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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계속되는 '자전거 여행'
a. 자전거 여행 신문 연재
인야의 자전거 여행은 서울에서 남쪽 땅끝마을까지 이어지더니, 부산 해운대에서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까지 달리는 겨울 여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생한 여행기들은 그의 홈페이지에 차곡차곡 올라가고 있었다.
며칠 전의 일이다. 그날도 인야는 아침으로 고구마를 먹고, 컴퓨터로 MP3 음악을 틀어놓은 채 방안 가득한 햇볕을 피해 장롱에 기대어 멀건히 앉아 있었다.
요즘은 날마다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아침 아홉 시경, 아무런 희망도 생각도 없이 늘 듣던 트럼펫 연주곡을 듣고 있을 때,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렸다.
그날따라 핸드폰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깜짝 놀라기까지 했다. 평소에는 전화 소리에 잘 놀라지 않는 편인 데다, 남들에게는 업무가 시작되는 아홉 시가 인야에게는 전화가 오기에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자 모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궁 문 선생님이십니까?”
“예, 그런데요.”
“저는 OO신문사의 OO 팀장으로 있는 OO라고 합니다.”
“예? 부슨 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인 것 같아 인야는 전화를 받은 채 흘러나오던 음악 볼륨을 줄였다.
“혹시 최근에 어디 특별하게 여행 다녀오신 곳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여행이라면 어떤? 그런 거 없는데요. 더구나 해외여행은 다녀온 지 몇 년째 되었고……”
말을 흐리던 인야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하긴 국내에선 근 1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만.”
상대방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아, 그러세요? 자전거 여행요? 얼마나 다니셨는데요?”
“여기저기 제법 많이 다녔습니다. 서울에서 땅끝까지, 그리고 해운대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그런 식으로요.”
“그렇게나 많이요? 그럼 국도를 타고 다니셨겠네요?”
“그렇기도 하고, 지방도나 되는대로 작은 오솔길도 다니고 그랬지요.”
“아, 재미있겠네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 신문 주말판에 ‘여행 란’이 있는데, 선생님의 그 자전거 여행기를 실으면 안 되겠습니까?”
어떤 일들은 이렇듯 뜻하지 않은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일은 뜻밖에 급물살을 탔다.
신문사 팀장은 다음 주부터 당장 자전거 여행기를 연재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좋은 일 같으면서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갑작스러운 제의에 인야는 어리둥절했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은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상대방의 연락처를 받아 두고, 다음 날까지 구체적인 안을 짜보자는 약속과 함께였다.
신문사 측의 요구는 명확했다.
신문 주말판에 자전거 여행기와 함께 여행 정보를 1주일에 한 번씩, 최소 6개월 동안 연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겨울철이니 다음 주부터 당장 원고 30매 분량의 '겨울 여행' 기사로 시작하자고 했다.
갑작스러운 제의를 받은 인야는 고민에 빠졌다.
이전에 개인 사이트 ‘화가의 일기’에도 적었듯이, 자전거 여행기를 인터넷에 공개하면서도 책으로 낼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책을 내자고 했을 때도 코웃음을 쳤던 그였다. 그런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려니 마음이 걸렸다. 신문은 책과 다르다 해도 결국 인쇄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인야의 삶은 하루하루 피가 말리는 생존 투쟁의 나날이었다. 수입은 전혀 없고, 이제는 가난에 찌들어 헤어나오기 힘든 지경이었다.
