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는 신발을 만드는 제화공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모국어인 영어와는 별도로 외국어인 라틴어, 헬라어를 독학하여 많은 책들을 통한 지식을 습득하였으며, 비 국교회의 어려운 교회를 섬기며 설교를 하였고, 1787년 5월3일 정식으로 침례교의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26세 이였다.
목사안수 후 그의 신분 변화는 그 지역 성직자 협회의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모임에서 윌리엄은 세계선교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지만 주제넘은 열정으로 민망함을 당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그 사건을 계기로 세계선교를 위한 저서를 준비하였고 1792년 5월 12일에 톰의 도움을 받아 영국에서 최초로 세계선교에 관한 '연구서'를 출간하게 되었으며, 그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시오!" 이 한 마디는 윌리엄의 사후에도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열정의 불을 당기며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당시 18세기 영국 교회는 선교는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이었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케리가 이방인들에게 선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한 목사가 말을 저지하면서 “이보게 젊은이, 그만 열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걸세.” 그러나 윌리엄 케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행 1:8) 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곧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을 믿었다.
윌리암 케리가 선교사로 가고자 결정했을 때 아버지, 아내인 둘리 등 가족들과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그의 선교열정은 더욱더 가속화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세계선교 열정이 충만한 윌리엄에게 선교 동역자가 나타난 것이다. 인도의 벵골지역에서 4년간 인도에서 활동 경험이 있는 의사 토마스 박사이다. 토마스 박사와 윌리엄 케리는 하나님 뜻 안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진 것이다. 윌리엄이 인도선교에 참여하기로 하고 이들 일행은 선교비 마련을 위해 영국교회에 세계선교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선교순회여행을 하여 선교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네 명의 자녀들과 처제와 그리고 토마스 박사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윌리엄이 인도에 도착하여 후임 선교사들과 벵골어 성경 인쇄, 현지인들을 위한 학교 운영 등 7년간 땀을 흘렸지만 단 한 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으며, 이러한 환경들로 인하여 윌리엄 케리는 멋있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산산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고, 아들 피터를 하나님 품으로 보냈다. 윌리엄 케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 맡길 수 있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
7년 후 윌리엄 케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쉬나 팔과 고쿨 이라는 두 인도인이 개종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 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다. 윌리엄 케리는 1834년 72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 세람포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비천하고 가난하며, 벌레같이 보잘 것 없는 자가 주님의 친절한 팔에 쉬겠네'라고 새겨졌다.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 케리는 제화공으로 일하면서 라틴어와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독학으로 터득했다. 영국이 자국의 식민지에 선교사를 파송해 한다는 확신 가운데 그는 영국 최초로 선교회를 조직하였고, 자신이 인도 선교사로 사명을 받아 최초의 선교사로 자원했다. 자녀가 죽고 아내가 정신 이상이 되는 역경 속에서도 윌리엄은 포기하거나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고난에도 참고 견디며, 선교를 위해 앞으로 나갔다. 그는 인도의 기독교인을 위해 최고의 대학을 설립했고, 성경을 인도 방언들과 아시아의 언어들로 번역했으며, 인도 여러 지역에 많은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그는 비윤리적인 인도의 풍습과 의식을 타파하고 복음 전하는 사명에 충실했다.
윌리엄 캐리가 세계선교에 꿈을 품고 현실에 절망치 않고 끈질기게 도전하였을 때 18세기의 영국 교회를 깨웠고, 이를 계기로 세계 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를 만든 것이다. 그 후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런던 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공회가 창설되어 오늘날 세계 선교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19세기 선교 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윌리엄 케리는 선교를 위해 태어난 특별한 사람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말씀 연구와 다양한 언어, 과학 등 준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그를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심을 보았다. 우리도 마음에는 전도해야 되고 선교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성경연구, 기도로 준비한다면 성령님께서 나에게 선교에 대한 꿈을 허락하실 것으로 믿는다. 다만, 윌리엄 케리와 우리가 다른 것이 있다면, 누구도 선교를 나가려고 하지 않을 때 윌리엄케리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과 꿈을 품고 그 길을 나섰다는 것뿐이다.
새로운 미지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둘리와 똑같은 한 사람이 있다. 나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은 하나님 나라 확장에 위한 도구 사용될 때 아내와 나와 함께 사역지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할 뿐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