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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 이야기 (下)
"왕자님."
깊은 밤, 왕검성 대전 옆 서옥으로 단장된 별채에 졸린 듯 가늘게 눈을 뜬 초승달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으며 창가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호동에게 돌연 영의 음성이 들렸다. 그는 은밀히 자신의 처소에서 서옥으로 건너왔는데, 그 동작이 매우 재빠르고 조용하여 바로 지척에서 새근거리는 가려마저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호동은 창 밖의 지붕에서 잽싸게 처마 밑으로 몸을 감추는 영의 동작이 늘상 보던 것인 마냥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영은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왕자님.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소인을 용서하여 주시오소서. 하지만 하지 않는다면 왕자님의 대업을 망칠 것만 같아서 부득불 예까지 오게 되었사옵니다. 그것은..."
그러자 호동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호동은 말꼬리를 흐리며 주저하고 있는 영을 향해 짧게 내뱉었다.
"...알 것 같구나. 그러니 그만 물러가도록 하거라."
"하지만..."
"물러가도록 하라."
"...편히 쉬시오소서."
짧은 한숨과 함께 영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호동은 편월(片月)에 시선을 던지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려의 마음도, 최리의 신뢰도 얻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의 이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양심의 가책? 그건 아니었다. 양심의 가책으로 치부하기엔 그 소용돌이는 너무나도 뜨겁고 맹렬했다. 호동은 휘장 너머 침상에서 새근거리는 가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에서, 마침내 호동은 자신이 어떤 기분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를 비로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무너지는 자신을 느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좋아... 하고 있는걸까.'
그녀의 수줍던 시선... 그녀의 분위기... 그녀의 연주... 그리고 그녀의 인상...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태자의 위(位)를 받는 데 있어서의 디딤돌일 뿐이었다. 그녀를 뒤에서 조종하여 낙랑국의 선진 철기 제조술을 캐낸다면, 광맥(鑛脈)이 있는 고구려쪽이 훨씬 많은 무구들을 생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낙랑뿐만 아니라 옥저까지도 복잡한 외교전략 없이 간단하게 무력제압이 가능할 터였다. 호동의 목적은 오직 계책을 성공시켜 부왕과 주민들의 기대에 보답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려는 단지 그것만을 위한 존재였다. 언제나 무예실력이 부족하다며 자신을 야단쳤지만 따사로운 눈길로 내려 보던 숙부를 위해서도, 당신의 아이도 아닌 그를 거두어 친자식처럼 키운 모후 연씨를 위해서도. 그러기 위해선 계책을 성사시켜 고구려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 가슴속의 소용돌이는 무엇인가. 어째서 이다지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일까.
호동은 *이(履 : 주 1)를 벗고 침상에 올라가 팔을 괴곤 반쯤 누워 가려를 내려보다가, 그녀의 삼단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어내려갔다. 그러자 이내 가려가 눈을 살포시 떴다. 가려는 자신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호동의 시선을 마주하곤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듯, 그녀는 호동의 품에 안기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호동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얼싸안았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호동 자신도 그녀를 안고 나서야 흠칫 놀라고 있었다. 스르륵, 비단 이불이 제쳐지며 살과 살이 맞닿는다. 호동도, 가려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한 사람은 황홀한 행복감에서,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나락에 떨어지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전율 속에서, 오히려 호동은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그에게 안긴 가려의 등을 어루만지며 낮게 말했다.
"가려, 그대는 이제 나와 혼약을 치뤘소. 내 이제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는 낙랑 사람이오, 아니면 고구려 사람이오?"
가려는 호동이 질문하는 뜻을 몰라 잠시 주저했지만 이내 대답했다.
"소첩이 이미 서방님의 것이 되었사온데 어찌하여 그러한 것을 물으시옵니까? 소첩은 고구려 사람이옵니다."
호동은 그녀의 대답에 기쁨의 빛을 감출 수 없었다. 가려의 떨리는 어깨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호동은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고맙소, 부인! 그대는 진정한 이 사람의 부인이오. 그대가 이 사람을, 아니 우리 모두를 살린 것이오. 부인..."
잦아드는 음성으로 호동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가려는 호동이 어째서 그러한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로서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기에, 자신의 대답이 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저하는 마음을 추스려 대답했던 것이다. 호동이 기쁨에 차 그녀를 격렬하게 안자 그녀 또한 환희에 젖어 호동을 마주 안았다.
"서방님... 소첩,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서방님만을 따를 것이옵니다..."
