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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가까운 신안교회에서 화요일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하고 목사님들과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내 옆에 안은 노회안에 가까운 목사님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목회를 옮기신다며 담양 남면지역에 500여평의 땅을 장만하고 기도처를 마련하고 다음 주일부터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식사 중에 말씀을 하시더구요 그래요!! 목사님! 그러면 어떤 사역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물었더니 목사님 농촌지역에서 준비를 잘하여 앞으로 12가족이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여 은퇴하신 목사님들과 함께 가족처럼 돌봄을 통해 미래의 사역을 하겠다고 말씀하시더구요 그래서 100여명이 살고 있는 농촌지역 주민들을 섬기고 닭 짐승을 키우며 채소들을 재배하고 함께 살면서 돌봄 목회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더 듣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목사님!! 꿈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제 핸드폰 카카오톡 처음 화면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지금 목회자인 저의 마음입니다. 나 라는 존재는 주향가족 소중한 여러분 분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칼럼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우분트(UBUNTU)를 알고 계십니까? 어떤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한 부족의 아이들에게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근처 나무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매달아 놓고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것을 먹을 수 있다고 하고 '시작'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들은 먼저 뛰어가지 않습니다. 다함께 손을 잡고 가서 그것을 함께 먹었습니다. 인류학자는 감동함을 받았을까요? 아이들에게 " 맛있는 음식인데 먼저 막! 뛰어가서 먼저 차지할 수 있는데 왜 다함께 뛰어 갔을까? 물었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우분트(UBUNTU)라고 외치며 말하기를 좋은 음식이라고 나혼자 욕심껏 뛰어가서 먼저 먹으면 다른 친구들은 슬픈데 어째서 나만 행복해 질 수 있나요?" 라고 대답 했답니다. "우분트" 반투족 말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고인이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자주 강조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돌봄이 그렇습니다. 나 김승권이 아닌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먼저 다가가 살피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이 지나면 추석 명절 어김없이 귀성행렬로 몸살을 앓게 될 것입니다. 가족들을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는데 어찌 지내실까? 사실 요즘은 핸드폰으로 전화 할 수 있고 영상통화를 통해 얼굴을 서로 마주보며 부모님 건강도 체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명절이 되면 그렇게만 해가지고는 양이 차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 지내시는지 하며 고향에 내려옵니다. 직접가서 부모님을 뵈어야 내일을 할 수 있다며 하루 꼬박 걸려도 집에 내려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가족의 풍속도입니다. 이처럼 가족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우리가 돌봐야하는 우리 가족의 현주소는 지금 어떠습니까? 돌봐야 할 내 가족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이 우리의 궁금증입니다.
이 질문의 대답을 찾고자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으로 가족들 사이에서 인생을 사신 예수님의 가족관을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족관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1. 예수님의 돌봄은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먼저 우리가 내 가족 소중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내 품안에 있는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가족을 위해 생명을 받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가족관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에 또 다른 가족에 대한 개념을 무관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웃의 가족에 해가 돌아가게 하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가족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가족보다 좀 더 큰 개념인 민족을 또한 생각해 보십시오. 민족은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내 민족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의 권리를 박탈하고 침략하는 행위가 가슴 아플 따름입니다. 우리 주변나라들이 얼마나 영토권 때문에 앙숙이 되고 있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족사랑을 뛰어 넘어 민족사랑으로 더 높은 가치를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가족보다 민족보다도 더 높고 더 넓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족관을 보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교하시던 중에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달받은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마태복음12:49-50.......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르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 할 때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예수께서 부인한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혈연적 가족의 범주를 초월하는 가족관을 예수께서 가지고 계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그리고 육신의 형제들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또한 바로 그의 가족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이셨습니다. 저는 성찬식을 할 때 마다 가족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잔을 함께 나누고 떡을 함께 목을 때 한 몸 되신 보혈로 나누는 공동체를 봅니다. 그때마드 저는 찐한 진정한 가족의 정체성을 생각합니다. 혈연의 공동체는 다 혈액형이 다르지만 보혈로 하나되는 감격 그 감동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런 가족의 찐함이 행사로 이러집니다.
사진1..얼마 전 민규청년 케이멘제도 보낼 때 식사하고 커피타임가질 때 사진입니다. 멀 리 떨어져야 할 자녀를 유학 보내는 그런 마음으로 격려해주기위해 모였습니다.
사진2.....작년 추수감사절을 마치고 김정례집사님 가정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는 친교 의 시간이었습니다.
사진3....12년전 여름성경학교 때 채린 채원이 4살 현민이 7살 때 주향가족사진 입니다.
사진4.....작년에 우리가 영광으로 1박2일 야월 순교기념관으로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수련회를 할 때 마다 느낀 것인데 교회를 떠나 집을 떠나 다른 지역에 가서 1박2일이나 2박 3일 공동체모임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가족냄새가 풍기는지 모릅니다. 자기집에 있을때는 혈연의 가족끼리식사합니다. 그러나 수련회오면 한 솥에서 모든 주향가족이 다함께 밥을 먹고 티를 다함께 입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산책하고 이것이 공동체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은혜 받고 함께 격려하는 또 다른 경험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그런 행사를 통해 늘 느낀 강렬한 공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아, 우리가 가족이었구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말씀이 마태복음 12:49-50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 내 동생들이냐--“다시 말하면 누가 내 가족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가족이니라” 이것이 바로 성경적 가족관 즉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입니다.
