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의(知情意)적인 신앙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7-18).
17절 이하의 말씀은 16절에서 말씀한 일반적인 이치(理致), 즉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한 말씀을 성도들에게 적용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17상), 이제는 “죄에게서 해방이 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 하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죄의 종”이었던 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의의 종”이 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 됩니다. 이점은 “나는 과연 의의 종이 맞는가?” 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합니다.
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17상) 합니다.
㉠ 16절에서는, “죄의 종과, 순종의 종”, 두 부류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본래는 “죄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을 에베소서에서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本質)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하고, “진노(震怒)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② “죄의 종,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들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 합니다. 이것이 어떤 경로로 가능해졌단 말인가?
㉠ 본문은 몇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 첫째로 17절에는 “죄의 종”이 있고,
㉯ 18절에는 “의의 종”이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종”이 아니면, “의의 종” 둘 중에 어느 하나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논리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주인(主人)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인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 이점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를 소유(所有)하고, 우리의 삶을 지배(支配)하고 싶어 하는 두 큰 세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권세자 사탄을 상전으로 섬기는 죄의 종과, “의”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의의 종” 둘 중 어느 하나입니다.
③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나의 “주”가 되신다고 고백하며 자랑합니다.
㉠ 그러나 사탄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당신의 주인은 마귀요” 하면 펄쩍 뜁니다. 듣기 싫어하고 싸우자고 덤벼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그 비극적인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간교하여 자신을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 마귀는, “네가 먹는 날에는 내 종이 된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탄은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살아라, 네 자신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살아라, 네가 왕이다, 네가 주인이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하고 속삭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④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주님께서 “너희”라 한 속에는 일반 백성들만이 아니라, “제사장, 서기관, 장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지도자들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요 8:48, 52), 즉 미친 사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 선민 이스라엘, 그것도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이 어찌하여, “뱀들, 독사의 새끼들”(마 23:33)로 전락을 했는가? 그것은 “의의 종”되기를 거부하고, “죄의 종”, 즉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하는, 18절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합니다.
⑤ 사도는 “하나님께 감사(感謝)하리로다”(17상) 합니다.
㉠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 감사 속에는 로마 성도들의 변화된 “삶”을 인한 감사도 포함이 될 것입니다만, 사도가 “감사하리로다” 하고 감격해하는 데는 보다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본래는 “죄의 종”이었던 로마 성도들을,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게”(18) 하여주셨다는 “신분(身分)의 변화” 때문인 것입니다.
⑥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17중) 합니다.
㉠ 종은 자신의 힘으로나 자신의 의지로는 주인을 바꿀 수도 없고, 해방될 수도 없습니다. 일생동안 매여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것이 종의 처지입니다. 그런 자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은 우리도 감사해야할 우선순위인 것입니다.
⑦ 그런데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는 이것이 어떤 경로로 되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 사도는 이점을 17절을 통해서 세 단계(段階)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 첫째 단계는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즉 복음을 들었고,
㉯ 둘째 단계는 “마음으로”, 즉 들은 말씀을 마음을 믿었고,
㉰ 셋째 단계는 “순종하여”, 즉 변화된 삶이 뒤따랐다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해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18)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점이 우리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⑧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다시 강조해야만 하겠습니다. 첫째로,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 듣기 위해서는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그들은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첫 단계입니다. 10:17절에서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 “전하여 주어서, 듣게 한다”는 것은 중요한 요점입니다. 이점을 어째서 강조하느냐 하면 현대교회 강단에서는 복음이 점차 살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13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합니다.
⑨ 그런데 사도는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이라고, “본”(本)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 “본”(本)이란 표준(標準)이라는 뜻으로 세월이 지나도 본은 변하지 않고, 변해서도 아니 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복음은 “불변의 진리”(眞理)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이라는 표현 속에는 아무 설교나 듣기만 하면, “죄에게서 해방이 되어 의에게 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 사도는 그 누구보다도 복음의 “본”을 지키기 위해 힘썼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하지 아니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3:17)하고 말씀합니다.
㉢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7-8) 하고 단언을 합니다. 이것이 “본”입니다. 그런데 현대교회 내에는 복음의 “본”을 보수(保守)하려는 자가 얼마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로부터 전승된 “교훈의 본”을 자주 전해주어서, “죄의 종에서 해방”될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첫째로 “지적”(知的)인 단계입니다.
⑩ 두 번째 단계는 복음의 본을 들을 때에 “마음으로”(17중)부터 믿음이 생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 10:9-10에서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고, “마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들어서 아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단계입니다.
㉡ 그런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 하신 책망이 남의 이야기란 말인가? “교훈의 본”이 무엇으로 바뀌었는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로 바뀐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사람의 계명”, 즉 “성장(成長)학”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헛된 경배, 즉 헛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들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믿는 것, 이것이 “정적”(情的)인 단계입니다.
⑪ 세 번째는 “순종하여”라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의지적인 단계입니다.
㉠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1:5) 하고 시작한 로마서는,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16:26) 하고 마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 죄의 종이 되었던 한 사람이, 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이상과 같은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 정. 의”적인 신앙인격입니다. “교훈의 본”은 지적(知的)인 면이요, “마음으로” 믿는 것은 정서적인 면이며, “순종하여”는 의지적인 면입니다. 그래야만 균형 잡히고 조화 있는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 “음악을 감상”하듯(겔 33:32) 지적(知的)인 만족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말씀”만을 찾아 헤맵니다. 감정(感情)에만 호소하는 집회가 있습니다. 부흥회와, 찬양집회가 이렇게 될 소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동과 눈물을 흘리게 되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풍선 같을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빠지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허탈밖에는 없습니다. “순종”만 강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또 다른 율법이 되어 성도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⑫ “해방(解放)되어--종이 되었다”(18) 하는 역설적(逆說的)인 표현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합니다. 이것이 “종에게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自由)로 육체의 기회(機會)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합니다. 이것이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전 인격적(人格的)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게 합니다.
㉢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하는, 지정의적인 신앙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