖어 그 녀석의 밤송이 같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억지웃음을 지어
“어머니가 계시는 병원에 가볼까?”
하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서글프게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폭풍우는 점점 가라앉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랑비가 이따금 생각 난 듯이 처마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창을 열고 머지않아 개어올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북쪽 하늘에는 찢어진 구름 틈으로 별들도 두어 개 보였다.
“이젠 비가 갤 모양이야. 우리 함께 병원에 가보지 않을래?”
대답이 없다. 돌아다보니 아이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셨니?”
“갈 리가 있어요?”
아이는 이불 속에서 약간 반항적으로 말했다.
“이상한 아버지구나, 어머니가 안되셨다.”
“……”
“그럼 넌 아버지한테로 돌아갈 생각이구나. 아버지도 틀림없이 집에서 걱정하고 계실 거야.”
얼굴 내민 아이가 토라진 듯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난 여기가 좋은데.”
“그야, 뭐…….”
나는 대답할 말을 찾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여기 있어도 괜찮긴 하지만…….”
마침 수학 수업이 끝났는지 복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문에 노크 소리가 나고 이군이 시름 어린 얼굴로 들어서다가 누워 있는 야마다를 보더니 단박에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약간 당황하여 밖에 나가 이야기하자며 그를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
“선생님은 죠오센징 소리 듣는 게 무서워서,”
이군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저 녀석을 감싸고도는 거군요.”
“그런 무례한 소리가 어디 있소?”
나는 괜스레 발끈하여 외쳤다. 나는 분명히 그의 출현에 당황하고 있었다.
“야마다는 이 사나운 비바람 속에 나를 찾아왔소. 게다가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단 말이오.”
“누가 갈 곳이 없다는 겁니까? 그 불쌍한 아주머니야말로 정말 돌아갈 데가 없죠. 저놈은 지 애비한테로 가면 된다구요. 빌어먹을 악당자식!”
그러더니 그는 갑작스레 맥이 빠져 애원하듯 흐느껴 울었다.
“어째서 선생님은 그 가엾은 아주머니는 동정하지 않는 거죠? 그 불쌍한 아주머니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군요……”
“제발 좀 그만둬요.”
나는 사정하듯이 말했다.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머리는 텅 비어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
“그만두라니까!”
나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그는 비칠비칠하며 사라졌다. 나는 격렬한 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기진맥진하여 벽에 기댔다.
물론 나는 순진한 이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일렀다. 나도 과거에 그런 시기를 거쳐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현재 내가 미나미라고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오관 속에 종소리처럼 울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놀란 듯이 언제나처럼 그것에 대한 갖가지 변명들을 생각해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위선자 같으니라구, 너는 또 한 번 위선을 부리겠다는 것이지.’
내 속에서 문득 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이제는 기력이 다 되어 비굴해가고 있는 거야.’
나는 깜짝 놀랐고 경멸하듯 되물었다.
‘나는 어째서 항상 비굴해져선 안된다, 안된다 하며 씩씩거리고 있어야 하지? 그게 오히려 비굴의 시궁창 속에 발이 빠졌다는 증거 아니냐……’
그러나 나는 끝까지 말을 맺을 용기가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자신이 완전히 어른이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린아이같이 토라져 있지도 않고 젊은 아이들처럼 광적으로 ○○하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역시 나는 쉽사리 비열함을 짊어지고 빈둥거리고 있었던 것일까. 이번엔 스스로에게 따지고 들었다. 너는 저 순진무구한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싶어서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기를 쓰고 자신을 숨기려 드는 오뎅집의 조선 사람들과 네가 뭐가 다르다는 거냐? 거기서 나는 항변을 위해서 이군을 몰아치려 했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감상에서든 격정에서든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이라구” 하며 외쳐대는 오뎅집의 또 다른 사나이와 너는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것이냐? 그것은 자기가 조선인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야마다 하루오의 경우와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완전히 얼굴색이 다른 터키 아이들조차 여기 아이들과 씨름을 하고 뒹굴며 천진하게 놀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조선인의 피를 받은 하루오만은 어째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땅에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할 때는 언제나 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분명히 혼자서 옥신각신하던 끝에 지쳐 있는 것이다.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비척거리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은 어두컴컴했다. 하루오의 침상으로 다가서던 나는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신의 오른팔을 베고 눈을 반쯤 뜬 채로 잠들어 있는 야마다 하루오의 모습.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터져 나오려는 소리를 삼켰다.
