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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황금찬 시인
민문자
남산자락에도 봄빛이 돌건만 아직 찬바람은 두꺼운 오버코트를 벗기지 못하고 있다.
2009년 2월25일 수요일【문학의 집 서울】산림 문학관 수요문학광장에 92세의 황금찬 시인의 문학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문인들이 모여 들었다.
사회자 전옥주 【문학의 집 서울】사무처장의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다음은 황금찬(黃錦燦) 시인의 약연보이다.
․ 1918 8.10. 강원도 속초 출생.
․ 강릉에서 교직에 몸담은 이후 1951년 시동인 '청포도' 를 결성해 활동
․ 1953년 《문예》와 《현대문학》을 통해 정식 등단
․ 중·고등학교에서 33년간 교사로 봉직.
․ 해변시인학교 교장, 시전문지『시마을』발행인 역임
․ 시집 : 1965 첫 시집 《현장》《5월의 나무》《오후의 한강》《산새》《구름과 바위》 《한강》《기도의 마음자리》《나비제》《별이 있는 밤》《조국의 흙 한줌과 아름다운 주검》《보석의 노래》《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잊지 못하는 것은》《사랑교실》《물새의 꿈과 젊은 잉크를 쓴 편지》《하늘에 걸린 정원》《겨울꽃》《구름은 비에 젖지 않는다》《오르페우스의 편지》《아름다운 아침의 노래》《별을 찾아서》《행복을 파는 가게》《물방울 속에 우주가 있다》《호수와 시인》《옛날과 물푸레나무》《어머니와 뻐꾹새》《음악이 열리는 나무》《공상일기》《고향의 소나무》등 시집 36권 발간.
․ 산문집 : 1965 첫 산문집 《실용문장법》《고독이 만든 그림자》《원고지에 그린 고향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그래도 별은 빛나고 있다》《사랑과 주검을 바라보며》《영원의 뜨락에 내리는 비》《들국화》《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로》《행복과 불행사이》《예술가의 삶》《나는 어느 호수의 어족인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저편 》《나의 서투른 인생론》《말의 일생》 등 24권의 산문집과 그 외 시론집, 시감상집 다수발간
․ 수상 :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서울시문화상, 한국기독교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문화보관훈장 수훈.
생명 / 황금찬
흙에서 나고 거기서 사는
나무와
풀은
흙을 닮지 않는다
풀과 나무에서 피는
꽃은
잎새들보다 아름답다
마음은
상념의 바다
물결은 쉬지 않는다
높고 위대한 파도는
사랑이다
별과 고기 / 황금찬
밤에 눈을 뜬다
그리고 호수에
내려 앉는다
물고기들이
입을 열고
별을 주워 먹는다
너는 신기한 구슬
고기 배를 뚫고 나와
그 자리에 떠 있다
별을 먹은 고기들은
영광을 취하여
구름을 보고 있다
별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같은 자리에
내려앉는다
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 먹지만
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
먼 하늘에 떠 있다.
곧바로 아직도 청년 못지않게 정정하신 황금찬 선생님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다음은 노시인이 하신 말씀을 메모하여 기록한 것이다.
시는 왜 쓰는가, 시는 양심이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그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에 이런 말을 했다.
‘시인이 못 사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보름달과 어머니의 유방은 둥글고 아름답다. 시인에게는 양심이 있다. 시를 써 놓으면 그 속에 인격이 나타난다. 시인은 양심 속에 산다. 양심은 아름다운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 시는 중국시를 베꼈고 현대시는 일본이 먼저 서양시를 받아들여 오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청년시절 요꼬하마에서 배를 타고 밀항하여 영국에서 겪은 이야기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돈이 가득 든 가방을 주워서 가방을 찾아가라고 써 붙였다. 그런데 돈가방 주인이 나타나서 칭찬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욕을 하고 때렸다.
“아, 누가 너 보고 가방 가져가라고 했어, 내가 가방 두고 볼일 보러 갔는데…, 나쁜 놈!”
‘아, 여기는 일본과 다르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일본에 돌아와서 명치유신이후 실권을 장악하고 한국침략을 하였다. 길가에 대소변을 보지 말고 큰 길 나갈 때는 신발을 신고 나가라는 명치천황이 칙령을 내릴 정도로 그 당시 일본사회는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던 미개한 시절이었다.
좋은 시는 첫째, 언어가 순화 된 아름다운 말이다. 성경에서 이런 아름다운 말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나무, 풀, 꽃은 누가 만들었나, 시인이 만들었다.
둘째, 시인은 사물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아름다운습성을 길러야 한다.
셋째, 시인은 생활의 예지가 있어야 한다.
시를 읽으면 읽은 사람의 표정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이야기, BC 2세기경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위대한 시인 굴원(屈原)의 어부사 (漁父辭) 고전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릴 적에 어부가 그를 보고 말하였다.
“아, 이게 누구세요? 아, 높은 분이 어떻게 이곳에 와서 놀고 계세요. 어인 까닭이요?”