화가가 그림을 팔아먹고 살아야 한다지만 그것은 꿈같은 얘기였고,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무엇이든 다른 일이라도 해야 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세상만 한탄하던 처지였기에, 조만간 무슨 결정이든 내려야만 했다. 돌파구 없이 밑바닥으로 빠져들기만 하던 와중에 이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더욱이 스스로 어딘가를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하며 구걸한 일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먼저 찾아와 부탁을 한 것이니, 이것은 자신을 살려주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인야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이 방면을 잘 아는 친구 A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A 역시 반색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을 꼭 잡으라고 강권했다. 자존심 강한 인야가 혹여 기회를 놓쳐버릴까 봐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결국 인야는 연재를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물론 모든 조건이 마음에 쏙 든 것은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해당 신문사가 독자가 그리 많지 않은, 다소 시시해 보이는 신문사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 기분이 아주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기진맥진한 자신을 찾아와 일을 맡겨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입장이었다. 허황된 자존심은 버리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또 다른 문제는 연재 순서였다. 인야는 자전거를 처음 타기 시작했던 2005년 9월 초, 늦여름 치악산 자락의 이야기부터 차례대로 싣고 싶었으나, 신문사에서는 계절에 맞춰 '겨울 여행'부터 시작하자고 요구했다.
초반 가을 여행은 묻어두고 눈길 빙판에 넘어지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니 구성이 뒤죽박죽되는 것 같아 갈등이 깊었지만, 결국 신문사의 요구에 맞추기로 했다.
또한, 주 1회 연재되는 짧은 기사 양식에 맞춰 원고를 전격적으로 재작성해야 했다.
홈페이지에 올린 글은 일기 형식으로 시간 순서대로 묘사한 것이었지만, 신문 연재를 위해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구역을 나누고 분량을 조절하는 '새로운 작업'이 필요했다.
새로운 일거리에 덜컥 겁부터 났지만, 이 또한 배부른 소리일 뿐이었다. 출퇴근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시간을 투자할 수 있으며, 노트북만 있으면 멀리 여행을 다니면서도 작업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고료가 생각보다 적었다. 월 4회 연재해 보았자 보수가 얼마 되지 않아 당장 경제적 어려움이 눈에 띄게 해결되거나 생활이 나아질 리는 만무했다.
실속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방비 상태로 손 놓고 지내는 것보다는 백번 나은 일이었고, 작은 돌파구가 될 수도 있었다. 적성에도 맞는 일이니 붙잡아야 했다.
갈등이 이어지는 며칠 동안 인야는 이 사실을 개인 사이트에 알리지 않았다. 활자로 인쇄되어 나오기 전까지는 중간에 어떤 이유로 일이 무산될지 모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방송국에서 난리를 치며 촬영을 끝내고 편집까지 마쳤으나, 결국 인야가 거절하여 불발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친구 A도 이번만큼은 꼭 잡으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그사이 인야는 자전거 여행의 개략적인 개요 문서와 이미지를 정리해 신문사에 보냈고, 그쪽에서도 흔쾌히 수락했다.
첫 회 분량으로 요구치보다 훨씬 많은 원고를 보냈는데, 신문사에서 교정을 본 원고가 다시 돌아왔다.
원고 교정 과정은 미묘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계약이 틀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에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수긍하기로 했다.
약력과 사진, 지도까지 모두 넘겼으니 이제 이틀 뒤인 목요일(25일) 신문에 실려 나오는 일만 남았다.
신문이 주요일간지가 아니라서 특별한 곳에 가야 살 수 있거나 지국에 미리 주문을 해야 했기에, 인야는 사이트 회원들에게 미리 이 사실을 알렸다.
신문사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구체적인 신문사 이름은 이튿날 발표하기로 했다.
어찌 됐든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생겼고, 정말이지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자전거 여행기가 신문에 아주 대대적으로 실렸다.
이 소식을 미리 알고 있던 군산의 친구로부터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왔다. 새벽 5시가 넘자마자 군산 신문보급소까지 차를 몰고 가 신문을 받아 읽고는, 시간이 너무 일러 꾹 참다가... 이제야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 친구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정말 기사가 나긴 난 거야?”
인야가 잠이 덜 깬 느릿한 목소리로 묻자 친구가 대뜸 걱정스레 물었다.
“너 어디 아프냐?”
“아니, 자고 일어나서 처음 입을 열어서 그래. 나도 아침 챙겨 먹고 신문 사러 나가 봐야지.”
“야, 신문에 엄청 크게 났어. 두 면이 통째로 꽉 찼다니까!”
평소 하지 않던 아침 샤워를 하고 옷을 껴입은 뒤, 오전 8시 반경 쌀쌀한 공기를 뚫고 미리 알아둔 근처 신문보급소로 향했다.
