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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서지 사항
이 책은 林希茂(1527-1577)의 문집으로,2권 1책의 木活字本이다. 表題ㆍ內題 및 版心題는 모두 蘫溪集으로 되어 있다. 四周單邊에 界線이 있다. 半郭의 크기는 가로 16.2㎝ 세로 19.4㎝이며, 판심에는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가 있다. 每面은 10行18字로 되어 있다.
간행 경위
남계의 遺文은 임진왜란의 병화에 사라져 시문 약간 편이 남아 전할 뿐이다. 남계가 졸한 지 1백여 년이 지난 1657년, 남계의 증손 林炯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남계의 행적이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남계의 외손 鄭重獻에게 「行狀 」을 부탁하면서 유집을 간행할 계획을 세웠다. 1659년 후손 林友極 역시 남계의 유집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문집 간행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못했고, 남계가 세상을 떠난 지 약 3백 여 년이 지난 뒤인 1889년 후손 林炳洪ㆍ林鍾學 등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런데 編次와 내용상에 문제점이 있어 후손 林鍾顥ㆍ林世圭 등이 1917년 다시 간행한 것이 지금 전하는 간본이다.
저자 소개 : 林希茂(1527-1577)
임희무는 자가 彦實, 호는 蘫溪, 본관은 羅州이다. 남계는 1527년 3월 17일 咸陽郡 黍坪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林珏이며, 어머니는 安東權氏 權時敏의 딸이다. 7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해에 할아버지의 상을 당해 아버지가 시묘살이를 하게 되자, 묘소에 가서 아버지에게 계속 배우겠다는 뜻을 누누이 간청하여 배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1549년 23세 때 南冥 曺植(1501-1572)이 紺岳山에 놀러가면서 편지로 남계와 介庵 姜翼(1523-1567), 朴承元을 불러 함께 유람하였다. 1552년 26세 때 남계는 강익ㆍ박승원ㆍ徒庵 盧祼1522-1574)ㆍ梅村 鄭復顯과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고을은 文獻公(一蠹 鄭汝昌, 1450-1504)의 고을인데, 선생이 몰하고 이미 50년이 되었으나 아직 서원과 사당을 건립하는 계획이 없으니, 실로 우리 고을의 수치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힘을 모아 蘫溪書院을 창립하였다.
1558년 32세 때 世子冊封 別試에 급제하였다. 남계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벼슬하러 나아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부모님 봉양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1563년 37세 때 남계의 아버지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남계는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기를 “사람의 자식이 되어 약을 써 보지도 못하고 이런 비통함을 만나다니, 어찌 견디겠습니까.”라고 하며,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묘소 곁에서 새벽과 저녁으로 슬픔을 곡하고 아침ㆍ저녁으로 죽을 올렸는데, 한결같이 예전에 아버지가 시묘살이할 때의 예를 따랐다. 날이 밝기 전에 손을 씻고 묘를 배알하며 어머니가 계신 곳을 향하여 절을 하고 편안함을 물었다. 그리하여 시묘살이한 곳의 마을을 ‘齋宮村’이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
남계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나 한번 보면 곧 기억했다. 중국 산천의 지경과 길과 마을, 멀고 가까운 것을 마치 눈으로 본 듯, 몸소 가 본 듯 환히 알고 있었다. 또한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였다고 하니, 굉박한 문장과 탁월한 才識을 상상할 수 있다. 남계는 조식선생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玉溪 盧禛ㆍ靑蓮 李後白ㆍ姜翼ㆍ九拙 梁喜(1515-1580)ㆍ德溪 吳健과 벗이 되어 서로 책선하였다. 스스로 박식하고 이치에 통달하였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위는 二品에 오르지 못했다.
내직으로는 弘文館 正字, 成均館 學諭, 司憲府 掌令, 司諫院 正言, 승정원의 左右承旨를 지냈고, 밖으로는 淳昌ㆍ錦山ㆍ密陽ㆍ蔚山ㆍ綾州 등 다섯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남계는 당시의 형세가 날로 그릇되어 가는 것을 보고 귀향하였으나 임금을 사모하는 정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매년 重陽日이 되면 두 동생과 마을의 후생들과 함께 집 뒤에 있는 봉우리에 올라 향을 피우고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해가 기울어야 끝마쳤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 봉우리를 重九峯이라 부르고, 그 단을 望北臺라 이름 하였다. 부인은 新昌表氏로, 副司直을 지낸 表晜雲의 딸이다. 2남 1녀를 낳았다.
