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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문인협회에서 발행하는 '문학도시 11/12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심심하실 때 읽어보세요!
철밥통과 머슴
남순백
“구조요청! 구조요청!”
119를 통해 접수된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는 본부를 통해 가장 빠른 시간에 해당 소방서 및 산하 구조대로 연결된다. 영호는 불편한 손을 내밀어 그러나 잽싸게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기가 입에 닿기도 전에 계급과 성명을 대고 요청사유를 물었다. 간결하면서도 정중했다. 그 과정은 과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맹수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상대의 목소리는 영호의 맏딸정도 되는 젊은 여성의 것이었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제 휴대폰이 하수구에 빠졌어요. 빨리 좀 꺼내 주세요!”
“뭐요? 방금 휴대폰을 꺼내달라고 말했습니까?”
“왜요? 내가 잘못 신고를 했나요? 119가 그런 일 하는 데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신고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지금 구조차가 위급한 인명을 구하러 모두 출동하고 지금 한 대만 대기 중에 있습니다. 언제 더 큰 사고가 있을 줄 모르기 때문에 휴대폰 때문에는 출동을 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뭐요? 시민이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도 도와 줄 수가 없다는 말인가요? 대기차가 한 대 라도 있으면 보내 줘야할 것 아녜요? 내 휴대폰은 아주 비싼 것이란 말예요.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와 소중한 정보가 들어있단 말예요! 이거 모두 아저씨가 책임질 거예요?”
“죄송합니다. 출동한 구조차가 들어오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아저씨 이름이 뭐죠?”
“전화를 받을 때 관등성명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잘 못 들었단 말예요! 똑 바로 다시 대보세요!”
영호는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름석자를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요새는 늘 이런 식이다. 전화 받기가 겁이 날 지경이다. 이십오 년 너머, 결코 짧지 않은 소방관 생활을 해왔지만 요즘은 특히 힘이 든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불을 끄는 것이 힘 드는 것이 아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져버린 불타는 건물에서 외줄을 타는 것도 두렵지 않다. 분수처럼 유독가스를 뿜어대는 건물 안을 헤치며 들어가는 것도 무섭지 않다. 이미 이골이 난 일 아닌가.
멀쩡한 보통사람이 두려운 것이다. 남의 사정은 아랑곳없고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시민이 늘고 있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나자빠져 숨이 넘어가도 전혀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태도들이다. 나만을 위해 살고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나의 길에 방해가 되는 건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다.
한솥밥 이십오 년! 영호가 생각하기엔 정말 순식간이면서도 긴 세월이었다. 산에서 도를 닦았다면 어지간히 도사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영호는 물속과 불속과 사고의 연속선상에서 도를 닦아 이 방면에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화재와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날이 따로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직감한다. 상대방의 매몰찬 말투 때문에 기분은 좀 언짢았지만 보통 때 같았으면 휴대폰이 아니라 코딱지를 하수구에 빠트렸다 해도 자신이 직접 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잘 적중하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자살소동이 벌어졌고 대기차량은 물론 이미 출동 중인 팀까지 현장으로 투입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경황 중에 신고한 휴대폰에 대한 사건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영호가 변심한 애인 때문에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는 아가씨를 세 시간에 걸쳐 겨우 설득하여 경찰에 인계하고 파김치가 되어 사무실로 돌아오니 감사계로부터 전화가 와 있었다.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에게도 감사는 말만 들어도 피곤한 것이다. 평소의 멀쩡한 동료도 감사파트로만 가면 사람이 표변한다. 어깨에 힘이 주어지고 목소리가 뻣뻣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연한 일로도 색안경을 쓰고 사람을 죄인 시 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들면서도 절로 짜증이 났다.
“이 소방관, 오늘 민원인에게 불친절했고 출동요구에도 불응했다면서요?”
“아니? 방금 출동했다가 들어오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말이오?”
“젊은 여자 분이 화가 단단히 났던데요! 손해배상까지 청구한다던데요.”
“아차!”
그제야 출동 전에 있었던 핸드폰여인이 생각났다. 급한 나머지 인계를 못하고 뛰쳐나갔던 것이다. 어쩌면 인계할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의 세태로 보아 충분히 항의가 있을 수 있는 사안이다. 오늘은 뭔가 찜찜한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후회해봤자 죽은 아이 불알 만지기일 뿐이다.