‘아, 한베에의 아들이다!’ 나는 마침내 생각해낸 것이다. 지금까지 눈앞에 어른거리면서도 좀처럼 생각나지 않던 한베에. ‘한베에의 아들이다!’
나는 기절할 만큼 놀랐다. 아,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나는 이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한베에를 얼마나 오랫동안 보아왔는지 모른다. 칠칠맞게 떡 벌린 입하며 커다란 눈 주위에 있는 늙은이 같은 둥근 그늘까지 제 아버지를 꼭 빼닮지 않았는가. 그 아이가 또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내 옆에 누워 자고 있는 것이다. 실은 나는 한베에와 두 달도 넘게 같은 유치장에서 지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기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하루오를 전보다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순간, 이 남다른 아이 하루오가 결국은 제 아버지와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무서운 예감이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 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돌이켜보면 내가 M서의 유치장에서 한베에를 만난 것은 작년 11월이었다. 그때 그는 히죽히죽 웃어가며 나에게 다가왔다. 주름진 말상의 얼굴에 커다란 눈이 게슴츠레한 흉물스런 사내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보는 순간에 아, 조선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이, 네 셔츠 좀 빌리자!”
그는 이미 내 양복 단추를 벗기고 있었다. 나는 그때 좀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단박에 퉁명스레 그를 뿌리치고 구석에 가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고약스럽게도 이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눈초리로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이 겁 없이 까부는군.”
그는 정식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이 조오센징 놈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그는 팔을 걷어붙였다. 그때 복도를 오가고 있던 간수가 철창을 들여다보며
“야마다, 앉아 있어!”
하고 호통을 쳤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야 비로소 그가 내지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히쭉 웃더니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하릴없이 윗옷을 벗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벽에 걸더니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도시락의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려 마치 못처럼 벽에 꽂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그때 그 옆에서 졸고 있던 왜소한 몸집 의 틸보가 머리를 그에게 기대려고 하자 그는 별안간 거친 주먹으로 그의 며리를 콱 쥐어박았다. 그러고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내게는 도시락을 나눠주지 않고 자기만 게걸스레 먹어댔는데 그때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 언젠가 밥을 먹고 있는 하루오를 보면서 얼핏 한베에를 떠올릴 뻔했던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비겁한 폭군이었다. 다들 그를 무서워했지만 뒤에서는 몹시 미워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간수의 눈을 두려워했지만 그 대신 신참자나 힘없는 이들에게는 무자비하고 난폭했다. 그중에서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사람들을 을러대는 것이 주특기인 모양이었다.
“이쪽은 말야, 이래봬도 에도(江戶)*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던 몸이시라구. 까불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걸. 너희들 같은 좀도둑하고는 차원이 다르니까.”
유치장 안의 분위기로 봐서 그와 한패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도합 예닐곱은 되었다. 그가 허풍을 떠는 대로라면 그들은 아사꾸사(滾草)를 주름잡고 있는 타까따(高田)파로서 유명한 배우들을 공갈쳐서는 돈을 우려낸 모양이었다. 한베에는 그중에서도 자신이 얼마나 겁 없는 사람인지를 떠벌리고 다녔다. 하지만 가만 보니 그 패거리 중에서는 ‘모자라는 놈’이라는 의미에서 그를 한베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 챘다. 나는 지금도 그의 본명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나는 그에게 낯을 익혔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도 대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내 자리는 점점 그와 가까워졌다. 그건 왜냐하면 감방에서는 고참일수록 철창 쪽 가까이로 옮겨가게 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나는 마침내 한베에와 마주 앉게 되었고 잘 때는 나란히 눕게 되었다. 그는 이미 나에게 온순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그와 함께 자는 것이 내게는 큰 고통이었다. 그의 입냄새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하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가 밤새도록 사타구니를 긁어댄다는 것 때문이었다. 제 입으로 매독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머릿속까지 퍼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느 날 한밤중에 그가 묘하게 정색을 하고 내게 물었다.
