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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에큐메니칼 일곱 공의회
기독교 초기 시대 공의회들의 중요의제 중, 제1차와 제2차는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었으며 제3차부터 제6차까지는 기독론에 관계된 것들이었고, 제7차는 교회의 신앙과 관습에 관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공의회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통치기에 열렸다. 아리우스가 예수는 태어난 적이 없던 때가 있었다고 하여 예수를 피조물(그러나 가장 뛰어난 피조물)로 전락시키자, 논쟁 초기에 주교 알렉산터가 그를 정죄하고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모든 직분에서 축출했지만, 아리우스는 동조자들을 규합하고 일반인들의 옹호시위까지 일어났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324년 9월에 감독 코르도바의 호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고, 아리우스의 주장이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6월 19일에 공의회를 개최했다.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작성하여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아리우스파를 파문했다. 또한 공의회에서는 속주 주교들의 정규 교회회의들을 신설하고, 속주 대도시의 주교에게 관할 지역의 주교 선출 및 임명에 대한 거부권을 부여하고, 속주의 주교들 중 적어도 주교 3명이 참석하지 않을 경우 새 주교를 선출할 수 없게 함으로써 사실상 속주 교회들과 그 주교들의 권한을 제한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디옥의 각 주교에 대해서 각 속주의 영역보다 더욱 광범위한 예외적인 관할권을 인정함으로써 총대주교구들이 형성되게 되었다. 공의회는 다양한 교회의 훈령과 20개의 교회법들을 제정했다. 그중 특별한 몇 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ㄱ) 부활절 날짜(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 폴리갑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일로 주장)
ㄴ) 20개의 교회법 제정(디오클레타인의 새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할권 확정: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들이아, 안디옥으로)
ㄷ) 성직자의 직위
ㄹ)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ㅁ) 분열자들과 이단자들의 재 입회에 관하여
ㅂ)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다.
제2차 세계공의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 데오도시우스의 소집으로 개최되었다. 361년에 안디옥에서 유조이우스를 중심으로 한 급진적 아리우스파들이 성부와 다른 성자를 표명하는 신조를 채택하였고,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신학적 오류에 직면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아타나시우스와 더불어 성령적대파들과의 논쟁에서 성령의 신성과 성부와의 동일함으로 옹호했다. 데오도시우스는 380년 2월, <데살로니카 칙령>을 공포하여 정통신앙을 옹호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칙령>을 반포하여 니케아 정통신앙을 수호했으며, 381년 5월 초에 제2차 세계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회했다.
공의회는 성령은 생명을 창조한 성부와 같으며, 역시 성부에게서 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 표현함으로써, 제1차 세계공의회에서 채태고딘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고, 성령의 신성과 삼위일체적 지위를 분명히 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작성했다. 이 공의회는 마케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를 파문했으며, 동방교회의 관할 구역을 이집트, 오리엔트(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본도, 트라키아로 나누고, 각 교구에 자주성을 주었다. 공의회는 또한 제국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다음, 알렉산드리아 바로 앞으로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제3차 세계공의회는 431년 6월 22일 시릴을 비롯하여 160명의 감독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공의회에서의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논쟁은 그가 없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으신 분’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으로 불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모독한 자로 정죄되고 주교직에서 파직되고 사제로서의 직무 수행을 금지당했다. 436년에 황제는 그를 이집트로 추방하였고 그의 이름과 그들은 정죄되었다. 제3차 공의회는 8개 항의 교회법과 더불어 ㅓ예수의 한 위격 안에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함께 있음을 선언하였으며,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왔으므로 진실로 테오토코스”라는 내용이 담긴 신조를 채택하여 발표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위격의 일치성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 밖에 에베소 공의회는 메살리안파를 정죄했다. 제3차 공의회는 제1차와 제2차 공의회를 통하여 채택된 신조를 최종적이고 완전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제4차 세계공의회는 451년 칼케돈에서 황제 마르키아누스의 통치기에 열렸다. 제4차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 유티케스가 단성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육이 되신 말씀의 한 본성”이라는 시실의 사상을 극단화한 것이다.