굴원은 " 세상이 다 미쳤네, 나만 미치지 않았어. 온 세상이 모두 취해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으니 그래서 추방을 당했소이다."라고 하였다.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의 변화에 따라야 하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기의 밥이 될지언정 어찌 희디흰 순백(純白)으로 세속(世俗)의 먼지를 뒤집어쓴단 말이요?”라고 굴원이 대답하였다.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두드려 떠나가며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빠십시오,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세요."
마침내 청렴결백한 굴원이 5월5일 멱라수(汨羅水)에서 자살을 하였다.
“고기들아, 이 떡 먹고 굴원의 시체는 건드리지 마라.” 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해마다 떡을 해서 그곳 강물에 뿌리며 굴원을 기렸다. 그래서 굴원이 자살한 5월 5일은 용선(龍船)축제가 있는 단오절이 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 신채호 40세 때 ‘내 나이 사십에 할 일이 무엇인가. 호숫가 잡초같이 시들어 가는구나.’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인류사회(人類社會)의 세계사라 하면 세계사류(世界史類)의 그리 되어온 상태(狀態)의 기록(記錄)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라고 역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우리역사의 정의를 잘 정리한 저서 《조선상고사》를 남겼다.
세 번째 이야기, 천하미인 왕소군은 전한의 원제(元帝)때 궁녀로 뽑혀 입궁하였다. 많은 궁녀 가운데 단 하루라도 황제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많은 궁녀를 화공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올리게 하여 마음에 드는 미인을 선택하여 곁에 두었다.
이런 관계로 궁녀들이 막대한 재물을 화공들에게 바쳐 자신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황제의 총애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미인인 왕소군은 자신의 용모와 비파실력을 믿었는지라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화공은 아리따운 용모를 추하게 그리고 점 하나까지 찍어서 황제에게 바쳤다. 이 때문에 왕소군은 황제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었다.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세력이 강성해지자 한나라의 원제에게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원제는 공주를
차마 보낼 수가 없어서 궁녀 중에서 골라 보내기로 했었다. 왕소군은 이런 소식을 접하고 한과 흉노와의 화친정책을 위해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자신이 시집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원제는 변방무마책으로 궁녀 중에서 제일 못 생긴 궁녀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흉노의 사신을 불러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자리
에서 초상화를 보고 미리 정해 놓았던 왕소군을 불러 호한왕에게 시집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초상화의 주인공은 못생긴 줄만 알았는데 궁중의 절세가인이었다. 왕소군의 미색에 반해버린 원제는 시집보내기로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사신이 보는 자리에서 시집을 가라고 명하였으므로 번복할 수가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보았는데 왕소군의 초상화는 실제와 천양지차로 그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공 모
연수가 황제를 기만한 것을 알고 분노가 치밀어 모연수와 초상화를 그리던 화공들을 모두 참수하고 가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서기 33년 17세의 왕소군은 한나라와 흉노와의 화평을 위해서 흉노 호한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왕소군이 고국산천을 떠나
사신을 따라 멀고 먼 흉노의 나라로 시집을 갈 때 슬프고 원망하는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로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
하고 있었다.
黎菜芙芙 (여채부부) 명아주 푸르러 무성하기도 한데
芳葉元黃 (방엽원황) 꽃다운 잎은 원래 누런색이었다네
有鳥此處 (유조차처) 새들은 이곳에 깃들었다가
集于苞桑 (집우포상) 뽕밭으로 모여든다지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아 있는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어
그만 땅에 떨어졌다. 이리하여 왕소군을 일러 낙안미인(落雁美人)이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일본의 간노도메이는 이렇게 말했다.
.
‘이태백이 왜 태어났는가, 왕소군의 시를 쓰기 위해서 태어났다.’
왕소군 / 이백(李白)
1.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 왕소군은 안장을 떨치고
上馬涕紅頰 (상마제홍협) : 붉은 뺨에 목이 메어 말에 오른다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 오늘은 한나라 궁궐 여인이지만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 첩이 된다네
2.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 한나라 시절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
流影照明妃(유영조명비) : 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는구나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 : 한번 옥관의 길에 올라
天涯去不歸(천애거부귀) : 하늘 멀리 떠나간 뒤 다시는 못 온다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 : 한나라 달은 다시 동해에서 떠오르지만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내일) : 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네
燕地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 오랑캐 땅은 늘 추워 눈이 꽃을 이루니
娥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땅에 묻혔으리
生乏黃金枉畵工(생핍황김왕화공) :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死遺靑塚使人嗟(사유청총사인차) : 죽어서는 청총을 남겨 사람을 탄식하게한다.
네 번째 이야기,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이렇게 쓰여졌다.
도연명(陶淵明)이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은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직했다. 퇴직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도연명의 직속상관이 순시를 온다고 하면서 밑의 관료가 진언했다.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하십시오.”