“자네 고향이 조선 어디야?”
“북쪽일세.”
“난 남쪽에서 태어났지.”
그는 교활하게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흥 하며 자기 말을 부정하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나는 애써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그러자 그는 이를 드러냈다.
“정말이야.”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둘이서 남몰래 주고받고 있었다.
“내 마누라도 조선 여자라구.”
“그래애……?”
나는 무의식 중에 눈이 둥그레졌다.
그는 그보란 듯이 히죽히죽 웃었다. 나는 분명히 그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조선에 가서 얻었나?”
“우스꽝스럽고 성가신 일이었지. 스사끼(洲崎)의 조선 요릿집에 나랑 두목이 직접 담판을 하러 갔었어. 이 계집을 우리에게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장지문에 불을 지르겠다고 겁을 줬지. 그랬더니 그놈들 새파랗게 질려서 내놓더라구.”
그는 곁눈질로 힐끔 나를 보았다. 마침 비쳐 드는 새벽 달빛에 그 눈은 한층 더 음산하게 그늘져 보였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냐는 얼굴이었다. 역시 변함없이 약한 자를 괴롭히고 신참의 도시락을 낚아챘다. 그러나 나는 그날 밤 이후 점점 더 그에 대해 의심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경찰에서 야마다라고 불리고 있는 것을 보면 내지인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가 조선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나는 기소유예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마침내 그를 생각해낸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성이 같다는 것만 보고도 그 정도는 눈치 챌 수 있는 일 아닌가. 맨 처음 야마다 하루오를 본 순간부터 내 눈앞에는 한베에의 영상이 어렴픗이나마 어른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한베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하루오에 대한 애정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 한베에라는 사실을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베에.”
나는 다시 한 번 조용히 불러보았다.
하지만 하루오는 새근새근 단잠에 빠져 있었다. 나의 망막에는
“내 마누라도 조선 여자라구.”
하며 비굴한 웃음을 짓던 한베에의 얼굴이 몇 겹으로 겹쳐 떠올랐다. 그러더니 어느샌가 그 얼굴은 잠든 하루오의 모습과 겹쳐졌다. 한순간 하루오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듯 하며 가위에 눌려 우우우 하며 소리를 지르고 돌아눕더니 놀란 듯이 눈을 떴다.
“왜 그래, 꿈이라도 꿨니?”
나는 땀투성이가 되어 있는 그의 목덜미를 닦아주며 물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으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이번 엔 나를 처치하겠대요.”
4
나 역시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하며 어수선한 꿈만 꾸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미 하루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놀라는 스스로에게 소오죠오병원에 가보면 될 것이라 일렀다. 그날은 일요일이니 하루오도 학교에 가지 않을 것이다. 어느샌가 나는 병원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마침 윤의사가 나와서 나를 하루오 어머니의 병실로 데려가면서 말했다.
“이름이 야마다 테이쥰(山田貞順)이라구 되어 있어. 조선 사람이 아닌가봐. 말투도 좀 그렇고 테이쥰이라는 이름도 좀 이상하고 해서 부상당한 순간의 상황을 조선말로 물어봤지만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더군. 그냥 넘어진 거라고 일본말로 하더라구.”
“아, 그래?”
나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다친 데는 어때?”
“아마 괜찮을 거야, 물론 얼굴에 상처는 남겠지만. 정말 가엾을 정도의 상처가 미간 언저리에 생길 거야. 자, 저길세…… 야마다상, 아드님이 다니는 협 회에서 선생님이 오셨네요.”