한동안 그대로 부둥켜안은 것도 잠시, 호동의 손길이 급한 듯 가려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을 감싸던 저고리는 어느새 벗겨져 있었으며 휘장을 뚫고 들어온 달빛 아래 환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호동은 드러난 그 언덕에 얼굴을 묻고는 혀 끝으로 정상을 농락하고 있었으며 이윽고 백설같이 희고 투명한 허벅지가 비단 이불을 헤치고 달빛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호동은 계곡 안쪽을 혀로 공략하다 그의 몸을 밀착시켰고, 가려는 느닷없는 아픔에 움찔 했으나 이내 고통 속에서 물결치는 희열에 덮여버렸다. 몸 속 깊은 곳에서 그녀는 호동의 존재를 느꼈다. 물결치는 파도가 평평한 바위에 닿아 부서지며 외치는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그녀에게서 울리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뜨겁고도 아득한 감각이 그녀의 깊은 곳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가려의 새하얀 두 다리는 본능의 파도를 따라 넘실대며 호동의 둔부에 휘감겼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격렬한 움직임에 호응하듯 호동의 움직임 또한 한층 격해졌다. 그것에 반응하듯, 가려는 허리를 활처럼 꺾으며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두 팔은 호동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두 다리는 호동의 허리 어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껏 오므라진 작디작은 발가락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호동의 움직임도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한껏 그녀를 밀어붙인 채 한동안 움직임 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쾌감(快感)이었다.
이튿날부터 호동은 가려의 안내를 받아 성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성의 주민들이 그들에게 기꺼이 경의와 애정의 눈길을 주었다. 호동은 가려와 함께 낙랑의 관제구, 시장, 공장과 사서관까지 들락거렸다. 마침내 *야장(冶場 : 주 2)에 이르러 호동은 풀무 근처에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가를 탐색해 봤지만 널브러진 참나무 목탄 나부랭이 이외에는 특별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실망한 호동은 야장에서 나왔다.
낙심한 기색이 역력한 호동의 표정을 본 가려가 그에게 물었다.
"서방님, 어이하여 그리 기력이 쇄하신 모습이옵니까."
그러나 호동은 말없이 야장을 나와 곧장 서옥으로 향했다. 가려는 그의 수심어린 얼굴에 덩달아서 얼굴을 흐렸다. 가려가 초조함에 그녀의 소맷선을 꼬깃꼬깃하게 구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호동은 서옥 살림채의 측실 휘장을 걷자마자 돌연 그녀를 돌아봤다.
"부인."
"네, 서방님."
가려는 갑자기 다가온 호동의 흑백이 뚜렷한 단아한 눈동자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콩닥콩닥, 문득 지난밤의 정사(情事)를 떠올린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두 손을 가슴 어림에서 꼭 마주 쥐었다. 호동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서 목욕물을 데우시오. 준비가 끝나거든 시녀를 시키지 마시고 부인께서 직접 오시오. 그리고 침실 근방의 모든 이를 물리치시오. 부인과 침실에서 할 말이 있으니, 내 그때 모두 말씀드리리다."
"예, 서방님."
목덜미까지 새빨개져 간신히 대답한 그녀는 흥분에 몸을 떠는 자신을 간신히 추스리며 살림채를 나갔다. 그러자 호동은 베(布)를 펼치고는 세필붓을 들어 빠르게 써내려갔다. 빽빽하게 글씨로 채워지는 베에는 그동안 호동이 성내를 돌아다니며 봤던 것들의 대부분이 필사되고 있었고, 그려지고 있었다. 작업을 마치고, 호동은 자신이 필사한 베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것은 왕검성의 내부를 상세히 묘사한 지도로, 낙랑을 보다 효율적으로 무너뜨리는 데에 확실히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낙랑의 철기 제작 비법. 그것을 위해 호동은 옥저로 가는 길을 돌려 과감히 낙랑의 중심부에 몸을 던진 것이다. 그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선 그것이 꼭 필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어야만 했다. 그가 그러한 생각을 굳히고 있을 때, 가려가 들어섰다.
"서방님, 목욕물을 준비하였사옵니다."
호동은 일어나 베필을 잘 간수한 다음 측실을 나와 침실로 들어섰다. 더운물의 습기어린 훈훈함이 침실 휘장 안쪽에서부터 배어나고 있었다. 제법 커 두 사람 쯤은 넉넉히 들어갈 만한 목욕통 옆엔 새로 갈아입을 저고리와 바지와 이(履), 그리고 도포(道袍) 한 벌이 놓여 있었다. 호동은 두루마기를 벗으며 가려에게 말했다.
"밖에 휘장을 한 번 더 치시고 안으로 들어오시오. 이 사람과 같이 하십시다."