“그놈은 나와 서당에 다닐 때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는데 내 월급 오두미(五斗米), 쌀 다섯 말 때문에 그 못난 놈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느냐, 내가 난 땅과 나무와 숲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도연명은 스스로 사임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병초의 아내가 남편을 맞이하고 막걸리를 한 되 사와서 아름다운 말로 위로 했다. 이리하여 유명한〈귀거래사(歸去來辭)>가 탄생한 것이다.
귀거래사(歸去來辭) / 도연명(陶淵明)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전원장무호불귀) 논밭 장차 황폐해지거늘 어이 아니 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었다.
奚惆悵而獨悲(해추창이독비) 어찌 홀로 슬퍼하고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일은 탓해야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 이에 앞으로의 일은 올바로 할 수 있음을 알았도다.
實迷途其未遠(실미도기미원) 실로 길 어긋났으나 멀어진 건 아니니,
覺今是而昨非(각금시이작비) 지난 것 잘못 되였음에 이제부터라도 바르게 하리라.
舟遙遙以輕颺(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훨훨 불어 옷자락 날린다.
問征夫以前路(문정부이전로) 길 지나는 사람에게 갈 길 물어야하니,
恨晨光之熹微(한신광지희미) 희미한 새벽빛에 한숨이 절로 난다.
乃瞻衡宇(내첨형우) 저만치 집이 바라다 보이니,
載欣載奔(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뛰듯이 집으로 간다.
僮僕歡迎(동복환영) 어린 하인들 모두 나와 반가이 맞이하고,
稚子候門(치자후문) 자식들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三徑就荒(삼경취황) 세 갈래 오솔길엔 잡초 우거졌어도,
松菊猶存(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예 그대로 남아 있다.
携幼入室(휴유입실) 어린 아들 손잡고 방으로 들어서니,
有酒盈樽(유주영준) 술통엔 술이 가득 나를 반긴다.
引壺觴以自酌(인호상이자작) 술병과 술잔 끌어당겨 혼자 마시며,
眄庭柯以怡顔(면정가이이안) 뜰 앞 나뭇가지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 짓는다.
倚南窗以寄傲(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있노라니,
審容膝之易安(심용슬지이안) 좁은 방이지만 편하기 그지없다.
園日涉以成趣(원일섭이성취) 정원은 매일 거닐어도 풍치가 있고,
門雖設而常關(문수설이상관) 문은 있으되 늘 닫아 두고 있다.
策扶老以流憩(책부노이류게) 지팡이 짚고 다니다가 앉아 쉬기도 하고,
時矯首而遐觀(시교수이하관) 때로는 고개 들어 먼 곳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무심한 구름은 산골짝을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저 새는 둥지로 돌아온다.
景翳翳以將入(경예예이장입)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무고송이반환)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으며 홀로 서성거린다.
歸去來兮(귀거래혜) 돌아가자!
請息交以絶遊(청식교이절유) 사귐도 어울림도 이젠 모두 끊으리라!
世與我而相違(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
復駕言兮焉求(복가언혜언) 다시 수레를 몰고나간들 무엇을 얻겠는가.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친척 이웃들과 기쁘게 이야기 나누고,
樂琴書以消憂(낙금서이소우) 거문고와 글 즐기니 근심은 사라진다.
農人告余以春及(농인고여이춘급) 농부들 나에게 봄 왔음을 알려주니,
將有事於西疇(장유사어서주) 서쪽 밭에 나가서 할 일이 생겼다.
或命巾車(혹명건차) 때로는 천막 친 수레를 몰고,
或棹孤舟(혹도고주) 때로는 외로운 조각배 노를 젓는다.
旣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 깊고 굽이져 있는 골짝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 험한 산길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도 한다.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 물오른 나무들 싱싱하게 자라나고,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샘물은 퐁퐁 솟아 졸졸 흘러내린다.
善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 만물은 제 철을 만나 신명이 났건마는,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 이제 나의 삶은 휴식 년을 절감한다.
已矣乎(이의호) 아서라!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 세상에 이 내몸 얼마나 머무를 수 있으리오!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 가고 머물음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무엇위해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는가.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 부귀영화는 내 바라던 바 아니었고,
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신선 사는 곳도 기약할 수 없는 일.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 좋은 시절 바라며 홀로 나서서,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지팡이 세워두고 김매고 북돋운다.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어보고,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지어본다.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 이렇게 자연을 따르다 끝내 돌아갈 것인데,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복해의) 천명을 즐겼거늘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
다섯 번째 이야기, 백낙천(白居易,白樂天)의 비파행(琵琶行)과 장한가(長恨歌)
“비파소리 누가 치는가.”
“늙은 기생입니다, 한때는 장안에서 제일 잘 치는 기생이었는데 지금은 늙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뱃사공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비파를 한번 켜 보너라.”
“늙어서 못 칩니다.”
그가 손을 잡고 현을 치니 밤 가는 줄 모르더라.
