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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828 산정무한 원문보기 글쓴이: 임병기
대구일보에서 특집으로 기획하고 있는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필진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지식과 문장력이 일천하며, 지명도가 전혀 없는 저를 신문사에 추천해주신 우리카페 최재운 교장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3~4편 올릴 예정이며 총 54회에 걸쳐 대구.경북의 덕망 높은 저명인사들이 유익하고 재미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전개할 것입니다. 신문 기사 안보이죠? 글을 가져오니 한 번 읽어 보이소예!
봄이 무르익어 가는 계절의 여왕 5월이 오면 전국 지자체에서는 고장의 특색을 살린 고유 문화의 창달, 특산물 홍보, 관광 활성화 등의 다양한 주제와 목표를 설정하여 축제를 펼치고 있다. 대구에서 가까운 성주군의 경우 지금까지의 참외축제와 세종대왕왕자 태실 태봉안 행사를 작년부터 '생활사 성주생명문화 축제'로 이름을 변경하여 개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컨텐츠가 태어나서 삶을 영위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생生 활活 사死이다. 생生은 세종대왕 왕자 태실, 활活은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우리옛집과 아련하게 향수를 자아내는 돌담길이 어우러진 한개마을, 사死는 성산가야 옛터전인 성산떼고분을 소개함으로서 문화유산이 즐비한 성주가 역사문화의 고장임을 함축하는 상징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귀하게 여겨 태실을 조성하는 까닭은 풍수지리의 동기감응同氣感應론으로 명당의 기운을 받아 태의 주인공이 왕조를 태평성대로 통치 하기를 바라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명당의 기를 받아 왕조를 위협하는 왕이 태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사대부와 명문가에서 조성한 왕후지지王后之地의 명당을 빼앗을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 있던 자리에 본래 성주 이씨 중시조 이장경의 묘와 묘각이 있었다고 한다. 이장경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예전 고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있던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시조 다정가(多情歌)를 지은 이조년의 아버지 이다. 묘의 이장과 관련하여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장경의 장지에 노승이 나타나 "산(태봉)위의 저 나무를 베고 묘지를 쓰면 더 없는 길지이나 묘각을 지으면 후일 그 소유가 바뀌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후손들은 묘각을 지었다. 세월이 흘러 왕실에서 태를 모시기 위해 지관을 파견하여 확인한 결과 처음에는 신통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묘각에 오른 지관이 명당임을 알아보았으니 노승의 말대로 묘각 때문에 이장을 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왕실에서 태실지로 결정했지만 이장경 후손들의 반발도 있었다. 이정녕은 태조의 9녀 숙혜옹주와 결혼하여 성원위가 된 이장경의 후손이다. 이정녕은 당시 풍수학제조 관직에 있으면서 왕자 태실을 두기 위하여 이장경의 무덤을 이장해야 된다는 조정의 결정에 명당을 안 빼앗기려고 무시한 죄로 파면되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태실의 조성이 끝났고 관례에 따라 성주는 성주목으로 승격되어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세종대왕 왕자 태실은 뒷줄에 소현왕후 청송 심씨 소생의 대군 7명의 태무덤, 앞줄에 후궁 소생의 태무덤 11기, 열에서 비켜나 홀로 모셔진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봉안되어 있다. 태실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태실의 구조는 기단부基壇部와 몸돌 옥개석屋蓋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 아래에는 석실을 만들어 태항아리를 안치하며 방형의 두터운 기단석에는 앙련仰蓮을 표현하였고 특별한 장식이 없는 몸돌과 옥개석에는 복련覆蓮을 새긴 후 보주寶珠를 위에 올린 단순한 형태이다. 이런 형태는 우리민족의 전통 사상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상징성이 함축된 것으로 보이며 몸돌은 사람을 상징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 만난 박연주 문화유산해설사는 "태는 길일을 택하여 깨끗하게 백번 씻고 마지막으로 궁중의 향원주로 다시 씻은 후 작은 항아리 바닥에 동전을 깔고 그 위에 태를 놓은 후 기름종이로 항아리 입구에 덮는다. 다음 큰 항아리 안에 솜을 깔고 작은 항아리를 넣은 다음 공간을 솜으로 채우고 밀폐한 후 뚜껑을 덮는다"고 말했다.
태를 봉안하는 절차와 의식도 까다롭다. 관상감觀象監에서는 태실의 자리 선정과 날을 정하였고 태의 호송은 선공감繕工監에서 수행하였다. 태를 호송하는 책임은 임명된 안태사安胎使가 주도했다. 배태관陪胎官은 봉송 도중 발생할 수 있는 불의의 사고를 대비했고, 전향관傳香官은 배태관을 보좌하였다. 태실지는 상토관相土官을 파견하여 길지 여부를 재확인 하였으며 감동관監董官은 일체의 공사를 감독하였다. 태실 조성 후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벌목 채석 농사 가축 사육 등을 금했으며 고을에서는 정기적으로 순찰하여 훼손여부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후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의 태실 석물은 도괴倒壞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근자에 기단부를 수습하여 제자리에 모셨다. 계유정란으로 강화도로 귀양 가서 사사된 친동생 안평대군의 태실 석물에는 기단부만 남아 있고 상부의 몸돌, 옥개석, 태비가 없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길지에 태실을 봉안하여 세세년년 조선왕조의 번영을 기원했던 세종의 염원과는 달리 수양대군 추종 세력들은 골육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찬탈을 거쳐 세조로 등극 이후 1457년 형제의 태실마저 훼손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조의 태실은 왕으로 등극한 뒤 어엿하게 귀부를 꾸미고 비신위에 용무늬가 새겨진 이수를 갖춘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 태봉의 면모를 갖추었다. 비문은 세조가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윤성이 지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은 불가능 한 상태이다.