하루오는 없었다. 12첩* 정도 되는 방에 침대가 다섯 개쯤 엇갈려 놓여 있었는데 침대는 침울한 얼굴의 환자들로 모두 차 있었다. 그 구석 쪽에 하루오의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하얀 붕대로 친친 감은 얼굴에서 코와 입만 약간 보였다. 그녀는 꼼짝 않고 누워서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윤의사는 회진을 돈다면서 자리를 떴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좀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힘드십니까? 하루오도 몹시 걱정하는 것 같더군요.”
어쩌다 보니 말끝에 야마다 이야기가 미끄러져 나왔다.
“실은 제가 하루오가 다니는 협회의 선생을 하고 있거든요…… 저는 남(南) 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약간 몸을 움직인 것 같았다. 틀림없이 그녀는 내가 조선이름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놀랐으리라고 짐작했다.
‘음, 음.’
그녀는 손끝을 가늘게 떨며 신음했다.
“하루오……·하루오가 정말로 나를…….”
“……”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으흐흑.”
그녀는 감동한 듯 흐느꼈다.
“우리 하루오가 정말로…… 내가 걱정된다고…… 했단 말씀입니까……”
나는 씁쓰레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하루오 이야기로 그녀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매일 하루오를 만납니다. 때로는 이것저것 실망하실 일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니 틀림없이 머지않아 어머니가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하루오가 되어줄 겁니다.”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가 지금 같은 성격을 갖게 만든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감안해가면서 따스한 손길로 지도해 간다면 틀림없이 그는 점점 더 깊은 자신의 인간성에 눈을 뜨게 되리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숨을 죽인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역시 어머니가 하루오를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흠칫 했다.
“어머니를 위해서도, 하루오의 장래를 생각해서도 그게 제일 좋은 길이라고 여겨졌거든요. 하지만 아직도 한베에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신 거죠?”
“아이고……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
“제 남편인걸요…….”
“아무것도 숨기실 필요 없어요. 나는 전부터 한베에씨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
그녀는 놀란 듯이 말을 삼켰다. 그러더니 완전히 가라앉은 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
“……어쨌든 그 사람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었잖아요. ……게다가 저, 저는 조선 여자랍니다…….”
말끝은 흐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역시 이런 식의 노예 같은 감사의 정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잔혹한 한베에를 떠올리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서글픔에 휩싸였다. 언젠가 스사끼의 조선 요릿집 주인을 협박해서 빼앗아 끌고 왔다는 것이 바로 이 여인이리라. 비겁하고 잔인한 한베에이니 의지가지없는 조선 여자에게 눈독을 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애초부터 그의 제물로 선택되었을 뿐이었다. 그 무지막지하고 얼간이 같은 한베에를 생각하면 얼마나 가엾은 아낙네인가. 나는 그들 부부의 일상생활까지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날마다 얻어맞을 것이다. 벌거벗긴 채로 두 손을 모아 빌고 애원할지도 모른다. 그런 환경에서 하루오 같은 유별난 아이가 생긴 것이다. 자기는 조선 사람이라고 그녀는 몹시도 서글프게 말했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내지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나마 거기서 위안을 받으며 이런 역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가 한베에에 대해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기를 바랐고 같은 민족으로서 함께 느끼는 의분에서 오는 즐거움에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보기 좋게 한 방 얻어맞은 셈이었다.
“선생님.”
“예.”
“부탁이…… 있습니다. 부디 우리 하루오를…… 모르는 척…… 해주세요.”
“……”
나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 였다.
“……·하루오는……혼자서도 잘 놉니다…….”
상처가 몹시 쑤시는지 그녀는 다시 죽은 듯이 늘어졌다. 그래도 모기같이 가느다란 소리로
“혼자서…… 아이들…… 목소리를…… 흉내 내기도 하고…… 심심치 않게…… 논답니다…… 춤도 잘 추지요. 저는 너무나 서글펐어요. 어디서 보고 왔는지…… 혼자서 열심히 춤을 추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도 울고 있더라구요…….”
“조선 사람이라고 밖에서 놀림을 당해서일까요?”