유티케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448년에 파문되었다. 그러나 449년 8월 8일, 일명 에베소 강도회의에서는 유티케스의 ’성육신 이전의 두 본성, 이후의 한 본성‘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찬동하여, 유티케스가 정통이라고 선언되고 그의 사제직과 대수도원장직 복귀가 결의되었다.
450년 7월 데오도시우스 2세가 죽은 후, 새로 동로마의 황제가 된 마르키아누스는, 451년 10월 8일에 500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칼케돈에서 공의회를 개최했다. 10월 22일에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문을 작성했다. 이 결정문은 10월 25일에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시릴의 계승자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는 그리스도 안에 단지 하나의 본성(physis)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단성론자들의 주장은 예수의 인성이 그의 신성 안에 흡수되어 예수는 단지 신성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공의회는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예수의 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아들”이라고 진술하고 “.....혼합됨이 없으시며, 변화됨이 없으시며, 분리됨이 없으시며, 분할됨이 없으신” 두 본성을 가졌으며, 이 본성들 사이의 차이는 연합 때문에 결코 제거될 수 없고 오히려 각 본성의 독특한 특성은 보존되어 있으며, 양자는 한 위격 안에서 결합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칼케돈 신조를 작성했다.
제4차 세계공의회는 신조의 형성과 더불어 여타의 교회 및 교구, 성직자들에 관한 결정사항을 도출했다. 30개의 교회법들을 논의햇는데 28항이 가장 치열하게 논쟁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교부들은 로마가 제국의 수도였으므로 로마에 동등한 가운데 첫째로서의 위치를 주었다. 동시에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로마 다음의 권한과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한 예루살렘을 카이사레아의 사법권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에게 대교구들 중 다섯 번째 위치를 주었다.
제5차 세계공의회는 553년 5월 5일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제5차 세계공의회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확인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독생하신 아들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노래를 통하여 이 정통 신앙을 선포햇다. 이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 관점으로 칼케돈을 재해석했다.
제6차 세계공의회는 680년 11월 7일에 콘스탄티누스 4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제6차 세계공의회는 단일의지론에 대항하여, 예수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가졌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두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두 의지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서로에게 대적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조화를 이룬다는 결론을 내었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와 피루스, 키로스, 교황 호노리우스가 파문되었다. 이렇게 하여 기독론 논쟁은 제6차 세계공의회에서 마무리되었다.
제6차 세계공의회를 정점으로, 최소한 3세기 전에 시작한 교리적 해석과 발전과정이 마무리되자 교회는 내외부적인 위협에 대처해야 했다. 교회가 사용하던 성화에 대한 도전이 일어난 것이다. 제7차 세계공의회는 이러한 배경 아래서, 767년 9월 24일부터 10월 23일까지 니케아에서 열려 성화에 대한 교회의 결정을 이끌어 냈다. 레오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가 성화 사용을 금지하고 파괴 명령을 내리자 다마스커스의 요한이 729년부터 성화 파괴론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며 성화 옹호론을 폈다. 그는 <정통신항의 주해>를 통해 성화 공경이 이교적 우상 숭배의 부활이라는 비판을 막아내면서, 성화를 상징과 매개자로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성화를 성육신이라는 교리로써 정당화하면서, 성화 문제를 구원론과 연결시켰다. 성육신이라는 가시적인 구원의 섭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물질이 하나님에 의해 취해졌고 변용되었으므로 물질적인 것이 신적인 것의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7차 세계공의회는 형상과 모상의 결정적 차이,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합당한 예배와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성화에 합당한 공경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표명하는 한편, 형상화된 인간을 향하는 리고 예배와는 구분되는 성화 공경을 결정했다. 