2. 예수님은 거룩한 습관 돌봄은 가족 책임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중심의 돌봄 가족관이 천국 갈 때까지 붙잡고 나가야 할 소중한 가족 돌봄이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가족 돌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가족들에게도 최선의 책임을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중에 자세한 내용은 12살 때 성전안에서 성경을 랍비들과 토론하는 참 진솔한 장면이 있는데 그 외에 자세히 어린 시절이 기록된 내용은 없습니다.
12살 먹은 소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방문이후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어린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그럼 어린시설 나사렛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셨을까요? 눅2:50..“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어머니는 이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근거로 보면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좋은 아들로 목수이신 아버지 또한 어머님을 잘 돌보며 순종한 어린 시절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당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실 때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에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예수님의 성실성을 보고 주변사람들은 예수님을 착한 마리아의 아들로 살아가던 모습, 그리고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잘 감당하던 예수님의 성실했던 직업인의 모습, 그리고 육신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유다 그리고 시몬과 어울리며 살아가던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족으로서의 성실하심이 더 깊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마지막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복음 전하시던 때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 통치시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거기에 죄인이 되어 두 강도와 함께 매달리신 예수님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사람들이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면 자신의 고통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악의 고통의 시간 예수님은 누구를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육신의 어머니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신 후의 어머니의 노후 문제를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고통의 절정의 순간 예수님이 기억한 것은 예수님 자신의 고통이 아닌 마리아 어머님가 어떻게 앞으로 살아 가실 것인가? 이런 염려와 고통을 더 걱정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돌봄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 26절......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27절 십자가밑에 있는 요한을 주목하며 말씀 하십니다. “또 그 제자(요한)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은 이처럼 지상 생애 마지막까지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신 예수님의 마음 진정! 가족 돌봄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돌봄은 제자들에게 가족 돌봄의 교훈을 승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 돌봄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가족 돌봄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예수님이후 세상을 복음화한 바울의 가르침을 생각 보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족 돌봄을 포기한 사람들을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편지했습니다. 바울은 이 교훈을 자신의 목회의 승계자인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입니다.
딤전1:1-2.....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사도된 것은 자기 노력이나 종교적 가문이 좋아서 학력이 높아 사도된 것 아닙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강권하심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바울자신은 나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족을 돌봐라 하는 교훈은 오직 예수님께 받은 교훈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 가족 돌봄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디모데 전서에서 바울 사도는 바로 우리의 이런 가족 돌봄의 노력이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며,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현대가족을 가정사역 전문가들은 가족이 있는 것 같지만 가족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사랑방 가족의 끈끈함이 개인주의로 흘러 갔다고 합니다. 엣날 한집에서 7식구 8식구가 이불 하나로 몸을 서로 접촉하며 잠자던 때가 그리워진다는 합니다. 지금은 어떠습니까? 자녀가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학원 갔다가 자기 방으로 손쌀 같이 들어갑니다. 자기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때부터 개인플레이입니다. 엄마가 밥을 차려놓아도 대답도 없습니다. 이제는 더 할 수밖에 없는 무기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입니다. 부모가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찬송가 559장 3절.....♪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서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이 가정 찬송가 가사가 무색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의 삭막한 가정 돌봄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족을 돌보는 모습이 정말 사라져 우리 가정이 불효 막심한 가정으로 희망이 없습니까?
작년 KBS 인간극장에 방영한 내용인데 보셨는가 모르겠습니다. 대구에서 사시는 106세 문대전 할머니 53살 된 아들이 어머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정 이야기를 방영했습니다. 한 적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106살 연세에 젊은 사람도 오르기 힘든 한라산을 오르시다니요? 53살 된 아들과 같이 사는데 어느 날 어머님이 산에 가는 것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대구 가까운 공원에 모시고 다녔는데 걷기를 좋아하시니까 어머님을 모시고 10km 걷기대회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한라산까지 오르셨어요
한라산을 오르시는데 할머니가 침해가 있으셔서 두 아들이 계속이야기를 해주는데 얼마나 좋아 하시는지 두 아들과 노래를 부르고 여유 있게 산에 오르시는데 이 광경을 본 등산객들이 어머님.... 할머님....최고 엄지손가락으로 1등이라며 추켜 세워 주니까 더 좋아 하시는 거예요 ...... 저녁에 아들과 숙소에서 잠들기 전에 아들이 다리에 안티푸라민으로 발 맛사지를 해주는데 두 아들이 서로 발가락 맛사지하는 것이 더 좋다 발등에 해주는 더 좋다하며 서로 다투는 거예요 이럴 보고 할머니는 누워서 두 아들을 보며 넘! 행복해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를 돌보는 가족들 그져 싱글벙글 좋아하는 겁니다. 가족을 돌보는 것 우리 가정이 행복 에너지를 발산하는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삭막한 세상에서 지쳐 있는 상태이지만 안식처인 집으로 들어갈 때 서로를 돌보아줄 가족이 있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와 가족들과 함께 서로를 위한 돌봄의 시간을 만들어갈 때 주님이 바라시는 진정한 천국이 가정 안에 이루어질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