비파행(琵琶行) / 백낙천(白樂天)
深陽江頭夜送客 (심양강두야송객) 심양 강 나루에서 손님을 밤에 보내려니
楓葉荻花秋瑟瑟 (풍엽적화추슬슬)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바람 쓸쓸하다
主人下馬客在船 (주인하마객재선) 주인은 말 내리고 손님은 배에 타고
擧酒欲飮無管絃 (거주욕음무관현) 술을 들어 마시려니 음악이 없구나
醉不成歡慘將別 (취불성환참장별) 취해도 즐거움 없는 이별을 하려하니
別時茫茫江浸月 (별시망망강침월) 망망한 이별의 강에 달빛만 젖어 있네
忽聞水上琵琶聲 (홀문수상비파성) 그 때 물 위로 비파 소리 들려오니
主人忘歸客不發 (주인망귀객불발) 주인도 손님도 자리를 뜨지 못하네
尋聲暗問彈者誰 (심성암문탄자수) 소리 찾아 조용히 누구인지 물으니
니
琵琶聲停欲語遲 (비파성정욕어지) 비파소리 그치고 대답이 없구나
移船相近邀相見 (이선상근요상견) 배를 옮겨 가까이가 자리를 청하며
添酒回燈重開宴 (첨주회등중개연) 술 따르고 등 밝혀 자리를 잡아 앉네
千呼萬喚始出來 (천호만환시출래) 부르고 또 청해 겨우 나타났는데
猶抱琵琶半遮面 (유포비파반차면) 비파 안고 얼굴을 반쯤 가리었네
轉軸撥絃三兩聲 (전축발현삼양성) 꼭지를 틀고 현을 골라 두 세 번 소리 내니
未成曲調先有情 (미성곡조선유정) 곡조도 이루기 전 정이 먼저 흐르네
絃絃掩抑聲聲思 (현현엄억성성사) 줄 감싸 쥐어 손끝으로 누르니 소리 처량하고
似訴平生不得志 (사소평생부득지) 평생에 못 다한 마음속 한 호소하듯
低眉信手續續彈 (저미신수속속탄) 눈 섶을 내리깔고 손에 맡겨 비파 타니
說盡心中無限事 (설진심중무한사) 마음속 숱한 사연 모두 털어 놓는 듯
輕롱慢撚撥復挑 (경롱만연발부조) 가벼이 누르고 비벼 뜯고 다시 퉁기니
初爲霓裳後六요 (초위예상후육요) 처음은 예상곡 뒤에는 육요구나
大絃조조如急雨 (대현조조여급우) 큰 줄은 소란스런 소나기 같고
小絃切切如私語 (소현절절여사어) 작은 줄은 가냘픈 속삭임 같이
조조切切錯雜彈 (조조절절착찹탄) 소란함과 가냘픔 섞어서 타니
大珠小珠落玉盤 (대주소주락옥반) 큰 구슬 작은 구슬 옥 쟁반에 떨어지듯
間關鶯語花底滑 (간관앵어화저활) 때로는 꾀꼬리 소리 꽃가지 사이 흐르듯
幽咽泉流氷下灘 (유열천류빙하탄) 샘물이 어름 밑을 흐느끼며 흐르는 듯
氷泉冷澁絃凝絶 (빙천냉삽현응절) 찬물이 얼어붙듯 줄을 잠시 멈추니
凝絶不通聲漸歇 (응절불통성잠흘) 멈추는 그대로 소리 또한 멎었네
別有幽愁暗恨生 (별유유수암한생) 그러자 깊은 근심 남모르는 원한 일어
此時無聲勝有聲 (차시무성승유성) 소리 없음이 있음보다 애절하네
銀甁乍破水漿병 (은병사파수장병) 갑자기 은병 깨져 술이 쏟아져 나오듯
鐵騎突出刀槍鳴 (철기돌출도창명) 철기가 돌진하여 칼과 창이 부딪쳐 울듯
曲終收撥當心畵 (곡종수발당심화) 곡이 끝나 비파 안고 한번 그으니
粧成每被秋娘妬 (장성매피추랑투) 화장하면 미인들이 질투를 하였다 하네
五陵年少爭纏頭 (오릉소년쟁전두) 오릉의 젊은이들 다투어 선물을 주어
一曲紅초不知數 (일곡홍초부지수) 한 곡에 붉은 비단 수없이 받았었고
鈿頭銀비擊節碎 (전두은비격절쇄) 자개 박은 은빗을 박자 맞추다 깨뜨리고
血色羅裙飜酒汚 (혈색나군번주오) 붉은 비단치마 술로 얼룩졌었다 하네
今年歡笑復明年 (금년환소부명년) 웃고 즐기며 한 해 한 해 보내느라
秋月春風等閑度 (추월춘풍등한도)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는데
弟走從軍阿姨死 (제도종군아이사) 동생은 군대 가고 양어머니마저 죽고
暮去朝來顔色故 (모거조래안색개) 어느덧 나이 들어 얼굴빛이 변하니
門前冷落車馬稀 (문전냉락안마희) 문 앞은 쓸쓸하고 찾는 손도 드물어
老大嫁作商人婦 (노대가작상인부)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상인의 아내 되니
商人重利輕別離 (상인중리경별리) 상인은 이익보다 이별을 가벼이 여겨
前月浮梁買茶去 (전월부량매다거) 지난달 부량으로 차를 사러 갔다 하네
去來江구守空船 (거래강구수공선) 강어귀에 왔다 갔다 빈 배만 지키자니
繞船月明江水寒 (요선월명강수한) 배 비추는 밝은 달에 강물만 차가와
夜深忽夢少年事 (야심홀몽소년사) 밤이 깊어 문득 어린 시절 꿈을 꾸면
夢啼장淚紅欄干 (몽제장루홍난간) 꿈도 울어 화장 눈물 얼굴을 적신다 하네
我聞琵琶已嘆息 (아문비파이탄식) 비파 소리 듣고 이미 탄식 했는데
又聞此語重즉즉 (아문차어중즉즉) 여인의 말 듣고 나니 다시 한숨이 나네
同是天涯淪落人 (동시천애윤락인) 우리는 같은 천애의 불행한 신세
相逢何必曾相識 (상봉하필증상식) 상봉이 어찌 아는 사이만의 일이랴
我從去年辭帝京 (아종거년사제경) 나는 지난해에 서울을 떠나