"예, 서방님. ...네?"
가려는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호동의 말뜻을 깨닫고는 얼굴 가득히 홍조를 띄웠다. 잠시 망설였지만, 그녀는 곧 침실 바깥에 휘장을 한 번 더 친 뒤 목욕통 앞에 이르렀다. 호동은 그녀가 직접 벗기기를 바라는 듯 가만히 서 있었고 그녀는 호동에게 다가가 그의 저고리와 바지를 벗겨 속곳차림으로 만들었는데, 더 이상은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호동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저고리와 치마를 벗겨냈다. 삽시간에 그녀 또한 속곳차림이 되었으며 호동은 그렇게 드러난 가려의 몸을 잠시 감상했다. 가려는 호동의 눈길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는 것 같아 더는 몸을 지탱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녀의 숨결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자, 호동은 이내 그녀에게 다가가 속곳의 허리선을 거칠게 끌러냈다.
"아..."
가려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호동의 품으로 무너지듯 안겼다. 밀착된 호동의 허리 어림 근처에 느껴지는 단단하고도 뜨거운 감촉이 그녀의 몸 전체를 파도처럼 강타했다. 호동은 그녀를 번쩍 안아 목욕통 속으로 들어갔다. 가려를 목욕통 안에 내려놓은 후, 호동은 가려 앞에 섰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사방이 환한 가운데 그녀는 호동의 벗은 몸을 원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부인, 무얼 하고 있소. 이 사람의 속곳은 벗기지 않을 테요?"
가려는 떨리는 손길로 호동의 허리에 있는 속곳의 매듭을 끌러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호동의 물건이 그 육중한 존재를 드러내자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리며 들고 있던 그의 속곳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이런."
가려는 서둘러 속곳을 주웠지만 이미 속곳은 흠뻑 젖어 있었다. 호동은 웃음을 짓고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속곳을 낚아 채 목욕통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목욕통에 걸쳐져 있던 수건으로 정성스레 그녀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서, 서방님?!"
물에 적셔진 따끈한 수건의 감촉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그녀는 몸서리를 치면서도 일어나려 애썼다. 호동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며 속삭였다.
"가만히 계시오. 이 사람이 하고 싶어 이러는 것이니..."
"서, 서방님..."
호동은 계속 그녀의 몸을 닦았다. 가려는 호동의 손길 하나하나가 전율과도 같은 감촉으로 온몸을 엄습하고 있었기에 어쩔 줄을 모르며 그 감각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그때, 호동의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부인, 낙랑의 산업 중 가장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난데없는 호동의 질문에 놀라면서도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은 주저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 아무래도 발달한 철기 제련업이 아니올는지요."
호동은 계속 그녀의 몸을 닦으며 다음 질문을 했다.
"내 보니 낙랑의 철기는 고구려의 그것보다 높은 강도를 자랑하는 것 같던데 그것에는 어떤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오?"
가려는 계속 대답했다.
"아, 아버님께서 직접 야장(冶場)을 관리하시어 소상히는 모르겠사오나 원석에서 철을 주조할 때 뭔가를 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 응앗."
호동은 가려의 대답에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의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음 질문을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그러한 기술에 관한 비급 같은 것은 있소?"
"자, 잘은 모르겠사오나 아버님의 침소 곁 서책장에 필사본 같은 것이 있을 것이옵니다."
호동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그는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부인, 다음을 시작하기 전에 확실하게 말해주시오. 부인께선 정녕 낙랑 사람이오, 아니면 고구려 사람이오?"
"소... 소첩은 이미 고구려 사람이옵니다, 서방님."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게 된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대답하자 호동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그녀를 안았다. 물이 출렁거리며 목욕통 밖으로 다소 넘쳤으나, 호동은 상관 않고 그녀의 비밀스러운 곳을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앗... 서, 서방님....!!"
돌연 기습을 당한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며 물속에서 허우적거렸고 호동은 그녀를 응시하며 비장의 질문을 꺼냈다.
"좋소, 부인. 그렇다면 부인을 믿고 말씀드리리다. 부인께서는 고구려를 위해, 이 사람을 위해 장인어른의 침소에서 그 필사본을 가져다 주실 수 있겠소?"
"...예?!"
가려의 동공이 확대되며 호동의 그린 듯 단아한 얼굴에서 반짝이는 활화산 같은 눈빛을 마주 대했다. 그녀의 온몸이 격정과, 그리고 공포로 인해 굳어졌다. 호동은 날카롭고도 차가운 눈빛으로, 그러나 욕망이 서린 폭발적인 눈빛으로 가려를 응시했다.
