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탐험 최오순
오기 똘똘 오순이의 에베레스트 스토리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여인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무슨 얘기냐고? 기자가 지하철역에서 본 것만 꼽아 봐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고어텍스로 된 재킷을 입고 헬멧에 안전벨트까지 찬 최오순은 오늘도 출퇴근길 바쁜 사람들을 향해 웃고 있다. 이보게들, 산에 오라구.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훌쩍 넘겨보며, ‘요새 아줌마 등산객이 늘었다더니…’하고 스쳐 지날 뿐이다. 광고판 속의 그가 한국 여성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은 아마 누구도 알지 못할 것 같다.
에베레스트란 과연 얼마나 높으며, 그 산이 우리 사회에 지니는 무게는 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그리고 그 규모와 높이란 과연 고스란히 정당한 저울에 달려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14명의 대원 중 하나로, 기회가 있었을 뿐” 1993년 한국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대원으로 참가했던 최오순은 등정을 마치고 내려오는 하행 카라반 길에 지현옥 대장으로부터 들은 한 마디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대장은 먼저 그를 텐트 안으로 불러들이고, 이어 함께 등정한 김순주씨를 따로 불렀다. 둘은 그날의 일에 대해 대화해본 적 없으나, 아마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오순은 한국 여성 첫 에베레스트 등정자 3인 중 한 사람이다. 그에게 쏟아졌던 스포트라이트는 8848m 이상이었을는지도 모르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써왔다.
“‘산을 내려가면 너희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앞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자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 가 쏟아져도 ‘써미터’라는 것을 팔고 다닐 생각일랑 하지 마라. 항상 겸손하게 한 발짝 물러서서 행동해라’라고 했어요.”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선배의 괜한 기우(杞憂)인 것 같았고, 서운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가 그런 말을 내게 하지 않았더라면 좀 ‘까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는 14명이서 함께 움직였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등정자에게만 쏠리는 것도 좋지 않았어요.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할 때도 ‘정복’, 이런 단어나 누군가에게 부각되는 표현은 제발 쓰지 말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도 기자들은 꼭 눈에 띄는 단어를 써서….” 작년 그가 킬리만자로를 끝으로 5대륙 최고봉을 모두 올랐을 때 인터뷰를 하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나는 14명의 대원들 중 하나였을 뿐이며, 산에 오르며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고 누차 강조했었다.
함께 인수봉에서 등반도 하며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주말 계획이 모두 잡혀있단다. 아마도, 피치 못할 약속이란 산에 가는 일일 거라 생각하며 평일 낮 청계산에서 그를 만났다. 마침 차가 꽉 막혀 약속시간에 30분이나 늦었다.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 기다리느라 불쾌지수도 이만저만 높은 게 아니었을 텐데 나무 그늘에서 책을 보고 있던 그가 환한 웃음을 먼저 보였다. 혹시 짜증이라도 내면 어쩌나 졸아들었던 마음은 이내 풀렸고 우리는 하드를 하나씩 물고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오순은 1967년 전북 고창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가냘픈 소녀시절이었다. 산에 다니기 시작한 건 순전히 건강 때문이었다. “픽픽 쓰러지곤 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학교 산악부 지도교사였는데, 산에 같이 가자고 권하더군요. 그때 지리산 종주를 처음 했어요. 선생님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걸은 기억이 나요. 학교가 남녀공학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다 큰 학생들이 같이 야영을 간다는 건 상상도 못했죠.
선운산에 야영 가서 스님들한테 불심검문(?)을 받을 때면 선생님이 전화를 해주셔서 무사통과하기도 하고, 암벽등반도 그때 해봤어요.” 그는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꼭 ‘교사’가 아니라 ‘선생님’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이었다”고 기억했다. 지금도 고향에 내려갈 때 마다 들러 인사를 하곤 한다고 했다. “에베레스트를 다녀와서 고산을 몇 개 오르자 선생님이 ‘5대륙 최고봉 중 뭐가 남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무심코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던 게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요. 그때 정년퇴임을 했던 그분은 ‘내가 가진 돈이 있다면 너를 산에 보낼 텐데’라고 생각했었나봐요.” 최오순은 정이 많다. 사람 욕심이 많다고 해도 같은 말이다. 그래서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다. 5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른 그는 그저 “기회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선생님에 대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리라는 생각도 했다. 시골 작은 학교에서 자신이 키운 제자가 세상의 고봉을 올랐다는 건, 그 타이틀보다도 스승으로서 가장 뿌듯한 일일 테니 말이다.