“일단 민원인에게 사과부터 하고 내일 오전 중으로 경위서를 적어 내세욧!”
감사계 직원은 매섭게 한마디 하고는 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영호는 핸드폰여인과의 정나미 떨어지던 대화가 생각나 다시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직원이 알려준 번호대로 전화를 걸었다.
“119소방대 이영호 소방장입니다. 낮의 일로 사과를 드리려고…”
“뭐요? 아저씨가 공무원이에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 불친절할 수가 있죠? 공무원이란 안정된 직장에서 월급 많이 받으니 우리 같은 서민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죠? 벌써 태도가 글러먹었잖아요? 아저씨는 핸드폰도 없나요? 아저씬 핸드폰을 폼으로 가져 다니나요? 핸드폰이 소중하지 않나요? 남의 것이라고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사과라고요? 어떻게 사과할건데요? 내 손해를 다 배상할건가요? 그럴만한 능력이라도 되나요?”
그녀는 영호가 인사말을 끝내기도 전에 따발총을 쏘듯이 퍼부어댔다. 영호에겐 한마디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녀의 항변은 십여 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고막이 터지도록 고함을 질러대더니, 제가 할 말은 다했다는 듯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미리 써놓은 웅변원고를 연습하는 것 같았다. 영호는 기분이 몹시 상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황당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그 이튿날 핸드폰여인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나 싶어 여인들이 나른함을 느낀다는 열한 시쯤에 용기를 내어 전화를 다시 걸었다.
“당신 같은 철밥통 공무원은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배가 불러 우리 같은 서민의 마음은 전혀 모르죠? 그리고 왜 그렇게 퉁명하고 딱딱하죠? 마트 같은 데도 안 가보나요? 친절이 뭔지 알기나 하나요? 말로는 국민의 공복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머슴노릇을 제대로 하고나 있는가요? 서민들 머리꼭대기에 앉아서 군림하고 명령이나 할 줄 알지...”
역시 녹음된 원고를 들려주는 것 같아서 영호는 주저하며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말할 기회를 찾고 있는데 상대방은 또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영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별난 민원인이 자주 있기는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났을까?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언짢았던 그 사건을 어지간히 잊어갈 무렵이었다.
“이 소방장에 대한 인터넷 진정서가 접수되었으니 오늘 중 방문하여 조사를 받기 바랍니다.”
“나에 대한 진정서라고요? 무슨 내용인데요?”
“진정 내용이 길군요. 출동요구 거부… 등, 자세한 것은 방문하여 확인 바랍니다.”
본청 감사실의 전화였다. 아니나 다를까? 또 그 핸드폰여인이었다. 감사관은 매우 딱딱했다. 그는 국민에 대한 무한 봉사자로서의 공무원의 자세를 들어 핸드폰여인이 열거한 십여 개 항목에 대해 그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근거한 그의 지적은 날카로웠고 정말 지당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감사관은 정말 공무원의 사명에 투철한 국민의 머슴 같았다. 그러나 그의 고지식한 훈시를 들으면서 영호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험한 욕지기가 마구 튀어나올 것만 같은 것을 어금니를 물고 참아야 할 지경이었다.
‘야, 이 병신 같은 자식아! 네가 일선에 근무해봤냐? 고약한 민원인에게 시달려보기라도 했냐? 불 속에나 한번 들어가 봤냐? 불어터진 시신을 안고 물속을 헤엄쳐 봤어? 썩은 시체를 안아보기나 했나? 불에 덴 사람 꺼내보기라도 했냐? 현장경험이 있기나 하냐? 백면서생이 괜한 말뿐으로 육갑 떨어서 고생하는 사람 기죽이지 마라!’
“이 소방장!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민원인은 우리의 당신에 대한 조치가 미흡할 경우 인터넷에 올려 당신을 혼내겠다고 했소! 전체 소방관의 명예를 위해서 찾아가서 깊이 사과하고 사건을 더 키우지 마시오!”
감사관은 자신이 작성한 진술서 앞뒷면에 영호의 손가락을 잡고 인주를 묻혀 꾹꾹 찍으면서 이렇게 경고했다. 그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영호도 당연히 찾아가서 자신의 실수를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러나 핸드폰여인은 기분 나쁘다며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면 영호가 단 한마디도 끝내기 전에 그녀는 다시 원고를 따발총처럼 읽어버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리기를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렇게 뒤보고 닦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한 가운데 또 며칠이 흘러갔다. 마음속으로 이제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반쯤은 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날이었다. 야간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을 하려는데 서장의 호출이 왔다. 서장은 그가 서장실에 들어서서 문도 닫기 전에 호통을 쳤다.
