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락된 역사, 땜쟁이
필자가 진행한 세운상가 50년 경력 진공관 오디오 기술자와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그때 우린 땜쟁이로 불렸지”라는 증언에는 기술자를 하대하던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담김
조동원(2015)의 지적처럼 학계에서도 세운상가 일대의 연구는 도시와 건축 분야에 집중해 있을 뿐, 이 일대의 기술문화와 제작문화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것이 현실임
뒤늦게 산업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가 빠르게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고 기술선진국들을 추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세운상가의 근간을 이루었던 ‘땜쟁이’들의 노력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세운상가와 청계천 일대, 전자업종의 태동지
1960년대 청계천 일대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기계, 공구, 전자제품들을 판매하거나 제품을 뜯어서 부품을 팔고 그 부속품으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장들이 자리하고 있었음
특히 광도백화점과 아세아백화점을 중심으로 장사동, 청계천 일대에는 전자업종들이 집중 분포했으며, 60년대 부품 판매와 라디오 조립 판매 수준에서 70년대에는 완제품을 만드는 단계로 발전하면서 전자업종이 팽창하기 시작함
한편 세운상가는 60년대 말 준공 당시 저층부 상점가는 백화점의 성격으로 소위 “쌀가게와 연탄가게를 빼고 서울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곳”이었으며, 그 위의 고층부 아파트는 사회 고위층의 주거지로 조성되었음
그러나 준공 직후부터 주거민과 상인들의 갈등, 주거와 상업 기능의 충돌, 강남 개발로 인한 고층부 아파트의 인기 하락 등으로 주거 기능이 약화됨
이러한 배경에서 앞서 언급한 전자업종의 팽창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고층부 아파트는 기술자들의 작업실과 사무실로 대체되었으며, 주거기능 약화에 따라 저층부 소매점 역시 전자 업체들이 들어서면서 70년대에 이르러 세운상가는 곧 전자상가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됨
그림1. 1980년대 초반 세운상가와 아세아극장 (출처: http://ka.do/FCa0)
복제의 시대
세운상가를 대변하는 기술적인 특징은 복제(copy)로 대표되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로써, 이는 기술 추격형 국가의 대표적인 산업전략이자 국가의 묵인 아래 장려되는 자생적인 기술산업 발전동력이었음
실제로 세운상가 일대에서는 70년대 일본 오락기의 복제와 재생산, 80년대 애플컴퓨터와 IBM PC의 복제, 컴퓨터 드라이버의 복제 등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고가의 원본보다 저렴한 복제품의 확산으로 관련 시장의 규모를 확대하는데 결과적으로 기여했음
복제의 과정은 선진기술품의 분해와 (회로)분석을 통해 내부의 기술적 정보들을 취득하고, 원본과 동일한 제품을 제작하거나, 원본과 기능은 동일하지만 새롭게 재설계된 제품으로 나타나기도 함
일례로 일제 오락기 일부는 세운상가에서 복제과정을 거치면서 원본이 두 장의 보드(board)로 구성된 것을 역설계를 통해 한 장의 보드로 구현하였으며, 일본의 원천 기술자들이 추적해왔다가 역설계의 기술에 탄복해 저작권 침해 소송 제기 없이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함
또한 이러한 기술자들의 연계와 협업망도 같은 시기 발맞춰 구축된 것으로 보이는데, 복제와 재생산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분야의 업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협력했으며, 이 일대에는 그들 사이에 공유되는 기술적 암묵지들이 존재하였음
창의성 발현의 토대, 우리식의 해커 문화
1960년대 초, 당시 30대의 한양대 이만영 박사가 청계천 일대의 부품을 이용해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를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1980년대 초에는 청계천 5, 6가 전자제품부속가게에서 유명한 단골 고객으로 통한 17세 고교생 박현철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워드 프로세서를 개발하기에 이름
이러한 자생적 기술 습득의 공유지 위에서 TG삼보컴퓨터(삼보전자엔지니어링)와 한글과컴퓨터, 코맥스(중앙전자공업사) 등의 1세대 IT 기업들이 세운상가를 근거지로 성장했음 이러한 사실은 세운상가 일대에서 복제로 시작된 기술의 습득이 단지 남의 것을 베끼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창조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증명함
다시 말해 창조성의 한 형태로서 분해-복제-조립-변형-제조의 문화, 즉 일종의 해커문화가 당시 세운상가 일대에서 활발히 벌어졌고, 이러한 문화의 축적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인물과 기술들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음
만약 이러한 현상을 모두 '불법'으로만 규정한다면 이 시기 세운상가 일대에서 벌어졌던 역동적인 기술 발전의 역사가 간과되기 쉽고, 자생적으로 형성된 창의적 제작공간에 대한 의미도 밝혀내기 어렵게 됨
해커, 크래커, 메이커의 유래
해커(Hacker)문화는 1960년대 MIT 테크철도클럽(TMRC)에서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활용하여 철로위의 신호와 전력제어를 해결하려던 숙련된 프로그래머들의 고유한 문화에서 유래됨
그림2. TX-O를 사용하는 MIT TMRC 회원 (출처: http://ka.do/o6Xk)
해킹은 종종 “문제를 해결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기술적인 숙련도와 명석함”으로 정의되고, 해커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인식과 태도가 요구됨
1. 이 세계는 풀리지 않은 매력적인 문제들로 가득차 있다.