"부인께서 이 일을 감당치 못하시면 이 사람은 추후 부인을 더 이상 예(禮)로서 맞지 않을 것이오. 어찌 하시려오?"
가려는 어찌해야만 좋을지 몰랐다. 그녀의 서방인 호동은 지금 엄청난 것을 그녀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은 호동의 눈빛에 고정되면서 안정을 되찾아갔다. 결심을 굳힌 것이다.
"소첩은... 서방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옵니다."
"고맙소, 부인. 자세한 일정은 추후에 알려드릴테니 지금은 이사람과 즐겨봅시다."
그렇게 말하고는, 호동은 비로소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가슴 속에 얼굴을 묻었다. 가려는 나른한 물 속에서 출렁거리며 온몸을 질주하는 뜨거운 전율의 파도를 느끼며 환락의 세계에 몸을 맡겼다.
서기 32년, 대무신(大武神) 15년, 5월 중순.
마침내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
깊은 밤, 만물이 침묵하는 어둠의 시간에 가려는 왕검성 대전을 지나 최리의 침실을 향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걷는 그녀의 발소리는 특별히 바닥이 부드러운 이(履)로 골라 신었기 때문에, 주변에 거의 들리지 않고 있었다. 호동이 그녀의 곁을 떠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녀의 몸은 확실하게 호동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엔 어느새 오직 경험자만이 지닐 수 있는 비릿한 욕정과 갈망이 옅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호동이 왕검성을 나서기 직전, 그녀에게 건네준 밀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밀서엔 호동이 그녀에게 세워준 비급을 빼돌리기 위한 상세한 계책이 적혀 있었다. 밀서를 건네주던 그 따뜻한 손...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얄미울정도로 매력적인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본부인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그녀가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을 지금까지 지켜낼 수 있었던 최고 기밀 기술을 빼돌리는 것을 걸었다. 비록 어렴풋이긴 했지만, 그녀 또한 호동의 요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남편은 자신을 당신의 집안에 들이는 조건으로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의 근본과도 같은 것을 가져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이미 그녀의 아버지에게 전하는 마지막 서신을 들고 온 터였다. 비급을 훔친 뒤 곧바로 성을 빠져나갈 계획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인 낙랑왕 최리의 침실 휘장 밖에서,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서방님을 위하자니 나라의 기밀 기술이 새어나가 나라를 존망의 위기에 빠트리게 될 터이고, 그렇다고 나라를 위하자니 자신이 살아갈 희망을 잃게 될 터이니 정녕 어찌해야만 좋은 것일까...
그녀가 손수 미리 손을 써 놓은 탓에, 침전을 지키고 있는 파수꾼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신나게 코를 골고 있는 장정들을 넘어 휘장을 제치고 침실로 들어섰다. 침상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서책장에서,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책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피곤한 듯 곯아떨어진 얼굴이 잘 비치는 창가에 그것은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무방비 상태의 서책에 쉬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정녕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몇 번의 실랑이가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불효 여식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소리죽여 흐느끼는 그녀의 손아귀엔 이미 서책이 들려 있었다.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결정되어진 선택지일 뿐이었다. 가려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을 느끼며 아직까지도 곤히 잠들어있는 최리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조용히 그녀의 아버지의 이불에 베필을 올려놓은 후, 이내 그녀의 방으로 돌아와 미리 준비된 보따리를 들고 예의 자줏빛 경의(景衣)로 갈아입었다. 가려는 호동이 일러준 대로 걸음을 재촉해, 미리 말을 감춰둔 장소에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정적에 휩싸인 성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서서 달이 움직이는 방향을 확인한 뒤, 밀서에 적혀있는 대로 북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나무에 꽂혀 있는 붉은 실을 댄 첫 번째 표식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것이구나.' 가려는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날따라 최리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언제나 호쾌하게 우는 장닭의 소리와 함께 일어났었는데 오늘은 눈을 떠보니 동창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비비며 일어서는 노인의 손어귀에 이불 위에 곱게 포개 둔 베필이 잡혔다. 모양새로 보아 서신임을 알아본 최리는 이내 그것을 펼쳐보았다. 가느다란 세필로, 그에게 낯익은 가려의 글씨가 노인의 눈에 들어왔다.
[아버님, 이렇게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불효 여식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소녀, 이미 서방님이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나이다. 그러니 소녀는 이제 집을 떠나 서방님의 뒤를 따르려 하옵니다. 다만 아버님께서 과연 대죄를 짓고 떠나는 불효 여식을 용서해 주실런지... 소녀, 소녀의 추잡함에 눈물을 멈출 수 없사오나, 이미 서방님께 귀속된 몸... 그저 아버님의 평안을 빌어드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옵니다. 언제고 소녀의 악덕이 탄로나 아버님께서 소녀를 참(斬)한다 하여도, 소녀는 결코 아버님을 원망치 아니할것이옵니다. 안녕히 계시옵소서.]