“그렇지만 이젠 울지 않아요.”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하루오는 일본인입 니다……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에요…… 그걸…… 선생님께서 방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베에씨도 조선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는데요…….”
“예……그래요……어머니가 저처럼 조선 사람이었죠……·하지만 지금은……조선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 사람은 부르르 성을 낸 답니다……”
“그렇지만 하루오는 조선 사람인 나를 무척 따릅니다. 실은 간밤에도 제 방에 와서 자고 갔습니다.”
“……”
“머지않아 아이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도 점점 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녀를 격려하듯 우겨 말했다.
“틀림없이 이제 곧 하루오는 어머니를 향한 애정을 되찾게 될 거예요. 하루오가 나를 따르는 것은 꼭 나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기보다도 실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오는 애정에 굶주려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어머니에게 그저 단순히 사랑을 쏟을 수도 없고 또 어머니의 사랑을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거죠. 하지만 그건 점점 나아져갈 거예요…….”
“그럴까요?”
그녀는 절망적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 애가요…….”
그때 한복을 입은 웬 할머니가 구르듯이 문에서 뛰어들어왔다. 나는 이 할머니가 이군의 어머니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조금 물러섰다. 할머니는 환자의 무참한 모습에 조선말로 분통을 터뜨렸다.
“세상에 무슨 끔찍한 짓이야. 틀림없이 그 악당에게 천벌이 내릴 거야. 이봐요. 하루오 엄마, 나를 알아보겠어? 이가네 엄마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빨리 나아야지. 알았어?”
정순은 손끝을 떨며 침대 위를 더듬었다. 할머니는 그 손을 잡았다.
“상처만 나으면 이번에야말로 찾지 못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구. 언젠가처럼 다시 돌아와선 안돼. 뭐 좋을 게 있나.”
정순은 앓는 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서둘러 보자기를 풀더니 귤 두 알을 꺼내놓았다.
“귤일세. 이걸 먹으면 갈증이 좀 풀릴지도 몰라.”
하면서 할머니는 부지런히 귤껍질을 벗겼다.
“우리 아들이 아주머니 갖다드리라며 사왔더라구. 걔도 오늘부터 면허장이 나와서 겨우 독립 했다고 좋아하던데.”
“몸조리 잘하세요.”
나는 이제 그만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 하루오 어머니가 조선말로 무어라고 숨가쁘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와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할머니한테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 돌아가지 않을래요…… 제 얼굴에는 끔찍한 흉터가 남는대요……그렇게 되면……그 사람도…… 나를 팔아치우겠다는 소리는 못할 거고…… 아무도 이런 나를 살 리가 없잖아요…….”
하더니 별안간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이 일어나려 했다.
“아!”
“아니, 왜 이래, 응?”
할머니는 허둥지둥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무슨……소리가 났어요.”
그녀는 정신이라도 이상해진 것처럼 헐떡이며 말했다.
“할머니…… 하루오가 와요. 저것 보세요, 나를 찾아왔잖아요…….”
그러더니 갑자기 새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할머니, 가주세요…… 빨리 숨으세요!”
“오긴 누가 온다고 그래? 아무도 안 보이잖아?”
할머니는 울음섞인 서글픈 소리로 말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문밖으로 나왔는데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그때 나는 누군가의 조그만 그림자가 복도 모퉁이를 황급히 가로지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누군지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정말로 하루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나는 얼른 모퉁이까지 뛰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짐작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뒤쪽의 어두컴컴한 구석에 야마다 하루오가 몸이 굳어버린 듯이 서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고 있어?”
나는 다가서며 물었다.
당황한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듯 점점 더 구석으로 뒷걸음질쳤다. 무얼 숨기고 있는 것인지 오른손을 등 뒤로 돌리고 있었다. 금방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어머니 문안을 온 거지?”