대중성이 떨어지는 신문이라 지하철 가판대에서는 팔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관도 하고 은사님들과 형제들에게도 돌릴 겸 신문 열 부를 달라고 했다.
신문을 받아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들춰보았는데, 사진은커녕 이름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하는 인야에게 보급소 직원이 주말판 별지를 챙겨주지 못했다며 미안해하며 묶음을 건넸다.
그것을 펼친 순간, 인야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자전거를 탄 자신의 모습이 신문 한 면 전체를 커다랗게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담한 척 돈을 지불하고 서둘러 작업실로 돌아왔다.
방에 앉아 느긋하게 신문을 검토해 보니 아쉬운 부분들이 눈에 밟혔다.
큰 제목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전거 여행 동기 끝부분에 적힌 ‘전문 자전거 여행가’라는 표현도 마음에 걸렸다. 전문적으로 여행을 해 온 사람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문 시작 부분 등 신문사 측에서 교정하며 임의로 써넣은 구절들이 못내 아쉬웠고, 이메일 주소의 철자마저 틀려 있었다. 정성껏 그려 보낸 지도는 너무 축소되어 머쓱했고 풍경 사진도 작게 나왔다.
그렇지만 이미 인쇄되어 나온 것을 어쩌랴.
트집 잡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데다, 시각적인 디자인 자체는 시원시원하게 잘 나와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욕심 같아서는 원고 보낸 것을 축소하지 말고 다 넣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할지 말지 갈등하던 일이 이렇게 눈앞에 활자로 펼쳐지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신문 연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내용은 2007년 2월 1일, 서울로 복귀한 뒤 까페 ‘화가의 일기’에서 옮겨 적음)
그렇잖아도 머리를 식히러 어디론가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신문 연재와 원고 수정 문제로 정신없이 며칠을 보내고 나니 더는 서울에 머물기가 싫어졌다.
마침 눈도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전라북도 남원에 사는 친구 Y에게 연락을 취했다. 마침 Y는 주말을 맞아 부여 본가로 내려가는 날이었기에, 남원의 숙소를 비워두고 인야가 혼자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본의 아니게 친구를 피해 내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충청도 쪽으로 내려갈수록 눈이 점점 두텁게 쌓였고, 고속도로 교통사고로 인해 차가 심하게 정체되어 남원에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 Y는 이미 떠나고 없었지만, 가기 전 직원들을 시켜 터미널 픽업부터 식사 배달까지 인야를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해두었다. 숙소는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냉장고에는 먹거리가 가득했다. 과분한 배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원에는 눈이 조금 쌓여 있었고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낯선 숙소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TV 뉴스만 잠깐 본 뒤 인야가 시작한 일은 뜻밖에도 또 원고 정리였다. 성격상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터라, 인터넷 메일함에 저장해 두었던 원고를 다운받아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교정 작업에 매달렸다.
장소만 서울에서 남원으로 바뀌었을 뿐, 결국 원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 작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기존에 써둔 자전거 여행기가 있으니 재미있는 에피소드만 골라 살을 붙이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갔다. 개인 홈페이지에 올릴 때는 자유롭고 빠르게 썼지만, 대중 매체에 공식적으로 나가는 글이라 생각하니 좀처럼 마음에 차지 않았다.
보고 또 보며 고칠수록 글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다음 회 원고가 진작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선뜻 보내지 못하고 남원까지 들고 내려와 고치고 있는 이유였다.
그렇게 수정했음에도 원고 분량이 40장에 육박해 신문사에서 짜증을 내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연재 때문에 개인 삶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나기도 했지만, 점차 이 생활에 익숙해지며 적응해 나가야 할 터였다.
남원에 머무는 동안 서울의 친구들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폭설 때문에 동행을 포기했던 친구 둘이 도로 사정이 좋아진 것을 확인하고 하루 늦게 합류하겠다는 것이었다. 간간이 눈발이 비치는 날, 친구들이 남원에 도착했다.
