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 배선옥의 시집,『오래 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
文霞 鄭永仁
나는 시(詩)에 대해서 문외한(門外漢)이고 맹문이이다. 청맹과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시의 겉모양만 보지 속마음을 잘 보지 못하는 꼴이다. 마치 나무 겉껍질은 보고 속의 목리문(木理紋)은 못 보는 것처럼…….
그래서 시의 본질인 ‘시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의 맛’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하긴 고등학교 때, 수학의 3차원 기하학은 아주 젬병였다. 그저 1, 2차 해석만 좀 했을 뿐이다. 수학을 잘하는 딸아이는 그런 나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니 시 구절보다는 맛깔스럽게 쓴 시어(詩語)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배선옥 시인의 『오래 전의 전화번호를 가억해내다』를 받는다. 어쭙잖은 글 쓰는 나도 이런 시집을 받을 수 있다니…….
대개의 사람들은 오래 전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를 좋아한다. 오래 전 이야기는 곰삭고 발효되고 정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늘. 날씨 맑음」(16쪽)을 읽는다. 첫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마음속에 한 사람을 담는다는 건 이미 담겨져 있던 누군가를 덜어낸 다음의 일임을 알았다”
우선 이 시의 제목부터 의문이 생긴다. 「오늘. 날씨 맑음」, 왜 ‘오늘 다음에 온점( ._)을 했을까? ( , ) 반점을 하면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또 시들의 전체에 ’문장부호‘가 없다. 이게 산문형 시의 특징인가? 나는 확실히 시에 대해서 맹문이다.
정해진 공간에 누군가를 담는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누군가를 내보내야 하는 것. 마치 항아리에 새 물을 부으려면 있던 물을 쏟아버리듯이……. 아마 갈마드는 일일 게다.
그래서 누군가를 내보내는 일은 시집 이름처럼 오래된 그리움이 남게 되는 것 같다. 오랜 전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듯이 말이다.
나는 이 시집의 전체 맥락은 ‘그리움’이 덕지덕지 냄새가 난다. 제목부터 그렇고. 하기야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그리움을 되새김하는 동물이 아니던가.
전체가 산문 형태인 시집은 처음 대한다. 하긴 별로 시집을 읽지 않았으니깐.
흡사 사설시조(辭說時調)를 읽는 기분이 난다. 사설(辭說)을 들으면서, 마치 이즈음 유행하는 라틴아메리카 레게음악의 랩송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시(詩)는 문학에서 가장 함축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사실 시에 대해 문외한이니 ‘메타포니, 이메지니, 명징(明澄)…’ 하는 말 등에 대한 진정한 뜻도 잘 모른다. 그저 시는 정갈하게 정제된 언어가 아닐까 한다. 시어(詩語)들이 모여서 시가 될 터인데 심장 속에서 정제된 언어가 아닐까 한다.
소설가 김훈은 『흑산』을 쓰면서 ‘봄이 왔다, 봄은 왔다’라는 문장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고 한다. ‘이’로 할 것인가, ‘은’으로 할 것인가 한 글자 때문에. 마치 플로베르가 말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 )을 실천하듯.
아마 시는 더욱 치열한 은유된 언어의 선택일 것이다.
그의 시집, 마지막 시가 「찔레꽃」이다(86쪽)
“내 가슴에선 지금 시큼한 포도주 냄새가 난다. 껍질과 알맹이와 씨들이 함께 얽히고 섥혀 삭아가는 냄새 그리워라
~(중략)~ 이제 형체도 없이 뭉그러져 남았기에 말갛게 정제된 시절~“
말갛게 정제된 시절!
아마 시도 포도주·맥주·소주·맑은술·막걸리 같은 혹은 소맥, 폭탄주 같은 시도 있을 것이다. 그런 술들은 다 발효가 잘되어야 한다.
어렸을 적, 우리 집에서는 가끔 술을 담갔다. 그 당시는 밀주(密酒)다.
고두밥에 누룩을 넣고 잘 빚어 맑은 물과 함께 항아리에다 담갔다. 술항아리는 떠억하니 따끈한 안방의 아랫목을 차지하였다. 헌 이불을 둘러쓰고서.
며칠이 지나면 술독에서는 마치 코고는 소리가 드린다. ‘골골골골’이 지나면 ‘부글부글…….’ 시큼한 냄새가 지나면 달착지근한 냄새가 우리를 간질인다. 좀 덜 발효되었을 때가 가장 새콤달콤했다.
‘껍질과 알맹이와 씨들이 함께 얽히고 섥혀(?) 삭아가는 냄새’는 바로 아이들에겐 좋은 주전부리가 되었다. 너무 먹으면 시에 취하듯 우리도 취했다.
술이 다 발효가 되면 용수를 박고 말갛게 괸 맑은 술 웃국을 정성껏 떠냈다. 그 나머지를 걸러낸 것이 막걸리다.
하여간에 말갛게 정제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삭히고 발효되어야 한다. 시도 그런 것이 아닌지. 잘 발효된 시, 그렇지 않으면 부패된 시가…….
소설가 김훈의 그의 수필 「찻잔 속의 낙원」에서 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詩 )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라면,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것이다.”
그런데 너무 인공적이면 시가 난해해진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배선옥입니다.
오늘에서야 올리신 이 글을 읽었습니다.
우선 부족한 제 시를 읽어주시고 언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겨주신 내용들은 잘 음미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은 또 눈이 내린다고 합니다. 제 시만큼이나 난해하고 징그러운
계절인가요? ㅎㅎ 건강하십시오.
누군지 모르지만 시집의 대강을 잘 표현했네요. 저 시집을 다 읽고도 감히 표현 못한 저도 부끄럽고, 큰 맥락 - 그리움의 시- 에 공감합니다.
*** 고맙습니다 ***
시에 대해서 문외한입니다.
그런 제가 감히 시집을 읽고 중언부언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신문에 나는 시들을 부지런히 스크랩하는 독자이기도 합니다.
언제 다시 읽 수 있을까 하는 미망 속에.
엊그제 어느 수목원을 다녀왔습니다.
모든 풀들은 뿌리를 감춘 채 숨을고르고 있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게죠.
시을 읽으면 지상의 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큰 삼나무는 뿌리에서 빨아올린 물이 맨꼭대기 기공으로 증산하기까지는
23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시도 오랜시간 숙성.발효되어야 하는 것첨럼...
눈이 녹아 대지를 적시듯, 시도 녹아서 삶을 적시는 것처럼
정영인 선생님...
올리신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나름 숙제를 한가지 가지고 돌아갑니다.
가볍고 말랑거린다고 모두 생짜는 아니랍니다^^
아, 발효가 잘못 되면 부패하게 되니 기껏 잘 삮은 척 하는 게 우스울스도 있겠습니다만,
인공적이라고 모두 난해한 것만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좋은 말씀 잘 새겨두겠습니다.
'말갛게 정제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삭히고 발효되어야 한다. 시도 그런 것이 아닌지.
잘 발효된 시, 그렇지 않으면 부패된 시가...'
'그런데 너무 인공적이면 시가 난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