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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웹북》2011년 하반기 제6회 신인문학상 발표
■ 종합심사평
왜 글을 쓰는가 / 심사위원장 조향순
근래에 와서 ‘왜 글을 쓰는가.’하는 문제를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참 길을 가다가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가끔씩은 짚어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에 잘못 가는 길이라면 돌아서서 다시 가든지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다.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내면적인 멋, 즐거움, 혹은 기쁨을 얻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멋, 즐거움, 혹은 기쁨은 일시적인 감흥이나 속된 욕심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라 마음결을 수없이 빗어 내리고, 밤새워 고민을 하고 다듬어야만 얻을 수 있는 열매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드디어 나를 즐거움 혹은 기쁨의 물결로 출렁이게 한다. 이 즐거움과 기쁨이 글을 쓰는 목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것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온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된다고 해서 일확천금이 굴러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번쩍거리는 명예가 씌워지는 것은 아니다.
글은 최고급의 오락이다. 이 고급 오락을 열심히 하다보면 더러는 돈과 명예가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깥의 것들, 부수적인 사은품 정도이다. 사은품에 어찌 무관심할 수야 있을까마는 사은품에 너무 목을 매다 보면 본래의 목적은 뒷전으로 밀린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비굴하고 남루하고 초라하게 보인다. 무엇이 주가 되어야 하고 무엇이 부가 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는 최고급의 오락을 즐기는 사람으로서는 취할 태도가 아니다.
《계간웹북》 신인상이 벌써 6회에 이른다. 고급 사은품은 마련할 형편이 되지 못하지만,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래도 비굴하지 않고, 신뢰로 어우러져 고급 오락을 지키려는 고집과 순수함과 선량함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시 분야에서 당선자가 나오지 않음에 심란했다.
정경오의 작품을 읽으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까치발 딛고 있는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흔히들 남발하는 잔재주를 모르는 사람이다. 설거지를 하며 기원하는 화자의 진술이 허술하여 감동에까지 이를 수 없었다. 차라리 부질없는 몇 연을 빼고 상상의 여지를 주는 재주를 부려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설거지로 시를 쓰다) 다음을 또 기대한다.
그리고 시 분야에 응모한 조천형씨에게는 왜 글을 쓰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더구나 불혹(不惑)도 지나고, 지천명(知天命)의 시점에 서 있다면 하늘의 뜻이 과연 그런 짓이었는지, 그 짓이 과연 옳은지, 꼭 짚어보기 바란다. 겨우 얻어 걸린 말,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가. 산토끼 쫓다가 집토끼 놓친다고 했던가. 걱정스럽다.
소설에서 끝까지 남은 작품으로는 변기(김수민), 핑크 팬티(김하나), 빙하보다 온기(장다영), 세 발짝(최고나), 소녀(이호형), 꿈(이철), 존엄과 안락(정수진)이다.
김수민은 소설 기법이 매우 현대적으로, 아빠를 잃고 불안해진 가정환경으로 인한 주인공의 심리적인 상태를 변비를 통해 치밀하게 그렸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이 되었던 부정을 연결한 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제목은 글의 얼굴이요, 소재요, 줄거리요, 주제다. 제목을 읽고 독자는 줄거리와 주제를 넉넉히 짐작할 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소녀’(이호형)는 부드럽고 유려한 문체로 심사위원들에게서 많은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문장이 세련되었긴 하나, 인물의 설정과 갈등에 있어서 독자의 감동을 끌어내기에는 약한 부분이 아쉽다. 예술이냐 현실이냐를 놓고 교차하는 두 인물의 내면갈등, 그러나 감동에 이르기까지는 멀다. 그리고 이런 류의 소설은 그야말로 소설을 위한 소설이라 독자들의 범위를 넓히기가 쉽지 않음을 참고로 해주기 바란다. 요령은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으니 경험과 사고를 더 쌓고 넓히면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고 당선작으로 민다.
수필 분야에서 최종 심사까지 오른 이는 이종수(절망을 넘어서), 송문용(나무도 보고 숲도 보고), 차영민(자전거, 자유로운 영혼의 친구)이다. 설명문은 이해를 위한 글이고, 논설문은 설득을 위한 글이고, 문학(수필)은 감동을 얻고자 하는 글이다. 감동은 훈계를 하거나 주장을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감동(울림)을 얻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이 붓은 제멋대로 아무데로나 가지 않는다. 가장 개성적이고 가장 고백적이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우아한 길이라야만 가는 까칠한 글이다. 그런 길을 통해서 가야만 훈계가 아닌 감동에까지 이를 수 있다. 남은 작품 중에서 그래도 송문용의 작품이 흠이 가볍고, 글의 구성도 짜임새 있고, 내용도 의미가 깊어 주저 없이 당선작으로 민다.
동화 분야에서는 김미희(쉿! 비밀인데), 배은선(욕심쟁이 비밀), 조상용(안드로메다74번지), 김정은(진짜 라이벌)이 경합에 올랐다. 조상용의 작품은 명칭 하나하나에도 동화적인 고뇌를 한 흔적이 보이고, 문장도 안정적이다. 그야말로 동화다운 글이다. 이 말은 칭찬이 될 수도 있겠고 나무람이 될 수도 있겠다.
세 분야의 당선자들에게 축하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당신들의 꽃을 피워드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 《계간웹북》의 노고에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드린다. 발행인인 이용환 씨에게 ‘천당 가겠습니다.’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다. 2011년 8월
조향순 경북 청송출생. 1977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0년 시집 <꿈은 꿈대로(다층)>.
2007년 산문집 <말 붙잡기(다층)>
2011년 시를 위한 산문집 <빈 자리에 고인 어둠(다층)>이 있다.
《계간웹북》 제6회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
이호형- 소녀(少女)
1.
23일. 금요일 밤. 최상급 라이브 카페 K9.
건반 블록이 너울거리면 에메랄드빛이 피아노 본체에 비친다. 하얀 학 열 마리가 춤추며 피아니스트의 마음을 빚으면 달달한 향기에 청중들은 황홀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갈빗대와 폐 사이에 있는 얇은 벽이 녹아내리면 음악(音樂)이 심장을 권능으로 움켜쥐고 무시(無始)를 향하여 영혼을 엿가락처럼 쭉쭉 뽑아낸다.
영준이 높은 솔을 누른 후 10여 초가 지났다. 신(神)의 음성은 일산(日傘)처럼 심야 술집 내부와 손님들을 지배하다가, 정적을 깨는 손뼉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영준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이번에는 블루스 음표 몇 마디를 진행했다. 영준은 담뱃재가 떨어지듯이 음표 하나씩을, 그렇게 버리듯이 피아노 페달 아래서부터 끌어 올리며 그랜드 피아노의 갈빗대를 진동시켰다. 서러운 통증이 검고 위대한 악기에게 음악을 뱉게 하는 것이다. 천한 인간들은 경이로운 연주를 통해 본디 아름다운 영혼의 실마리를 잡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영준은 갈채 속에 블루스의 푸른 커튼을 걷고 일어섰다.
“왜 인간은 음악에 감동할까?”
위스키가 담긴 잔을 흔들며 동진이 물었다. 녀석은 한 시간 전의 연주를 끝내고 영준을 기다리며 흠뻑 타락해 있었다.
“모르시긴. 음악을 듣고 인간의 깊숙한, 심연에 내재된 악기가 공명하니까 그렇겠지.”