원래는 Y의 숙소에서 따뜻한 밥을 해 먹이려 했으나, 내려오는 길에 전화를 걸어온 친구들이 밖에서 먹자고 종용하더니 만나자마자 당장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결국 인야는 다시 숙소로 들어가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나오는 번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행선지는 평소 가보고 싶었던 전남 곡성의 섬진강 변으로 정했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경치가 과연 멋졌다.
구례 아래쪽처럼 이곳도 강 양쪽으로 길이 나 있었는데, 인야의 제안으로 반대편 도로로 돌아 올라가 한 시간여를 함께 걸었다. 눈발이 날리는 날씨였지만 운치가 있었다.
그 길로 일행은 남해도로 향했다. 이 또한 인야의 신문 연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여정이었다.
친구들은 무조건 인야의 일정에 맞춰주기로 한 상태였고, 인야는 다음다음 주에 연재될 기사에 쓸 사진이 못내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이번 기회에 보충 촬영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계절이 같은 겨울이니 1년 전 자전거 여행 당시의 풍경과 크게 다를 바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특히 신문사에서는 ‘남해대교’의 멋진 사진을 원했는데, 지난 여행 때는 땅거미가 질 무렵 서둘러 도착하느라 불안감 속에 대충 찍은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일행은 남해대교 근처 회타운에서 저녁을 먹고 투숙한 뒤, 다음 날 새벽 일찍 걸어서 남해대교를 건너며 필요한 사진들을 촬영했다. 비록 아침이었지만 약간 어둑어둑한 상태여서 지난 자전거 여행 당시의 저녁 분위기와 엇비슷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
이어 예전 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혔던 창선도~삼천포 구간으로 향했다. 작년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지날 때는 날씨는 좋았으나 어찌나 추웠던지 사진을 제대로 찍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신문 연재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기에 대충 찍고 넘어갔던 터라 이번 기회에 재답사를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당일 날씨는 작년보다 훨씬 흐렸다.
시야가 흐려 멀리 있는 산과 다리 세 개가 한눈에 들어오는 원하는 구도가 선명하게 잡히지 않았다. 의지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지만, 운전하는 친구를 귀찮게 해 가며 방파제마다 들락날락 각도를 바꾸어 가며 필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아쉬운 대로 쓸 만한 컷들을 확보한 뒤 삼천포에 닿았다.
포구 풍경이 아름다운 삼천포에서 인야는 친구들을 이끌고 옛 정취가 남아있는 '굴항'과 어시장, 시장통을 느긋하게 돌며 관광을 즐겼고 원하던 사진도 충분히 확보했다. 친구들이 차를 대령해준 덕분에 편하게 신문 연재용 사진 작업을 마칠 수 있었던 셈이다.
이후에는 고생해 준 친구들을 위해 미조항과 보리암, 남해도 서쪽 해안 드라이브 코스로 기수를 틀었다. 작년 자전거 여행 때는 체력이 고갈되어 들르지 못했던 곳들이었다.
미조항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뒤 보리암으로 향했으나, 중간 주차장부터는 본격적인 등산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이번에도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어서 이번 주 신문에 실릴 '다랭이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다랭이 마을은 작년에 비해 한층 더 현대화되어 있어 인야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인터넷 사진을 보고 기대했던 친구 역시 너무 변해버린 마을 모습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고즈넉해야 할 절벽 어촌 마을이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변해 있었다. 안 오느니만 못했다는 씁쓸함을 안고 서쪽 해안을 달려 남해를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하동과 구례를 거쳐 '지리산 온천'에 들러 피로를 풀고 아예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운전하느라 고생한 친구와 다 함께 술 한잔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2박 3일간의 뜻깊은 여정이 마무리될 무렵, 남원 입구에서 신문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번 주 연재물의 원고 분량이 너무 많으니 대폭 줄여달라는 요청이었다.
30매 기준에 47매를 보냈으니 과하긴 했다.
신문 연재 사진을 찍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지독한 원고 축소 작업에 매달려야 하는 운명이었다.