내용 개요
灆溪集序 1(2)
이 서문은 1888년 宋秉璿이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남계는 조식을 스승으로 삼고, 오건ㆍ노진ㆍ이후백ㆍ양희를 벗으로 삼아 도의를 갈고 닦았다. 서적을 깊이 연구하고 孝悌를 돈독히 실천하였으며, 집에서 자신을 닦은 뒤 마을을 교화하였다. 남계의 재주와 식견은 우리나라 인문이 성대한 明宗ㆍ宣祖 연간에 활동하는 데 마땅치 않음이 없다.
그러나 낮은 벼슬자리에 머물며, 축적된 식견이 한 몸을 깨끗이 하고, 한 집안을 돈독히 하는 데 그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게다가 목숨은 겨우 50세가 넘으니 志士의 긴 탄식이 된다. 유문은 병화에 사라지고, 자손이 모아 엮은 것은 이와 같이 보잘 것이 없으니, 더욱 쓸쓸하고 상심되며 안타깝다.
그러나 노진의 남계에 대한 제문 한 편이 있으니, 남계의 덕과 업적과 학문을 백 세 뒤에도 알 수 있다. 나무를 보고 산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남계의 스승과 벗을 통해 충분히 징험할 수 있겠다. 남계의 후손 林炳洪이 공의 시문을 모아 1책으로 만들어 간행하려고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灆溪集序 2(3)
이 서문은 1611년 禹禎圭가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남계가 별세한지 1백여 년이 지났다. 상고하여 믿을 만한 것은 家乘과 國史에 남아 전할 것인데, 병화로 소실되어 징험할 만한 것이 없으니, 남계의 덕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남계의 행장을 살펴보면 선배들이 남계의 덕을 드러낸 것이 이와 같이 찬란하니, 공의 덕을 일컬을 수 있겠다.
우리나라는 본래 小中華이며, 嶺南은 鄒魯의 고향이고, 명종ㆍ선조 때에는 鴻儒碩士가 무리지어 나왔는데, 남계가 살던 이 곳은 더욱 성대하였다. 남계는 재식이 탁월하며 문장이 굉박하였다. 그가 축적한 것을 펼쳐 국가의 성대함을 울려 퍼지게 했어야 했는데, 겨우 50세가 넘어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현인을 낼 적에는 장차 훌륭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인데, 어찌하여 그토록 빨리 빼앗아가 덕이 일컬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공자께서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우라.”고 하셨으니, 옛 성현들은 行誼를 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고, 모든 행실의 근원은 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남계의 아버지는 효로써 추천되어 참봉이 되었고, 남계는 家法을 잘 이어 역시 효를 몸소 실천하여 鄕黨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서 남계가 온축한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人道 중에는 孝悌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문학적인 면에서 아무리 박학하고 벼슬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해도 효제를 갖추지 못하면 군자라 말할 수 없다.
남계는 벼슬에 오른 것이 겨우 5년이었고, 대부분은 문을 닫고 돈독히 행하여 나아가 취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계가 古今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문학의 풍부함과 벼슬의 성대함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권 1】
詩(8)
•오언절구 : 2수
與葛川薰陪南冥先生遊安陰三洞, 石門有懷
•칠언절구 : 12수
花開途中, 燕谷途中口號, 又, 次思齊堂韻, 永思亭次思齊堂韻贈梅潭幷小序, 假山, 又 ,與吳德溪健唱酬智谷寺, 題裵林塘愼忱克復齋, 與盧玉溪禛李靑蓮後白都養性軒希齡聯句, 下第歸時吟
•칠언율시 : 1수
感懷
•칠언장단구 : 2수
燕谷途中口號, 謹呈申松溪
【권 2】
祭文
祭南冥曺先生(1)
이 글은 임희무가 南冥 曺植에게 제사를 지낸 제문이다. 상하의 문장이 빠져 있고 16자만 수록되어 있다. 題下의 註에 의하면 이 제문은 『南冥集』에 실려 있다고 한다.
祭德溪吳公(3)
이 글은 임희무가 吳健에게 제사를 지낸 제문인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덕계의온아한 자품과 정밀하고 사물에 막힐 것이 없는 덕은 사람을 맑게 하며, 사물을 이롭게 하고 세상과 나라를 선하게 만들고 교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병이 깊어져 의원이 기술을 다하였음에도 끝내 살아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너무나 슬프다. 벗들이 모여 깊이 탄식하고 朝野도 비탄에 잠기며 마을도 공허함을 슬퍼한다. 그러나 덕계는 英明하니 삶과 죽음을 따라 이 세상에 오는 것이 아니라, 구름과 기운을 타고 천제의 곁을 오르내릴 것이다.