술병에서 금색 비단이 액체가 되어 흘렀다. 얼큰한 취기가 오른 손님들의 이마에는 방울이 맺히고 술집 안에는 동 시대의 모든 언어와 화젯거리가 불쏘시개가 되어 타 없어지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다만, 영준이 네가 페달질은 나보다 더 낫지. 안 그러냐? 그런데 너 악센트 그따위로 치다가는 조만간 손가락 나간다.”
왼쪽 어깨가 기운 동진은 취했다는 증거. 솔트 피넛을 줍다가 놓치기 일쑤였다. 주당이던 음대 동기의 거뭇한 입술과 피부색에 영준은 혀를 끌끌 차며 그게 네 간의 빛깔이라고 지적하곤 했다.
“야, 영준이 너는 연주할 때 작품 해석 말이야. 네 이야기라고 연상 하냐? 아니면 손님 입장에서 내용을 진행 하냐?”
“좀 더 효과적인 쪽으로. 내가 그럴 때도 있고, 클럽 무드 봐서 다른 이미지를 끌어 오기도 하고.”
“하하하. 병신. 인마, 술 처먹은 놈들 기분에 따라 다르지. 안 그래?”
묵묵히 영준은 공감의 잔을 들었다. 금빛 그림자가 출렁이고, 독약을 마시며 생명을 몰아내는 두 사람은 놀라운 기교를 가진 피아니스트였다.
2.
우편함에는 여지없이 흰 봉투가 꽂혀 있었다. 영준은 철렁대는 가슴을 쓸어안고 카드 대금 고지서를 뜯어본 후에 기운 없이 계단을 올랐다. 그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오선지를 꺼냈다. 별자리처럼 악상과 음표가 적혀 있으나 보랏빛, 초록빛의 색채는 흩어져 있을 뿐, 아직 어떠한 풍경이라든지 인물을 묘사하고 있진 않았다.
“후…….”
탄식을 뱉고 습작한 곡을 하나씩 펼쳐보니 4개월 치 익은 녀석, 3년째 겉절이인 녀석도 있었다. 또한 영준이 사랑에 빠져서 여름 장대비도 시 구절로 들릴 때 작곡한 ‘설산의 수정’도 있었다. 낯부끄러운 음률로 가득하지만 기교적으로는 훌륭했다. 하지만 영준은 알고 있었다. 만드는 이에게 뿌듯한 곡일수록 타인에게는 더 닿지 않다는 것을. 작품이란 누군가를 위해 쓰여야 하는 것이기에.
영준이 컴퓨터로 음악을 재생할 무렵 밖에선 현관문이 열리고 둔탁한 하이힐 벗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부스럭대는 종이 소리는 그녀가 고지서를 살펴보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쇼팽의 봄의 왈츠, 공교롭게도 이별의 곡이 흐를 때 ‘설산의 수정’이던 아내가 방문을 열었다.
“왜 이리 한심하게 있어? 당신이 벌어오는 돈에 대해서 고민할 것이지 음악이나 들을 때야?”
“내 직업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영준의 아내 수정은 방안의 음악 서적과 악보를 손가락질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함축하여 말하자면 피아니스트란 보이지 않는 꿈을 재현하지만 두 부부가 지상에 딛고 사는 이상 가시적인 소유를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강의였다. 즉,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위기 상태였다.
‘세상을 승리할 수 없는 서적으로만 가득 찬 책장.’
‘현실에서는 쓸모없고 음악 공동체 안에서만 위안을 얻는 자.’
두 가지 묘비명을 영준의 가슴에 새겨준 채로 수정은 안방으로 사라졌다. 가난한 피아니스트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연봉을 버는 아내에게 침묵만을 지켰다. 영준은 자신의 업라이트 피아노를 쳐다보았다. 흐느끼는 수정의 목소리를 듣고 피아노를 보노라니 볏단처럼 악상이 쌓여갔다. 영준은 예술의 재능은 악마의 농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3.
두어 달이 지났으나 시침과 분침의 길처럼 영준의 매일은 같았다. 아침마다 일찍 출근한 아내 없이 깬 후 정오에는 시내의 어느 카페에 앉아 있곤 했다. 언제나 진득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우뚝 솟은 빌딩들을 천천히 감상했다. 태고의 자연을 걷어 내고 문명의 삼림을 세울 때까지의 세월을 헤아리다가 자신의 처지에 우울했다.
음악은 그에게 꿈이다. 가령 커피 한 잔에는 테이블이 있고 잔잔한 공간과 멈춰 있는 시간이 있다. 회전문 하나를 사이로 현실의 물결과 마음의 휴식이 경계를 이룬다. 영준에게 음악이란 원치 않는 소음을 물리면서 청중의 마음과 머릿속을 환기시켜주는 무한의 기법이자 닿지 않는 세계, 그러니까 꿈이었다.
젊은 날,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하던 영준은 작곡에도 능력이 있었다. 콩쿠르도, 유학도 어려운 처지였지만 동기들은 그의 창작력에 감탄했다. ‘너는 놀라운 집중력을 지녔어. 지극한 세계에 다다를 수 있을 거야’ 해외로 떠난 동기들이 속속 귀국할 때까지 영준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찾아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약간의 작곡과 편곡, 세션으로 작업하며 이름은 꽤 알렸다. 다만 마땅치 않은 점은 주머니 사정이라서 영준은 계획 없는 삶을 살았다. 불규칙한 레슨과 녹음은 생활하기에 힘든 점이 많았고 수입이 전혀 없는 시기도 가끔 닥쳤다. 비슷한 처지의 동진은 어린 아내와 이혼까지 했다. 혼자 사느라 씀씀이가 적을 것 같았지만 그는 노상 폭음으로 혈관을 괴롭혔다.
꿈이란 무엇인가? 영준은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은 회사원들을 보았다. 휴식 담배 한 대 피우며 토론하는 그들에게 행복의 꿈이란 부인과 아이들을 모자람 없이 양육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벤처 기업이 즐비한 사무실 촌(村)의 사내들은 넥타이핀과 커프스단추도 갖춰 입었다. 저녁에야 인생이 화려해지는 영준은 멀건 태양 아래의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쌓아 놓은 서류 속 질문에 뇌 안의 지식을 제공하며 짭짤한 수입을 올리다가 종종 개인의 꿈이 고프면 영준의 일터인 카페 K9에 방문한다. 그리고 술집 의자에 앉아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영준을 부러워하며 자조 섞인 찬탄을 보낸다. ‘아, 저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얼마나 꿈결 같은 인생인가!’ 묽은 조명 아래서 건배하며 비틀대지만 영준은 그들이 얼마나 자부심에 취해 있는지 더 잘 알고 있었다.
K9으로 이동하며 영준은 기억을 몇 모금 게워냈다. 삼 년 전에는 영준의 음반을 내겠다는 투자자가 그에게 빚을 떠안기고 사라진 일이 있었다. 아내가 일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라, 영준의 악상은 그로부터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그가 자부하던 재능이 깊고 짙푸른 바다로 잠기기 시작한 계기였다.
길에서 와플 하나를 1000원 주고 사 먹던 영준은 젊은 장사꾼에게 물었다.
“여기 서 있으면 장사 좀 됩니까?”
“평일은 좀 그렇고 주말에만 괜찮은 편이죠.”
“원래 꿈은 뭐에요? 돈 많이 버시는 일?”