애정을 가지고 몇 번이고 고쳐 쓴 2회분 원고였기에 가슴이 아팠지만, 신문사의 기준에 맞춰 욕심을 내려놓고 상당 부분을 덜어내야만 했다.
남원에 내려와서도 인야의 모든 신경은 온통 이 연재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날은 중부지방에 폭설이 내리고 기온이 급강하한다는 예보대로 날씨가 매우 사나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야는 남원에 내려온 본래 목적 중 하나였던 '섬진강 나루터' 답사를 감행하기로 했다.
당초 계획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섬진강 중류를 여유롭게 걷는 것이었으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는 늘 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친구 Y가 배려해 준 직원의 차를 타고 곡성읍 외곽 17번 국도를 거쳐 한적한 강변 도로에 내렸다.
직원을 돌려보낸 뒤 쌀쌀하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는 섬진강 중류 둑길을 따라 홀로 걸어 내려갔다. 예전 KBS 프로그램 '호곡리 사람들'에 나왔던 그 나루터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미 연재 첫 회에 썼듯이, 10여 년 전 화개장터를 찾았을 때는 지금의 화개교가 없어서 강 양쪽에 연결된 밧줄을 잡아당기며 나룻배를 타고 건넜었다. 이제는 그런 전통 나루터가 이곳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얼마 걷지 않아 저 멀리 강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한 척과 강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줄이 보였다. 예상보다 빨리 목적지인 '호곡나루터'에 도착한 것이다. 평일인 데다 추운 날씨 탓에 주위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인야는 나룻배에 올라 혼자 줄을 잡아당기며 강을 건너보았다. 배가 강 중간쯤 나아갔을 때의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셀프 타이머의 시간 제한 때문에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아쉬운 대로 배에 오르는 모습과 줄을 당기는 모습을 몇 컷 찍는 동안, 설상가상으로 원치 않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마을 입구 원두막으로 몸을 피하고 서 있자니, 근처 첫 집의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고 주인은 문을 열고 눈총을 주더니 이내 들어가 버렸다. 시린 겨울 아침, 비 내리는 섬진강 변 원두막에 엉거주춤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처량하게 느껴졌다.
며칠 후, 신문사로부터 설 연휴 스케줄에 관한 연락을 받았다.
신문사 측에서 명절 주간에는 연재를 한 주 건너뛰겠다고 하기에, 인야는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어 조심스레 제안을 건넸다.
“저, 혹시 남해안 여정 중에서 다랭이 마을과 삼천포 이야기가 나간 다음에 바로 거제 해금강으로 넘어가면 공백이 너무 크니, 그사이에 ‘삼천포에서 통영까지’ 이야기를 1회만 더 연재할 수 있을까요? 그래야 전체적인 여행 흐름이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요.”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문사 담당자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아닙니다. 그냥 예정대로 ‘거제 해금강 여행’으로 깔끔하게 끝을 내지요.”
전화를 끊고 난 뒤 인야는 밀려드는 후회와 자책감으로 마음이 찝찝해졌다.
사실 전화를 받기 전 인터넷으로 바둑 시합(LG배)을 보던 중이었는데, 바둑돌 놓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방금 나눈 대화로 가득 찼다. 신문사의 말은 결국 이번 남해안 시리즈를 끝으로 연재 자체가 완전히 막을 내린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도 마지막 회가 아쉽다는 핑계로 1회만 더 늘려달라고 매달린 꼴이 되었으니, 스스로가 너무 구차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모처럼 얻은, 기본적인 생활을 연명하게 해 줄 소중한 일자리였기에 신문사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다른 방향으로라도 연재를 유지해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그런 소리를 못 하는 이가 미련을 보였으니 자책감이 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 않았어도 될 말을 하여 어서 빨리 연재를 털어내려는 신문사 측에 구걸한 모양새가 된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사실 돈 한 푼 더 벌자고 고집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1회 고료를 더 받는다고 생활이 급격히 나아질 리도 없었고,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다만 기왕에 시작한 여행기인 만큼, 비록 전체 자전거 여정의 일부분일지라도 독자들에게 구색을 갖춘 깔끔하고 알찬 마무리를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로서의 순수한 아쉬움이었을 뿐이다. 마음을 비우고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쓸쓸한 허전함은 지울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지난 2월 5일, 신문사에서 밀린 고료를 정산해 주겠다며 은행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 이미 연재 종료의 조짐은 보이고 있었다.