최오순은 웃음이 많다. 얼굴이 아플 지경으로 목젖을 보이며 웃는 게 술버릇일 정도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면 뚫어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최오순은 수원 삼성전자에 취직했다. 이미 산 맛을 보았기에 스스럼없이 사내 산악부에 들었다. 89년 가을 사내산악부에 입회원서를 내고, 이듬해 봄에야 정식 회원이 됐다. 기숙사 생활로 시작한 낯선 객지에서의 일상에 산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선배들은 그에게 등산학교에 가기를 권유했다. “처음에는 무슨 등산을 학교에서 배우냐고 안 간다고 했어요. 그러다 결국 정승권등산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걸 배웠죠. 등반 기술도 그렇지만, 인품이랄까. 강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같은 거. 그때는 왜 선배들이 후배들 다잡곤 했었잖아요.” 등산학교를 통해 얻은 건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산 사람들과의 인연이었다. 수료 후 경기산악연맹 구조대 활동도 시작하고, 선배들의 추천을 통해 그 즈음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 훈련대에 원서도 넣었다. “훈련 중 동계 장기등반이 있었는데, 회사에서 3일 휴가를 낼 수가 없어 아예 사표를 썼죠.”
고지식하다고 해야 하나, 최오순이 조금만 약았더라면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빌려 3일 휴가가 아니라 더한 것도 받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던가. 길을 가다 만난 벽을 넘어설 수 없다면 주저앉거나 돌아서는 게 아니라 아예 뚫고 지나가버리면 된다. 최오순은 훈련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훈련대를 지도했던 남선우(월간마운틴 사장)씨였다. “‘어, 나 남선운데’ 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부들부들 떨렸어요.
정말 뽑히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거든요. 4~5월에 네팔 전지훈련을 보내줄 텐데 참가할 수 있냐고 묻기에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죠. 꼭 꿈을 꾼 것 같아 전화를 끊고 아무에게도 이야기 못했어요. 복 달아날까봐.” 허나 히말라야는 최오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녹록치 않은 곳이었다. 내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만 했던, 6000m급 첫 고소였다. 임자체와 로부체 훈련등반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곧바로 천산산맥으로 향한다.
수원 돌비알산악회의 포베다(7439m)와 칸텡그리(7010m) 원정대에 합류한 것이다. 7000m급 등반을 마치고 나면 에베레스트 대원에 발탁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선배들이 마련해준 자리였다. 최오순은 어렵지 않게 칸텡그리 정상에 올랐고, 운명의 여신은 비껴가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에베레스트로 향한 것이다. “지금도 에베레스트 다녀온 분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고 존경스러워요.” 본인도 다녀오지 않았는가.
“저는 운이 좋은 거였다고 생각해요. 당시 2차 공격조였는데, 막판에 기회가 온 거죠. 고소에 강한 체질은 아니에요. 그때 기록 담당이라 늘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등반했는데, 대원들이 짐도 살짝 빼서 들어주고,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도 하루 운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힘이 30퍼센트 쯤은 남아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로지 산을 통해 모든 것을 배웠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였다. 시작부터 기우뚱하기도 했던 원정대는 세상의 온갖 주목을 받으며 떠났지만 정작 돌아와 보고서 한권 내지 못했다.
“안 좋은 기억은 다 잊어버리는 성격이에요. 오랜 시간이 지나기도 했지만, 정말 기억 안나요. 지현옥 대장은 때로 무섭고 어렵기도 했지만, 저는 많이 좋아하고 언니처럼 따랐어요.” 무거운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찰나, 최오순은 느닷없이 보약의 힘으로 정상에 설 수 있었다고 화제를 돌렸다. “출국 전에 선배 언니가 45만원을 들여 보약을 지어줬어요. 그걸 먹고 기운을 낸 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몰라요. 엄홍길이나 박영석 같은 분들도 보약 먹는다던데?”