젊은 장사꾼은 멋쩍게 웃었다. 그에게는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웃음이 있어서 영준은 마음이 편해졌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 수 있나요? 집안에 돈이나 넉넉하게 벌어다 줘야죠.”
왈칵 부러움이 솟은 영준은 목례를 하고 K9 입구로 서서히 인파와 함께 쓸려갔다. 꽃밭처럼 살갗이 일렁이는 수백 사람을 보노라니 현기증이 일었다. 어딘가 영준은 굳어지기 시작함을 느꼈다. 오늘은 동진에게,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는 고백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래 예술을 버리면 나을지도 모른다. 사람 일은 모르지 않는가? 현재 여기 있는 인파 속에 행복해 보이지 않는 자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반짝이는 K9의 철제 계단을 밟으며 영준은 다짐했다. 2층을 돌아 연주자실로 들어갈 즈음에는 오늘 최선의 연주를 하겠단 생각에 부지런히 손가락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4.
햇와인에 취한 쇼팽인가, 둘러싸인 귀부인의 향기에 취한 리스트인가? 영준은 밤 10시의 K9을 한껏 고조시켰다. 눈치 빠른 매니저는 홀 안 조명의 숨을 낮췄고, 구석 테이블 의자에 스며든 붉은 음영도 곡조에 따라 너울거렸다. 바텐더 앞의 두 남녀가 영준의 피아노 연주로 넋을 잃다가 곡이 무어냐고 궁금해하자 한편에 엎어져 있던 동진이 취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라고. 가사 없이 모음으로 부르는 곡을 피아노로 치는 겁니다.”
감사의 뜻을 블랙 러시안으로 얻어 마신 동진은 뿌연 담배 연기 속의 영준을 기운 어깨로 지켜보다가 자신의 검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오선을 그렸다. 펜이 바삐 움직이다가 다시 멈추고, 잔을 털어 놓은 후 소묘하듯 음표를 나열했다. 연주를 마친 영준이 다가오자 동진은 노트를 덮고 가방을 치웠다. 손가락을 튕겨 바텐더에게 맥주를 내오라는 신호를 보낸 그는 친구를 칭송했다.
“천재성이 넘치는 양반이야, 자넨. 자네의 영혼은 말랑거리고 향기 나는 솜털 이불임을 다시 알았어. 오, 피아노 건반에 음악의 육즙이 넘쳐흐르니 손님들은 기묘한 욕정에 사로 잡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더라니…….”
“적당히 마셔야지. 네가 국문학과는 아니잖아? 언변은 항상 교향곡인 사람이 왜 계속 혼자야?”
둘은 맥주병을 부딪치고 어색한 휴식을 가졌다. 친구라고 해도 셔츠 안 사정이나 호주머니의 결핍을 말하기란 껄끄러운 법이다. 하물며 인생의 중대사였기에 영준은 애꿎은 땅콩만 집어 먹으며 머뭇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선글라스를 착용한 중키에 비대한 남자가 다가 왔다. 볼과 입술에는 웃음이 만개해서 인상은 좋아 보였으나 그는 손바닥을 지나칠 정도로 연신 만지작거렸다.
“역시 소문대로 훌륭하십니다. 송영준 씨, 이동진 씨. 저는 NBE방송국의 프로듀서 양기반이올시다.”
빠르게 영준 머릿속을 지나는 단어가 있었다. 지인 중에 녹음과 작곡을 병행하는 임은현이란 후배가 K9을 방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서 명함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어리둥절해하는 동진과 허리를 편 채로 자신을 맞이하는 영준에게 사내는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다름이 아닙니다. 저는 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고, 잘되면 책임 프로듀서로 발령이 날지 모릅니다. 여기에 온 까닭은 영준 씨와 에……. 동진 씨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격식을 갖추는 자리가 아니라 죄송합니다만, 어른들이시니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혹시 제 후배 임은현이가….”
“아, 맞아요. 우연히 영준 씨 이야기를 듣고 감이 왔어요. ‘이 사람은 뭔가 드라마가 있다!’ 그래서 연락처와 주소를 물어보았습니다. 솔직히 전 지난 두 주일 간 K9에 왔었습니다. 두 분에 대해 알아도 보았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자, 두 분 다 제가 시작할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주시겠습니까?”
“음악 방송입니까?”
뺨이 녹아내리듯 벌게진 동진도 솔깃한지 물었다. 아직까지 선글라스를 벗지 않던 남자는 사회적인 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선글라스를 내려놓았다.
“시퀀스는 이렇습니다. 누구나 해보지 못한 꿈, 선망이 있잖습니까. 첫 회로 저는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시각장애우 소녀와 몹시도 가난한 소녀를 데려올 것입니다. 그들이 소망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재능은 있지만 길이 없어 종국에는 좌절하는 잉여 예술가 지망생이 되진 않을까! 매우 진실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동진이 나직하게 반박했다.
“그런 이야기는 빤하잖습니까. 진행자와 게스트들이 눈물을 짜내려 별짓을 하지요. 시청자에게는 생소하지만 프로 연주자라면 당연한 기량의 연주를 펼치고 감동이었다며 극찬을 해대지 않습니까?”
“아, 동진 씨는 너무 예민하시군요. 더 들어 보아요. 그렇다면 이 나라에 엘리트 유학 코스를 밟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연주하는 실력자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저는 그런 이야기를 캐고 싶습니다. 두 분은 무대에 서고 싶지 않나요? 첫 회의 꿈꾸는 소녀를 빌미로, 그녀들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재야 작곡가, 연주가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필두로 소개하고 싶은 겁니다.”
테이블을 손끝으로 따닥따닥 두들기던 영준은 양 프로듀서의 기획안을 듣곤 가슴에 잔잔한 바람이 일었지만 ‘왜 하필 저희를 찾아오셨습니까?’란 동진의 질문에 같은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방송 비즈니스라는 것이 아까 설명한 대로 음악의 소개 정도로는 파멸의 길이지요. 불쌍한 여자 애 둘……. 어수룩한 실력의 연주자로는 시청자에게 감흥이 없어요.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 씹히든 칭찬받든 꺼리가 있어야지요. 전 두 분을 스카우트하고 싶습니다. 두 분 다 정말 실력이 굉장하시더군요. 어느 날 갑자기 시청자가 놀랄 정도의 실력가로 등장, 이내 밝혀지는 힘든 일상생활……. 그리고 화려하게 변신하는 겁니다. 눈부신 예술가로 도약하는 겁니다! 전 방송을 통하여 여러 후보를 모으겠지만 방송 내의 최종적인 보상을 받을만한 가장 유력한 두 라이벌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대립 각이라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주실 분들을 말이죠. 바로 제 앞에 있는 고수들로.”
한동안 묵묵히 말을 하지 않던 영준이 프로듀서의 말을 막았다.
“거기에는 음악적인 요소란 하나의 양념에 불과한가요? 프로듀서님은 생소한 장르로 시청자를 자극하시고 힘든 형편의 연주자를 파시려는 듯 보입니다만.”
“예. 그렇습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아시겠지요? 일단은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하기에 강렬한 사건과 주제거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두 분은 처음에는 다소 실력을 감추셔야 합니다. 나중에 상대적으로 더 훌륭한 연주를 보여 주셔야 하고요.”
“그럼 영준이나 제가 음악으로는 시청자를 충분히 감동시키진 못한다는 말이군요. 애절한 사연을 까발려야 할 정도니. 저희는 상품이 아닙니다. 미리 감동하란 준비를 시켜야 할 만큼 자신 없는 피아니스트는 더더욱 아닙니다.”