당시 산책을 나갔다가 논두렁 볏단에 앉아 전화를 받았을 때, 담당자는 계좌번호를 묻고는 앞으로의 계획을 넌지시 일러주었었다.
“다음 주에 남해안 여행기가 한 번 더 나간 뒤, 설 특집으로 ‘설 쇠러 떠나는 자전거 여행기’를 실을 예정입니다. 다만 설 특집호에는 명절 교통 정보 등 다른 기사가 많아 지면이 부족하니 원고를 20매 정도로 대폭 줄여주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 주 남해안 마지막 회까지만 확실히 나가고, 그 이후에는 지면 개편이 있어서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사흘 밤낮을 달려간 힘든 고향 길 이야기를 달랑 20매로 압축하라는 요구에도 인야는 그저 신문사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었다.
하지만 처음 계약 당시 ‘최하 6개월 이상 연재’를 운운하던 그들이 이제 와서 지면 개편을 핑계로 발을 빼려 하니 은연중에 항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획을 세울 수가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인야의 말에 담당자는 주말판 지면이 16면에서 8면으로 축소될 예정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화를 내거나 따지는 대신 조용히 전화를 끊었지만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단물만 쏙 빼먹고 냉정하게 돌아설 이중적인 언론사의 행태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계절에 맞춰야 한다며 여행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흔들어 놓더니, 단 1회 특집을 위해 고생스러운 여정을 칼질하듯 편집하라 명령하는 그들의 편의주의에 짓밟힌 기분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친구 Y에게 전화를 걸어 불평을 털어놓자, Y는 도리어 차가운 충고를 건넸다.
“네가 평소에 세상과 동떨어진 다른 식의 삶을 살아서 그렇게 느끼는 거지, 그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니다. 세상은 원래 다 그렇게 굴러가는 거고, 그게 지극히 정상적인 거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듯한 친구의 말에 서운함과 오기가 솟구쳤다.
과연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고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세상의 행태가 과연 ‘정상’이란 말인가. 인야는 여전히 그것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마침 당일 아침에는 아랫니 하나가 흔들리다 신경이 죽어 버린 불길한 현실과 맞물려, 입안에서 이빨이 툭 빠져 굴러다니는 선명한 악몽까지 꾸었었다.
예부터 이빨 빠지는 꿈은 흉몽이라 하더니, 꿈에서 깨자마자 신문사의 종선 통보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담담하려 애썼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장을 제안했던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한 후회는 오래도록 가슴을 짓눌렀다.
마침내 설 특집호로 ‘자전거를 타고 고향 선산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완성된 신문을 펼쳐 든 인야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짜증에 휩싸였다. 신문사 측에서 원고를 교정한다는 명목하에 글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해 놓았기 때문이다.
명절 지면 한계로 인해 사흘간의 여정을 20매로 압축하는 것만으로도 뼈를 깎는 고통이었는데, 신문사는 그 원고마저 멋대로 주물러 전혀 다른 결과물로 가공해 버렸다.
특히 인야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집필했던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마음속 독백체 대화’를 아예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 형식으로 각색해 놓았고, 마무리는 ‘아들 올림’이라는 세배 문구로 끝맺음해 놓았다.
순간 확 짜증이 치밀었다. 대중 매체에 글을 실으려면 어느 정도의 교정은 필수적이겠지만, 작가의 의도와 어투를 완전히 짓밟고 유치한 신파조로 바꾸어 놓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평소 어머니께 쓰던 투박하고 솔직한 대화가 타인의 손에 의해 변색되어 인쇄된 것을 보니 내 글이 아닌 것 같아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가위질의 상처는 비단 신문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 출간했던 저서 '아름다운 고행 산티아고 가는 길' 때도 교정 담당자가 임의로 문장을 바꾸는 바람에 출판이 무산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
결국 작가인 자신이 한 발 물러서 피눈물을 머금고 내 글 아닌 글로 책을 낼 수밖에 없었고, 작게 축소된 그림과 사진 배치도 출판사 뜻에 맡겨야만 했다. 그렇기에 올해 9월 출판 계약이 만료되면 재계약 없이, 온전히 자신만의 풍부한 감성과 시원시원한 편집을 살려 내 식대로 재출간하리라 다짐하던 터였다.