"허허... 그렇게 떨어지기 싫었나? 딸자식은 키워봐야 전혀 쓸모가 없다더니, 에잉~"
최리는 혀를 차며 흐뭇한 시선으로 다시금 서신을 훑어내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단지 호동왕자를 따라간다는 것만으로는 서신이 의미하는 것이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일어서서 서신을 한손에 쥔 채 창가를 거닐며 서신의 내용을 곱씹어보았다. 대죄... 악덕... 참(斬)... 원망치 않는다? 최리는 조용히 뇌까리며 딸의 서신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서책장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에야 딸이 의도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는 급속하게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부들부들 떠는 노인의 주먹엔 이미 구겨진 베필 위로 눈물이 어룽어룽 떨어지고 있었다. 최리는 핏발 선 눈동자로 목이 터져라 고함쳤다.
"주부(主簿)는 어디에 있느냐! 속히 들라 하여라!"
시종들과 파수병들이 노인의 고함을 듣고는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최리는 그들을 보곤 짜증스럽다는 듯 일갈하여 물렸다. 이윽고 남색 도포를 걸친 가신이 들어오자 최리는 그의 앞에 가려의 서신을 내던지며 노기 띤 얼굴로 단숨에 소리쳤다.
"지, 지금 당장 사방으로 기수들을 보내라! 국가의 배신자와 빌어먹을 도적놈을 일각이라도 빨리 내 앞에 무릎꿇리어라!"
뜬금없는 명령에 어리둥절한 주부는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서신들 펴 들고는 빠르게 훑어내리는 찰나, 다시 한 번 노인의 노기띤 음성이 들려왔다.
"가려, 내 딸년이 감히 부모를 배신하고 정인(情人)에게 국가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중요 기술을 빼돌렸다. 아직 국경을 빠져나가진 못했을 터이니 속히 추격하여 사로 잡으라 일러라! 만일 생포가 불가하다면 시체라도 끌고 와라!"
주부는 머리를 조아려 읍하고는 물러갔다. 노인은 분을 못참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서릿발 같은 명령은 왕검성 내에 빠르게 퍼졌고, 이내 추적대가 편성되어 고구려로 가는 길목들을 향해 전력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가려가 그녀의 집을 빠져나온 지 정확히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서기 32년, 대무신(大武神) 15년, 5월 말.
짧은 낙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호동은 낙랑을 빠져나와 고구려로의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행동으로, 환송단과 헤어진 직후에 그는 가려에게 서신으로 보낸 것과 같이 일정 지점마다 그녀가 자취를 더듬어 올 수 있는 표식을 남기며 약속 지점으로 향한 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주저하여 약속 기간 안에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하면, 그는 그대로 계획이 틀어졌음을 알리는 전서구를 보낸 뒤 애초의 임무였던 밀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러 옥저로 갈 생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려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비장함이 서린 그의 표정은 언뜻 봐서는 철옹성 같은 견고함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영의 마음은 오히려 착찹해지고 있었다. 그가 모시는 작은 주인을 어릴 적부터 봐 온 그로서는 그런 주인의 표정이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높은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은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그들이 약속장소에 도착하여 이틀이 경과되어 있었다. 만일 날이 밝아도 가려가 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떠나야만 했다. 왕검성에서의 지체로 인해 호동에겐 더 이상의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왕자님."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았지 않느냐."
"하오나..."
"...조금만 더 기다리자꾸나."
"...조금만입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호동의 눈가엔 어느새 그늘이 져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영은 자신의 감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최소한 한동안, 어쩌면 평생 호동은 낙랑의 공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혼약관계로 두 나라를 연결한다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은 전략이었다. 애초의 작전이 옥저와 연합하여 낙랑을 치려는 계획이었는데, 낙랑의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어설픈 연대는 오히려 옥저의 분노를 사, 남동방면의 전선을 확장시킬 뿐이었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호동과 가려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방이 환해져옴을 깨달은 영은 마지막으로 호동을 본 뒤 예의 작은 비단보를 끌렀다. 나무로 만든 작은 새장이었다. 그러나 막 새장을 열려는 순간, 호동이 살짝 경직된 얼굴로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나 영은 알 수 있었다. 눈가의 그늘이 사라진 그의 표정은, 경직됨으로 가장되어 있는 기쁨의 표현이라는 것을. 영은 호동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서 들려오는 작은 말굽소리와 하나의 그림자를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련인 것이다. "무엇이 걱정인지는 잘 알지만, 다 잘 될게다." 호동이 그의 어깨를 치며 명랑하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자신의 아내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짙은 녹음 사이로 짓쳐들어오는 가운데, 꼭 껴안은 두 사람은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앞으로의 시련조차, 두 사람의 간절한 마음은 이길 수 없었건 것일까. 영의 머릿속은 바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서기 32년, 대무신(大武神) 15년, 6월 초.