行狀
襄烈公栢冶張公行狀(21)
이 글은 임희무가 쓴 柏冶 張弼武(1510-1574)의 행장이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백야는 자가 武夫이며, 求禮 사람이다. 아버지는 御將軍을 지낸 張謹銜이며, 어머니는 通德郞을 지낸 沈惕의 딸이다. 백야는 1510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奇偉하고 말이 적으며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여러 아들들을 매우 엄하게 가르쳤다. 백야는 가장 어렸는데, 어머니가 부당하게 매질하는 것을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잘못을 하면 당연히 매질을 해야 하겠지만, 어머니의 어깨와 팔을 손상시키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어버이에게 효를 행하고자 하니, 백야의 어머니는 반드시 집안을 일으킬 아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조 중에 무예를 업으로 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詩書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자라서 개연히 배움을 구하는 뜻이 있어 스승을 좇아 『通鑑』ㆍ『大學』등을 배워 대의를 대략 이해하였다. 다시 스스로에게 다짐하기를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초목과 함께 썩을 수는 없다. 공명을 세워 선조를 빛내고, 후예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장부의 일이다.”라고 하며, 무예를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어버이를 모시기를 폐하지 않고 지극히 효성스러워, 몸소 漁獵하여 항상 모자라지 않게 하였다.
1543년 무과에 올라 訓鍊權知가 되고, 1547년에는 訓鍊奉事에 제수되었다. 1548년 중국에 들어갔는데, 여러 사람들이 시전 물화를 보고 부러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백야는 홀로 관사에 기거하면서 받은 상으로 책을 잔뜩 사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1552년에는 司憲府 監察이 되었다가 明川縣監으로 옮겼다.
백야의 성품은 비록 엄하고 급하였지만 백성을 돌보는 데 있어서는 인자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같았다. 고을을 다스린 지 한 달이 넘지 않아 官庫가 가득 차 넘쳤다. 이 당시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쳐 근심이 되었는데, 백야는 화살 한 대만 지니고 가서 호랑이를 잡아 더 이상의 해가 없도록 하였다.
1555년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군사 8명으로 크게 무찔러 이겼지만 자신의 공을 논하지 않았다. 長興府使ㆍ釜山僉使ㆍ濟州牧使를 거쳐 1565년에는 滿浦僉使에 제수되었다. 이 때 중국 중원지방 도적의 무리가 우리나라 변방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중국 황제는 우리나라가 정벌하도록 명하였는데, 백야가 猛士 1백여 명과 더불어 적의 소굴에 깊이 들어가 수백 명을 사로잡아 중국으로 보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사신에게 명하여 茂勳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 뒤 병으로 사퇴하였다. 1572년 咸鏡北道兵使에 제수되었을 때도 간절히 사퇴하고 싶었으나 그 때 북쪽 오랑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국은을 받은 의리상 사퇴하지 못하였다. 흔쾌히 수락을 하니 오랑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서로 경계하며 두려워하였다. 1574년 병으로 사퇴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추석날 묘를 청소할 때 아픈 몸으로 목욕을 하려 하자 집안사람들이 말렸으나 더러운 몸으로는 신명과 만날 수 없다며 굳이 목욕을 하였다. 9월 20일 목욕을 하고 갓을 쓰고 띠를 두르고서 졸하였다. 향년 65세였다.
附錄
附諸賢唱酬(3)
•次假山韻 / 盧禛
•三洞韻 / 曺植
•三洞韻 / 林薰
•和石門韻 / 安瑑
•和花開韻 / 安瑑
•和燕谷韻 / 安瑑
•唱酬智谷寺 / 吳健
•唱酬智谷寺 / 盧欽
•唱酬智谷寺 / 裴愼忱
挽章(3)
•葛川 林薰(1500-1584)의 만장
•石谷 成彭年(1540-1594)의 만장
祭文(2)
•玉溪 盧禛(1518-1578)의 제문
行狀(8)
이 행장은 1657년 鄭重獻이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앞에는 임희무의 일생을 서술하고, 겨우 51세의 나이에 생을 마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하늘이 재덕을 부여해 놓고 끝내 그 목숨을 인색하게 하여 당세에 훌륭한 일을 할 수 없게 한 것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행장의 중간 부분에는 제현창수에 실린 시들의 정황을 알 수 있는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1566년 남계가 40세 봄에 노진ㆍ강익ㆍ노관ㆍ정복현ㆍ金宇顒1540-1603) 등과 함께 山陰의 지곡사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완상하며 읊조리고 서로 노닐던 일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조식이 安陰의 산수가 아름답다는 것을 듣고 安陰三洞을 찾아 노닐 때 노진ㆍ강익ㆍ임훈ㆍ林芸(1517-1572)등과 더불어 시를 짓고 노닐던 일을 기록해놓았다.