약간은 격앙된 목소리로 동진이 참견했다. 평소에 삐딱하긴 했지만 동진은 자존심이 강한 예술가였다.
“많이 취하셨어요. 동진 씨. 시청률의 묘미를 모르시는군요. 예술을 하는 사람이. 대중은 명석치 않습니다. 두 사람의 어려운 기교 따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화려한 손놀림으로 대중의 귓속에 꿀물을 넣어주세요. 아름답고 빠르기만 하면 됩니다. 어렵나요? 감동의 덫! 그겁니다. 다투고, 싸우고 악다구니 끝에 비치는 눈물. 드러나는 미(美)의 실체에 시청자들은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들이 리모컨 버튼만 누르지 않는다면 두 분은 각자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무슨 삶이냐? 유명해지고 가격이 붙는 삶. 어찌 보면 콩쿠르나 연주회보다 더 세간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란 말입니다.”
악마와 밀크티를 마시는 자 같이 양 프로듀서는 동진과 영준을 설득해냈다. 실패해도 좋으니 한 번만 녹화를 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 대신 세간의 화제가 되기 위하여 괜찮은 자작곡을 한두 편정도 준비하면 좋겠다는 명령을 하고 갔다. 동진과 영준은 새벽까지 술집에 앉아 긴 대화를 나눴다. 사실 영준은 절호의 기회다 싶어 친구와 함께 하고자 했으나 의외로 동진은 순수 예술가로의 고집을 부렸다.
“그러면 두 소녀는 어떻게 되는 거냐. 영준아.”
“계속 무슨 소린데.”
“아니, 파일럿 프로라면서. 소녀 둘은 우리가 얼마나 굉장하게 등장하느냐에 운명이 걸린 셈인가? 한 번 하고 끝나면 끝이잖아.”
“듣자하니 우리 둘을 여자애들에게 일종의 친구 혹은 선생님으로 짝지어줄 셈이더군. 인간극장과 오디션 프로그램, 예능의 합본이었어. 걔들은 음악적으로 성장하고 우리는 무대를 가지며 알려지는 감동 스토리.”
“뭐, 음악적으로? 정상적인 음악 수업 없이 그런 꼼수와 동정으로 음악에 접근하겠다고? 기성 음악인들이 영준이 너와 나를 얼마나 비웃겠어! 학교에 입성하지도 못하고 변변한 강사는커녕 학원 하나 차릴 돈 없는 두 무지렁이가, 심지어 밤에 술집에서 취객 상대로 연주하는 놈들이 재야의 명 피아니스트 행세를 하겠다는 말이야?”
“헛소리 좀 작작해. 이미 우리는 꿈이 없어! 알겠어? 너나 나나 겉으로는 음악 한다면서 독주회 근처에도 못가! 그토록 숭배하던 음악의 순수성, 인성에 잠재된 예술을 획득해서 대가(大家)가 되지도 못했고 난 집에 가서는 형편 어려운 아내와 세간에 답답해하고 넌 혼자 원룸에서 널브러져 있어! 이게 젊은 날 바라던 피아니스트의 시간이야! 꿈은 이미 지워졌어!”
“아니야! 아직까지 건반을 누르면……. 느끼지 않아?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어. 완벽해져서, 완벽해져서 청중을 울리고 웃길 수 있는 그 경지를 가겠다고 했는데 너라는 놈은 왜 세속에 타협하겠단 거야?”
“멍청한 자식, 정신 차려! 현실을 봐! 무얼 이뤘는데! 내가 얼마나 비참한 연기를 마시면서 사는지 알고는 있어? 너도 힘들면서 괜한 자존심 계속 세울 거야!”
싸움은 옥신각신을 넘어 고성으로 이어졌다. 며칠 후에 매니저는 영준에게 따로 말했다. 영준이 동진의 뺨을 치고 안경까지 날려 보냈다고 말이다. 두 사람은 꽤나 취했고 다툼을 기억하지 못했으나 음악에 대한 언쟁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5.
사각사각. 사각거렸다.
오선지 위에서 몸부림치는 펜이었다. 마디만 긋고 며칠이 지나기도 했다. 심상(心象)에는 온통 다가오는 방송 일자뿐이었고, 영준은 작곡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책상에서 서너 시간씩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아무리 궁리해도 머릿속은 빈 깡통이었다.
“영준 씨. 과일 좀 들고 해요.”
아내 수정은 방송출연 이야기를 듣고 매일 밤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영준의 실력이라면 이름을 떨칠 것이라는 부담스런 말을 자꾸 했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영준은 명곡을 탄생시켜야 하는 의무감을 느꼈다.
“당신 친구 동진 씨는 작곡 잘 하고 있대요?”
“걔는 음주를 너무 해. 입술이 까맣다 못해 검어지고, 체력도 급격히 안 좋아. 방송은 하겠다고 약속 넣었으니 지키겠지.”
“걱정 말아요. 멋진 곡만 써 가면 이렇게 굉장한 연주가가 단지 운이 없어서 고생했노라고 방송에서 보듬어 주겠죠. 우리, 조금만 체면 구겨요.”
그녀의 눈망울 속에서 미래가 비춰졌음을 안 영준은 두근거렸다. 마치 처음 예술가와 한 여인으로 만나던 시기로 돌아간 듯싶었다. 아내가 잃었던 행복한 삶이란 그의 책임이라는 것을 영준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
‘잘못된 선택이 아냐. 이게 옳았어. 내가 아닌 다른 송영준으로 한 번 살아 보자.’
문제는 기성곡의 채보(採譜)를 통해서도 쓸모 있는 곡을 구성하지 못했음이었다.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유려하고 각인될 작품이 필수였으나 영준의 달음질하는 심리상태로는 혼미만이 거듭되어 자신감마저 상쇄되고 있었다.
방송 출연 전날까지 제대로 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영준은 동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유는 없었다. 수초처럼 기운 빠진 영준은 더 맥 빠진 동진의 음성이 들리자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명작을 완성했겠지? 천재 송영준은.”
“아니. 대중이 원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순수 예술의 모유를 먹고 자란 터라서 체질이 그리 쉽게 바뀌나. 너야 말로 다 완성했니?”
“후후후. 그렇긴 했는데 영준이 네가 화낼지도 모르겠다. 그만 끊자. 내일 잘해라.”
“잠깐, 제목은 정해놨어? 스타일이 겹치면 안 되잖아?”
“소녀. 대단할 거야.”
전화를 끊은 영준은 혼란스러워졌다. 미친 듯이 서랍 속 습작을 꺼내어 펼쳐 놓고는 훑어보았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기에 조금이라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새벽까지 악보더미 속에서 별미를 채집하던 영준은 낯부끄러워하던 졸작, ‘설산의 수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설산의 수정’ 앞뒤에 낡은 파일로 간직한 습작의 음률을 따서 곡들을 합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는 피아노 위에서 두서없는 서커스를 하겠지만 그는 상관없었다. 영준의 굳어가던 무언가는 더 단단해져서, 그의 입술과 뒷모습에 맴돌았다. 새벽하늘이 포도주색으로 밝아지기까지 그의 부산함은 끝나지 않았다.
6.