“이 소방장! 도대체 근무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거요?”
“예! 어제 밤에 여섯 번 출동했고 자세한 내용은 서면으로 보고서를…”
“엉뚱한 소리 작작 하시오! 국가권익위원회로부터 내려온 이 서류를 보시오! 지금이 어느 땐데 이렇게 민원인을 막 대해도 되는 것이오? 당신 때문에 봉사하는 기관으로서의 우리 소방서의 명예가 이렇게 더렵혀져서야 되겠소? 고생하는 대원들 보기 미안하지도 않소?”
국가권익위원회는 예전의 국민고충처리위원회다. 그곳은 이름그대로 국민의 고충을 처리해 주는 기관인데 영호는 자신이 국민에게 그런 고충을 준 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멍하니 서장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요? 민원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민원인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제대로 사과도 않고…. 이거야 원, 아무리 철밥통이라지만 공무원으로서 이럴 수가 있소? 만약 이 사실이 인터넷에라도 뜨면 우리 소방서의 명예와 내 체면은 무엇이 되겠소?”
‘아니? 직원의 어려웠던 상황을 정상참작은 못할망정 그놈의 인터넷을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요?’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영호는 꾹 참았다.
“아! 그게, 전화를 몇 번이나 했지만 만나주질 않아서…”
“소방사나 소방교도 아니고, 소방장 중에서도 고참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의무감과 사명감이 부족한 건 아닌가? 그 집 앞에 가서 꿇어앉아 밤을 새워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이 문제는 이미 자네 개인차원을 넘어섰단 말일세!”
영호는 제 입장과 체면만 생각하고 부하의 입장은 아랑곳도 않는 서장에게 할 말이 많았고 아니꼬운 생각도 들어 한바탕 내뱉고 싶었지만 공무원생활 이십오 년에 성질도 죽고 자신감도 줄었다는 것을 느끼며 더 구부정해지는 어깨를 펴지도 못한 체 벌레 씹은 얼굴을 해가지고 서장실을 나왔다.
“오늘 내로 처리해! 국가권익위원회에도 연락해서 확실히 해결하고!
서장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교대 후 식전이라 시장기가 엄습해왔지만 영호는 인터넷에서 국가권익위원회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의외로 젊은 아가씨였다.
“본청으로부터 선생님의 소명자료를 받아 보았는데 정말 억울한 점이 많더군요.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어쩌겠어요? 진정인이 선생님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고 화를 많이 내고 있어요!”
“먼저 물의를 일으킨 점 죄송합니다. 그러나 원만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여러 번 시도해보았지만 내 말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상위부서로 자꾸 고발만 해대는 데는 전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요즘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우리도 골치가 아픕니다. 특히 공무원이 관련된 일에는 진정인들이 더 민감한 것 같아요. 공무원을 한편에선 부르주아계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에선 머슴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많거든요! 일단 일이 벌어지면 공무원은 약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국가권익위원회라면 민원인 한쪽의 권익만 생각지 말고 공무원의 권익도 생각해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일부러 출동 안한 것도 아니고 출동할 인원이 부족하고 더 위급한 사고가 발생하여 출동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을 사사건건 이런 식으로 집요하게 따지고 든다면 앞으로 민원인 무서워 일을 어떻게 소신 있게 일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영호는 그동안 당하며 참았던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상대는 젊었지만 차분하고 노련했다.
“어쨌든 진정인이 자신의 손해에 대한 합의를 요구하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양측이 큰소리 없이 원만하게 합의를 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막강한 국가기관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합의를 종용할 수 있습니까? 물에 빠진 애완견을 구해 달라하고, 택시 잘 안 잡힌다고 119 부르고, 감기 걸렸다고 병원에 데려 달라하고, 술 취한 취객을 귀가 시켜달라는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더 응급한 환자가 죽어간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하죠? 그 사망사건도 소방관이 합의를 봐야하나요?”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귀하는 어차피 공무원인데 이런 것을 민원인이 다시 청와대 신문고나 게시판에 올리고 인터넷에 올리면 뭐 이로울 게 있겠어요? 이쯤에서 참는 게 득이 아닐까요?”