謫居臥病심陽城 (적거와병심양성) 심양성에 귀양 와 병들어 누웠다네
심陽地僻無音樂 (심양지벽무음악) 심양 땅은 외지고 음악도 없어
終歲不聞絲竹聲 (종세불문사죽성) 한해가 다가도록 악기소리 못 듣고
住近盆江地低濕 (주근분강지저습) 분강 가까이 살아 땅이 낮고 또 습해
黃蘆苦竹繞宅生 (황려고죽요택생) 갈대와 대숲만 집을 둘러 무성타네
其間旦暮聞何物 (기간단모문하물) 그 간 아침저녁 들은 소리라고는
杜鵑啼血猿哀鳴 (두견제혈원애명) 피맺힌 두견새와 원숭이의 슬픈 소리
春江花朝秋月夜 (춘강화조추월야) 봄 강의 아침 꽃과 가을 밤 달빛 아래
往往取酒還獨傾 (왕왕취주환독경) 가끔 술을 얻어 홀로 잔을 기울이고
豈無山歌與村笛 (기무산가여촌적) 어찌 산 노래와 초동의 피리 없으랴 만
嘔啞嘲절難爲聽 (구아조절난위청) 조잡하고 시끄러워 들어주기 어렵다네
今夜聞君琵琶聲 (금야문군비파성) 오늘 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如聽仙樂耳暫明 (여청선악이잠명) 신선 음악 들은 듯 귀 잠시 맑았네
莫辭更坐彈一曲 (막사갱좌탄일곡)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 들려주오
爲君飜作琵琶行 (위군번작비파행) 내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니
感我此言良久立 (감아차언양구립) 나의 말에 느꼈는지 한 동안 서 있더니
객坐促絃絃轉急 (객좌촉현현전급) 물러앉아 줄 울리니 곡조는 점점 급해져
凄凄不似向前聲 (처처불사향전성) 슬프기 그지없어 앞의 곡과 다르니
滿座重聞皆掩泣 (만좌중문개엄읍) 듣는 모든 사람 소리 죽여 흐느끼네
座中泣下誰最多 (좌중읍하수최다) 그 중 누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는가
江州司馬靑衫濕 (강주사마청삼습)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 흠뻑 젖어 있구나
당 현종은 양귀비를 첩으로 들이고 나서 양귀비에 빠져 향락적인 생활을 추구하였다. 북방 유목민족 출신 안록
산(安祿山)은 당 현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현종은 그에게 국방을 맡기고 양귀비에게 수양아들로 삼게 했다.
안록산은 자주 수도 장안(長安)을 출입하면서 병력 부족으로 장안의 방위가 허술한 것을 알고 군사를 모집하고
병기와 식량을 비축하여 당왕조를 탈취할 준비를 하였다. 신하들은 안록산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말하였지만 현
종은 믿지 않았다. 안록산이 범양의 장수 32명을 교체하고 현종의 소환을 거부하자, 그제서야 현종은 그를 의심
하기 시작하였지만 아무 대책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록산의 난 소식을 전해들은 현종은 설마하고 믿지 않았으나 반란을 알리는 급보가 계속해서 올라오자 그제야 깜짝 놀라 허둥
댔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양국충은 장수들이 공을 세우면 자신에게 불리해질까봐 현종에게 엉터리 명령을 내리게 하였으며 이
로써 당나라 군은 안록산이 이끄는 반란군에 번번이 참패하였다. 반란군은 계속해서 낙양(洛陽), 동관(潼關)을 점령하고 곧바
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현종은 양귀비의 친척인 간신 양국충의 권유를 받아들여 양귀비 등과 함께 사천(四川)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수행하던 장병들
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쳐 지금까지 꾹 참아오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소리 높여 ‘양국충과 양귀비를 주벌하라'라고 외
쳐댔다. 이들 병사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키자 현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 수 없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는 38세였
다. 당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했다. 그는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
과 그리움 속에서 남은 세월을 보냈다.