방송국에 도착하자 영준은 벌떼처럼 조명이 박힌 무대를 보고 설렜다. 양 프로듀서는 시각장애우 소녀와 남루한 옷차림새의 소녀를 인사시켰다. 방송 작가는 영준을 앉혀놓고 전반적인 흐름을 설명했다. 두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메이저 데뷔를 꿈꾸는 연주자를 소개하다가 영준과 동진이라는 강력한 실력파를 선보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진행자까지 인사를 한 영준은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가방 안에는 아침에야 짜깁기가 끝난 ‘설경’이란 악보가 누워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대기실 문이 덜컥 열리더니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그러더니 한 젊은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영준 형님? 오늘 동진 형은 못 와요. 이것 전해드리랍니다!”
“무슨 사고 났어요? 어제만 해도 괜찮더니!”
“아침에 병원에 실려 갔어요! 친척들에게 긴급 전화를 넣었다고요! 이 악보를 반드시 전하랍니다!”
자초지종을 듣지도 못하고 영준은 사색이 된 채로 무대 뒤로 달려 나갔다. 황망함에 욕지기가 성대 아래까지 올라왔으나 영준은 이내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떠올렸다.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고 동진이 보낸 악보를 끄집어냈다. 표제는 ‘소녀’였다. 악보를 펼쳐보니 작은 쪽지 하나가 영준의 발밑으로 툭 떨어졌고, 그는 급하게 쓰인 글씨체를 주워 읽었다.
‘존경하는 나의 피아니스트 영준. 만약 너의 준비곡이 충분치 않다면 이 곡은 송영준의 이름으로 발표해다오. 그렇지 않더라도 버리지 말고. 나로서는 최선의 곡이야. 그간 숨겨온 비밀이 많아. 간경화란 진단에도 폭음을 했거든. 주말 저녁에는 네 녀석의 연주를 듣는 게 좋았고 말이야. 우린 정말 힘들었지만 서로 기대는 사이였지. 그래, 너나 나나 어려워. 그래도 넌 순수한 예술가인 송영준이고 내 자랑이었지. 아, 지난 몇 주는 네가 과연 영준일까란 의심도 들었어. 그런데 말이지. 넌 가장 힘든 내 인생 시기의 친구였어. 그런 너를 세속적이라고 비난했지. 미안해, 친구. 난 쓰레기야. 이혼한 그녀가 재혼한다더군. 부유한 내 지인과 말이야. 그래서 당분간 쉬고 싶다. 조금 오래토록, 아주 깊은 땅속 근처에서라도. 참. 두 아이를 부탁 하네. 난 믿어.’
두 손을 얼굴에 모으고 영준은 가만있었다. 스탠바이 하라는 무대의 목소리도 여름 나비처럼 무음으로 지워졌다. 주변의 소음은 둥실둥실 떠가고 고요한 시간만이 순백의 나체로 누워 있자 영준은 무대로 올라섰다. 방청석의 환호와 요란한 공기를 밟으며 걸어 나온 영준에게는 오히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홍조를 띈 그의 표정은 금요일 밤 저녁, K9의 그것이었다.
‘소녀’를 펼치고 영준은 촬영 중인 객석과 두 소녀를 보았다. 동시에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음정을 두들기니 삽시간에 벚꽃과 잔디가 펼쳐졌다. 소리의 조화를 바람씨로 날리며 영준은 한 남자의 인생을 손아귀에서 당기고 쥐었다. 깨끗한 소녀의 마음에 우연히 적셔온 음악 소리. 아름다움을 발견한 기쁨에 피아노를 사랑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며 인생의 질곡을 헤엄친다. 어린 날의 그 음악을 찾아 오르페우스가 되지만 에우리디케를 빼앗김은 어쩔 수 없었다. 영준은 피아노를 치면서 ‘소녀’는 영준의 장기인 표현력을 사용하는 곡이란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차츰 그의 마음속에 동진의 기운 어깨가 떠올랐다. 천상의 곡조를 재현한 피아니스트이면서 현실이라는 명부(冥府)의 삶을 나눈 친구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작품이었다.
무대 위에 영롱한 물방울이 흘렀다. 피아노 밑으로 여신의 감탄이 울리고 천장에서부터 우주의 숨결이 오로라처럼 춤을 추었다. 순수해서 얽매이지 않고, 또 순수의 경지에 다가선 운지가 건반을 다스렸다. 영준이 얼핏 본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진행자도 게스트도, 방청객들도 이유 모를 감격에 샘물이 맺혀 있었다. 멀리 서 있던 양 프로듀서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가슴이 한참 뜨거워질 무렵에 영준은 곡을 마쳤다. 느린 필름으로 시야의 것들이 움직였다. 두 손을 빠르게 마주치며 외쳐 대는 사람들. 놀라운 시선으로 영준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영준은 아직 순수의 지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소녀’ 악보를 가지러 느릿하게 피아노로 다가섰다. 구깃구깃한 악보를 지니고 나오면서 그는 뒷부분에 뭔가 적혀 있음을 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 찬란한 피아니스트 송영준을 떠올리며’
‘컥.’하고 K9의 금요일 피아니스트 송영준은 영혼의 외마디 줄기를 토해냈다. 명곡의 탄생이 그를 울리는 것인지, 아니면 살아오면서 쌓인 찌꺼기를 내뱉는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여러 사람이 무대에 난입해 그와 악수를 청할 무렵이 되어야 영준은 비로소 타인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진정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어떻게 지금껏 버텨 오셨습니까? 왜 인간은 음악에 감동할까요?”
흐르는 눈물 속에서도 영준은 앞에 놓인 마이크를 향해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제야 방송 녹화라는 부담감에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지켜보는 모두가 기대와 확신에 차서 영준을 보고 있었다. 주저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
“제 꿈인 음악은 행복을 주니까요.”
그의 생애를 담은 말이었다.
이호형 수상 소감
처음 제가 펜을 든 순간은 불을 끈 방 안에서 빈 노트를 펼친 채였습니다. 힘든 마음을 녹인 먹물에서 하나 둘씩 적어 나가며 위안을 얻곤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글이란 정녕 혼자일 때 조우할 수 있는 참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은 행위에서 시작된 문학에의 막연한 동경이 오늘의 기쁜 소식으로 이르게 되니, 자연스레 되돌아보는 지난 시간이란 아득하기 그지없네요.
부끄러운 작품이지만 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바를 옮기려 했습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꿈에 도전하려 합니다만, 대개의 다수는 쓰디쓴 현실에 그렇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잊자니 아름답고, 이루자니 너무 힘든 그 길은 제가 걷는 모습이기도 하기에 아직 부족한 붓을 겁 없이 들게 되었습니다.
심사 위원들께서는 저에게 수상이라는 책임감을 안겨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어깨에 짐이 있으면 더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글에 대해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미래에는 더 충실한 글쓰기를 하리라 다짐합니다.
저를 이끌어주신 심사위원분들과 계간웹북의 모든 임원, 회원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 이지형. 그리고 존재만으로 든든한, 예술가로서의 모델인 장인어른과 저를 아껴주시는 장모님과 처남 김호일. 부족한 남편을 언제나 묵묵히 지켜보는 아내와 글 쓰는 친구를 둔 죄로 문학적 잔소리를 듣는 친구들. 마지막으로 항상 기다리시고 안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호형 1977년 경기 평택 출생.