최소한 인쇄에 들어가기 전 단 한 번이라도 교정본을 보내주어 저자의 확인을 거쳤다면 이렇게 황당한 결과는 피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가공해 바로 찍어내 버리니 저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상한 속을 달래며 인야는 개인 홈페이지에 원래 원고를 올리고, 신문사 기사 링크와 비교해 볼 수 있도록 대조 자료를 남겼다.
새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3월이 시작되었지만, 인야에게는 씁쓸한 악재가 찾아왔다. 주말판 신문에 연재되던 자전거 여행기가 단 5회 만에 유야무야 급하게 막을 내려버린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덤덤하려 애썼지만, 대중을 상대로 시작한 일의 끝 모양새가 너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정식 인쇄본을 보지 못한 채 확인한 인터넷판 신문은, 종선을 알리기 위한 급작스러운 편집과 본문 외적인 자잘한 여행 정보 안내들로 가득 차 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의 글이 아닌 것 같은 기분에 또다시 서글픈 짜증이 밀려왔다.
기진맥진해 있던 차에 운 좋게 찾아와 기본적인 밥줄을 책임져 줄 거라 믿었던 일자리가 단 한 달 남짓 만에 끝이 났다.
채 적응하기도 전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져 당장 내일부터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실패의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았다.
결론은 서글프게도 모두 '내 잘못'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신문사의 요구와 의도를 제대로 맞춰주지 못한 자신의 고집스러운 원고가 원인이자 결과였기 때문이다. 신문사는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상업적인 '관광 안내'식 원고를 원했던 반면, 인야의 글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철저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으로 느끼는 인간사 이야기에 머물렀던 탓이다.
첫 회 섬진강 하이킹 기사가 나갔을 때만 해도 인터넷 블로그 등지에서 "옆에서 친구가 조잘조잘 말하듯 들려주는 선하고 순수한 영혼의 글",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한 기질이 반영된 세계"라며 칭찬하는 댓글들이 달려 스스로도 내심 놀라고 기뻤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기사는 신문사의 가위질로 변색되었고, 독자들의 반응 또한 급격히 시들해졌다. 신문사 입장에서는 연재를 지속할 매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과거 누군가 그의 책 '산티아고 가는 길'을 두고 "다른 여행 수필에 비해 재미가 없다"고 남긴 냉정한 비판의 댓글이 뼈아프게 떠올랐다.
글이 재미없다는 대중의 지적은 겸허히 수용한다. 하지만 신문사나 출판사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은 지울 수 없다.
아무리 투박하고 재미없는 글일지라도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내 글'을 보여준 뒤 비판을 받았다면 이토록 억울하고 짜증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문사의 무분별한 가위질과 편집은 글 고유의 맛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인야는 그저 담담하고 솔직하게 사람 사는 냄새를 적어내고 싶었으나, 그것은 상업 지면의 논리와 맞지 않았다.
여행지의 먹거리, 볼거리, 풍경을 자연스럽게 노출하길 원했던 신문사의 요구에 맞추기엔 그의 글은 너무 주관적이었고, 때로는 비판적이거나 비관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결국 저자가 보낸 개인적인 수필 위에 신문사가 강제로 '관광 정보'를 덧씌우는 과정에서 기사는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고, 서로에게 상처와 짜증만 남긴 채 끝이 난 것이다.
그사이 두어 번 조짐이 보였을 때 신문사 측의 요구를 영악하게 수용했어야 했을까.
비를 맞으며 서 있던 섬진강 원두막처럼, 처량하게 끝난 연재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인야는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