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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효자 한림학사 八達山 主人 李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을 정계의 전면에 배치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매진하는 한편 고려의 유신(遺臣)들에 대한 포섭과 회유에도 정성을 기울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역성혁명을 일으킨 태조로서는 전조(前朝)의 충신들로부터의 지지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예에서 보듯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이들로부터의 지지와 협조를 받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려 말의 충신들은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낙향 은둔하며 조선의 관직제수에 불응하고 자신들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였다. 망천(忘川) 이고(李皐, 1341∼1420) 역시 그러한 은인(隱人)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광주(廣州)로 낙향하였던 송산(松山) 조견(趙, 1351∼1425), 둔촌(遁村) 이집(李集, 1314∼1387)과 함께 고려말 3학사로 불리는 인물로 수원 광교산에 은거하고 호를 망천이라 하였다.
이고는 고려 말 원나라로부터의 내정간섭을 혁파하고 갖가지 개혁정치를 구현해나가던 공민왕 11년(136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공민왕 23년(1374)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그는 집현전제학, 한림학사, 사헌부집의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는 사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키며 정계를 장악하자 고려의 국운이 다하였음을 알고 공양왕 2년(1390)에 관직에서 사퇴, 은거에 들어갔다. 그의 은거지는 광교산의 일맥이 닿고 있는 팔달산 부근으로 이 일대를 중심으로 이고와 관련된 유적과 일화(逸話)들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오고 있다.수원시 남창동의 팔달산 자락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던 학사정(學士井)이라는 연못에서 낚시를 하고 광교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망천에 나가 함께 은거한 이들과 함께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세상을 잊고 소요하며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때 공양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일에는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집 뒤에 있는 탑산(팔달산)의 경치가 무한히 아름답고, 산정에 오르면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마음과 눈을 가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 즐겁다”고 하였다.그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고려말의 유신들을 불러모으면서 이고의 경륜과 어진 심성을 알고 그를 등용하고자 삼사좌승겸경기우도안렴사(三司左丞兼京畿右道安廉使)에 제수하여 조정에 출사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고가 출사하지 않자 태조는 화공(畵工)을 시켜 이고가 살고 있는 탑산의 경관을 그려오도록 하였는데, 그 그림을 본 태조는 “역시 아름다운 산이다”이라고 감탄하며 산이름을 ‘팔달산’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고 한다.
한편 광교산에도 이고와 관련된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망천이라 이름한 수원천 상류 시냇가에서 8학사와 더불어 소요하며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지며 이 부근에는 용연 문암 선암 약암 등의 승경지가 알려져 있다. 또한 권선리(勸善里)는 이고가 벼슬을 내놓고 이곳에 살면서 백성들이 어질고 착하게 살기를 권하였는데 그의 높은 인품과 가르침에 따라 많은 백성들이 감화되어 ‘권선’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렇듯 이고는 수원에 은거하여 세월을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태조실록』에는 이고가 대간(臺諫)의 직책으로 활동하다가 태조 4년(1395) 민생의 안정을 위해 군적(軍籍)의 정리를 뒤로 미루자는 상소와 풍문을 인용해 상소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태종 9년(1409)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출사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 초기의 실록이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편찬되어 신뢰성에 문제가 있지만,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고는 태조 4년(1395)경에 은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건국초기 이고의 출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고는 태조의 검소한 생활과 민생의 안정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자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은거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이고의 절의는 조선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는데 『세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졸기에 ‘공은 성품이 강직하며, 조행이 뛰어나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집현전학사에 이르렀다. 노쇠하여 수원에 물러나 있다가 별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수원에 은거한 이유를 노쇠하였기 때문으로 기록하였지만,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이고의 절의를 잘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고의 사망에 대해 세종은 효자의 정려(旌閭)를 내리게 하고 ‘고려효자한림학사이고지비(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之碑)’라는 비석을 마을 입구에 세워 이고의 넋을 위로하게 하였다. 