제7차 세계공의회는 성화 파괴론자들에 대한 파문서를 내었고, 성화 파괴논쟁 기간에 숨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그들이 봉직하던 교회에 안치하도록 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공의회의 성공을 기념하여 매년 사순절 첫 주일을 “정교회의 승리 주일”로 삼아 경축하고 있다. 또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유래한 22개 조항의 법률을 재확인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정신과 신학과 교회법을 가장 완고하게 그리고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 그들은 공의회가 성령에 의해 지도된 전승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전승 아래서 자신들의 신학과 신앙과 직제를 판단하고 적용한다. 동방정교회에서 세계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은 보편적인 권위를 갖는다. 세계공의회가 결정한 교회법들은 지역 종교회의 혹은 후에 이어지는 회의들에서 보충되거나 개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교회 전승에서는 다른 어느 것들 보다 초기 일곱 세계공의회에서 유래한 신앙과 교회법의 전승성서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마) 동방정교회 안에서의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위치
공의회의 신학들과 제정한 교회법들, 관습들은 개신교에서는 그리 큰 비중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에서 그것들은 동방정교회의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들이다. 나아가 교부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그 어느 기독교 종단들보다 밀접하고 견고하게 밀착되어 있다. 동방정교회가 초기 기독교의 일급 공의회를 자신들의 교회적, 신학적 근간으로 이해하는 이유를 고찰하기 위해서 그들이 초기 일곱 공의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공의회 교부들에 대한 그들의 존숭의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ㄱ) 동방정교회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이해
동방정교회가 이해하는 전승의 틀 안에서 큰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공의회의 역사는 동방정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이해하는 데 근간이 된다. 동방정교회는 공의회의 전승을 중요하게 여긴다. 동방정교회에서는 공의회의 전승에 성령의 인도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동방정교회는 과거로부터 전해져 온 유산의 가치를 동등하게 여기면서도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이해한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자 조지 플로로프스키는 성령을 통한 전승을 강조한다. 특별히 동방정교회는 초기 일곱 차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성령을 통한 전승의 대표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고, 그 전승 아래서 신학과 신앙과 직제를 판단하고 적용한다. 그 이유는 첫째, 5개 주요 대교구 만나 회의하고 결의를 이끌어 낸 기독교 전체의 공의회라는 점이며, 둘째, 이들 공의회들이 교회가 자랑할 만한 위대한 교부들에 의해 이끌어졌다는 것이다. 교부(The Fathers)들은 공의회를 통하여 교리적 정의들을 이끌어 내었고 그들의 활약은 공교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방정교회에서 공의회들의 결정 사항들은 보편적인 권위를 갖는다. 공의회가 결정한 교회법(Conons)들은 지역 종교회의 혹은 후에 이어지는 회의들에서 보충되거나 개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교회 전승에서는 다른 어느 것들보다 공의회에서 유래한 교회법의 전승 안에서 판단의 기준을 찾는다.
동방정교회는 일곱 개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을 ’지혜의 일곱 기둥'(the Seven Pillars of Wisdom) 혹은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the Seven Gifts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말하며 정교회 전승의 특별한 한 부분으로 여긴다. 그들은 초기 일곱 공의회들이 교회의 지속되는 전승의 완전한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동방정교회는 초기 일곱 공의회들이 신앙의 온전하고 순전함을 표현했다고 여긴다.
동방정교회 안에서 공의회는 모든 교회의 일치와 교류를 가능케 하는 기준이다. 공의회는 성서와 성서의 정신을 계승하고 해석한 교회의 공통되고 정통적인 견해를 도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공의회를 기준으로 신앙적 일치를 이룰 수 있고 상호간 관습과 교회법을 이해할 수 있다.