긍정이 보약이다. 에베레스트의 힘은 컸다. 3일의 휴가를 받지 못해 사표를 썼던 전과는 달리, 세상은 ‘최초’와 ‘등정자’에 대한 환대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회사는 먼저 손을 내밀어 다음에 또 원정갈 경우 후원을 약속했고, 고민 끝에 그는 관례를 깨고 삼성전자에 재입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이듬해에 선배들과 매킨리 등반을 가기로 계획을 세워둔 터였다. “회사와 먼저 서면계약을 하라는 선배의 조언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 또 사표를 내야했죠.”
세상은 에베레스트를 오른 그에게서 과연 무엇이 필요했던 것일까. 인간으로서의, 산악인으로서의 최오순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매킨리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남벽 아메리칸 다이렉트를 시도했던 등반에서 최오순은 벽등반 인원의 제약 때문에 정상공격조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등반이 끝날 즈음 1캠프에 올랐던 그에게 낙석이 떨어졌고, 머리에 맞아 10cm가량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의료구가 없어서 그냥 벌어진 양쪽 머리카락을 묶어 붙였어요.” 나빠진 날씨로 등반대는 정상에 서지 못하고 앵커리지로 내려와야 했다. 멀리까지 어렵게 와서 머리에 땜빵만 남겨 돌아가나 했는데, 마침 수원에서 활동하던 선배 남상익씨를 현지에서 만났다. 그의 제안으로 다시 산으로 올라갔고, 노멀루트를 통해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딸에게서 온 전화였다. 통화하는 내용을 대충 들어보니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랑 싸우면 안 돼. 세상엔 아빠처럼 멋진 남자도 많아. 그 아이들은 아빠 같은 남자는 아닐 거야. 그러니까 지원이가 참아.”
“이 아줌마가 유명한 사람이요?” 청계산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던 아주머니들이 관심을 보였다.
최오순이 모델로 출연했던 고어텍스 광고는 지하철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1995년 인도 차우캄바 2봉을 다녀온 이후 근 10여 년간 최오순은 큰 산에 갈 수 없었다. 그는 1996년 12월, 그전부터 함께 줄을 묶어왔던 동갑내기 가의용씨와 백년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어진 생활과 출산은 굴레라기보다 행복한 선택으로 그를 산 아래 묶어두었다. 남편은 항상 그의 편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있나보다. “오랫동안 산에 못 가면 아파요. 결혼하고 한창 직장생활을 할 때, 어느 날 저녁 5시쯤에 수원 광교산에서 호숫가를 따라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곤 너무너무 부러워 병이 난 적도 있어요.
요즘은 행복해요. 오전엔 운동하고 오후엔 산에 다녀오고.” 그는 지난 봄부터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활동을 시작했다. 대산련 2급 등산강사 자격을 따자 제안이 온 것이었다. “덕분에 저도 공부 열심히 해요. 산을 새로 접하는 사람들 중에는 등산이 취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대충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항상 공부하는 산악인이 되라고 하고, 저 또한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녀시절을 돌아보면 참 고집 세고 독단적인 성격이었어요.
돌이켜 보면 서로 다를 뿐 틀리지 않은 것인데, 저는 산을 통해 살아가는 모든 걸 배웠다고 생각해요. 산에서 겪은 어려움들은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됐죠. 아이들도 제대로 키우려면 산에 보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앞으로 뭐할 거냐고 안 물어봐요?”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설령 묻는다 한들 “살아가야죠”라는 대답 이상의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8000m 산을 모조리 오르고 엄청난 원정대를 꾸려 국위를 선양할 것이오”라고 대답할리도 만무했다.
“그걸 물어봐주지 않아서 감사해요.” 우리는 느티나무 아래서 캔 맥주 하나씩을 사다먹었다. 어느덧 해가 45도로 기울어 가는데도 정말 더운 날이었다. 그는 이제 가족들을 위한 저녁을 준비하러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는 다음번에 산에서 보거든 바위나 한번 하자고 약속하곤 헤어졌다. 오기 똘똘 오순이는 살아간다. 에베레스트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산(生)악인’의 모습이 그의 긴 그림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 글 / 이영준 기자 - 사진 / 양계탁 기자 - 월간 마운틴 2008,08.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