그런데 비석의 제목을 고려효자 한림학사라고 한 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조선에서 이고에게 내린 벼슬은 삼사좌승, 경기우도안렴사, 공안부윤 등으로 종2품에 해당하는 것임에서도 고려의 벼슬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점이 조선 건국초 이고 기록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세종대에 정려가 내려지고 비석을 건립한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이고가 다시 한번 현창(顯彰)되는 시기는 정조대의 일이다.정조는 수원부를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으로 정하고 수원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긴 이후 화성성역(華城城役)이라 이름한 신도시 건설을 진행하면서 팔달산이 고려 효자 이고가 살던 곳이라 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화성의 남문을 팔달문(八達門)이라 하고 그의 유허지(遺墟址)에 학사대(學士臺)를 세워 유적을 표하게 하였다. 그리고 1795년의 을묘년 원행(園幸) 때에는 종2품의 중신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이때 정조는 제문을 직접 지으며 이고를 팔달산주인(八達山主人)이라고 칭하여 이고가 신도시 수원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치제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산 이름이 팔달인 것은 성주(城主)께서 주신 바였으니,그 가운데 일민(逸民)이 있어 홀로 기거하며 지냈네.고사리는 수양산에 자라고,토지는 반곡(盤谷)에 비옥하니,장자(莊子)는 낚시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 않았으며,위야(魏野)는 자신이 살 곳을 알았네.이 곳에 나아가 화성을 건치(建置)하매,팔달산이 끌어당기듯 둘러싸고 있으니,망루가 즐비하고 여정이 갖추어져하나의 큰 도회를 이루었네.주인옹이 여기에 있으매황연히 신이 살피는 듯하니,광세(曠世)의 감회가 깊은지라,이에 나의 행차를 멈추었네”
정조는 이고를 백이, 숙제와 당 나라 때 무녕 절도사로 있다가 죄를 지어 파직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처음에 살았던 반곡에 은거한 이원(李愿) 장자, 송나라 때 섬주의 동교에 초당을 짓고 거문고와 시로 세월을 보내며 진종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은 은사 위야 등에 비유하였다. 정조는 이고를 위와 같이 비유하여 이고가 은거한 것은 선비의 절의를 다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이고의 신령이 화성을 무사안녕하도록 도와줄 것을 바랐던 것이다.정조의 치제이후 이고의 위상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순조를 비롯한 헌종 고종 등 후대의 임금이 행한 화산 능행차에는 반드시 이고의 묘에 예관을 보내 치제를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수원의 유생들은 이고를 배향하는 사원(祠院)을 건립하고자 조정에 청원하는 일도 있었다.
정조 19년(1795) 을묘년 원행시에 수원 유학(幼學) 윤성렬(尹聲烈) 등이 통문을 돌려 전국에 원우(院宇)와 영당(影堂)을 세운 것은 조정에서 절의와 도학을 숭상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니 수원에도 이고의 사원을 세워 줄 것을 청하였다. 이들은 고려조의 유신 가운데 정몽주를 비롯하여 8학사로 불리는 조견 이집 이색 길재 김주 서견 원천석 등의 서원과 향사(鄕祠)가 곳곳에 건립되었으나 오직 이고의 사원만 건립되지 않아 흠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박주양(朴周陽)이란 유생이 주동이 되어 수원에 이고 배향사원의 건립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사원설립을 허가해 줄 것을 또다시 주장하였다.
이고의 묘는 하광교동 갈곡(葛谷)의 여주이씨 시조비 우측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광교산 남록으로 천곡(泉谷)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모두 4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상단으로부터 공인풍산홍씨(이고의 며느리), 이윤방(李允芳 1310∼?, 이고의 아버지), 이고, 이심(李審 1379∼?, 이고의 아들)의 묘가 차례로 모셔져 있다. 이윤방(1310∼?)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사온서(司署) 직장동정, 서령동정 등의 실직을 역임하였다. 이윤방이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생년으로 미루어보면 고려말에 사망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이고가 수원에 은거한 것은 부친의 묘소를 수원에 정하고 말년을 수원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공양왕이 사자를 보내 이고를 찾았다는 이야기도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侍墓)중에 있던 이고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고의 묘는 원래 묘표와 상석, 향로석만 갖춘 단촐한 묘였으나 최근에 봉분에 호석을 둘렀다. 현재의 묘표는 영조 9년(1733)에 건립한 것으로 연꽃봉오리 형태의 개석과 하엽문의 방부 형태를 하고 있다. 전면에는 ‘고려한림원학사이고지묘(高麗翰林院學士李皐之墓)’라고 쓰여져 있으며, 후면에 9행의 짧은 음기가 남아 있다. 세종대에 세웠다는 비석이 언제 유실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경종 4년(1723)에 촌부가 밭에서 찾았다는 이야기가 『여주이씨가승』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 찾은 비석의 양식을 상고하여 1733년에 다시 조성하여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이고의 묘표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이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조선초기에 유행하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고려말·조선초기의 혼란기에 근거자료가 부실한 상황이긴 하지만 공식기록인 『세종실록』의 기록이 보다 정확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고가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에 등장하고 있으며 실록의 졸기는 당대의 중요인물과 이름난 명사에 대한 평가를 사후에 곧바로 기록하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이고의 아들 이심은 아버지가 은거하였던데 비해 태종 8년(1408)에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세종대의 명신이 되었다.