ㄴ) 에큐메니칼 공의회 안에서 교부들의 위치
기독교 초기 일곱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이단적 신앙과 교리로부터 정통신앙을 수호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루드비히 오트(Ludwig Ott, 1906-1985)는 교부로서 불릴 수 있는 요인을 공의회로부터 찾는다. 첫째, 교부들은 각양의 다양한 지역에서 초대된 이들로서 주교들의 지도 아래 있는 자들이고, 둘째, 다양한 지역에서 완전한 지도력을 인정받는 자들이고, 셋째, 소집된 회의에서 결정권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당대의 교부들은 사실상 기독교 초기의 사도들로 간주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관용령 이후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적 역학관계 안에서 활동의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공의회를 주도하고 공의회의 결정을 정통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공의회들은 교회가 자랑할 만한 위대한 교부들에 의해 이끌어졌다. 교부들은 공의회를 통하여 교리적 정의들을 이끌어 내었고 그들의활약은 공교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의회 교부들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동방정교회가 주장하는 공의회 중심의 일치 주장의 기초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자 존 메옌도르프는, 공의회의 주교들이 전승의 확고한 증인들이엇고, “성인들에 의해 전래된” 신앙의 수호자들로서 이단들에 의해 사도적 신앙이 잘못 이해되고 가르쳐지는 것을 막은 이들이었다고 말한다.
ㄷ) 초기 기독교 일곱 공의회의 정황적 배경
공의회의 성립과 전개 및 결과 도출에 이르는 과정에는 다음의 세 요소가 삼위일체적으로 작용했다.
a) 교부들의 공헌
공의회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온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교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공의회의 전개와 결과 도출에서 서로 공방을 주고 받으면서 공의회를 이끌었다.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교부들의 공헌으로 인해 교회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뤄낼 수 있었다. 초기 기독교의 일곱 공의회들은 이단들과 분열에 대처하여 보편적이고 일치된 교회의 교의학적 가르침을 도출했다. 비록 공의회가 황제들에 의해 소집되고 주도되었다 해도 제국의 거의 모든 지역 교구들로부터 온 교부들에 의해 보편적인 교회(the Universal Church)의 신앙과 실천이 표현되었기에 공의회는 정치적인 사건이 아닌 교회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공의회의 결정들은, 그것에 동의하는 한,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교회들에게 정통신앙의 잣대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성령에 의해 교부들을 통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인해 기독교가 제국 내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교회는 대체적으로 신학적 논쟁보다는 신앙의 본질을 수호하고 이방에 대해 변증하는 일에 힘을 썼다. 그러나 제국 내에서 신앙적 자유가 주어주자 교회 안에는 무수히 많은 신학적 이론들이 등장했다. 신학적 이론이라 함은, 그들이 믿고 있던 신앙의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2세기와 3세기에 영지주의나 마르시온, 그리고 3세기의 몬타누스주의 등, 기도교 내부의 이단적 흐름들이 정리된 후, 4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제국 내에서 팽창을 거듭해 나갔다. 교회가 제국 내에서 안정적 지위를 획득하고 점차 세력 판도가 다양한 지역적 환경을 따라 설정되어갈 무렵,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삼위일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이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교부들은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정통적 입장을 세웠고, 사도와 속사도 시대에 특정인에게 집중되던 권위와 존경과 판단기준이 교부들의 총의를 이끌어내는 공의회로 이전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예컨대 속사도 시대의 이단, 영지주의에 대하여 이레니우스의 권위와 해석이 존중되었듯이, 교부들의 시대에 등장한 아리우스의 사상, 유사본질론, 성령적대파, 네스토리우스의 사상, 단성론, 단일의지론, 성화파괴론 등이 교부들의 회합인 공의회라는 교회 전체의 총의로 그 정당성 혹은 이단성이 판단되는 기준이 마련된 것이다. 즉 교회의 리더십이 특정한 권위를 가진 개인에게서 교부들의 회합, 공의회로 이전된 것이다. 그 결과 다양한 신앙형태와 예전과 교회의 치리와 각조 ㅇ교회 내적 양상들이 통일성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교회는 공의회를 통해 인정된 교부들의 지도 아래 그들의 권위와 더불어 정통신앙에 선 교회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다양한 논쟁의 과정을 통해 표출된 교부들의 글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정통적 신학의 보고가 되었다.