나는 목 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어머니는 좀전에도 네가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아이는 한층 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안타까워 아이의 몸을 잡아당겼다. 아이는 여전히 오른손을 등 뒤에 감춘 채였다. 뭔가 하얗고 조그만 종이꾸러미를 꼭 쥐고는 숨기려 드는 것이었다. 순간 야마다 하루오가 자기 어머니를 주려고 뭘 가져온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자기 어머니를 병문안 와서도 남의 눈을 꺼리고 들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오히려 소년의 그런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애처로워 보여서 말했다.˙
“틀림없이 어머니가 기뻐하실 거야.”
그러자 아이는 갑자기 내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울기는.”
아이는 더욱 목 놓아 울어댔다. 그러다가 어떻게 꼬깃꼬깃한 흰 종이꾸러미가 굴러 떨어졌다. 나는 그걸 보고 멈칫했다. 썰어놓은 담뱃잎이었던 것이다. 그건 오늘 아침 일어나서 책상 위와 서랍을 암만 찾아도 없던 내 ‘싸리’ 담배봉지였다.
“뭐야, 이것 때문에 선생님을 무서워하고 있었구나. 그냥 선생님 한테 말을 하고 가져왔으면 될걸. 됐어, 이제부터 조심하면 되는 거야. 자, 어서. 어머니가 기다리시잖아? 갖다드려. 왼쪽 세번째 방이야.”
나는 아이의 용기를 북돋우듯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뭐야, 너답지 않구나. 선생님은 이제부터 협회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오면 어제 약속했던 대로 둘이서 우에노로 놀러 가자꾸나.”
아이는 왁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 마음도 흔들렸다. 하지만 내가 병원 안에 있으면 아이를 더 곤란하게 할 것 같아 그에게 병실을 일러주고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째서 그가 내 담배를 가지고 온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이 어머니가 피우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엉뚱한 짓을 하다니. 그때 한베에가 감방의 벽에 옷을 걸어놓고 히죽히죽하고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5
한 시간쯤 지나 야마다 하루오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아이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후련하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있는 건지 이제라도 입이 벌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뭔가 자랑스런 일을 해낸 아이가 어른 앞에서 멋쩍어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이 아이의 얼굴에 이렇게 순진하고 어린애다운 표정이 나타난 적이 있었던가. 그는 이제 완전히 나를 신뢰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저 남몰래 미소 지을 뿐 아무것도 묻거나 하지 않았다.
“자, 가볼까.”
모자를 집으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전날 밤의 폭풍우의 영향으로 약간 쌀쌀한 오후였다. 히로꼬오지(廣小路)에서 전차를 내렸을 때는 일요일의 밀치락달치락하는 혼잡이 한창이었다. 어느샌가 마쯔자까야(松坂屋)백화점까지 밀려와 있기에 특별히 볼일은 없었지만 아이의 손목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화점 안도 몹시 봄비고 있었다. 하루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자는 대로 둘이서 그 위에 나란히 섰을 때 아이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온몸에 넘쳐 오르는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소년 하루오가 지금 북적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 나는 이상하리만큼 즐거웠다. 이 아이 하루오는 내 곁에 있는 동시에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삼층까지 올라갔다. 거기서도 사람들의 물결을 누비며 우리는 오층인가 육층까지 올라가 식당 한 구석에 마주 앉았다. 우리는 필요 이상의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스크림 과 카레라이스를 주문했고 나는 소다수를 마셨다.
“맛있어?”
“예.”
아이는 접시 위에 고개를 박은 채 눈만 올려 뜨고 나를 보았다.
“백화점 카레라이스는 정말 맛있네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일층 특매장에서 일 원을 주고 아이의 셔츠를 하나 샀다. 아이는 싱글벙글하며 꾸러미의 끈을 길게 늘여 들고 걸어 나왔다.
공원에도 보기 드물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돌계단을 올라 큰길로 나섰다. 우거진 숲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 아래서 소리 없이 나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은 낮게 흐려 있고 바람은 때때로 나무 꼭대기 우듬지에서 빗소리처럼 울고 있었다. 널따란 길에는 시골뜨기 같은 아낙네들과 아저씨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어느 틈에 새로 산 셔츠로 갈아입고 너덜너덜한 윗옷은 옆구리에 낀 채로 이따금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나는 뭐라 할 수 없이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별로 말을 걸지는 못했다. 아이가 느닷없이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선생님, 말할 거예요?”
