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가람 선생님께서 서거하신 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선생님은 1891년 3월 8일에 수우재에서 출생하셨다가, 1968년 11월 29일 오전 1시 50분에 향년 78세로 수우재에서 서거하셨습니다.
이번에 익산시에서 제10회 가람시조문학제와 제10회 전국 가람시조백일장 날짜를 11월 24일 토요일로 잡은 것도 선생님의 서거 날짜에 맞춰서 행사를 하고자 해서입니다.
서거 50년은 다른 해보다도 뜻깊은 해이니, 다른 해보다도 알찬 행사를 하고자 하였으나, 내부의 사정으로 그동안 해 왔던 ‘가람시조문학상과 신인상’마저 수상자를 결정하지 못해 아쉽고 부끄럽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다져지고, 한 걸음 물러선 뒤에 두 걸음 나아가는 경험을 되살려 내년부터는 가람시조문학상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를 기대합니다.
- 양점숙 가람기념사업회장, <발간사- 가람 선생님 서거 50주년을 맞으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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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꽃/ 권갑하
가슴에 꽃 한 송이 달아주지 못했는데
산비탈처럼 기운 아내의 야윈 등에
그 무슨 훈장 새기듯 둥근 꽃 피우네
속 썩혀 고인 것들 울컥, 울혈로 솟고
밤새 끙끙대던 통증 멍으로 올라와
피보다 검붉은 문양 눈물꽃을 피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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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 김교한
갖가지
닫힌 문을
열어 보는
세계가 있다
구름도
흐르고
낙엽도
흩날리는
거기엔
아픔도 눈물도
막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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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개비/ 김소해
내 일생 항해라야 통통배 하나였다
그마저 빈틈없이 달라붙는 따개비
또 내일, 출항을 위해
긁어내고
긁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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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각/ 김연동
꽃 속의 꽃을 보며 한나절을 뒤척인다
껍질 벗는 애벌레가 비상을 꿈꾸듯이
내 세 평 사각의 정글
푸른 생각 날(刃)을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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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내 인생/ 노창수
아내가 채근한 아침과
티브이가 떠드는 낮과
한 줄 쓰다만 기분과
고장난 커피자판기와
좀비 씬, 가짜 세트장에
휩쓸어가는 옷자락과
복수하는 반전과
예측하는 승전과
주인공이 죽었다면 하는 사람과
그걸 바꾸어내던 화면과
나의 생 막 뒤에 숨어
자빠진 엑스트라와 그 참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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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류미야
어느 밤
동굴처럼 캄캄해져
울고 있는데
터진 눈 반짝이며
그들이 내게 말했다
여기 봐, 날 좀 보라고, 별거 아냐 부서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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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민병도
오늘은 이만 안녕,
작별의 시간이다
상처와 약솜일까
노을 인 풀꽃 앞에
촛불을 켜려다 말고
나를 잠시 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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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오독, 혹은 모독/ 서숙희
눈이 침침해졌나 생각이 요상해졌나
모델을 모텔로 멘티를 팬티로
불운을 불륜으로 읽고
불안을 불알로 읽어
멀쩡한 문장을 오독으로 모독하니
오독이나 모독이나 독은 독인지라
이 둘은 경외가 아닌
경계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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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의 소망/ 서연정
바위가 단단하다 일월을 새긴 까닭
나무가 단정하다 버릴 것을 버린 덕
스스로 은은히 빛나 이 지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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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벌/ 옥영숙
아버지 살아생전
술심부름 담배심부름
냄새조차 싫었던 몇 가지 기억들
그 얼굴
다시 뵐 수 있다면
살얼음판도 뛰어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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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이우걸
그녀의 손 끝에 내 전부가 매달려있다
숫된 마음이 만난 우레같은 설레임
한 계절 나를 견디면
또 몇 뼘쯤 키가 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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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야생의 족보 2/ 임채성
달보드레한 저녁 길섶
한 여인과 마주쳤다
말을 걸까
그냥 갈까
얕은 어둠 주무르다
술잔 속 달을 마셨다
밤이 한 뼘 짧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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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정물/ 정경화
자작나무 숲입니다
텅 빈 미술관 벤치
낙엽이 오래도록
바람을 굴립니다
방치된
11월 오후,
노부부가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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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달아/ 정온유
숨골 속, 뻗어 부는 쓸쓸한 바람이
저녁 즈음 명치에서 제 몸을 부풀렸다
단풍은 어느새 붉고,
덩달아 하늘도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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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빛에 눈이 멀어/ 지성찬
세상빛이 하도 밝으니
하늘의 별 뵈지 않네
어릴 적 잘도 뵈던
하늘의 맑은 별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네
세상빛에 눈이 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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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국밥/ 최양숙
송정시장 내리던 눈
몇 바퀴나 돌았을까
비린 것 먹을 수 없어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떠나간
그 밤 눈발은
어느 역에 닿았을까
유리문 살짝 금 간
변두리 식당에서
새우젓 달게 풀어
국밥 먹던 한 남자는
막차를
놓치지 않고
돌아가긴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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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장수(長壽)의 뒤안길 20/ 최오균
야릇한 밤꽃 향에
감또개 뒹구는 한낮
핸드폰 4번을 꾸욱,
옛님과 말을 섞네
나야 뭐, 그저 그렇지
그냥 걸어본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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