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연재]
나는 브로커였다 13
탈북자 유상준
내가 한국에 와서 처음 배치 받은 곳은 포항이 였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생활의 첫걸음은 밟게 되였으며 김창식 담당형사님은 친형처럼 자심하게 생활의 구석구석을 잘 보살펴 주시여 낯선 땅이지만 나도 모르게 친근감이 도는 세계 최고의 철강기술을 자랑하는 철의 도시였다.
나는 담당형사님의 소개로 포항북부교회 한동식, 조연주 집사님들을 만날 수가 있었으며 그들은 나의 신앙생활과 일자리를 구해보기 위하여 정말 사심 없이 노력을 하여주신 분들이라 지금도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친근하면서도 성실하였고 자신들의 친동생의 일자리 구하는 것 보다 더 열심히 나의 한국생활과 일자리를 위하여 노력하신 덕분에 나는 포항제절산업기술 주식회사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들은 나의 북한 경력을 고려하여 회사에 취직한 후 곧 품질관리에 저를 배치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군검으로 10년이 넘게 근무하여 어지간한 도면과 여러 가지 측정기구를 다룰 수가 있었지만 한국의 도면(설계)은 표기와 명칭을 모두 영어로 표기되어 있어 정말 나로서는 보통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나의 앞에 일을 잘 하여 나갈 수가 없었다.
회사는 너무나 웅장하고 깨끗하였으며 근로자들에 대한 복지시설이 최고의 수준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회사에 입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만뜻밖에 일이 생겨 더는 회사일을 할 수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자고 하니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를 위하여 열심히 뛰여 다니면서 일자리를 소개하여주신 한동식 집사님 부부를 보기 미안 하였다.
집사님 부부를 찾아가서 조용히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이제는 서울로 가려고 합니다. 내가 살아서는 다시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 이제는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한번 일을 해보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집사님 부부는 이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가면 어데로 가겠는가고 하면서 극구 만류하였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굳어졌고 다시 돌아서지 않을거라고 맹세를 하였다. 내가 서울로 떠날 때 집사님 부부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시였고 그분들은 내가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일하는 것이 걱정스러워 이후에 포스코 구단( 포항제첼 축국단)훈련장 관리를 하여 달라고 하면서 나와 함께 직접 구단 훈련장에도 찾아 가본적도 있다.
포스코구단 훈련장은 도시 북쪽 외곽으로 한참동안 나가면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있고 한쪽으로는 아늑한 소나무 숲이 펼쳐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 가면 구단 훈련장이 아니라 원산의 송도원을 방불케 하였으며 주변의 경치와 어울리게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훈련소 건물과 훈련장들을 볼 수가 있다.
여기가 북한이라면 어느 곳에게 김일성의 별장을 들여 앉혔을 것 같았다. 북한에서 손꼽히는 명승지로 불리우는 송도원이나 명사십리, 그곳엔 모두 특권층을 위한 별장들이 자리 잡고 있어 일반 인민들은 그 근처에 얼씬할 수도 없다. 송도원에는 배나무골이 있었다.
나는 2001년 가을경부터 모 선교회에 자원봉사 형태로 일하여 본적도 있었다. 그때는 왜 그리도 많은 탈북자들이 경찰에 잡혀서 강제 북송되는지 지금도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난처에 여러 명의 탈북자들을 수용하면서 그들에게 충분한 안전규칙과 같은 것을 가르쳐주고 집단의 안전을 위하여 서로가 도와주면서 생활하도록 이끌었다면 그처럼 많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탈북자들의 생활을 돌보아야 할 피난처 책임자, 사역자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강조하고 주의를 주면서 피난처 관리를 책임적으로 하여 나갈 수 있게 꾸준히 노력을 하였다면 당시에 발생하였던 사고로 탈북자들이 체포되는 것을 적어도 반수 이상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였다.
한 달에도 몇 번씩 피난처가 습격 받아 피해를 받고 있었으며 3국 탈출을 시도하던 탈북 대열은 이송도중 체포되거나 목적지에서는 방향을 잃고 헤매이다가 죽거나 중국공안에 체포되는 일들이 매일과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개된 인터넷상에서는 초불이 간다느니, 꺼졌다고 하는 등 일행들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 글들이 공공연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모든 것을 극도의 비밀에 붙여놓고 일이 성공한 다음에는 공개하여도 별일 없으련만 일의 진행과정에서 이와 같은 일을 공공연히 말하는 것은 아주 위험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살려 피난처 관리에서 사역자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탈북자들에게도 집단의 안전과 성공적인 탈출을 위하여 외부와의 연계를 모두 차단하게 하였으며 피난처에서 발생 가능한 일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피난처에 비상용 전화를 갖추어 놓고 탈북자와 사역자간에만 이용하도록 강하게 요구하여 그대로 집행되게 하였다.
다른 한 가지는 피난처에 들어온 탈북자들에게 가족이나 친척 등 반드시 필요에 의하여 피난처를 나가야 될 사람이 있을 경우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피난처를 반드시 옮기군 하였다. 모 선교회에 자원봉사로 있는 동안에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이후에 중국에서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2004년5월에 첫 피난처를 두 곳에 개설하였고 2006년12월까지 피난처를 운영하면서 단 한건의 공안습격도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중국 국내에서 600-2000킬로미터의 먼 장거리로 탈북자들을 이송하는 경우에도 모두 성공적으로 탈북자들을 이송시켜 다른 피난처에서 안전하게 지내다가 3국을 탈출할 수 있게 하였다.