“뭘 말이냐?”
그러고 보니 아이의 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의심과 반항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대뜸 알아차렸다. 담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말하기는, 아무한테도 말 안해. 가없은 어머니한테 갖다드린 거잖아? 사실은 선생님은 오늘 네가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걸. 어머니가 담배를 좋아하시 나보구나?”
“좋아하시는 게 아니구요.”
아이는 갑자기 풀이 죽어 내키지 않는 듯이 중얼거렸다.
“엄마는 피가 나면…… 언제나 담뱃잎 썬 것을 상처에 붙이거든요. 난 다 알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나는 숨이 막힐 듯했지만 놀라는 기색마저 보일 수 없었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왔다. ……남편에게 몹쓸 짓을 당해서* 피를 흘리면 그녀는 가엾게도 담뱃잎 썬 것을 침으로 이겨 몇 개씩이나 상처에 붙이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자기 고향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랬구나.”
우리는 어느샌가 파출소 가까이까지 와 있었다. 그 옆에는 튼톤해 보이는 체중계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뒤를 돌아보고 서글프게 웃으며 아이에게 달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즐겁게 저울 위로 올라섰다. 너무나 갑작스레 무게를 받아 바늘은 휘청휘청 흔들리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제법 무거운 모양이었다. 그때 하루오는 무엇에 놀란 듯이 내 쪽으로 뛰어들며 손가락으로 큰길을 가리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이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는데 자동차 한 대가 우리들 옆에 와서 서는 것이었다.
“어라” 하고 보니 운전석에서 이군이 새 모자챙에 손가락을 약간 올려붙이고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나는 반가워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축하해요. 아까 병원에서 자네 어머니가 말씀하시더구먼. 잘된 모양이로군요.”
하루오는 그다지 어색해하거나 하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그걸 본 이군은 거북한 듯이 눈을 돌렸다.
“예, 조금 전에 저도 병원에 다녀왔어요.”
그렇다면 그는 거기서 하루오를 만났을 것이다. 검고 아름다운 눈을 깜박이며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다는 듯이 평소와는 달리 들떠있었다.
“이제 겨우 저도 제구실을 하게 되었어요. 이건 제법 좋은 차죠?
57년형이긴 하지만 비교적 새거구 엔진도 튼튼해요.”
그러고는 뻐기듯이 시동을 걸었다. 내 눈에는 흔해빠진 포드였고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았지만
“정말 좋은 차로군요.”
하고 대답해주었다.
“오늘은 하루오와 함께 놀러 나왔어요.”
해놓고 소년을 내세우듯 뒤를 이었다.
“좀전에도 나는 몰랐는데 하루오가 일러줘서 알았지요.”
“어때요? 한번 타보시지 않겠어요? 동물원에 가시는 길이죠?”
그는 차문을 열고 열심히 권했다.
우리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 동물원 입구까지는 금세 였다.
“어때요? 타실 만하죠?”
그는 우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순박한 젊은이는 오늘 하루가 견딜 수 없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다른 손님들도 다들 그러시더라구요.”
“그렇군, 새 차라서 기분이 좋군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만족해서 솜씨 좋게 핸들을 꺾더니 아까처럼 손가락을 약간 들어 작별 인사를 하고는 빵빵 하는 경적을 울려서 사람들을 헤치며 물고기처럼 달려갔다. 하루오는 물끄러미 서서 부러움에 찬 눈길로 차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이 참 운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군은 멋진 기사가 되었네. 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나는 하루오를 돌아다보며 즐거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무용가가 될 거예요.”
아이는 느닷없이 명랑한 소리로 외쳤다.
“허어.”
나는 놀라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일시에 아이의 몸이 광채를 발하는 것 같았다.
“무용가가 된단 말이지?”