세종 6년(1424) 사헌부 지평을 거쳐 1427년 봉상소윤이 되어 ‘왕은 무슨 일이든지 끝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해야한다…인심을 화목하게 하고 풍속을 후하게 해야 한다’는 등의 계문을 올려 가납(嘉納)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강원도관찰사와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실록에는 그의 성품이 청근(淸謹)하고, 학문이 매우 높았으며 행실이 뛰어난 인재로서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결백하고 모든 일에 공평무사(公平無私)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평은 이심이 청백리에 선록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후일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위와 같이 이고를 중심으로 한 여주이씨 일족은 여말·선초기 수원의 대표적인 명문가로서 이고의 절의가 드러나고 그의 아들 이심이 청백리에 선록되는 등의 영광을 누리면서 가문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 후 이고의 후손들도 대대로 수원지역에 거주하며 조선시대의 많은 문화유적을 광교산 일대에 남기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분묘와 석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는 최근의 상황으로 볼 때, 이고 묘를 비롯한 주변의 묘역에 대한 보존 대책이 서둘러 마련되어 팔달산주인 이고의 유적이 보호받기를 바란다
학사공[學士公]- [휘(諱): 고(皐)]
( 여주이씨사록[驪州李氏史錄 )
학사공[學士公] 사적[事蹟]을 고찰하여 재정립[再定立]
학사공[學士公]의 행적[行蹟]이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태조[太祖] 누징불기[累徵不起: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일어나지 아니했다]라고 가전[家傳]에 전하고 있으나, 이 기록[記錄]이 사실과 상이[相異]하니 태조원년[太祖元年: 1392년]에서 태종9년[太宗九年: 1409년]까지 17년동안 관직[官職]에 출사[出仕]한 행적[行蹟]을 조선조[朝鮮朝] 왕조[王朝] 실록[實錄]에서 발췌[拔萃]하였다.
가전[家傳] 영조을축보[英祖乙丑譜: 1745년]에 재국조보감[載國朝寶鑑]에서 경기안렴사[京畿按廉使]로 확인하였으나, 또 가전에서는 누소불기[屢召不起]라 하였고, 설헌공[雪軒公] 휘[諱] 중견[仲堅] 묘표[墓表]에는 고려[高麗]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되어 있으니 가전[家傳]을 믿는다고 하였다.
공[公]의 서거[逝去]가 세종2년[世宗二年: 1420년] 8월 9일이니 572년이 지난후 지금에 와서 여러 문헌[文獻]을 상고[詳考]하여 공의 사실[事實]을 재조사[再調査]하게 되었다. 선현[先賢]께서 고증[考證]이 불충분[不充分]함을 지적[指摘]해 두었으나 그 후 지금까지 재조사[再調査]하지 못하고 전[傳]해 오게되었다.
숙종신사보[肅宗辛巳譜]에서 약 290년이 지난후 학사공[學士公]의 역사[歷史] 행적[行蹟]을 탐구[探究] 조사[調査]하여 재조명[再照明]하고 사실[事實]을 새로 정립[定立]하고져 한다.
학사공[學士公]의 행적[行蹟]이 잘못 전해온 사유]
학사공[學士公] 휘[諱] 고[皐]는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경오[庚午] 개성부[開城府]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사퇴[辭退]하고, 수원[水原]에서 태조원년[太祖元年]까지 약 삼년 여 은거[隱居]하였다. 이때에 고려가 쇠망[衰亡]해가니 세념[世念]을 버리고 광교천[光敎川]에서 낚시를 드리우며 휴식[休息]하던 반석[磐石]에다 조대[釣臺]라 크게 각자[刻字]하였는데 광복 후 1965년까지 보전되어 전해오고 있었으며 광교천을 가르켜 망천[忘川]이라 하였는데 공[公]의 호[號]가 되었다. 송산[松山] 조견[趙狷]과 둔촌[遁村] 이집[李集]이 다 함께 팔달산[八達山] 기슭에 은거하며 학문을 나누고 교유[交遊]하였다고 하여 후세사람들은 세칭[世稱] 삼학사[三學士]라 부르고 있다.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되고 태조원년[太祖元年: 1392년]에서 태종9년[太宗九年: 1409년] 9월까지 17년간 공[公]이 관직[官職]에 출사[出仕]하였으니 수원[水原]에는 그간 행적[行蹟]이 있을 수가 없다.