[수필 부문 당선]
송문용- 나무도 보고 숲도 보고
우리 직장 부지에 딸린 300여 평 규모의 밭이 있고 희망하는 직원들 몇 명이 그 밭을 적당히 나누어 농사를 지었다. 밭두둑 주변 뚝방에 구덩이 몇 개를 추가 확보하여 호박을 심었고 제법 재미있게 호박을 땄었다. 그런데 금년엔 꾸물거리며 차일피일 미루다 어느 날 큰 맘 먹고 내가 짓던 밭을 나가보니 이미 작년의 호박 심었던 자리에 다른 직원이 씨를 뿌리고 비닐을 덮어 놓았다. 누군가가 선점해 버린 것이다. 조금은 화가 나려고도 했으며, 내가 심었던 내 자리이니 내놓으라고 따질까 하다가,
‘그래, 게으름의 대가이지, 다른 데 찾아보자.’
마음을 비우고 점령당한 땅에 대해선 잊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건 그곳에 심으려고 이미 사온 호박 모종 4포기를 어디에 심느냐 하는 것이었다. 많지도 않은 4포기를…….
‘그래, 찾아보자, 찾는 자는 찾게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고 찾았더니 나왔다. 시야를 높이 그리고 조금 멀리 향하니 제법 넓은 땅이 보였다. 동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직장 울타리 둘레-어느 분이 거기도 이미 호박 모종을 몇 개 구덩이에 심은 곳이었지만 남은 부분이 적지 않은 땅이었고 그 땅이 확 눈에 들어 왔다.
‘잘 됐다. 여기면 호박 모종 4~5개는 심고도 남을 만하다.’
그뿐이랴. 죽 훑어보고 나가니 훨씬 더 넓고 개척할 만한 둑이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 둑이 농사를 지어 무너질 염려라도 있다면 안 되겠으나 거기에 농사를 짓는다하여 문제될 곳은 아니었다.
청사 둘레 둑이 잡풀로 방치, 게다가 한쪽 면은 길 건너 반대쪽 둑이 비에 무너져 내린 흙을 걷어 올린 것이라서 질이 좋은 밭이 된 상황이었다. 거기에 호박 구덩이를 작년만큼 확보하고도 땅이 많이 남아 옥수수를 100여 포기 심고, 고구마, 고추, 토마토도 각각 수십 포기씩 심었다. 어찌 적은 땅이냐? 감격이요, 감동이다.
생각 한 번 새롭게 했더니 상황이 이리도 달라졌다. 만약 내가 농사짓던 땅이니 내놓으라고 언쟁을 했다고 하자. 언쟁까지 가진 않더라도 그런 얘기를 하여 호박 구덩이 너덧 개를 차지했다 손 치자. 대할 때마다 동직원 간에 두고두고 불편한 마음이 교차될 게 아닌가? 그런데 잘 참고 생각 한 번 바꾸니 이런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좋아한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긍정의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긍정의 일이 일어나고 부정적 언사를 쓰는 사람에겐 부정적인 결과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만 인생이 피곤하고 지치며 짜증이 난다고 생각하는 이에겐 그런 상황으로 내몰려 실제 그런 고통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지침이 될 이야기이다. 호박구덩이를 찾는 이런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 되겠다.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닌가? 근시안적으로 살지 말고 거시적 안목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도 이런 상황이 일부 설명해 준다.
그렇다. 세상은 광활하여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할 땅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우리의 수준 높고 갖춰진 고기능 고지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고학력자 인플레에 신음하고 있다. 너무 많은 고학력자가 좁은 국내에서만 아웅다웅 다투고 있다. 나가자, 앞으로! 광활한 땅의 어려운 나라들이 우릴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들의 비옥한 땅을 개발해 주자. 비록 버려진 황무지이나 금은보화가 가득 묻혀진 보배로운 땅임을 일깨워 주자. 그러한 값진 땅의 국민들이 우리의 발전된 기술과 예술, 의술, 교육, 잘 사는 비법을 배우고자 목말라하고 있다. 몽골과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아프리카와 남미, 북극과 남극대륙 들이……. 어찌 대륙뿐이랴! 거기에 부속된 넓디넓은 대양들도 무한한 개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중국은 그 큰 땅덩이를 두고도 외국에서 각종 광물·에너지·식량 자원 확보에 힘쓰고 있다.
우리는 좁은 국토임으로 그러한 노력이 일부 진행 중이지만 더욱 활성화해야 하겠고, 양질의 인력자원을 수출하는 일에도 더 힘써야 하겠다.
합창단 발표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관람석 맨 앞 잘 보이는 자리에서 여러 단의 합창단 경연을 잘 보고 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합창단을 이끌고 무대에 나오는 지휘자가 단원을 정렬시킨 후 차분히 뒤로 돌아서서 청중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되돌아서서 피아노 연주자에게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단원의 합창 지휘를 함이 통상적 지휘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지휘하는 지도자들을 보면 여러 가지 양태를 띠고 있었다. 자유스런 자세로 단원에게 맡겨 놓았는지는 모르나 출연한 단원들의 자세 하나가 통일되지 못한 단이 몇 개 있었고 어떤 단은 지휘자가 무대에 서서 긴장한 나머지 청중 및 심사 위원에게 인사하는 것조차 잊고서 지휘를 시작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한 후 시작하기도 하였다. 개 중에는 침착하게 입장하여 단원을 정렬시키고 뒤로 절도 있게 돌아 청중을 똑바로 응시한 후 침착히 인사를 드려 박수를 받고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음악당 2층 좌석의 청중까지도 여유 있게 훑어 본 후 열정을 다해 지휘하는 모습을 보이는 분도 있었다. 리듬과 멜로디가 정확하고 단원들의 발성도 힘차고 아름다워 단연 다른 팀보다 돋보였다. 합창경연대회라면 이 정도는 여유 있게 다듬어진 팀이 입상할 건 당연하다. 참으로 시원하고 훌륭하였다.
여기서 느끼는 중요 내용은 이렇다. 합창 지휘를 하고 있는 지휘자가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합창단의 박자, 음정, 발성 등에 온통 매달려 지도하다 보니 큰 것을 놓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 단원의 통일된 바른 자세와 지휘자의 인사 자세, 지휘 모습, 이런 것들이 합창경연대회의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음정, 박자 정확한 것보다 못지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큰 것에 신경 쓰지 못함은 세세한 쪽에만 온통 마음을 기울이다 보니 조금만 챙기면 얻을 수 있는 큰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었다.
호박구덩이 몇 개 팔 자리가 없어 고심하다가 거시적 안목으로 살피니 넓은 땅을 쓰게 된 사례나, 합창경연대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례들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인생을 살아감에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우를 범치 않도록 노력하자고.