b) 정치적 배경
공의회의 전개 과정 및 정통 신앙을 정립해 가는 과정에는 당대의 황제와 정치권력의 이해에 따른 부침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 공의회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비잔틴 제국안에서 교회의 결정은 정치적 배경과 역학구도 안에서 나온 산물이기도 하다. 물론 전제되는 것은 콘스탄티누스 이후 비잔틴 제국(중도에 율리안의 배교가 있었지만) 취한 태도가 국가교회(State Church)로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으로서 자임했다는 점이다. 비잔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 심장은 황제였다. 황제는 단지 평범한 세속 통치자가 아니고 지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겨졌다. 비잔틴 제국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형상(icon)이라고 한다면, 황제의 지상적 통치권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권의 이미지 혹은 형상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실의 권위가 종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그 자신이 물리적 그리고 정신적인 사건에서 지상에 신성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한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생각이 있었으며, 종교적 봉사가 황제로서의 최우선의 임무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러한 캐사로파피즘(Caesaropapism)은 이제 막 박해의 터널을 빠져나온 교회에게 유무형의 그리고 때로는 유익한, 때로는 해로운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박해로 인해 외부적 환경에 주목하던 교회가 박해가 종식된 후 교회라는 전체의 눈을 가지고 내부로 눈을 돌리게 되었을 때, 그 내부에는 아리우스, 성령적 대파 등의 불안전한(아직 정통신앙이나 신학이 획립되기 전이라는 면에서) 이론들이 산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급격히 확산된 교회의 지역적 분포로 인해 자칫 교회들은 신앙과 신학의 형태에서 정통을 세우기 어려웠고, 박해의 여파로 인해 약화된 경제력과 열악한 사회기반 환경으로 인해 교회의 회합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의 보호자로서 자처하며 제1차 세계공의회를 개최했을 때, 교회의 교부들은 그가 제공하는 편의를 통해 최초의 전 세계적 교회 회합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강력한 군주로서 그리고 그 자신이 열세 번째 사도라고 말할 정도의 신심에 있어서 열정적 자세를 가지고 회의의 중심에서 정통신앙 쪽에 서서 중심을 잡아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정통신앙/신학이 확립될 수 있도록 교회에 유익이 되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결과는 황제 데오도시우스나 유스티니아누스 황후 풀체리아 그리고 이레네의 역할에서도 드러났다.
그러나 당대 황제의 종교관과 정치권력의 부침은 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세 아들의 집권과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 따라 교회의 결정들은 번복되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했다. 황제들의 의견이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황제들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정통신앙이 이단이 되기도 하고, 이단이 정통신앙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아타나시우스의 다섯 차례에 걸친 유배와 복귀가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황제의 성향에 따라 교회에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성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불과 30년 만에 황제에 의해 뒤바뀌었는데, 황제의 정치적 혹은 사상적 태도에 따라 교회는 상반되는 변화를 반복해서 겪었다.
황제의 교회에 대한 영향에 있어서 369년경 발렌스의 조처는 부정적인 면에서 그 영향을 끼친 예다.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부적절한 데 모필루스를 세우려 했는데, 80개의 교회가 이에 반대하자, 불타는 배에 그를 실어 처벌했다. 적대자들에 대한 그의 박해는 날로 확산되었다. 적대자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유배되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황제가 바뀌면서 다시 황제의 입장과 견해에 따라 교회의 중흥이 일어났다.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아리우스를 정죄함으로써 니케아파가 승리를 얻을 수 있었고 정통 신앙이 확립되었다. 또 다른 예로서, 배교자 율리아누스와 레오, 콘스탄티누스 5세 등이 황제가 되었을 때, 교회는 황제의 사상, 종교관 그리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혼란이 가중되기도 했고, 정통 신앙이 박해를 받고 이단적 사상이 득세하기도 했으며, 교회의 전례와 관습이 침해를 받기도 했다. 마르키아누스 같은 경우는 황제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이용한 실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마르키아누스는 동, 서로마제국이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 로마의 대주교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 연장선에서 개최한 것이 칼케돈 공의회였다.