‘망할 놈의 인터넷이라니!’
영호는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욕설을 가까스로 참으며 전화기를 놓았다.
영호는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하여 초등학교 때 벌써 연못 얼음 속에 빠진 동생을 구하여 어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후에도 위기를 맞은 친구를 구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를 두고 주위에서는 크면 특공대나 구조대에 가면 큰일을 해낼 것이란 칭찬의 말들이 자자했다. 그래서 자신도 구조대가 있는 소방공무원이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공무원시험의 통과가 큰 난제였다. 불룩한 팔뚝의 알통을 보나 맹수 같은 기민함으로 보나 체력은 넘쳐났고 소방관이 되고 싶은 열망도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어쩐지 필기시험 앞에서는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으나 세상에 그것만은 맘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고민이 점점 깊어갈 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소방서에서도 군입대자를 대상으로 의무소방관을 모집한다는 정보였다. 새벽부터 기다리다 제일 먼저 접수를 시켰는데 초급대학졸업장과 신체검사만으로 떡하니 의무소방관에 붙었다. 당장 진짜소방관이 된 듯싶은 기분이었다. 군대 대신 소방서에서 의무소방관생활을 하면서도 영호는 같이 근무하던 진짜소방관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해야만 진짜로 소방관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화재장소에서 조금 떨어져 소방관들의 화재진압 보조역할이 그의 임무였는데 그는 불나방처럼 불만 보면 소방팀장보다 먼저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돌출행동으로 미친놈이라는 소리도 자주 들었고 상사로부터 혼이 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행운의 여신이 그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제대를 한 달 앞두고 소방관 임용을 희망하는 의무소방관만을 대상으로 치른 제한경쟁시험에 합격하여 꿈에도 그리던 진짜소방관이 된 것이다. 그는 고등고시에 합격한 사람보다 더 기뻐했다. 뿌듯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좋아하는 일은 도시락을 싸다니며 말려도 숨어서라도 하는 법인데 영호는 말리는 사람 없이 좋아하는 일을 하니 하루하루가 즐거울 뿐이었다. 정복차림으로 출근이 하고 싶어서 새벽잠을 놓치기 일쑤였다. 모두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우러러보는 것 같았다. 그런 만큼 일도 열심히 했다. 남들은 그의 바지런함을 두고 위험한 일은 혼자서 다 한다고 칭찬 반 질투 반으로 비아냥거렸지만 그런 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십삼 년이란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영호는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게 된 데는 그럴만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도통 예감이 좋지 않았다. 폭풍전야처럼 아무런 조짐이 없는데도 영호는 순간순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전은 별일 없이 그럭저럭 구렁이 담 넘어가듯 흘러갔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한술 뜨고 나자 긴장이 풀리고 온몸이 나른하며 졸음이 쏟아졌다. 이때 비몽사몽간에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동! 출동! ○○번지 3층 건물에 화재! 반복한다. 출동하라”
영호는 흡사 짐승과도 같이 반사적으로 소방차에 올랐다. 다른 대원도 마찬가지였다. 차는 출발했고 소방복과 장비는 달리는 차 안에서 완비가 되었다. 화재는 아담한 삼 층짜리 다세대주택을 온통 새카만 연기로 뒤덮고 있었다. 더군다나 장소는 작은 주택들이 바둑판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복잡한 주택가 한가운데였다. 좁은 도로에는 이리저리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어서 화재현장까지 도착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자칫하면 다른 건물로 불이 옮겨 붙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빨리 출동한데다가 소방서와 가까운 거리여서 영호 팀이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구경나온 주민들은 많지 않았다. 몇몇 안 되는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서 자신의 집으로 불길이 올까봐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화재는 금세 초동진압이 되는 것 같다가도 조금 있다 보면 딴 집에서 시커먼 연기가 화차 굴뚝처럼 푹푹 솟아오르곤 했다. 건물은 생각보다 커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낮에 집에 있던 세입자들이 대피를 했고 야근을 하고 와서 낮잠을 자던 몇 사람도 모두 대피를 했다. 대충 인명구조가 끝나가는가 했는데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안 돼! 저기 이층에 우리 옆집 딸아이가 있어요!”