송문용 수상소감
-무지갯빛 선물을 받고-
“계간웹북의 수필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한 통의 문자 메시지는 일곱 색깔 고운 무지개가 제 인생행로에 떠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생애에 최초의 일이며 참으로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앞으로 글쓰기에 더 노력해 보라는 권유의 메시지로 알고 배전의 노력으로 아름다운 글들을 지어보도록 힘쓰겠습니다. 이를 통해 제 자신의 심신을 정화하고 안정시키며,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작은 감격이라도 놓치지 않고 문자화 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생의 작은 기쁨과 깨달음을 같이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 그것도 보람된 일을 이루었다는 점, 누군가에게 새로운 소망과 희망을 심어줄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 평생에 걸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새로운 문학세계의 가족들과 교분을 나눌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 인생을 새롭게 반추하며 조명해 보게 되었다는 점, 새로운 기쁨과 보람을 누릴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 글을 쓸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는 점 - 이런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칠색 무지갯빛 선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글이란 것을 본격적으로 쓸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는 좋은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계간웹북 이용환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 봐야 한다는 고전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많이 읽은 바도 없고, 많이 생각해 본 바도 없으며 더구나 많이 써 보진 더욱 못한 형편이기에 더욱 분발하여 많은 독서, 많은 심사숙고, 다작해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하게 됩니다. 부족한 사람을 문학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계간웹북 관계자 여러분께 재삼 깊은 감사를 드리며 저로 하여금 창작의 세계로 확실히 안내해 준 계간웹북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송문용 (현) 경기도 화성오산 교육지원청 교육장
[동화 부문 당선]
조상용- 안드로메다 74번지
안드로메다 74번지. 처음엔 한두 사람이 며칠에 한 번씩 쓰레기를 버리고 가더니, 점점 많은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 밤마다 하나 둘씩 몰래 쓰레기를 가져다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 가면서 힘센이네 마을은 악취가 진동하고 벌레가 바글바글한 땅으로 변해갔다. 쓰레기가 엄청나게 큰 산을 이루자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땅이 되었다. 그것으로 인해 힘센이네 가족은 제일 골칫거리였고 위험했던 ‘사람들 피해 다니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악취가 나고 땅이 오염되어가는 것이 조금 문제가 되긴 했지만 벌레가 늘어나는 바람에 먹이가 풍부해져서 힘센이네가 살기에는 딱 좋은 천국이 되었다. 힘들여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풍부했고, 추운 겨울에도 먹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어느 날, 조용하던 마을에 사람들 몇 명이 왔다 갔다 하며 분주히 다니더니 힘센이네 마을을 빙 둘러가며 붉은 말뚝과 파랗고 빨간 깃발을 꽂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이번엔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하얀 마스크를 쓰고 빨간 장갑을 끼더니 쓰레기더미를 치우기 시작했다. 천국같이 평화롭기만 할 것 같았던 마을이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인해 시끄러워지자 힘센이네 가족들은 사람들을 피해 집에 들어가 숨어서 지내거나,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안나푸르나라고 부르는 높은 흙더미에 올라가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시끄럽고 분주한 며칠이 지나자 커다란 산을 만들었던 쓰레기가 말끔하게 치워졌다. 쓰레기더미가 사라지자 악취도 함께 사라졌는데, 문제는 악취와 함께 힘센이네 가족의 먹잇감도 사라진 것이었다. 오랫동안 풍요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힘센이네 가족들은 사냥하는 법도 다 잊어버렸는데 먹잇감이 사라지는 게 불안하기만 했다.
“마을이 깨끗해져서 우리가 예전처럼 힘들게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누가 좋은 생각이 없어?”
보름달이 뜨는 날 가족회의가 열렸다.
“예전처럼 어떻게 살아? 난 지긋지긋해!”
“난 이제 애벌레도 한 마리 잡지 못할 것 같은데.”
“맞아! 나도 지금이 좋아.”
“이사를 하든가 해야 하지 않을까?”
“대가족이 이사를 할 만한 땅이 있을까?”
“지켜야지. 우리 땅인데. 우리가 왜 이사를 가?”
“맞아. 여긴 오래전부터 우리 땅이었어. 지키자구!”
가족회의에서는 정든 땅을 버리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이사하자는 쪽과 우리 마을이니 우리가 지키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그렇게 서로 자기 말만 하면서 하룻밤이 지나가자 목소리가 큰 힘센이의 99번째 형이 참다못해 이사하자고 박박 우겼고, 밤을 꼬박 새운 회의에 지친 가족들은 눈치만 보다가 이사를 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힘이 세고 빠른 가족들 몇이 이사할 마을을 알아보러 떠났고, 남은 가족들은 해가 뜨면 사람들을 피해 집에 숨어 있거나 안나푸르나에 올라가서 이사할 곳을 알아보러 떠난 가족을 기다렸다.
보름달이 새로 뜰 무렵 이사 갈 마을을 알아보러 떠났던 가족들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새로 이사 갈 마을에 대한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던 가족들은 돌아온 가족을 보자마자 궁금한 것을 물었다.
“형. 여기서 멀어?”
힘센이가 지쳐서 누워있는 형에게 달려들며 물었다. 힘센이의 형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날 한 달 전과 같이 가족회의가 열렸다.
“그동안 주변을 다 알아보고 다녔지만 모두 같은 환경이라 이곳보다 좋은 마을을 찾지 못했어요.”
“그럼 어쩐다냐. 여길 지켜야 하는 거야?”
“지킬 수 있을까?”
“지켜야지. 지키자고.”
“그런데 어떻게 지키지?”
“바보야. 예전처럼 만들면 되지. 쓰레기를 주워다가 산을 만들면 되지 않겠어?”
“맞다. 그러자.”
회의 내내 처음 회의에서 이사를 하자며 큰 소리를 냈던 힘센이의 99번째 형은 아무 말도 없었고, 가족들은 마을을 지키자며 각자 의견을 냈다.
“어? 저기. 저거 뭐지? 형. 이상한 게 달려오고 있어.”
안나푸르나에서 볕을 쬐며 쓰레기를 주우러 떠난 가족들을 기다리던 힘센이가 겁에 질려 집으로 뛰어들어가며 소리쳤다. 집에 남아서 집을 지키던 가족들이 힘센이의 소리를 듣고 궁금해서 모두 뛰어나왔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시무시한 것이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커다란 것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땅을 파고, 짓밟았다. 무서운 가족들은 부리나케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날 밤, 쓰레기를 주우러 나갔던 가족들이 돌아오자 또다시 가족회의가 열렸다.
“그게 뭐야? 난 처음 보는 거라서.”
“색깔도 요상스러운 게……. 그걸 주황색이라고 하는 건가?”
“사마귀처럼 생긴 것이 힘은 무척 세던데. 혹시 이름이 뭔지 알아?”
“이름 모르면 그냥 왕사마귀라고 불러요.”
아무도 낮에 본 커다란 것에 대해 대답을 못하자 힘센이가 왕사마귀라고 부르자며 끼어들었다. 그 커다란 것을 왕사마귀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결정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날이 밝자마자 힘센이네 가족들은 왕 사마귀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안나푸르나에 올라갔다. 주황색 팔에 굴삭기라는 문신을 새긴 왕사마귀는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지나간 자리마다 움푹하게 흙을 파냈다.
“와. 저만큼씩 파면 우리 마을 하나는 한 번에 만들겠다.”
“와. 왕사마귀 대단한데. 애벌레 하나 주고 우리 편으로 만들까?”
“애벌레 하나로 성이 찰까? 저렇게 덩치가 큰데. 애벌레 100개는 줘야 할걸.”
모두 왕사마귀가 하는 일을 보고 감탄만 할 뿐, 왕사마귀가 점점 마을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왕사마귀는 자기 키보다 더 깊게 땅을 파헤쳐 내며 조금씩 힘센이네 마을 쪽으로 다가왔다. 파헤쳐 낸 흙은 왕사마귀보다 더 크고 빠른 왕애벌레가 몸에 가득 담고 어디론가 분주히 다녔다. 점점 마을로 가까워져 오는 왕사마귀의 소리를 듣고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가족들이 뛰어나왔다.
“다들 뭣 하는 거야? 지금 왕사마귀가 마을을 공격하러 오잖아.”
