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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9) 사울왕의 죽음 역대상 10:1-6, 13-14
오늘 역대기는 사울왕의 업적과 공로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다윗의 등장을 위한 준비로, 이스라엘의 왕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루는 느낌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왕이 되었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아서 이토록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는지는 새벽에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사울의 죽음, 그 모습으로부터 몇 가지 생각을 함께 해보고자 합니다.
사울과 블레셋이 전투를 벌이던 그때, 다윗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울 수 없었습니다. 사울을 피해 블레셋 저 아기스의 신하가 되어 있다가 아기스의 신하들로부터 쫓겨나 시글락에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시글락을 불태웠던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유대 장로들에게 전리품 택배를 부치고 있던 그 때, 사울을 포함한 이스라엘 군대는 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부터 길보아산에 이르기까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블레셋에 의해서 완전히 궤멸당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장면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이 싸우더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다가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추격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고”(대상10:1-2)
이 전쟁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에서도 사울왕과 그의 가문을 버리시는 전쟁이었습니다. 거대한 싸움이 코앞인데,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도 명령도 주어지지 않지요? 그래서 다급해진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귀신 사무엘, 가짜 사무엘을 만나기도 했던 것이지요? 그 본문을 한번 찾아봅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삼상28:5-7)
아무리 여쭈어도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싸워야할 전쟁인지, 피해야할 전쟁인지, 이길 수 있는 전쟁인지, 패배할 전쟁인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블레셋과 마주하여 진을 쳤구요. 백성들은 단 한 마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없는, 오직 저 사울의 전략과 판단에 의지한 전쟁을 치러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떠할까요? 싸울 명분도 의욕도 없던 그 전쟁의 결과는 피비린내나는 비참한 패배였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오늘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분들이시길 축복합니다. 주일 낮 살펴보신대로, 늘 하나님의 사랑의 눈과 인자한 귀로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주의 백성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꿈으로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순간순간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고, 또한 늘 우리의 길을 생명길로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시는 복받은 생애가 되시길 바랍니다.
설령 그렇질 못해서, 끝내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지 않거든, 그럼에도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시라구요? 신접한 여인을 찾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신 모든 상황 속, 이미 배우신 대로, 연습해오신 대로, 그 순간 가장 하나님의 백성다운 결정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게 이익인지를 판단해서 결정을 내리지 말고, 내가 생각하기에 무엇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도 아닙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 선택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참는 길이, 버텨내는 길이, 묵묵히 고난당하는 길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 됨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주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되어, 말씀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리고 구원하는 길을 걸으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목에 있는 편도선은 몸이 무리를 하거니 병균에 감염이 되면 체온이 올라가면서 막 붓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심한 경우에는 물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럽지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아, 이거 없어도 된다는 데 수술해버릴까? 그러나 여러분 이 편도선이 없는 게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편도선을 우리에게 만들어주셨을까요? 오히려 이 편도선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무리했음을, 그리고 이제는 좀 약도 먹어야하고 더 조심해야함을, 계속 이렇게 하다가는 죽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 편도선 같은 존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주는 편도선, 그들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오늘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블레셋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일전에 한번 말씀드렸지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려면 저 이웃나라, 블레셋의 상태를 보면 안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으면, 블레셋은 쥐죽은 듯 잠잠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질 못하면 블레셋이 어느 새 힘을 얻어 침공해오는 것이지요? 그래요. 이스라엘에게 저 블레셋은 참 없었으면 좋을 것 같은 편도선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괜히 딱 붙여서 옆 나라에 이들을 허락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모습과 형편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은 더욱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더욱 기도해야했고 더욱 바른 신앙의 길로 그들의 삶을 돌이켜야만 했던 것이지요!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편도선이 붓는 것 같은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누군가를 탓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가 부족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오늘도 마음이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그러시지요? 교회에 분란이 생기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느 교인 탓, 어느 성도 탓 하지 않으십니다. 다 당신들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입니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피곤해 게을러지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일들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 세우신 작은 교회, 여러분의 가정과 기업도, 여기 저기서 문제가 터져 나오면, 문제도 안될 것 같은 것들이 문제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얼른 가정과 기업의 제사장인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반성하는 기회로 삼으셔야 합니다. 아, 내가 그동안 기도하지 못했구나, 아, 내가 그동안 말씀읽지 못했구나, 아, 내가 그동안 인간적인 일, 세상적인 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었구나, 깨달으셔야 합니다. 