“뭐요? 옆집 딸아이가 바보요? 왜 이 난리 통에도 안 나오고 있단 말이오?”
“아니에요. 고등학생인데 오늘 시험을 쳤다면서 일찍 돌아왔어요! 아마 잠이 들었나 봐요. 틀림없이 있어요!”
불길은 시커먼 연기와 함께 집집의 유리창과 문을 부수며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저 건물 속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특단의 용기가 필요했다. 비상사태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안에 있다는데 확인을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들이 살려고 죽음을 피해 뛰어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영호는 재빨리 팀원 두 명에게 뒤따를 것을 명령하고 소방호스를 잡고 사다리를 타고 여인이 가리킨 창문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내부는 줄기찬 물세례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가구에서 불꽃이 일고 나무를 붙여놓은 천정이 막 무너져 내려앉고 있었다. 영호는 주관창수가 되어 뒤따르는 부관창수 두 명과 함께 여인이 가리킨 집의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집안은 불길에 싸여 있었지만 가구와 옷가지들이 뿜어내는 시커먼 연기 때문에 내부는 어두웠다. 불은 방 세 개 중 제일 안쪽 방, 닫힌 문에 붙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신나게 타고 있었다.
불타는 문을 발로 차서 부수자 안에는 한 사람이 깊은 잠이 들었는지 연기에 취했는지 책상에 엎드려져 있었다. 여고생이었다. 흰색 상의와 까만 교복치마를 입은 채였다. 영호는 소방호스를 놓고 수건에 물을 적셔 그녀의 얼굴에 씌운 채 안아들었다. 다른 팀원들도 함께 거들었다. 한사람이 먼저 소녀를 받으려고 창문을 타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소녀를 막 건네고 다시 소방호스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천정의 불붙은 물체가 영호를 덮쳤다. 온몸에서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이 힘이 쫙 빠지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이 사고로 영호와 함께 있던 소방관 한 명이 숨지고 영호는 얼굴부위 조금만을 남기고 전신화상을 입었다. 정신을 잃은 지 꼭 열흘 만에 반쯤 의식을 찾았다. 정신이 조금 들자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죽음보다 고통스런 통증이었다. 도대체 이 극심한 통증이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끼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흡사 미라처럼 자신의 몸뚱어리가 꽁꽁 동여매여 있다는 것도 알았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곤 눈알뿐이었는데 눈망울을 이리저리 돌리자 자신의 모습이라 해도 좋을, 비슷한 형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누워있는 게 보였다. 머리를 들고 있는 사람, 공중으로 한쪽 다리를 치켜든 사람, 양팔이 묶여있는 사람 …, 모두 제각각의 모습이었으나 하나 같이 붕대에 칭칭 동여맨 모습은 비슷했다.
며칠이 더 지나자 영호는 자신이 서울의 화상환자전문 의료기관에 있다는 것과 자신과 함께 불을 끄던 보조 관창수가 사망했다는 것, 아울러 자신들이 구출한 여고생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부터 또 며칠이 더 지나면서 자신의 모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붕대가 한 꺼풀씩 풀릴 때마다 그의 놀람과 절망감도 더해갔다. 우선 붕대가 풀린 손은 마치 튀겨놓은 통닭의 모습을 하고 있어 자신의 것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으며 조금도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팔다리의 사정도 손과 엇비슷했다. 머리엔 머리카락이 단 한 올도 없이 타버렸고 살갗은 뒤집혀져 있었다. 엉덩이와 배에도 살이 뒤집어져 진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시간이 지나며서 영호는 전신화상을 입은 자신의 몸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고목나무 껍질을 옷 대신 입은 괴물의 형상임을 알 수 있었다. 살맛도 나지 않았고 자신이 보기에도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렇게 영호가 가까스로 건진 생명을 계속 부지할지를 두고 심한 갈등을 겪고 있을 즈음에 영호의 담당 계장이 병문안을 왔다.
“이 소방장! 이제야 다 살아났구먼. 생환을 축하하네!”
“...... !”
“먼저 번에 왔을 때, 난 자네가 다시 일어설 줄 알았네. 자네가 그 와중에도 자네 막둥이딸 이름을 자꾸 부르더군. 가족을 찾는 사람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지.”
“제가 딸아이 이름을요?”