墓碣銘幷序(7)
이 글은 남계가 별세한 지 3백 여 년 뒤에 鄭泰鉉이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남계가 세상을 떠난 지 3백 여 년이 되자, 남계의 후손 林璣澤이 남계의 묘가 민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명종ㆍ선조연간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남계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젊은 나이에 책을 보면 묵묵히 은연중에 뜻이 통하여 마음으로 이해하였다. 요긴한 부분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분석하여 설명하니, 명예가 날로 퍼졌다. 승지 벼슬을 지내고 여러 고을의 수령에 제수되었는데, 綾州의 수령을 지낸 뒤로는 미련 없이 귀향하였다.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실천하는 학문에 오로지 뜻을 두었다.
남계에게는 어릴 때부터 남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는데, 지극한 효성과 지극한 우애였다. 따라서 친척들이 화합하였고 남계를 존모하였다. 157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哲人이 떠났다며 애도하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함양군의 남쪽 언덕 선조의 무덤 가에 장사지냈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 아들 林濟民은 月沙 李廷龜의 추천으로 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차남 林澤民은 通德郞을 지냈다. 차남의 큰아들 林廷桂는 효행으로 이정구가 추천하여 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딸은 정여창의 증손인 縣監을 지낸 鄭大民에게 시집갔다.
望北亭記(2)
이 글은 1915년 奇宇萬(1846-1916)이 지은 것으로, 남계의 유적지인 望北亭에 대한 기문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남계는 큰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님을 알고 결연히 강호에 물러나 세상을 잊었다. 그러나 이것은 남계의 평소 뜻이 아니었으므로,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항상 집 뒤의 작은 산에 올라 임금을 사모하는 충의를 표현하였다. 두 동생과 마을의 후생들과 함께 수창하고 토론하였으니, 몸소 실천하고자 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듣던 사람들은 그곳을 ‘망북대’라 이름 붙였으니, 이로써 남계의 마음을 알 수 있겠다. 남계는 ‘오늘날의 杜甫’라 할 수 있겠다. 자손들이 그것을 폐하지 않고 망북대 옆에 정자를 지어 이를 기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후손 林馨澤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望北臺碑銘幷序(2)
이는 외손 鄭泰鉉이 望北臺에 비를 세울 때 쓴 비명이다. 남계는 충과 효가 하나의 도리임을 알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정을 잊지 못하였다. 이런 선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그곳을 망북대라 이름 붙였는데, 그 자취가 없어질까 염려하여 후손 林鐘學이 터를 닦고 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후손이 저자에게 碑銘을 청하여 지은 것이다.
晉州道會所儒通(2)
이 글은 경상도의 유림들이 晉州 道會所에서 공의로 발의하여 함양 유림들에게 남계를 享祀하도록 하자고 제의하는 글이다. 앞에는 이 통문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름이 열거되어있는데, 다음과 같다. 의령의 許僐, 仁同의 申宅模, 의령의 安德光, 초계의 金志魯, 함안의 趙治祥, 안동의 柳道明, 안의의 全致祐, 삼가의 南圭復, 선산의 朴來植, 합천의 姜以周, 함창의 姜銑, 단성의 權, 안의의 愼必祐, 단성의 沈履導, 단성의 李海翼, 성주의 李重鎭.
金山鏡陽書院發文(2)
이 글은 金泉 鏡陽書院의 유생들이 함양의 유림들에게 남계를 서원에 향사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이 글을 보낸 이들은 呂學祖ㆍ姜義淳ㆍ金學沂ㆍ呂忠興ㆍ金斗永ㆍ李昌益ㆍ李東益이다.
居昌鄕校發文(2)
이 글은 居昌鄕校의 유생들이 함양의 유림들에게 남계를 서원에 향사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이 글을 보낸 이들은 魚錫洛ㆍ鄭孝源ㆍ李重錫ㆍ許恢ㆍ李敬黙ㆍ金達善ㆍ鄭孝根ㆍ朴命稷ㆍ尹相玉이다.
