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 도시의 즐거움․2
- 최승호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 1990)
최승호(崔勝鎬)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1975년 춘천교육대학 졸업
1977년 현대시학에 <비발디>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82년 제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1985년 제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0년 제2회 이산 문학상 수상
시집 : 대설주의보(1983), 고슴도치의 마을(1985), 진흙소를 타고(1987), 세속도시의 즐거움(1990), 고해 문서(1991), 회저의 밤(1993),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1995), 반딧불 보호구역(1995)
<감상의 길잡이>
최승호의 시는 진지한 명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가 펼치는 시적 의장도 무겁고 절제된 운율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노래하거나 읊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시는 ‘들여다 보는’ 것이며, 독자는 명상하는 시인의 곁에서 함께 명상하도록 권유받는다. 그가 첫 시집 대설주의보에서부터 일관되게 명상하는 대상은 ‘죽음’과 도시화 현상에 겪는 일상적 경험들이다. 그는 그것에서 비정하고 절망적인 관찰자가 되어 현대인의 본질적 모순을 정확히 읽어낸다. 죽음에 관한 명상의 매개로 사용하는 소재들은 ‘지하철’, ‘자동 판매기’, ‘자동차’, ‘변기’, ‘똥’, ‘기계’, ‘공해’ 등 다양한 도시적 물상들로, 그가 가진 비판적 세계관이 문명화 또는 산업화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종말론적 위기감 속에서도 그는 결코 종교적 초월이나 내면 세계로의 도피를 꿈꾸지 않는다. 속악한 세계는 반드시 속악한 인물을 통해서만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그의 시는 현대인들의 본질을 그 같은 모순으로 인식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다른 도시시들처럼 경박하지도 유희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각하고 진지한 어조로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시는 지성적 판단과 철학적 사유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 시는 그의 네 번째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의 표제시 중 두 번째 작품으로 세속화된 현대인들의 모순된 삶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제목 ‘세속도시의 즐거움’이란 세속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비극적 삶을 역설과 반어로 나타낸 것이다. 문명의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 왜곡의 전형적 양상은 물신(物神) 숭배로, 이 시에서 우리는 이 물신 숭배가 빚어낸 극단적인 인간 소외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거리감으로 인한 단순한 의미의 소외감이 아니라, 영안실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죽음의 비애라든가 엄숙함, 또는 진지함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데서 비롯되는 인간 왜곡 현상으로서의 극한적 소외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에 의해 관찰된 영안실 풍경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풍경은 남편의 죽음인지, 시부모의 죽음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 곡하던 여인’이 ‘늦은 밤 손익을 / 계산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이며, 두 번째 풍경은 영안실을 찾아온 문상객들이 보여 주는,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로서의 모습이다. 주검을 옆에 두고도 슬픔에 잠기지 않는 대신, 오히려 진지한 자세로 부조금을 계산하는 여인의 모습과,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이 아니라, 문상을 돈버는 기회로 삼고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는 우리 시대의 문상객들을 보여 주는 데 시인은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이러한 극단적 인간 왜곡을 보여 주면서도 시인은 그 추악한 세속적 욕망의 인간 소외를 증오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늘한 / 허’를 느끼고 있다. 그것도 죽은 자에서가 아니라, 산 자에게서 느끼는 허전함이라는 데서 이 시인이 추구하는 문명 비판의 시 세계가 허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와 아울러 죽음이라는 자연적 현상을 생전에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인은 나아가 ‘큰 도적에게 큰 슬픔이 있으리라’라는 극단적인 역설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그것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생의 마지막 귀결점이 아니라, 육신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거룩한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이 시인에게서 우리는 왜곡된 인간 존재의 슬픈 모습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