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편
금생과 내생의 소망
요절: 15절
내용 관찰
다윗의 시를 상고해 보면 그 배경이 사울에게 쫓기던 때와 압살롬의 반역 때와 적과의 전쟁 때 등으로 대별됩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비슷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들이 모두 성경에 수록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각 시편을 살펴보면 어느 부분에선가 보석처럼 빛나는 빛을 비춰주고 있는 특징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6편은 10절이 그러하고 17편은 15절에서 그 빛을 보게 됩니다. 이 점이 성령께서 이 시들을 기록하게 하셔서 후대에 전해 주신 이유라고 믿어집니다. 각 시편들은 처한 형편들이 제아무리 암울하고, 그래서 다급하게 부르짖고 있다해도 결코 절망으로 끝나고 있지 아니합니다. 현재의 고난 너머로 동이 터오는 미래의 소망과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먼저 14-15절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14절은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는 "세상 사람"의 삶이 묘사되어 있고 15절은 궁극적인 소망을 내세에 두고 있는 성도들의 삶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들도 풍족히 먹이고 남은 재산은 그 자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15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는 내세의 소망을 진술합니다. ”깰 때에"라는 말은 죽음의 잠이 들었다가 깨게 되는 내세를 의미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합니다. 이는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천국에 가서 눈을 떴을 때 나의 낮고 천한 모습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에 그 감격이 어떠하겠습니까? 다윗은 그 소망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도 “아멘"할 뿐입니다.
성경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앞부분 (1-5)에서 ‘흠’(3) 없이 살기를 힘썼다고 진술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히 말함이 아니라 대적들의 무고한 말에 대해서 자신의 진실함을 아뢰는 기도입니다.
17편은 기도의 시로 분류되는 시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1). 다윗은 바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6-12절에서 자신이 당한 곤경을 아뢰며 보호하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대적은 사자와 같고 젊은 사자와 같다고 말합니다(12). 가는 곳마다 에워싸고 넘어뜨리려 한다고 말합니다(11).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주의 눈"(2)과 "주의 손"(7,14)과 "주의 날개"(8)와 "주의 칼"(13)과 "주의 얼굴"(15)이 나타나 있음을 주목해 보십시오. 눈은 살피시고 손으로는 붙드시고 날개로는 품으시며 칼로는 대적을 넘어뜨리시고 얼굴로는 자비로이 비춰 주십니다.
묵상해 봅시다.
흠없이 살기를 힘썼던 다윗의 경건이 어떠합니까?(1-5)
자기 백성을 보호하실 "주의" 어떠한 부분들이 나타나 있습니까?
불신자의 이 세상의 복과 성도의 내생의 복이 어떠합니까?
적용: 15절이 형제의 신앙고백이며 최대의 만족입니까?
암송: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제 18 편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요절: 50절
내용 관찰
18편은 삼하 22장에도 수록이 되어있는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삼하22:1)라는 설명이 앞부분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마디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로다(2)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3) 함은 너무나 합당한 표현입니다. "내가 환난에서 부르짖었더니"(6) 들으시고 “나를 건져내셨도다”(16)라고 말씀합니다.
18편의 핵심이자 결론은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0)한 마지막 절입니다. 왕과 기름 부음 받은 자란 1차적으로는 다윗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다윗과 그 후손에게 준다" 한대로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고로"(행2:30-31) 시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했다고 말씀합니다. "사망의 줄",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다"(4-5)는 말은 사탄이 여자의 후손되시는 그리스도를 결박하기 위하여 발악적으로 날뛰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어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8편은 그리스도가 당하신 수난과 부활하심과 승리하시고 영광받으시는 관점에서 관찰되어야 마땅합니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도다"(19)는 말씀은 31:8에서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망에서 풀어 부활케 하심이요,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43상)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에 대한 묘사요(빌2:9-10),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43하)는 구원이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말씀합니다.
"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44상)는 복음이 바람 소리처럼 온 땅에 두루 전파될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증거하기를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바람 소리처럼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롬10:18)고 말씀했습니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7)는 한낱 시인의 상상이 아닙니다. 첫 번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출19:16). 두 번째는 십자가 사건 때 일어났습니다(마 27:51).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히12:26 학2:6) 하십니다. 언제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는 날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이런 일이 또 한 번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라는 표제는 영적 다윗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 승리를 얻으실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묵상해 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무엇이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2)
다윗은 왜 그렇게 진술하고 있습니까?
18편이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시입니까?
적용: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형제도 사망의 줄에서 풀려나 자유케 되었습니다. 형제는 무엇이라 고백하겠습니까?
암송: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