安義鄕校發文(2)
이 글은 安義鄕校의 유생들이 함양의 유림들에게 남계를 서원에 향사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이 글을 보낸 이들은 朴致龍ㆍ朴之秀ㆍ鄭錫奎ㆍ尹啓東ㆍ愼致黙ㆍ李慶來ㆍ金錫箕ㆍ禹象洛ㆍ鄭斗寅이다.
山淸西溪書院發文(2)
이 글은 山淸 西溪書院의 유생들이 함양의 유림들에게 남계를 서원에 향사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이 글을 보낸 이들은 閔百誾ㆍ姜必龜ㆍ朴義東ㆍ愼之亨ㆍ尹廷義ㆍ權正宜ㆍ李信培ㆍ裵鎭禹ㆍ洪樂龜이다.
本邑發文(2)
이 글은 咸陽의 유생들이 남계를 서원에 향사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이 글을 보낸 이들은 다음과 같다.
鄭德河, 盧錫義, 盧光斗, 姜胤齋, 鄭煥輔, 梁德誼, 權思黙, 朴之甲, 金宏柱, 姜周賢, 河慶斗, 梁柱宅, 河大演, 李基全, 禹相敏, 鄭必錫, 盧錫忠, 姜趾永, 朴之儉, 李正彬, 河大澄, 盧錫永, 李時彦, 趙重文, 梁柱海, 鄭煥震, 鄭履趾, 朴東仁, 盧光憲, 河必禹, 李再馨, 禹相堯, 鄭德源, 尹趙玉, 河漢綺, 朴尙質, 盧光奎, 鄭德隣, 盧錫景, 鄭祐述, 河必洪, 朴潤奎, 梁德民, 權東佐, 鄭東五, 李允學, 盧錫立, 柳章春, 盧廷學, 鄭德奎, 鄭相元, 鄭德三, 朴潤龍, 盧命圭, 盧光潤, 鄭東式, 盧錫鎭, 鄭德濂, 河漢達, 鄭光周.
跋
跋 1(3)
이 발문은 1917년 후손 林世圭가 쓴 것인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덕행과 공업과 문장을 三不朽라 한 것은 여러 훌륭한 학자들의 서문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하였으니, 다시 덧붙이는 것은 췌언이 될 뿐이다. 『春秋左氏傳』에 剡子가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 일은 내가 안다.”고 하였다. 남계선생은 바로 나의 방계 선조이다. 남계선생이 돌아가신 지 3백 년이 지났지만, 가정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어제의 일처럼 뚜렷하니, 공경하는 마음과 존모하는 정성이 타인보다 만 배 더함은 당연하다. 남계선생을 드러내어 알리는 일을 어찌 싫어하겠으며, 글로 남기지 않고 어찌 묵묵히 있을 수 있겠는가?
선생은 명종ㆍ선조연간의 성대한 시기에 태어나 爲己之學에 종사하였고, 조식 선생의 문하에 나아갔으니 학문의 연원이 깊다. 당시의 제현들과 학덕을 닦았으니 책선하는 유익함은 말할 것도 없고, 효제의 돈독함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다. 선생의 유문이 병화에 사라져 외롭고 쓸쓸하게 되었으니, 다시는 전체적인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름난 옥은 어떻게 하여도 보배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꼭 문헌이 적은 것을 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당을 만들어 아침저녁 경모하고 추념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선생의 덕업은 썩지 않을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跋 2(2)
이 발문은 1889년 2월 하순에 후손 林炳洪이 지은 것이다. 임병홍은 족숙 林慶昌, 종종숙 林炳孝 및 司果를 지낸 조카 林仁圭 등과 문집 간행을 논의했고, 林鐘簳ㆍ林鐘漢ㆍ林鐘澣 등이 그 일을 담당해 드디어 몇 백 년 뒤에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그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跋 3(2)
이 발문은 1889년 2월 하순에 후손 林鐘學이 지은 것이다. 1889년 문집을 간행하게 된 경위를 기술해 놓았다.
後記(1)
이 후기는 1917년 3월에 후손 임종호가 쓴 것이다. 남계의 글 약간 편을 엮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 오래되었으나 편차와 문자에 꺼려지는 바가 있어 망북대 아래 義庵精舍에서 다시 간행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문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