할빈과 장춘, 북경과 위해, 등 여러 곳에 탈북자들을 분산시켜 보내는 일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어도 모르는 탈북자들을 한 두명도 아닌 4-7명씩 조를 짜고 , 두 다리가 부서져 걷지도 못하는 탈북자. 고아와 어린이들,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을 우리는 그들을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려나는 일들을 원만히 수행할 수가 있었다.
내가 그와 같은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원인중의 하나가 선교회에 있으면서 내가 일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여 보고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음으로는 나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탈북자들을 위해 명예와 부를 떠나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분들을 일군으로 세우고 함께 논의하고 중국내에서 계획하는 일들은 현지인들의 의견을 많이 수렴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실행한데 있다고 본다. 모든 일의 승패는 어떤 일군을 세우고 어떻게 일하는가에 달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2001년과 2002년은 내가 보기에는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의 해였던 것 같다.날마다 들려오는 탈북자들의 체포되였다는 소식과 3국 탈출이 실패하여 탈북자들이 강제 북송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불안한 것이 아니 좋았다.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들도 헤여진 자기의 가족들을 찾고 그들을 한국에 데려오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여도 그들의 애타는 마음을 풀어 드리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에 나오신 분들의 가족은 그나마 다행이다. 한국에 아무 연고가 없이 산속에 숨어 지내는 탈북자들의 경우에는 그 어떤 바깥 세상의 정보를 접할 수가 없고 옷만 입었을 뿐이지 원시 사회의 원시인 그대로 였다.
산속에 숨어사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은 한시도 미룰수가 없는 초미의 과제였다. 정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아무 부담 없이 그들에 대한 지원을 하여 주어야 하는데 한국의 실정은 그러하지 못하다.
내가 일을 한다면 그들을 모든 부담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종교적으로도 부담이 없이 그들이 받아 들이는대로, 순리에 맞게 하고 싶었다. 나는 중국에 갈수 없는 몸이다. 그 시기에는 북한이탈주민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탈북자는 5년 안에 해외에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여 보면서 나의 여권을 발급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탈북자 여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보았지만 나 하나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였다. 2002년 봄 경으로 생각되는데 나는 처음으로 탈북자동지회에 찾아가 김성민 사무국장(현 자유북한 방송국 대표)을 만나서 탈북자 여권발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의견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처음 만난 김성민 사무국장은 첫 인상이 부드럽고 소탈한 감을 주는 것이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이때로 부터 나는 성민형을 존경하였으며 우리는 백두한라회의 이름으로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중앙대학교 사회복지관과 결연을 맺고 주변에 사시는 독거 노인들에 대한 봉사활동을 진행하였다.
봉사활동에는 백두한라회 회장 김성민, 비바리, 승희, 탁은혁, 정수반, 장천호등 한국의 대학생들과 탈북자들이 참가하였다.
우리들은 홀로 사시는 독거 노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집 청소도 하여 주었으며 겨울이 오기 전에는 겨울나이 준비를, 봄에는 집안 대청소와 어느 휴일을 택하여 한강 유람선을 함께 타고 독거 노인들과 휴식의 한때를 보내군 하였다.
나의 집은 포항이고 하니 서울에서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나는 서울역 3번출구 옆 25시 고시원의 한평 남짓한 방에서 살면서 노가다(일당로동)일을 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2003년 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해 5월은 유난히 나에게는 힘든 달이 였다. 매일 아침 새벽이면 보짐을 꿍지여 가지고 인력사무소에 찾아가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도 일거리는 나오지 않는다. 하루, 이틀, 나는 이렇게 보름이 넘게 인력사무소에 찾아갔지만 단 하루도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올 때면 정말 그때의 심정은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이 괴로웠다.
어느날인가 아침 일찍 인력사무소에 찾아가니 오늘은 일거리가 있단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현장에 찾아가 열심히 일하였더니 석재를 책임지시고 일하는 분이 자기들과 함께 일하자고 한다.
보름이 넘게 단 하루도 일하지 못하였는데 여기서 함께 일하자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이후에도 열심히 일하면서 교통비를 줄이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효창공원에 있는 고시원으로 자리를 옮겨 국방부 신청사 건설장까지 늘 걸어다니였다.
나는 노동생활을 하면서 백두한라회 봉사활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으며 탈북자 여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면서 대응책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때로서는 사실 나는 해외에 두 번씩이나 나갔다가 온 경험이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해당기관에서는 당신은 여권을 발급 받고도 왜 자꾸 여권문제를 들고 다니는가고 한다.
나 개인은 여권을 발급 받고 또 앞으로도 여권을 발급 받을 수가 있겠지만 수많은 탈북자들이 여권을 발급 받지 못하여 중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볼 수가 없었으며 어떤 이는 중국인들에게 인질로 잡혀 희생양이 되고 어떤 이는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그의 가족이 북한으로 강제 북송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도 국가는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문제였으며 탈북자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일이 자유의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바른 정신에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 였다.
탈북자들의 단결된 모습으로 함께 노력을 한다면 될 수도 있으련만 다들 앉아서 누군가가 대신 일하여 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한해, 한해는 실속은 없고 말뿐인 자유, 실망과 원망으로 그 무엇인가 하여 보려고 몸부림친 연약한 나의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다음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