시인 백낙천은 현종이 양귀비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잘 표현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땅에 나면 연리지가 되자.” 라는 말은 이때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장한가(長恨歌) / 백낙천(白樂天)
漢皇重色思傾國 한 황제 사랑 그리워함에 나라는 기울어가네
御宇多年求不得 오랜 세월 세상을 살펴도 구할 수 없구려.
楊家有女初長成 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으나
養在深閨人未識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하나
天生麗質難自棄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하루아침 뽑혀 군왕 곁에 있도다.
回眸一笑百媚生 눈웃음 한 번에 모든 애교가 나오니
六宮粉黛無顔色 육궁에 단장한 미녀들의 안색을 가렸다오.
春寒賜浴華淸池 봄 추위에 화청지에서 목욕함을 허락하여
溫泉水滑洗凝脂 매끄러운 온천물에 기름진 때를 씻으니
侍兒扶起嬌無力 시녀들 부축하여 일어나니 아름다움에 당할 힘이 없도다.
始是新承恩澤時 그 때부터 황제 사랑 받기 시작하였네
雲鬢花顔金步搖 구름같은 귀밑머리, 꽃 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 부용휘장 안은 따뜻하여 봄 깊은 밤을 헤아리니
春宵苦短日高起 짧은 밤을 한탄하며 해 높아서 일어나니
從此君王不早朝 이를 쫓는 군왕은 이른 조회를 보지 않았고
承歡侍宴無閑暇 총애로 연회에 매이니 한가할 틈 없어
春從春游夜專夜 봄을 쫓는 춘정을 즐겨 온밤을 지새우니
後宮佳麗三千人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의 총애가 그녀 한몸에 있으니
金屋粧成嬌侍夜 금 같은 방 단장하고 교태로 밤 시중들어
玉樓宴罷醉和春 옥루 잔치 끝나면 춘정을 이루니
姉妹弟兄皆列士 자매와 형제 모두가 열사라.
可憐光彩生門戶 예쁘게 여기 가문에 광채가 나니
遂令天下父母心 이로 하여금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도다
驪宮高處入靑雲 화청궁 높이 솟아 구름속에 들어 있고
仙樂風飄處處聞 신선의 풍악은 바람 타고 어디서나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 느린 노래 오만한 춤이 비단결과 피리에 맺히니
盡日君王看不足 군왕은 종일 넋 잃고 보아도 부족하도다.
漁陽瞽鼓動地來 돌연 어양 쪽 땅을 울리는 악관의 북소리 들려오니
驚破霓裳羽衣曲 예상우의곡에 깜짝 놀라도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궁궐에 연기 먼지 솟아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수천수만 관군들은 서남으로 가고
翠華搖搖行復止 천자의 기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며
西出都門百餘里 도성문 서쪽 백여리 마외역에는
六軍不發無奈何 육군을 보내지 못해 어찌 할 수 없어
宛轉蛾眉馬前死 미인의 긴 눈썹이 구부러지며 굴러 군마 앞에 죽었네
花鈿委地無人收 땅에 떨 군 꽃비녀 거두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 취교, 금작, 옥소두 땅에 흩어졌네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은 얼굴 가린 채 구하지 못하고
回看血淚相和流 차마 돌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르네
黃埃散漫風蕭索 누런 흙먼지 일고 바람 쓸쓸히 부는데
雲棧縈紆登劍閣 구름 걸린 굽은 잔도 검각산을 오르네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旌旗無光日色薄 천자 깃발 빛을 잃고 햇빛도 희미하네
蜀江水碧蜀山靑 촉강 맑게 흐르고 촉산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 황제는 아침저녁 양귀비 생각에 잠겨
行宮見月傷心色 행궁에서 보는 달에 마음 절로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는 애간장 끊어지는 소리요
天旋地轉回龍馭 천하 정세 변하여 황제 돌아오는 길에
到此躊躇不能去 마외역에 이르러는 걸음 뗄 수 없었네
馬嵬坡下泥土中 말 높은 고래아래 진흙더미 속에는
不見玉顔空死處 고운 얼굴 어디 가고 죽은 자리만 남아
君臣相顧盡沾衣 임금 신하 서로 보며 눈물 옷깃 적시네
東望都門信馬歸 동쪽 도성문 향해 말에 길을 맡겨 가니
歸來池苑皆依舊 돌아와 본 황궁의 정원은 변함없어
太液芙蓉未央柳 태액지의 부용도 미양궁의 버들도
芙蓉如面柳如眉 부용은 양귀비 얼굴 버들은 눈썹
對此如何不淚垂 이들을 대하고 어찌 아니 눈물 드리우리
春風桃李花開日 봄바람에 복숭아며 살구꽃이 만발하고
秋雨梧桐葉落時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이 떨어져도
西宮南內多秋草 서궁과 남원에 가을 풀 우거지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쓸지 않으니
梨園子弟白發新 이원의 자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椒房阿監靑娥老 양귀비 시중들던 시녀들도 늙었네
夕殿螢飛思悄然 반딧불 나는 저녁 궁궐 더욱 처량하여
孤燈挑盡未成眠 등불 심지 다 타도록 외로이 잠 못 드니
遲遲鍾鼓初長夜 더딘 종과 북소리에 밤이 길다는 것을 알았네
耿耿星河欲曙天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은 다가오고
鴛鴦瓦冷霜華重 원앙같이 금슬 좋은 기와는 차고 서리꽃이 심해지나