호동이 임무 완료의 보고와 함께 국경 부근으로 군사를 요청하는 전서구를 보내자 대무신왕은 급히 일군(一軍)을 구성하여 파견한다. 이때 호동 일행은 압록수를 건너기 위해 북동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여름철 장마가 일찍 오는 바람에 압록수의 수심이 깊어져 있어 호동은 고구려에서 낙랑으로 건너왔을 때의 여울목을 이용할 수 없었다. 압록수를 건너기 위해선 우선 얕은 목을 찾아야만 했으므로 호동 일행은 압록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직 그들의 시야에 최리가 보낸 추격대는 포착되지 않고 있었기에, 은밀하게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비교적 여유로운 상태였다.
가려는 며칠에 이른 여행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수심이 깊어진 여울을 무리해서 건너려다 그녀의 말이 휩쓸려 떠내려갔기 때문에 자연 이동은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후덥지근한 날씨는 불쾌감을 증폭시켰지만 그래도 목을 건너기 위한 최소한의 체력은 필요했기에 이들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산비탈 으슥한 곳에 말을 세워 둔 호동은, 가려에게 잠시 후에 돌아오겠노라 말한 뒤 영과 함께 주변으로 정탐을 나갔다. 녹음으로 우거진 숲의 정경은 편안함을 안겨주고 있었으나, 호동은 그것에 한껏 몸을 내밭길 수는 없었다. 주변을 충분히 살피며, 호동은 둔덕을 돌아 말을 세워둔 지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귀에 흐릿하게 뿔고동소리가 포착된 것은, 그가 돌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불길한 느낌에, 그들은 전속력으로 비탈을 내려갔다. 야영지가 호동의 시야에 흐릿하게 잡히자, 가려가 나무를 등지고 여러 병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호동은 영에게 짧게 속삭였다. "*편(片 : 주 3)을 쓰겠다. 주의를 끌거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영이 호동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잽싸게 활대를 꺼내 포장을 벗겨내어, 그 안에 들어있던 한껏 부려져 있는 금장식의 활을 들어 올리곤, 다시 말의 짐 속에서 검은색 막대기를 꺼내들었다. 그 막대기는 양 끝이 금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나 외관은 매끈한 형태였으며 안은 텅 비어 구멍이 나 있었다. 호동은 능숙한 솜씨로 활을 얹은 뒤 예의 막대기를 얹혀진 활의 *출전피(주 4)와 *절피(주 5) 사이에 장착시켰다. 그리곤 영이 나무에서 떨어져내려 적 병사의 목을 꺾는것과 거의 동시에 그 반대쪽의 병사들을 향해 깍지낀 호동의 손가락이 시나브로 현을 놓았다. 영이 *환도(環刀 : 주 6)를 뽑아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동안, 순식간에 호동에 의해 병사들이 정리되었다. 가려는 나무덤불에서 모습을 드러낸 호동에게 안겨 정신없이 울었다. 호동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둘러 이 자리를 떠야겠다. 설마 이정도의 인원만으로 우리들을 추격한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니."
"이놈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호동은 가려를 자신의 뒤에 태우고는 혹 떨어질지도 모르니 소매를 묶어서라도 자신을 꼭 잡고 있으라는 당부를 준 뒤, 영과 함께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숲에서 나와 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곧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다섯이지만, 아마도 더 있을 겁니다!" *마름쇠(주 7)를 꺼내 길 위에 뿌리며 영이 외쳤다. 호동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달렸다.
가려는 와들와들 떨면서도, 묶여진 매듭을 꼭 붙잡고 호동에게 매달려 있었다. '아버님께서 서방님을 해하려 하시는구나.'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자초한 것이었기에,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서방님 없이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돼.' 그러나 흐릿한 그녀의 시야에 잡힌 것은, 마름쇠로 인해 속도가 느려진 추격대의 몇몇이 천천히 활을 얹어 조준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화살촉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아, 눈을 꼭 감고 매듭을 붙잡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몇 번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가려는 허리 어림에서 느껴지는 압박감과 쓰라림에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자줏빛 경의를 검게 물들이며 길바닥에 쏟아지는 붉은 액체를 보고, 그녀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부인!!"