2. 이미 해결된 문제를 중복해서 풀어서는 안 된다.
3. 권태와 단순 반복 작업은 해악이다.
4. 자유는 좋은 것이다.
5. 해커는 마음가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필요하다.
즉 해커란 “무엇인가 난해한 문제를 풀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며, 자유와 자발적인 상호협력을 믿는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음
국내에서는 해커와 해킹은 범죄 차원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크래커(Cracker)와 크래킹이 오역된 것으로, 해커는 무엇인가를 만드는데 반해 크래커는 그것을 파괴한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함
한편, 2000년대 초반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메이크와 메이커(Maker)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여기서의 메이커란 “기술에 매우 열정적이며 기술을 가지고 노는 아마추어 제작자이자 취미공학자”로 새롭게 정의됨
이를 제안한 데일 도허티는 당초 해커를 염두에 두고 대중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한 용어로 메이커를 재정의했으며, 해커들의 전문적이고 성인 남성적인 문화에서 좀 더 폭넓고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하려고 하는 의지가 담겨있음
우리나라 원조 해커 스페이스이자 메이커 스페이스, 세운상가와 청계천 일대
세운상가와 주변 일대의 기술자들이 일궈온 문화는 주로 산업적인 차원에서 이권과 결탁한 활동이었던 점, 그들의 경험적 기술 지식이 극히 제한적으로 공유되었던 점 등이 현재 통용되는 해커문화와 다른 점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음
당대의 세운상가 기술자들은 선진 기술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넘쳐났으며, 암실(black box)과도 같은 선진 기술을 분석하고 풀어내어 복제 또는 재창조하는데 열중하였고, 이를 위해 연관된 지식과 관계망을 수용하며 자발적인 상호협력 체계를 이루어 왔던 것임
더구나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자생적으로 형성된 산업군 안에서 싹튼 해커 문화는 빽판, 음란물 등 세운상가의 다양한 B급 문화와 결합해 폭넓은 참여 계층을 끌어들였을 것으로 추정됨
즉, 세운상가와 청계천 일대는 우리나라의 우리식 원조 해커들의 활동지(Hacker space)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이 형성해온 기술 문화와 기술사에 대해서는 보다 세밀한 연구로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
이런 관점에서 현재 서울시가 추진하는 세운상가 재생사업으로, 다시금 세운상가를 “도심창의제조산업의 혁신지”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는 세운상가와 청계천 일대에서 반백년 이상 활동해온 우리나라 “원조 해커”들과 그들의 문화를 재조명하고, 이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끊기지 않게 하며, 새로운 동력과 연결되어 또다른 메이커와 메이커 문화로 잇고자 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임
참고 URL
조동원(2015), 제작문화와 전자상가, http://ka.do/Hk6b
조동원(2015), 한국의 디지털 문화사: 컴퓨터의 도입과 대중화를 중심으로, 사회와역사 통권106호, 한국사회사학회
박주용(2016), 창의적 사고 중심의 ICT·디자인융합 개방형 제작공간 프레임워크 연구, IT디자인융합프로그램,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에릭 레이먼드(2000), 해커가 되는 방법, http://kwonnam.pe.kr/howtobecomeahacker.html
※ 국가: 국내
※ 키워드: #세운상가 #청계천전자상가 #해커스페이스 #메이커스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