翡翠衾寒誰與共 함께 덮을 이 없는 싸늘한 비취금침
悠悠生死別經年 생사를 달리한지 아득하니 몇 년인가
魂魄不曾來入夢 꿈속에 혼백마저 만나볼 수 없네
臨邛道士鴻都客 임공의 도인이 도성에서 머무는데
能以精誠致魂魄 정성으로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하니
爲感君王輾轉思 양귀비 그려 잠 못 드는 군왕을 위해
遂敎方士殷勤覓 방사시켜 양귀비 혼백 찾게 하였네
排空馭氣奔如電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升天入地求之遍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上窮碧落下黃泉 위로는 벽락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는데
忽聞海上有仙山 홀연 들리는 소문 바다 위에 선산 있어
山在虛無縹緲間 그 산은 아득한 허공 먼 곳에 있고,
樓閣玲瓏五雲起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구름이 일어
其中綽約多仙子 그 곳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데,
中有一人字玉眞 그 중 옥진이라 하는 선녀 하나 있으니
雪膚花貌參差是 눈 같은 피부와 고운 얼굴 그인 것 같다하네
金闕西廂叩玉扃 황금 대궐 서쪽 방의 옥문을 두드리고
轉敎小玉報雙成 소옥 시켜 쌍성에게 알리도록 말 전하니
聞道漢家天子使 한황제의 사자가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 꿈 깨어 놀라는 화려한 장막 안의 혼백
攬衣推枕起徘徊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屛迤邐開 길게 이어진 구슬발과 은병풍 열리니
雲髻半偏新睡覺 구름 같은 머리 한쪽으로 드리우고 막 잠에 깬 듯
花冠不整下堂來 머리장식 안 고친 채 당에서 내려오네.
風吹仙袂飄飄擧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猶似霓裳羽衣舞 예상우의무를 추던 그 모습인 듯
玉容寂寞淚欄干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난간에 흐르니
梨花一枝春帶雨 활짝 핀 배꽃 한 가지 봄비에 젖은 듯 하구나
含情凝睇謝君王 정어린 눈길 돌려 군왕에게 사뢰니
一別音容兩渺茫 헤어진 뒤 옥음, 용안 듣고 뵙지 못하여
昭陽殿里恩愛絶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도 끊어지고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이 오래건만
回頭下望人寰處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
뿐唯將舊物表深情 장차오래 지닐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니
鈿合金釵寄將去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가지고 가라하네
釵留一股合一扇 비녀는 반쪽씩 상자는 한 쪽씩
釵擘黃金合分鈿 황금 비녀 토막 내고 자개 상자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를 어떻게 썼을까.
서양에서 낭만주의 사조가 꽃 피울 때 우리나라에는 1880년대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외국문학 영국시가 들어왔다. 당시 원산이북에는 장로교, 원산 이남에는 감리교 선교사가 들어왔다. 캐나다 선교사 로버트 그레슨(Robert Grierson: 구례선)은 1898년 9월 카나다 장로회에서 푸트(Foote.W.R)목사, 맥레(McRac.D.M)목사와 함께 한국에 파송되어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구례선(Robert Grierson)은 함경북도 남단 동해안에 있는 성진(城津)에 남녀공학인 보신학교와 협신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07년 성진공립보통학교, 보신여학교가 개교하였다. 구례선은 1934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선교와 교육에 충실하였다. 그는 1898년에서 1934년까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사건들을 에피소드별로 간략하게 자서전에 기술해 놓았다.
구례선이 선교사로 조선에 간다니까 친구가 조선인은 식인종이라면서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선교사가 원산 앞바다에 와 보니 조선 사람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고 천사 같이 보였다. 권총은 쓸모가 없을 것 같아 곧바로 바다에 던져버렸다. 후일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사실을 말하였다고 한다.
프랑스가 18C 중엽 낭만주의 꽃을 피울 때 근대시의 거장 일본의 기다하라하꾸슈(北原白秋)의 추천으로 정지용의 <향수>가 동인지 《학조(하꾸조 白鳥)》에 실려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 기다하라하꾸슈(北原白秋 1885~1942)는 일본 규슈 후쿠오카(九州 福岡) 야나기가와(柳川)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 동인지《빨간새》에 발표된 기다하라하꾸슈의 <고노미찌>는 우리의 윤동주 시인도 콧노래로 잘 불렀다는 시(詩)로서 일본 국민가요로 불릴 만큼 당시 수십만이 열광하며 불렀다고 한다. 한일문화교류협회회장 정명숙 수필가의 구술에 의존하여 <고노미찌>를 여기에 싣는다.