호동은 가려의 목이 떨구어지는 것을 느끼며 울부짖었다. 영은 품 속에서 수리검 몇을 꺼내 재차 사격준비를 하는 사수들에게 던졌다. 영의 수리검들은 정확하게 사수(射手)들의 목줄기를 꿰뚫었지만, 이미 그들의 화살은 재차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호동의 등어리에 닿는 흐트러진 가려의 호흡은 그를 다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날아온 화살들이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지나치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달릴 뿐이었다. '제발...' 앙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핏물이 비짓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강의 수심이 얕아지고 있었다. 그러자 영은 호동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왕자님! 강을 건너셔야 합니다!! 이곳은 이놈이 어떻게 해볼테니 어서 건너십시오!"
그러자 호동이 사납게 외쳤다.
"너를 두고 혼자만 가란 말이더냐!"
그러자 영이 품 속에서 수리검을 꺼내며 마주 외쳤다.
"그럼 부인 마님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대로 숨이 끊어지도록 방치하시겠습니까? 제발 가시란 말입니닷!!"
호동은 말문이 막혀 잠시 그의 충실한 조의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참방거리며 물 속으로 말을 몰았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을 명한다!"
영은 말을 멈추고, 이제는 십여 기(騎)가 되어버린 몰려드는 적병들을 향해 수리검을 던지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은 호동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일제히 그들에게 화살을 돌렸고, 이내 수리검에 맞아 절명했다. 그러자 창을 든 기병들이 영에게 돌진해왔다. 그 역시 말을 달리며 환도를 빼들었다. "육박전은 그다지 소질이 없지만..." 이윽고 수많은 날붙이들이 그에게 쇄도(殺到)했다.
한편, 호동은 자신의 안일했던 대처 때문에 처를 상처입히고, 젖형제를 사지로 밀어넣었다는 죄책감으로 흐느끼며 강을 건너고 있었다. 병장기들이 멀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거친 물살을 가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기에 뒤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늘어진 가려의 몸뚱어리에서 흐르는 피는 도도히 흐르는 압록수에 붉고 긴 궤적(軌跡)을 남기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강을 건너 반대편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는 순간 호동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막 적군의 *과(戈 : 주 8)에 목이 뎅겅 떨어지는 자신의 젖형제의 모습이었다. 호동은 오열하며 소리쳤다.
"안돼!!!!!"
호동은 포효에 가까운 함성을 연신 터뜨리며 미친듯이 시위를 당겼다. 그의 시윗줄은 마치 발악이라도 하는 듯,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폭풍과도 같은 현음(弦音)이 끝나고 호동의 전통에서 화살이 떨어지자, 주춤했던 낙랑의 추격대들은 하나 둘 강을 건너오기 시작했고, 호동은 눈물을 삼키며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환멸(幻滅)로 억누르며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의 말이 연속되는 피로로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 무렵, 뒤에서 다시금 바람을 가르는 궁깃의 횃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호동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끝이로구나.' 화살이 살 속에 박히는 묵직한 파열음이 들리자 기우뚱, 그의 말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넘어진다. 질주하는 말 위에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호동은 그의 허리에 묶여진 매듭을 꼭 붙잡고 있는 가려의 작은 손을 잡아 꼭 쥐었다.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군마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가려는 파리한 안색으로 눈을 뜨고는 남편의 슬픈 미소를 바라보았다.
"서방님..."
"이사람이 부덕하여 부인께 폐만 끼치나 보오. 그저 미안할 뿐이오..."
호동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가려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서방님... 소첩... 서방님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비록... 지금은 이리 끝나지만... 언젠가... 다음... 세상에... 함께... 하.. 기.. 를......."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끝내 가려는 눈을 감고 말았다. 그들의 주변은 가려의 몸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웅덩이를 이루며 내리쬐이는 햇빛에 반짝거릴 뿐이었다. 호동은 오열하며 외쳤다.
"부인! 눈을 뜨시오! 정신 차리시오!! 부인! 부인... 아흐흐..."
그러나 낙랑의 적병들은 그가 마음껏 오열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왕자 호동. 그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망쳐놓았소. 하지만 그대가 왕자인 것을 감안해, 최소한 이자리에서 찢어죽이는 것은 면해주겠소. 왕명도 우선은 생포라고 떨어졌으니... 순순히 오라를 받으시오."