“그래! 자네가 가망이 없다고 부산병원에 입원한 채로 있는 것을 우리들이 적극 주장하여 이곳으로 옮겼다네. 그건 오로지 자네가 으리앞에서 자식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병원옥상에서 헬기를 탈 때만해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더니만…”
“제가 헬기를 타고 왔다고요?”
“그래. 이만만 해도 거의 다 살아난 게로군. 걱정 말고 막둥이를 생각하며 잘 치료 받게. 화상 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자네도 어느 정도 알걸세. 의료보험 외의 치료경비를 우리가 모으고 있으니 잘 될 거야!”
“치료비를 모으다니요? 공상인데 국가에서 의료비를 지원해주지 않는가요?”
“미안하지만 국가에서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직원공제회와 직원성금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어!”
“계장님, 농담이겠죠?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 !”
영호의 치료는 계속되었다. 치료과정은 고문실의 모습보다 더 비참했다. 타서 불탄 살갗을 벗겨내는 고통은 모진 고문 이상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호도 고통을 참아내려고 이를 악물었으나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금니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나병환자처럼 우둘투둘 문드러진 살결을 고르고 불규칙하게 달라붙은 살갗은 벗겨내고 차오르는 새살을 정리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몸이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 그 자체였다. 영호는 온몸이 불에 데었기 때문에 덴 곳에 이식할 피부가 없어서 더욱 곤란했다. 눈썹에 겨드랑이털을 이식하였는데 꼬불꼬불한 털은 자라면서 눈 속으로 파고들어와 눈알을 마구 찔러댔다.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되는 효능 좋은 외국 약은 자비로 부담을 해야 했다. 값이 비싼데다 보험적용이 안 되니 더 큰일이었다. 근무처에서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지원금이 도착했으나 턱 없이 모자랐다. 논둑에 물이 새듯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 돈이 들어갈 곳은 여러 군데 있었다. 남편의 생명이 소생하는 기쁨도 잠시 영호의 아내는 약값과 알게 모르게 들어가는 과외의 치료비를 구하러 다닌다고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장장 이태가 넘도록 병원생활이 이어졌다. 수술도 계속 이어졌다. 바비큐를 굽듯 전신을 돌려가며 웃자란 살갗을 벗겨내고 고른 새살이 돋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호는 튀겨놓은 닭다리 같던 손가락에 아주 서서히 그러나 약간의 힘이 주어지는 것과 함께 생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삶에 대한 의욕이 솟아났다.
그간 자신의 옆에서 함께 투병을 하다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사람도 많았다. 왜 화상환자는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도 정신이 초롱처럼 반짝이는 것일까? 철저하게 고통을 맛보라는 신의 형벌이라도 되는 것일까? 영호는 심한 화상을 당해 함께 입원해 있는 주위의 사람들이 애처로웠다. 그 중에서도 정작 자신의 고통을 참아가며 옆 침대의 환자를 돌보며 다정스레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에 잠자듯 가버리는 환자들의 경우는 더 안타까웠다. 한 사람이 가고나면 그만 그를 따라 함께 목숨의 끈을 놓아버리는 환자들의 심정도 이해되었다.
영호는 이태가 훨씬 지난 후 아직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퇴원했다. 당분간은 근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요양을 주로 하면서 직장에는 출근부에 도장만 찍었다. 그 후 이 년간은 특정 업무 없이 출퇴근도 자유롭게 근무했다. 그때만은 자신의 직장이 철밥통이란 사실이 실감났다. 그러나 몸은 불편해도 놀고먹는다는 것은 그에게 언제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놀고는 못 베기는 것 또한 그의 천성이었다. 그래서 웬만큼 거동이 가능해지자 가족과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유 업무를 달라고 요구하고 그날부터 꼬박꼬박 정상출근을 했던 것이다.