문득 이 아이는 정말 대단한 무용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예, 저는 춤추는 게 좋아요. 그치만 밝은 데서는 안돼요. 무용이란 건 전깃불을 끄고 어두운 데서 하는 거잖아요? 선생님은 싫어하세요?”
“아니, 그건 틀림없이 신나는 일일 거야. 그러고 보니 너 참 몸집이 멋있구나.”
나는 꿈꾸듯이 말했다.
“선생님도 춤을 무척 좋아한단다……”
내 눈앞에는 출신이 남다르고 학대와 구박으로 비뜰어지기도 했던 한 소년이 무대 위에 서서 교차하는 푸르고 붉은 갖가지 빛 속에서 발을 쭉 뻗고 팔을 활짝 펴서 춤을 추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나의 온몸 구석구석을 정갈한 환희와 감격이 넘쳐흐르는 것을 나는 느꼈다. 아이도 만족스런 웃음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선생님도 무용을 만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야. 선생님도 어두운 데서 춤추는 걸 좋아하지. 맞아, 이제부터는 선생님과 함께 무용 연습을 하자꾸나. 잘하게 되면 더 훌륭한 선생님께 모시고 가줄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 역시 한때는 무용가가 되고 싶어 창작무용을 해본 적이 있었다.
“예.”
아이의 눈은 푸른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조만간 협회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 그래서 우선은 둘만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어쩌면 나를 금방 배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뻣뻣하게 굳어 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놓기 시작한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신나게 고목들 사이를 빠져나와 암자 옆을 지나고 있었다. 어젯밤 폭풍우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기도 하고 땅 위에는 군데군데 누런 잎들이 떨어져 있기도 했다. 비둘기들이 암자 지붕과 오층탑 주변을 요란스레 날아다니고 있었다. 석등 옆으로 가니 아래쪽 숲 사이로는 시노바즈(不忍) 연못이 펼쳐져 있었다. 연못은 거울을 깔아놓은 듯 저녁 노을을 반사하여 때때로 번쩍번쩍 황금빛으로 빛나곤 했다. 대여섯 척의 보트가 떠 있었다. 연못 위의 돌다리 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어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엷은 안개가 일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제부터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것이다. 어둠이 시나브로 연못을 건너 점점 이쪽으로 퍼져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의 마음도 더욱더 맑게 가라앉는 것이었다.
“동물원에 간다는 게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그렇지만 난 보트를 타고 싶은걸요.”
“그래? 그럼 내려가자.”
거기서부터는 기다란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나와 하루오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아이는 나보다 한 단 더 내려서서 마치 늙은이라도 데리고 가는 것처럼 조심스레 내 손을 이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계단 중간쯤에서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내 몸에 착 달라붙어 나를 올려다보며 응석이라도 부리듯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나 선생님 이름 알아요.”
“그래?”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말해보렴.”
“남선생님이죠?”
하고 말한 아이는 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윗옷을 내던지듯 내 손에 맡기고는 혼자서 신나게 돌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나도 안도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타다닥 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서은혜 옮김 〕
『文藝首都』 (1939. 10): 『光の中に』 (小山書店 1940)
김 사 량
본명 이시창(時昌)인 김사량(金史良)은 191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보 재학중 일본군 배속장교 배척운동을 빌여 퇴학당했고, 일본 토오꾜오(東京)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 했다. 1936년 일본어로 쓴 「토성랑」을 『제방』 에 발표한 뒤,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의 체념과 이에 굽히지 않는 민족의식을 보여준 「빛 속으로」를 1939년 『분게이슈또(文藝首都)』에 발표해 아꾸따가와상(芥川賞) 후보에 올랐다. 학도병 위문단원으로 파견되던 중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가담한 후로는 우리말로 작품을 썼다. 해방 뒤 북한 문화계에서 주도적 인물로 활동했다. 1950년 종군작가로 참여했다가 심장병이 발작해 낙오된 뒤로 행적을 알 수 없다. 「지기미」 「천마」 등의 작품과 수기 『노마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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