태조원년에 삼사좌승[三司左承]에 오르고 경기안렴사(按廉使)를 겸(兼)하였으며 대간[臺諫)을 오래도록 역임하여 관리들의 잘못을 규탄(糾彈)하고 기강[紀綱]을 바로 잡아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진작[振作]시키니 고려조의 문란[紊亂]했던 행정은 말끔히 사라져조선건국에 크게 공헌[貢獻]하였다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태종9년[太宗九年: 1409년] 9월 3일 72세에 이르러 공안부윤[恭安府尹]과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의 벼슬을 내어놓고 노퇴[老退]하고자 걸귀[乞歸: 왕이 사퇴를 허락하지 않아 엎드려 애걸하여 겨우 윤허를 얻어 시골로 돌아간다는 뜻] 로 광교(光敎)로 낙향 하시어 집필과 후학양성에 전념하시었다.
그 후 권선리[勸善里]로 이주[移住]하여 살면서 주민(住民)들에게 선[善]과 도[道]를 권장[勸奬]하였으며 세종2년[世宗二年: 1420년] 8월 9일 서거[逝去]하시었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화성[華城]을 축성[築城]할 때 학사공[學士公]의 유적[遺蹟]을 엄밀히 살펴보고서 부모님께 효도[孝道]를 다하여 선대[先代] 세종조[世宗朝]에서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내려졌고, 만년[晩年]에 이곳에 사시면서 이웃들에게 학문(學問]과 더불어 선(善]과 도(道]를 권장(勸奬]한 깨끗한 선비정신을 흠모(欽慕]하여 공(公]의 유허(遺墟]에 학사대(學士臺]를 건립(建立)하여 포장(褒奬]하였다.
또 공(公)이 마시던 우물을 학사정(學士井]이라 사명(賜名]하고 남문(南門)을 팔달문(八達門)이라 사명(賜名)하였으며, 공(公)이 사시던 내곡(內谷)을 권선리(勸善里)라 사명(賜名)하였으니 지금의 권선구(勸善區)이다.
세종조[世宗朝]에서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명정[銘旌]하고 특정[特旌] 정려석비[旌閭石碑]를 권선리[勸善里] 입구[入口]에 건립[建立]하였는데 그후 정변[政變]의 와중[渦中]에 없어졌으며 약 300년후 경종계묘[景宗癸卯: 1723]년에 매몰되었던 정려석비[旌閭石碑]가 발견되어 묘전[墓前]에 이치[移置]하였다.
공이 외간[外艱]을 당한 때는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경오[庚午: 1390]년 이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사퇴[辭退]하고 여막[廬幕]을 지어 3년동안 시묘[侍墓]하였다.
또 예관[禮官]을 보내어 공의 묘소[墓所]에 치제[致祭]하시니 열성조[列聖朝]에서 다섯 차례나 치제[致祭]가 계속되었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학사공[學士公]의 유적[遺蹟]을 답사[踏査]하신 후, 축화성[築華城]하고 남문루[南門樓]에 앉아서 팔달산[八達山]을 가르키며, 좌우제신[諸臣]에게 이르기를 “이 산이 고려 효자[孝子] 이고[李皐]의 소거지[所居地]”라고 강조[强調]하시었다. 공[公]의 행적[行蹟]을 살펴보고 실로 충의(忠義)에 느끼심이 클 것이며 대가[大嘉]는 열성조[列聖朝]에 끼친 은혜로움을 추모[追慕]하는 뜻에서 치제[致祭]까지 명[命]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왕조[王朝] 실록[實錄]을 볼 수 없었으며 더욱이 일반인(一般人)은 참고[參考] 할 수 없었으니 후손[後孫]들은 가승[家乘]에 등재[登載]되어 있거나 일반(一般) 문헌[文獻]을 참고[參考]하여 후세[後世]들에게 선조[先祖]의 행적[行蹟]을 전[傳]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사공[學士公]의 증손[曾孫]인 집의공[執義公] 휘[諱] 현손[賢孫]이 단종[端宗] 손위[遜位]에 시마지친[媤麻之親: 삼베 상복을 입는 가까운 친척: 삼종(三從-종동서)]으로 연좌[連坐]되어 정란[靖亂]을 피해 경남 단성[慶南 丹城 - 현재 경남 산청군]으로 피거은둔[避居隱遁]하였으며 벼슬은 무공랑직장[務功郞直長]이고 26세 때이다.