놀라서 달려 나온 가족들이 구경만 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소리쳤다. 그제야 왕사마귀가 마을 쪽으로 가까워진 것을 안 가족들이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너무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몇은 안나푸르나에서 떨어지기도 했고, 몇은 다리를 다치기도 했다. 다시 가족회의가 열렸고, 왕사마귀를 무찌르기 위해 특공대를 만들기로 했다.
특공대로 뽑힌 가족들은 안나푸르나 뒤에 숨어서 해가 지길 기다렸다가 해가 지고 왕사마귀가 움직이는 것을 멈추자 주위를 둥글게 에워쌌다.
“왕사마귀야. 우리가 누군지 아냐?”
목소리가 큰 힘센이의 99번째 형이 소리쳤지만 왕사마귀는 대답이 없었다.
“야! 이놈 왕사마귀. 날 무시하는 거냐?”
또 소리쳤지만 왕사마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힘센이의 99번째 형이 달려들었고, 여럿이 달려나와 말렸다.
“좀 성질 죽이고, 일단 대화로 풀어보자.”
“저놈이 내 말을 무시하잖아. 무슨 대화가 필요해.”
“자는 거 아닐까? 내가 깨워볼까?”
가족 몇이 왕사마귀를 깨우려고 툭툭 건드렸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자 물러났다.
“말로 해선 안 되겠는 걸. 우리가 누군지 보여주자. 공격!”
한참동안 왕사마귀에게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꾸가 없자 참다못한 특공대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물어뜯고, 꼬집고, 찌르고, 머리로 받고 했지만, 왕사마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왕사마귀는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공격하는 가족들이 많이 다치자 특공대는 후퇴를 했다.
다음날 아침 정찰을 하고 있던 가족이 왕사마귀가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있어야만 움직인다는 걸 알아냈다.
“저 사람만 없으면 왕사마귀가 마을을 공격 못할 거야.”
“맞아. 사람을 공격하자. 근데 사람은 너무 무서운데.”
“우리 마을이 다 부서지게 생겼는데 사람이 무섭다고 도망갈 거야?”
“맞아. 이사 갈 데도 없잖아. 공격하자.”
특공대는 이번엔 사람을 공격하기로 했다. 점심때가 되자 왕사마귀가 멈추었고, 사람이 왕사마귀의 등에서 내리자 특공대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옷 속으로 파고 들어가 물어뜯고, 꼬집자 사람은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심하게 발버둥치는 바람에 떨어져서 다친 가족들이 많았지만, 왕사마귀보다 사람은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서 도망가는 사람을 보면서 가족들은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기쁨도 잠시, 도망갔던 사람이 하얀 옷을 입고 등에 달팽이 껍질 같은 것을 붙이고 나타나더니 희뿌연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물에선 상한 우유 같은 냄새가 났다.
“아휴. 개미 새끼들이 왜 이리 많아.”
희뿌연 물이 바람에 날려 마을 곳곳에 퍼졌다. 모여 있던 가족들이 하나둘씩 쓰러졌고, 놀란 가족들은 급하게 집으로 숨어들었다. 잠시 후, 왕사마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은 가족이 죽고 다치자 이런 방법으론 마을도 지키지 못하고 가족도 지키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힘센이네 할아버지는 그날 밤 여왕을 찾아갔다.
“여왕님. 힘센 왕 사마귀가 마을을 공격하는 바람에 가족들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땅속 아주 깊은 곳에서도 세상일을 잘 알고 있다는 여왕에게 힘센이네 할아버지는 그동안의 일을 차근차근 자세하게 설명했다.
“우리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봐라.”
여왕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하더니 짧은 말만 하고 힘센이네 할아버지를 돌려보냈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할아버지는 똑같은 말을 힘센이네 아버지에게 했다.
“애비야! 우리가 잘하는 게 뭐냐?”
“땅 파는 것 아닙니까?”
“음. 그렇구나! 그거구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이를 먹으면 머리가 흐려지는 게 맞는가 보다. 역시 여왕님은 대단하셔.”
“아버지. 무슨 말씀이신지…….”
“땅 파서 왕 사마귀 묻어버리자.”
힘센이네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다들 저녁 먹고 삽 한 자루씩 챙겨가지고 달이 뜨면 안나푸르나 앞으로 모여라.”
달이 뜨자 삽을 하나씩 손에 든 가족들이 일제히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삽이 제 키보다 더 큰 힘센이의 막냇동생도 삽을 질질 끌면서 안나푸르나 앞에 섰다.
“날이 밝기 전에 왕사마귀를 묻어버릴 것이다.”
힘센이네 아버지가 가족들을 향해 소리치고 나서 삽을 높이 치켜들자 모두 삽을 들고 환호하며 왕사마귀에게 달려들었다. 가족 모두가 한시도 쉬지 않고 땅을 파냈고, 새벽닭이 울 때쯤 왕사마귀가 기우뚱하더니 고꾸라졌다. 주황색 팔을 하늘 높이 쳐들고 누워있는 왕사마귀의 모습을 보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승리의 기쁨에 들뜬 힘센이네 가족들은 피곤한 것도 잊은 채 해가 뜰 때까지 잔치를 벌이다가 잠이 들었다. 밤을 새워가며 힘든 일을 한 가족들은 오랜만에 행복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피곤함에 취해 곯아떨어진 힘센이네 가족을 시끄러운 소리가 깨웠다. 일제히 박으로 나온 가족들은 왕사마귀보다 몇 배는 더 큰 왕사마귀가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누워있는 왕사마귀를 번쩍 들어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이 덜 깬 가족들은 꿈을 꾸는 것인가 싶어서 볼을 꼬집기도 했고,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해 쩔쩔매기도 했다.
지난밤에 힘든 일을 하고 몸져누운 힘센이네 할아버지가 다시 일어선 왕사마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참을 고심하더니 다시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이사 가자. 정든 땅에 살면 좋겠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너무 많은 걸 잃었어. 내가 늙어서 그런지 더 잃을까 봐 겁이 난다. 어디든 정 붙이고 살면 내 땅이 되는 거니까. 이사하자.”
힘센이네 할아버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사를 하여야 한다는 말에 가족들 모두 눈물을 흘렸다. 가족들 모두가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슬퍼했다.
힘센이네 가족이 모두 떠나고 난 뒤, 안드로메다 74번지에는 하늘 높이 치솟은 벌집이 세워졌다. 벌도 아닌 사람들이 벌처럼 큰 벌집에서 살았다.
조상용-수상소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가 모호했다.
며칠 동안 ‘비가 온다.’와 ‘비가 내린다.’를 두고 고민했다.
또 며칠은 ‘비가 그쳤다.’와 ‘비가 멎었다.’를 두고 고민했다.
한 문장을 만드는데 그렇게 며칠 동안과 또 며칠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는 내리고, 멎기를 수시로 반복했다.
장마였다.
수시로 불어난 물은 둑을 허물었다.
범람이었다.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필요했다.
한 가지 더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게 무척 기쁘다.
딱 일 년만 더 무엇이든 써 보아야겠다고 했을 때
내가 사는 게 그저 다른 것일 뿐,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준 모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동화라고 쓴 글이 아이들에게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적는다.
조상용(趙相龍) 1974년 충북 단양 출생.
2004년 《월간모던포엠》시 등단. 시집 『민들레 사랑』, 『선물』, 『인연』
[출처] 카페 대문 (시산문(詩散門)) |작성자 헌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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