편도선이 붓는게 감사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사람이 둘인데, 그중 하나는 악신이 들려서 자신의 왕위 지키기에 급급하여 제사장들을 다 죽이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또 하나 기름 부음받은 사람은 저 멀리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의 신하가 되어서 사람을 죽이고 거짓말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야 억지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있기는 한데, 아직 저 이방 땅에 자기가 해놓은 말과 행실들 때문에 이스라엘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이스라엘 편에 싸우지도 못하는 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하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되시는 것이 싫어서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했고, 그 왕의 실정을 통해 고스란히 고통을 다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만 세워내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 같았는데,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간왕의 통치를 원하더니만 그들은 계속해서 블레셋의 침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하나님을 멀리한 채 수십 년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늘 사울과 그 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가 죽는 것입니다. 왕과 아들들이 죽었으니 전쟁은 끝난 것이고, 백성들의 목숨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전쟁을 치르는 이스라엘 경내에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 그래도 오늘 제사장이 있고, 오늘 에봇을 가지고 있는 다윗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다윗이 이스라엘 진영에 돌아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 이 두 기름부음받은 사람이 쫓고 쫓기고 마음과 자리가 나뉘어 있으니 블레셋은 마음놓고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언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겼지요? 다윗과 사울이 한 편이 되었을 때가 아닙니까? 사울에게로 다윗이 찾아왔을 때가 아닙니까? 사울이 다윗을 받아주고 그에게 갑옷도 입히고 칼도 내어주던 때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둘이 지금 하나가 되질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되어 있으니 이 전쟁은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이만큼 중요합니다. 사분오열되어 마음이 나뉘어지고 의견이 나누어지면 우리는 그 어떤 마귀와도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하나됨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어느 새 마귀가 틈타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이지만, 놀랍지요? 어느새 나뉘고 어느새 갈라지고 어느새 다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그냥은 안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고, 모든 겸손, 모든 온유, 오래참는 사랑, 서로 용납할 때, 그리고 평안의 매는 줄로 단단히 붙잡아 매야, 그제서야 우리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겨우 지켜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사제간에, 주종간에, 모든 관계가 다 이러한 힘써 지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나는 하기 싫고 누군가 상대방이 이 수고를 다 하기를 바라고 계시면서 점점 마음만 더 상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서로 노력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쪼금 더 힘써 노력하고 수고하고 섬기는 것이 마음상하고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관계가 결국 깨어지고 나면 그 마음은 그 자존심은 설 자리 조차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요. 사울은 마지막까지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오래참지 못했습니다. 용납하지 못했고, 평안의 매는 줄로 매지 못했습니다. 다윗을 불러왔어야 했습니다. 다윗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다윗을 곁에 두고, 다윗과 함께 다윗의 도움을 받으며 나라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적대자로 여기고 죽이려고만 했지요?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삼상 20:30) 끝내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으로의 망명이라는 해서는 안되는 결정까지 내리도록 그를 몰아갔던 것입니다. 다윗이 없어졌으니 평안할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왕위를 위협하는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다윗이 아닌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왕위를 위협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와 아들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새의 아들이? 아뇨? 블레셋이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백성이 거의 전멸하기까지 쓰디쓴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비참한 전투, 사울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어지는 본문을 함께 읽어보시지요?
“사울을 맹렬히 치며 활 쏘는 자가 사울에게 따라 미치매 사울이 그 쏘는 자로 말미암아 심히 다급하여 사울이 자기의 무기를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의 무기를 가진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행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매 사울이 자기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니 무기 가진 자가 사울이 죽는 것을 보고 자기도 칼에 엎드러져 죽으니라”(대상10:3-5)
여러분, 사울은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합니다. 자기 무기를 든 자에게 죽여 달라 청하지요? 그러나 그가 다른 명령은 다 따라도 왕을 죽이라는 명령만큼은 두려워 따르지 못하자, 스스로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자결의 이유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사울이 생포되었다면 아마 치욕스런 죽음을 당했을 것이 사실입니다. 저 블레셋이 저를 가장 잔인하게 그리고 수치스럽게, 고통스럽게 죽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사울이 이야기 한, 그래서 자결을 선택했던,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찌르고 모욕하는 죽음이 비참한 죽음일까요? 자기 백성 한 명이라도 더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스스로 죽은 것이 오히려 더 비참한 죽음이 아닐까요?
당시 전쟁은 장수를 잡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왕을 사로 잡고나면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죽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될 사람들을 죽이는 게 더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때요? 사울이 죽은 것을 다음날까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 죽은 것도 모른 채 싸웠고, 블레셋 역시 다 끝난 전쟁인데도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여나갔던 것이지요. 내가 고생당하면 되는 일을, 다른 사람들 고생시키고 마는 일을 저 왕이라는 사울이 한 것입니다. 나는 이상한 명분을 갖다 붙이며 죽음으로 책임을 면피하고,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사람들마저 다 죽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저 사울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오늘 사울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하고 얼마나 비교가 되는지 한번 보시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요18:8)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검과 몽치, 횃불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저 제자들을 한 사람도 붙잡지 않은 이유가 이겁니다. 제자들 열한 사람이 다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잡히시는 것으로 제자들은 보내줄 것을 약속 받으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화살에 맞아 중상도 했고,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알았다면, 백성들을 위한 마지막 결정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내가 사울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내가 여기있다. 더 이상의 희생을 내지 말고 나를 포박하라.”