이 길 (고노미찌)
기 다하라하꾸슈 시/야마다(山田) 작곡 / 정명숙 번역
이 길은 언젠가 왔던 그 길
아, 그래요
아카시아 꽃이 피어 있던 길
저 언덕은 언젠가 본 언덕
아, 그래요
보세요, 하얀 시계탑을
이 길은 언젠가 왔던 그 길
아, 그래요
엄마와 마차타고 왔던 그 길
저 구름은 언젠가 본 구름
아, 그래요
버드나무가지가 흔들리고 있어요
어느 날 박종화 씨가 학생시절 술값은 방인근씨가 지불하기로 하고 친구 일곱 명이 술집에서 정지용의 시 <향수>를 낭독하기로 했다. 술집 기생이 원고지에 베껴주고 원본은 자기가 접어 가슴에 넣고 말했다.
“오늘 선생님들 모신 영광은 잊을 수가 없어요. 술값은 제가 다 내겠어요.”
이 얼마나 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인가.
향수(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1928년 이후 일제의 징병, 보국대에 끌려갈 때 서정주의 <귀촉도>를 , 1940년 일제가 우리의 창씨개명을 요구하며 억압했을 때에는 김광균의 <향수> <설야>가 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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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촉도(歸蜀道) /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어 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장도(銀粧刀)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향수(鄕愁) / 김광균
저물어 오는 육교 우에
한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람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우에 갈매기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 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프라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 오기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 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어느 날 황금찬 선생님은 존경하는 시인 김광균 시비 앞에 꽃다발 하나가 없어 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혜화전철역 샘터 앞쪽에 있는 시비 <설야(雪夜)> 앞에 화분 하나를 갖다 놓았다. 우이동 집에 가면서 ‘누가 가져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튿날 일찍 일어나 시비(詩碑)앞에 가보니 화분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름다운 말, 아름다운 마음을 위해서 우리 어머니들, 어린이에게 흔드는 것 가르치지 말고 동화나 동시를 가르쳐 주세요.”
이 부탁말씀은 강한 메시지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 문학사에 대한 황금찬 시인의 소중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인터넷 독자와 방청석의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1.다시태어나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요?
“영원히 시를 쓸 것입니다, 시인의 역할에 감사합니다.”
2. 60여권의 시집을 출간되었는데 앞으로 시집 계획은 언제 쯤 될까요?
“산문집은 아직 계획 없고 내 시집이 안 나오면 죽은 줄 아세요.”
3. 몇 편의 시를 외우실 수 있고 가장 좋은 낭송시는 어떤 것인가요?
“목월선생의 시가 잘 맞아 좋아합니다. 외는 시는 한번 외웠다가도 가만있으면 잊어버리니 다시 챙겨야 합니다. 비교적 마음에 맞는 시라야 잊지 않습니다. 잘 외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시 100편쯤 베껴서 아침마다 읽습니다. 번역잘 된 외국시도 낭송하지요.”
“시집은 5000권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시집 1000권을 읽어라.’ 했습니다. 1941년 4월에 일제가 우리 잡지, 신문 모두 없애 버렸습니다. 1942년 서울에 사는 조지훈 시인이 경주의 목월 선생에게 편지로 <완화삼>을 써 보냈습니다. 이에 답신으로 시 <나그네>를 목월이 보내왔습니다. 경주박물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두 분이 처음 만나서 낭송한 시들입니다. 우리 시 역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 보물입니다.”
황금찬 시인은 우리 현대시의 산 역사입니다. 중간 중간 시낭송을 곁들인 특강은 시종일관 긴장된 시간이었습니다. 이 소중한 말씀을 아름다운 우리말을 마음껏 쓸 수 있고 마음대로 표현 할 수 있는 행복한 시대, 황금찬 노시인의 바람처럼 아름답게 시를 쓰고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낭독해야겠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바르게 기록하기 위하여 두 차례 선생님과 짧은 전화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평소 애송하시는 시를 꼭 짚어 말씀해 주십사 부탁드리니 위에서 거론한 시(詩)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명이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빛나는 이름이라고 생각되어 황금찬(黃錦燦) 선생님께 본명인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말씀인즉 선생님 어머님께서 선생님을 낳고 보니 영양실조가 몹시 심하였다고 합니다. 금방 죽을 정도여서 큰아버지께서 이름 덕이나 보라고 지어주신 본명이랍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삶을 사시는 황금찬 선생님 감사합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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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용모도 고매하시고 음성 또한 정겨움이 넘치셨습니다. 지난해 어느 시상식에서 중국 지진발생에 대하여 진심으로 걱정하시던 모습이, 말씀이 인상깊었습니다. 강의 말씀 두고두고 감상하며 공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