갑주 사이에 자줏빛 도포가 보이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낙랑의 적군이 눈짓하자, 몇몇이 말에서 내려 호동에게 다가왔다. 호동은 가려를 끌어안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돌연, 어디선가 다시 궁깃의 횃소리가 들려왔다. 호동에게 접근하려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화살에 꿰여 목숨을 잃었고, 재차 날아온 화살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보이는 적병이 말과 함께 쓰러졌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한 떼의 군마들이 호동에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왕자님! 무사하시옵니까!!"
호동은 눈을 부릅떴다. '환상?!' 주변을 둘러보니, 남은 낙랑군은 우왕좌왕하다 그들에 의해 거의 섬멸되었고, 나머지는 황급히 퇴각을 시작했다. 호동은 얼른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것은..." 그러자 긴 환도를 든 절풍의 사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호동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비류나부 소속의 조의(輩衣)들이옵니다! 이곳은 저희들이 막겠사오니 왕자님께서는 임무를 완수하십시오!"
"...숙부님의? 그럼 부탁한다."
호동은 가려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서글피 미소지었다. "미안하오, 부인. 부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은 조금 나중일 것 같소." 그러는 호동의 눈가엔 다시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가려의 시신을 들쳐업고 병사들이 내어준 새 말에 올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강 건너편을 바라보다, 옆의 병사에게 조용히 일렀다. "내 충실한 조의이자 둘도 없는 젖형제가 저기 잠들어 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해 오도록." 군사들이 호동의 명을 받고 달려나가자, 호동은 가려의 창백해진 시신을 끌어안고 조용히 귀국길에 올랐다.
-계속-
-雷蛇-
*이(履) : 신목이 없는 신발. 이를테면 실내화의 개념으로, 근세의 고무신과 비슷하다. 여성용 신발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격렬한 발의 움직임을 요구하는 행동을 할 때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화(靴 : 신목이 있는 신발. 가죽신, 혹은 장화라고 한다)를 신었다. 이도 같은 개념으로서 실내작업이나 무용수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남자들 또한 이것을 신었다. (주 1)
*야장(冶場) : 야장(冶匠)과는 달리, 작업하는 장소. 즉 대장간을 이른다. (주 2)
*편(片) : 편전(片箭)이라고도 불린다. 세계에서 가장 긴 사정거리와 파괴력을 갖춘 최고의 활이다. 이 활의 정확한 등장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활의 모든 기능을 응용했던 고구려조에서 그 최초의 등장을 하지 않았나 싶다. 유효 사거리 일천 보(一千步 : 대략 1.9 km)의 초 장거리 저격을 할 수 있는 활이며, 사거리 내에서 웬만한 투구나 갑옷의 장갑판쯤은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편에 쓰인 화살은 일반적인 화살의 절반 정도의 길이에 매우 얇은 굵기로, 일단 박히면 빼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것을 애기살이라고 부르지만, 또는 이것을 그대로 편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사정거리와 위력을 올리기 위해, 화살의 크기가 감소하고 포신을 대신할 수 있는 매끄러운 대롱이 이 활과 화살의 파괴력의 비밀이라고 생각된다. 편은 고구려조의 멸망 이후 고려전(高麗箭)이라는 이름으로 고려에 계승되었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화약의 상용화와 더불어 명맥이 쇠퇴한 활이다. (주 3)
*출전피 : 맥궁의 부위 중 손으로 쥘 수 있게 되어 있는 부분. (주 4)
*절피 : 맥궁의 부위 중 잦은 연사로 인해 현(弦)이 손상되지 않게 오늬(현에 맞닿게 되는 화살의 패인 부분)와의 접점을 얇은 쇠가죽 등으로 감싼 곳을 말한다. (주 5)
*환도(環刀) : 칼의 손잡이 아랫부분(서양 검에서의 폼멜(Pommel)을 말함)에 둥근 고리장식이 달린 칼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의 폼멜을 달은 검은 삼국시대의 주요한 무기였다. 추후 고려 이후의 시대에서 세세한 부류로 나뉘기 전까진 이 환도들은 서양 검과 같은 올곧은 직선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주 6)
*마름쇠 : 캘트롭(Caltrop)이라고 흔히 불리는 기마병 대응용 장애물. 간단히 뿌려둠으로서 기마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 즉석용 가시밭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주 7)
*과(戈) : 고대 우리 나라에서 쓰인 끝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두 개의 칼날, 즉 곧게 뻗은 7치 반(半)의 원(援)과 옆으로 뻗은 6치의 호(胡)가 달림. 서양 무기를 기준으로 빗대면, 어설픈 핼버드(Halberd)정도 되는 무기이다. (주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