또한 황제나 권력의 교회에의 개입은 교회로 하여금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Edictum Mediolanense, 313)을 통해 기독교를 하나의 합법적 종교(religio licita)로 인정하고, 교회의 권리 회복과 동시에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환원시킨 사건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새로운 측면으로 진전시켰다.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기본 정책에 ’박해‘에서 ’관용‘으로 바뀌면서, 교회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자리를 옮겼으며, 4세기 말에는 주교들이 법정 송사 사건에서 정부의 관료자격으로 청문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정부 관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관료들은 물론 황제까지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면서 교회는 권력의 상층부까지 영향력을 미쳤고, 오히려 이방인들과 이교도들 그리고 소위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자들을 박해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일부의 주교들은 국가 권력과의 밀착이나 교회의 세속 권력화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주교들은 황실의 비호를 힘입어 자신들의 신학적 견해를 관철하기 위해 국가의 도움을 청하거나, 국가 권력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다양한 차원에서 세속정치와 결탁했다. 이런 영향으로 황제와 제국의 정치적인 견해나 종교적 견해가 그들이 관여한 종교회의에서 채택되고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황제들 혹은 세속관리드르이 교회 내부 신학문제에의 개입은 신학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심각성의 인식에서라기보다는 제국 내의 혼란을 방지하고 자기 나름의 권력 구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필립 샤프는 그 결과를 이렇게 진단한다. 즉 그들의 개입은 신학의 자유롭고 교회 내부의 발전을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저해했는데, 이는 그들이 모든 신학 쟁점들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했고, 궁정의 온갖 음모와 당시 사회의 관심사를 한데 결부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와 권력, 종교와 국과의 관계가 근대 이후로 대부분 독립적인 된 지금, 초기 공의회의 전개양상에서 드러난 양자 간의 관계와 그에 따라 나타난 결과들은 오늘의 교회에 좋은 참고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 교구 및 지역 간 역학관계
교구 및 지역별 대립구도가 공의회의 전개와 개개 사안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교구 및 지역간 역학 관계는 때로는 정통 신앙을 위한 순기능으로, 때로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대립이 보다 순도 높고 정밀한 초기 기독교 신앙 정립을 가능케 했다.
사실 아리우스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내부 분쟁에서 시작되었지만, 제국 내 교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었다. 제국의 동부는 아리우스를 지지했고 서부는 니케아 신앙을 지지했다. 콘스탄티누스 왕제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법제적으로 동등한 위치를 가지게 하도록 노력한 결과 옛 로마가 기독교적인 새로운 수도에 밀려났고,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새로운 로마’의 선임으로서 로마 주교 다음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를 ‘손 위’ 교회로 보아온 관습을 깨뜨렸다.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한편으로는 니케아 신학의 승리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다른 ㅎ나편으로는 서방과 동방 간의 분열의 불씨를 남겼다 .동방자체에서도 유서 깊은 알렉산드리아 교구와 새 제국의 수도, 곧 콘스탄티노플 교구 간의 긴장의 불씨를 남겼다.
교구간의 알력 관계가 첨예하게 드러낸 것이 제3차 공의회인 에베소 공의회였다. 에베소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 노선과 안니옥 노선의 대립에서 보아야 하는 대표적 공의회다. 두 노선의 대립은 신학적인 면에서는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조합되었지만, 인간적인 원인들로 인해 심화되어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자신들의 권력투쟁을 신학 영역으로 거져온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에서의 수위성과 전체 교회에서의 둘째 지위를 수호하고자 했고 잠정적으로 로마와 제휴하고 있었으며, 콘스탄타노플은 강력하게 그 영향이 부상하고 있었다. 대립되는 두 노선은 교회의 신앙 외적인 요소들에서도 빈번히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