사울이 그렇게 잡혀갔더라면, 사울이 그렇게 엎드러져 죽지 않았다면, 사울이 죽은 것을 블레셋이 알았더라면 더 많은 희생이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죽은 것을 몰랐기에 블레셋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고 또 죽였던 것입니다. 왕이 살아 있어야 백성들이 마음을 모아 왕을 구출할 작전을 세우기라도 할터인데, 왕도 없이 다음 행동을 지시받지 못하는 백성은, 마지막 명령을 받은 자리에서 다 죽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왕의 죽음을 목격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삶의 터전, 자기 성읍도 다 버리고 뿔뿔히 흩어 피난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블레셋 한테 다 빼앗기는 것이지요?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골짜기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그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다 죽은 것을 보고 그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대상10:7)
그리고 보십시오.
“이튿날에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죽임을 당한 자의 옷을 벗기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길보아 산에 엎드러졌음을 보고”(대상10:8)
다음날 이스라엘 군사들의 옷을 벗기러 온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블레셋 진영은 사울이 죽은 것도 몰랐던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렇게 블레셋은 쉬지도 않고 이스라엘을 도륙하고 짓밟았던 것입니다. 사울의 비겁한 자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보시자구요. 오늘 사울이 그렇게 두려워한 것, 저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하는 것”이 그렇게나 두렵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는지를 말입니다. 성경에 딱 한 분만 보시지요? 그분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우리가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이렇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그대로 돌아가셨는데 우리 한번 읽어보시지요? 누가복음 18장 32-33절입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눅18:32-33)
여러분,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신 죽음이요, 옷벗김 당하고 그 속옷마저 제비뽑혀 나뉘어지는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당사자이신 예수님도 그 죽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일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능력을 참으시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 가셨던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고 하시며 온갖 수난을 다 당하셨던 것이지요? 왜? 당신이 이 수치를 당하심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살길이 열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울은, 자기 혼자 이 수치를 면해보기 위해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을 팔아버렸던 참으로 수치스러운 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할례받지 않은 이들에게 수치를 당한 사람, 이스라엘의 나실인 사사 삼손은 어땠지요?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두 눈이 뽑히고 그들 앞에서 재주를 부려야 하는 치욕을 당했던 삼손이지만, 나중에 기둥을 붙들고 쓰러져 블레셋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아무도 자살이라고 이야기하거나 치욕적인 죽음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목 베임을 당했고, 세례요한의 목은 베여져서 쟁반 위에 올려져 사람들에게 조롱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이들의 죽음을 수치스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삼손도 야고보도 세례요한도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삶이요, 그를 위해 당한 모욕이요, 수치였기에 그 누구도 그 죽음을 부끄럽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더욱 기리고 높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 십자가는 오늘 교회의 상징이 되어 있고 말입니다.
오히려 누구의 죽음을? 저 사울의 죽음을 정녕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의 기름 부음받은 자라는 이의 삶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도 하던 자의 삶이, 악신에 들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범죄하고 제사장들을 죽여버림은 물론이요, 철저히 끝까지 백성들의 목숨을 팔아 자기 수치를 면하고자 했던 끝까지 이기적이요, 마지막까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죠. 죽는 모습까지도 추하고 볼썽사나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파는 이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수치를 면해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내가 수치를 당하고, 오히려 내가 조롱을 당하고, 오히려 내가 모욕을 당해서, 저들의 수치를 면하게 하고 저들이 조롱을 받지 않게 하고 저들이 모욕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여러분, 오늘 기름부음 받은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어야 함을 오늘 성경은 우리 가운데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오늘 사울을 참으로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사무엘을 대신해 제사를 드렸음에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에 전리품을 챙겼음에도, 자신을 두 번이나 살려준 다윗을 여전히 죽이려 했음에도, 당신의 제사장 85명을 한꺼번에 죽였음에도, 엔돌의 신접한 자를 찾아가서 귀신에게 굽혀 절하였음에도 하나님은 참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정말로 말씀 그대로, 악인에게나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마지막에 사울이 하나님을 부르며, 다시 한번 백성을 살릴 힘을 달라고 저 삼손처럼 구하기를, 끝까지 기다리셨던 것은 아닐런지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참으로 오래 참아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그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교만과 고집을 내려놓고 꿇어 엎드려 보시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수치를 면하기 위해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해온 우리의 모습을 기억해보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면피하고 숨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대신 수치를 덮어 쓰고 우리 때문에 고생하고 고통당해야만 했던 많은 이들을 떠올려 보시길 원합니다. 오늘 이 밤에 수치스럽게 죽는 사울이 될지, 영광스럽게 죽는 사울이 될지, 우리의 마지막을 그림 그려 보시길 소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았을 때의 모든 점수보다,
죽을 때의 점수가 더 비중이 높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잘 죽어야 된다는 말씀을 그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오늘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한 구절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래요.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것보다, 내 사람들이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
그게 부모요, 예수님, 사랑하는 이의 마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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