태실지 가장자리에 위치한 불운한 임금 세손 단종 태실 석물은 돌꽃과 이끼가 적어 외형이 깨끗하다.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아버지 문종 재위 시에 숙부와 조카가 같은 태실지에 봉안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연유로 가야산 자락 가천 법림산으로 옮겼으나 단종 폐위 후에 법림산 단종태실은 철저하게 훼손되어 이곳에 묻어 두었던 태실 석물을 다시 세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왕릉과 마찬가지로 태실에도 위패를 모셔두고 불력을 통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며 제례를 준비하는 사찰 이른바 원당 사찰願堂寺刹이 있었다. 왕릉 수호의 능침 원당사찰로는 세조의 원찰 광릉 봉선사와 세종의 원찰 여주 신륵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왕실의 원당사찰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였다. 유교가 통치이념인 조선왕조는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의미로 사찰을 격하하여 원당사찰로 삼았던 것이다. 강원도 춘천의 월송리 삼층석탑은 조면사지造麵寺址 석탑으로 알려져 두부뿐만 아니라 관에서 사찰에 행해진 수탈의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영천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원당사찰이며, 세종대왕 왕자 태실 원당사찰은 지근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선석사이다. 선석사는 태실 원당사찰로 인해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 받기도 했다. 선석사에 전해오는 성주선석사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幀畵(보물1608호)은 숙종 28년 탁휘 외 3명의 금어 작품으로 당시에는 태실 제례에도 걸렸던 괘불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괘불탱은 야단법석野壇法席의 불교 법회 이외에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기우제를 지낼 때에 활용된 사례는 해남 미황사 등 여러 사찰에 전해온다. 선석사 주지스님에 의하면 태실 제례는 대한제국 이전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최하층 신분이었던 승려와 사찰은 왕실의 원찰願刹이 되면 관이나 사대부들의 핍박에서 벗어나며, 부역 면제, 특산품 공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 등의 조정의 보호를 받게 되어 태실 수호 가람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태실이 길지에 위치한 사실을 간파하고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정기를 끊어 국운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로 태실도 수난을 당하게 된다. 일제는 충북 금산의 태조 태실를 비롯해 전국 각지 명당에 산재해 있던 임금의 태봉과 세자, 대군, 공주 등의 태실 54기를 1930년부터 경기도 고양 서삼릉西三陵으로 강제로 이봉하였다.
서삼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희릉,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이 있어 서삼릉으로 불리었으나 일제의 민족혼 말살 정책으로 마치 왕실 공동묘지처럼 되어 버렸다. 일제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본래의 목적 외에도 태항아리를 비롯해 부장품을 탈취하여 세종대왕 왕자태실도 수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서삼릉에 옮겨진 태항아리는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어 아직까지도 경남 사천의 세종대왕 태실을 마주 보고 있는 단종의 태실에 관하여 진위 여부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 들은 태실 보호를 위한 미명하에 왕조의 정기를 끊을 목적으로 일본을 상징한다는 일日자字 형태의 시멘트 담장을 쌓았으며 최근까지 방치되어 오다가 1995년 시멘트블록 담장과 일본식 철 대문을 철거하였다.
태실은 왕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전승되어 전해오는 생명을 귀하게 여겼던 생명 존엄성의 상징으로 인류사에 그 유례가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독특한 문화이다. 특히 성주는 용암면의 태종 태봉, 가천면의 단종 태봉, 월항면의 세종대왕 왕자 태실과 세조 태봉이 있는 태실의 고장이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왕자들의 태실이 한 곳에 자리한 곳으로 세조반정 같은 권력 투쟁으로 인한 비운의 임금 단종과 세조의 왕위 찬탈에 연루된 왕자 들의 태실과 석물의 훼손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유형도 살펴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2012 성주생명문화축제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를 맞이하는 축제는 5월17일~5월20일까지 천연기념물 403호인 성주읍 경산리 성밖숲 일원에서 개최된다. 축제추진위원회는 이기간동안 생활사 주제관을 설치ㆍ운영한다. 생(生)과 관련해서는 엄마체험, 자궁체험, 태실모형전시를 한다. 또 어린이 생명과학관에서는 조상들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며 오늘날 저출산과 인간생명 경시 풍조에 경각심을 고취시킨다. 활(活)과 관련해서는 전통놀이체험, 생활음식점, 전통의상체험 등의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사(死)와 관련해서는 상여 꼭두를 전시, 사후세계의 상징성을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경복궁에서 태를 씻는 세태(洗胎) 의식 후 성주까지 태를 옮기는 태봉안(胎奉安) 재현 행사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고취시키고 있다. 태실은 왕자, 공주의 태를 묻는 석실을 말하며 왕자 공주가 출생하면 전국의 길지를 찾아 태를 봉안하여 현재도 방방곡곡 많은 지역에 ‘태실’ ‘태봉’의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 2012.05.02 대구일보 |
첫댓글 아~ 안보이다가 다시보이니 반갑네....아부지산소에서 보면 바로정면의 산이 칠봉산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