단종갑술[端宗甲戌: 1454년]에서 명종을축[明宗乙丑: 1565]년 까지 약 110여년간 수원[水原]을 비웠으며 또 단성[丹城]도 집의공[執義公] 휘[諱] 현손[賢孫], 현감공[縣監公] 휘[諱] 영효[永孝] 양세[兩世]가 살았으나, 후손[後孫]들이 단성[丹城-산청]을 떠났으니 단성[丹城]도 비게 되었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되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었다가 숙종[肅宗] 25년(1699년) 245년후에 단종대왕[端宗大王]으로 왕위[王位]가 복위[復位]되니 단종[端宗]을 위해 몸바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의 절의[節義]가 모두 인정[認定]이 되어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높은 벼슬을 증직[贈職]하고 사당[祠堂]을 짓는등 많은 힘을 썼다.
그러나 단종복위[端宗復位] 이전에는 단종[端宗]을 위하여 몸바친 사람들을 들어내어 놓지 못하였으니 학사공[學士公]의 증손자인 집의공[執義公] 휘[諱] 현손[賢孫]도 여기에 해당되는 한분이다. 학사공[學士公] 후손[後孫]들은 이미 때가 늦었기에 학사공[學士公]과 여러 선조(先祖)님 묘소[墓所]를 비롯하여 집의공[執義公] 부자[父子] 묘소[墓所]도 실전[失傳]하게 되었다.
후손[後孫]들의 온 정성[精誠]으로 학사공[學士公] 묘소[墓所]는 피거[避居] 159년후 광해계축[光海 癸丑: 1613년]에 찾게 되었고 집의공(執義公) 부자 묘소(墓所)는 정조을묘[正祖乙卯: 1795년] 피거[避居] 340년후에 묘소의 위치가 확인되어 설단[設壇]하여 단비[壇碑]를 세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가승[家乘]으로 전하는 모든 문헌록[文獻錄]이 한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려말 유허[遺墟]인 조대[釣臺]와 공양왕[恭讓王]의 사문[使問]에 공이 상소[上疏]한 글가운데 은거[隱居]하고 있는 그곳을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 표현[表現]하였으며 또 태조[太祖]가 보고 도화[圖畵]를 그려보게 하여 탑산[塔山]을 팔달산[八達山]이라 사명[賜名]하였다.
세종조[世宗朝]에서 건립(建立)한 정려석비[旌閭石碑]인“고려(高麗)효자(孝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고 지비[李皐 之碑]”가 발견되었고, 세종[世宗]때 내곡[內谷]에 거주한 권선리[勸善里] 등이 공(公)의 유적[遺蹟]에 연유[緣由]되어 전(傳)하고 있었으며 또 정조대왕[正祖大王]이 학사대[學士臺]를 세우고 천정[泉井]을 학사정[學士井], 남문을 팔달문[八達門]이라 각각 사명[賜名]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묘소에 치제[致祭]하시니
이때 수원[水原] 유림[儒林]에서 서둘러 위의 유적[遺蹟]을 근거[根據]로 학사공[學士公]에 대한 청원소[請院疎] 및 통문[通文] 등을 정리하여 ‘태조원년누유소명공사이차산위수양고수불기우하경기안렴지명종불응[太祖元年屢有召命公辭以此山爲首陽固守不起又下京畿按廉之命終不應]’이라 기술[記述]하였다.
또 정조정사[正祖丁巳: 1797년]]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간행[刊行]될 때에도 청원소[請院疎] 및 통문[通文]을 참고(參考)하여 기록(記錄)하였고 따라서 여주이씨가품[驪州李氏家稟]도 위와 같이 기록되었고 여흥세승기[驪興世乘記]를 1925년 간행[刊行]하면서도 가품[家稟]에서 발췌[拔萃]하여 기록됨으로서 지금까지 공[公]의 행적[行蹟]이 잘못 전해 오게 된 사유[事由]이다.
학사공[學士公] 이 태조원년[太祖元年: 1392년]에서 태종9년[太宗九年: 1409년]까지 17년간의 행적[行蹟]을 후손(後孫)들은 모르고 지내온 공백기[空白期]가 있었으나 지금은 왕조[王朝] 실록[實錄]에서 행적[行蹟]이 밝혀졌으니 공[公]의 연보[年譜]를 재정립[再定立]하여 수록[收錄]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