정상근무를 하여보니 사고 전보다 세상이 많이 변해버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우선 사람들의 요구사항이 각양각색이었고 그 요구가 어느새 요청이나 부탁에서 당당한 권리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변화는 사람을 재난에서 구조하는 데나 불 잡는 데는 귀신같은 그로서도 감당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영호는 오늘은 어찌하던지 핸드폰여인을 만나 끝장을 보아야겠다고 작심하고 주소를 적고 인터넷에서 도로명, 주소, 약도까지 찾아서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동네 가게에서 큼지막한 수박 한통과 과일을 사서 검정 비닐봉투에 넣었다. 깎아지른 듯 좁은 비탈길을 반시간쯤 오르자 숨이 턱밑에 와 닿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이들 소꿉장난에나 쓰일 듯싶은 자그마한 무허가주택들이 좁은 길을 따라, 불규칙하게 닥지닥지 붙어 늘어서 있었다. 골목길을 들락날락 몇 번을 반복하다 드디어 집을 찾아냈다. 집에는 누를만한 초인종도 없었다. 영호는 안이 빠끔히 들여다보이는 낡은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여기가 이선화씨 집 맞습니까? 이선화씨!”
“누구세요?”
“소방서에서 왔습니다. 이영홉니다! 문 좀 여세요!”
생활에 잔뜩 쪼들린 듯 남루한 차림의 젊은 여인이 문을 열고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안에서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나왔다. 순간 영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선화가 바로 그 이선화였어?”
상대방도 놀란 눈을 치켜뜨고 영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니, 아저씨! 정말 아저씨 맞아요? 아저씨가 여기까지 어떻게?”
영호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여인은 영호가 사고를 당하면서 구해낸 바로 그 여고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막힌 우연보다 더 기가 찬 것은 소방서 구조대에 의해 목숨까지 구한 사람이 더구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한사람의 소방관이 숨지고 또 한 사람이 반병신이 된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소방관을 상대로 그런 고발장을 집요할 정도로 계속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영호는 화가 솟는 정도를 넘어서, 묘한 호기심까지 일었다.
“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새로 건진 선화가 어디선가 멋지게 살아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인생이란 참 우습군?”
“여고를 졸업하고 재수가 없어 대학에 떨어져 전문학교를 나왔죠. 성질이 괴팍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았는데 남편과는 늘 싸움질만 하다가 그만 이혼을 하고 말았죠. 먹고 살려고 직장에 여러 번 취직을 했습니다만 그때마다 못된 주인을 만나 쫓겨나고 말았어요.”
그녀는 무엇인가 울분에 차긴 했으나 손님을 집안으로 들어오란 말도 없이 선 채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영호가 전화 수화기를 통해서 듣던 에의 그 막무가내소리였다. 그녀는 때때로 이를 악물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홀어머니가 외동인 저를 키운 것처럼 저도 딸 하나쯤 잘 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활이 점점 어려워만 가니 그마저도 간단치 않더군요. 내 생활이 쪼들리니 잘사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났지요. 직장에서 자주 쫓겨나다보니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싫어지더군요. 그 중에서도 공무원만 보면 더 신경질이 났죠. 날이 갈수록 이혼할 때 합의금으로 쥐꼬리만큼 받은 전세보증금이 줄어 결국은 보증금 없이 달세만 있으면 되는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요.”
영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도 집요하게 마치 진돗개인 양 자신을 물고 늘어지던 그녀의 실체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선화의 어려운 사정은 이해가 되지만 자신의 불행을 애꿎은 사람에게 그렇게 무참하게 전가시켜도 죄책감이 들지 않던가?”
“죄책감은요? 지금은 인터넷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고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아도 고발, 신고, 진정… , 온갖 것을 다 할 수 있잖아요. 위계질서가 잘 체계화 되어 있는 철밥통이나 대기업사원은 바로 우리의 밥이죠!”
“아니? 뭐! 우리라고?”
“그럼요.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인터넷동호회가 있죠. ‘홀로 사는 어머니 모임’ ‘이혼녀 모임’ ‘가난한 착한 사람들 모임’ 등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죠! 우리들은 사안별로 서로 도우며 살아가지요. 나와 알력이 있는 기관과 사람을 먼저 상위기관 홈페이지에 고발도 하고. 그 후에 그 사실을 우리 카페에 올리면 수백 명이 상위기관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이어서 그 기관과 당사자에게로 전화를 해대죠. 그러면 일이 쉽게 풀리기 마련이죠. 대부분은 이런 사실만 넌지시 알려줘도 미리 항복을 하게 되죠.”
“선화는 참 좋은 기술을 익혔군 그래?”
“이 어려운 세상에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죠!”
할 말을 잃어버린 영호는 씁쓰레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번일 만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지? 목숨까지 건져주었는데! 나 같은 하위 머슴에게는 그렇게 해주는 것만도 천만 다행이지.’라고 생각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