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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김종부 감독. K3 챌리저스리그에서 화성FC를 우승시킨 감독으로, 최근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최우수지도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사진=조석연 PD 헤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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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멕시코 세계 청소년(U-20) 축구대회. 4000만 국민들은 멕시코 고원을 달리는 어린 선수들의 경기에 열광했고,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대표팀은 4강 신화를 이루며 금의환향했다. 당시 멕시코 4강 신화의 주역은 주전 공격수로 뛰며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던 김종부였다.
183cm 당당한 체구의 대형 센터포워드 김종부는 대회 이후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을 재목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986년 고려대 4학년 재학 중 대우와 현대의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리며 김종부의 축구 인생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 최고의 공격수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못했고, 프로 입단 후에도 부상과 부진으로 쓸쓸히 은퇴 수순을 밟았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학원 축구와 실업팀을 전전하며 프로 지도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가 2014년 12월 21일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한 2014 KFA 어워드 시상식에서 남자 일반부 최우수지도자상을 수상했다. 2년 전 창단된 경기도 화성시 시민축구단 ‘화성FC’가 챌린저스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비운의 스타’란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김종부 감독(50)을 만나 그동안 그가 살아온 녹록치 않았던 축구인생을 들어봤다.
#1. 창단 2년 만에 K3 챌린저스리그 우승 차지
14년 전 <일요신문>에서 ‘그 사람 지금은’이란 코너를 진행할 때 당시 거제고 감독이었던 김종부 감독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여전히 지도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나도 그 기억이 난다. 멀리 거제도까지 오셔서 날 인터뷰하셨던 장면들이. 서로 열심히 살다 보니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 아닌가(웃음).”
화성FC를 이끌고 계신지를 얼마 전에 알았다. 챌린저스리그 우승 기사들 속에 김 감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3부리그인 챌린저스리그는 언론의 관심이 거의 없는 편이다. 챙겨서 보지 않으면 우리가 무슨 축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화성 FC는 창단한 지 2년 된 팀이다. 창단 첫 해인 지난 시즌(2013년) 아깝게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지만 올시즌(2014년) 챌린저스리그 통합 2위에 올라 챔피언결정전에서 포천시민축구단을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창단 2년 만에 우승까지 거뒀다는 게 놀랍다.
“화성시의 뒷받침과 선수들이 노력한 결과이다. 현재 챌린저스리그에는 18개 팀이 있다. 그 팀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거니까 칭찬을 받을 만하지만, 내가 이 팀을 맡은 이유가 우승만이 아닌 화성시에 유소년 축구를 활성화시키고 초•중•고 축구부를 부흥시키는 등 전체적인 축구 붐 조성을 위해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그 길을 가기 위한 걸음마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선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순수 실업팀 선수가 30%, 2부리그에서 내려온 선수가 40%, 그리고 프로에서 뛰다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중인 선수들이 20%, 나머지 일반 선수가 10% 정도 된다.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선수는 2부리그 팀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한다. 우승도 기쁘지만, 좋은 팀으로 ‘승진’해서 올라가는 선수들이 나타날 때 표현 못할 기쁨을 맛본다.”
(K3 챌린저스리그는 순수 아마추어를 표방하는 풀뿌리 축구로 2007년 창설됐다. 대부분 소규모 자본으로 창단돼 연봉 없이 승리 수당으로 평균 15만~20만 원 정도를 받는 게 전부라 공익근무를 하면서 프로 대신 뛰는 일부 선수들을 빼면 직업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단 버스나 숙소 등이 제대로 준비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축구할 수 있는 환경이 열악한 편인가.
“선수단 전용 버스는 없지만, 경기 때는 관광버스를 빌려 이동한다. 훈련할 때는 봉고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시에서 아파트 두 채를 선수단 숙소로 지원해주셨다. 다른 팀에 비해선 환경이 좋은 편이다. 다른 팀은 경기장에도 선수들이 각자 알아서 개별적으로 오기 때문에 유니폼 갈아입기 전에는 선수와 관중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운동 환경은 아마추어이지만, 실력은 뛰어나다. 선수 구성이 다양하고, 프로 경험을 한 선수들이 뛰고 있어 경기 내용이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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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장마차 운영하는 축구팀 감독
거제고 감독을 시작으로 많은 팀을 옮겨 다녔다. 동의대-중동고-양주시민축구단, 그리고 지금 화성 FC 감독을 맡고 있는데, 선수시절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지도자 생활이.
“뭐, 선수 때도 멕시코 청소년대회를 제외하곤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이번 우승으로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는데, 순간 뭉클한 감동과 함께 내가 걸어온 시간들이 동시에 떠오르더라. 주위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학원 축구에 머물다보니 정작 프로에 갈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열심히 살았다. 거제고에서는 6년 동안 우승 1회, 준우승 4회를 이뤘고, 대학축구의 최하위권에 머물렀던 동의대 감독으로 부임 후에는 1년 반 만에 8강에 진출, 준우승까지 올라갔다. 양주시민축구단은 친구가 그 팀의 단장이라 도움을 주는 차원이었다. 그 다음 맡은 팀이 지금의 화성FC이다.”
인터뷰 시작하기 전에 부업을 한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어떤 일을 하는 건가.
“아는 선배와 화성에서 통영 장어 포장마차를 하고 있다. 리어카 포차가 아닌 실내포장마차 같은 형태이다. 내 고향이 통영이라 자연산 장어를 통영에서 직접 공수해온다. 최근에 오픈을 했기 때문에 아직 입소문이 나진 않았다. 그래도 장어가 맛있다며 찾는 분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지금이 비시즌 중이라 가게에 나가 청소, 설거지 등을 하면서 일을 돕지만, 시즌 중에는 선배가 전적으로 맡아 운영할 것이다. 축구 감독하면서도 입술이 불어 튼 적이 없는데, 개업 준비하면서 입술이 불어 틀 정도로 힘든 일이 많았다. 종종 선수들 영양 보충도 시킬 겸, 집에 생활비도 갖다 줄 겸 해서 시작했다.”
그래도 ‘김종부’하면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축구인들 사이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괜찮은 건가.
“‘김종부’란 이름을 지키려고 이 일을 시작했다. 생활이 어려우면 지도자들이 다른 길로 새기 마련이다. 학부모에게 손을 내밀고, 선수를 갖고 장사를 한다.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기 때문에, 나로선 그들을 뭐라 할 수 없다. 그런 ‘막장’을 가지 않으려고 이 일을 하게 됐다. 창피하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가 창피하나. 도둑질하는 것도 아닌데. 40대 후반부터 축구인생을 다시 사는 느낌이다.”
지도자 생활이 ‘배고픈 직업’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고선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프로팀 감독이 아니고선 일반인보다 더 적은 보수를 받고 일한다. 학원축구가 아닌 일찌감치 성인축구로 눈을 돌렸으면 경제적인 여건은 더 좋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학원축구가 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은퇴 후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잘린 적도 있고, 내 발로 나온 적도 있지만, 바로 다음 팀으로 연결이 됐다. 내가 실력이 형편없는 지도자는 아닌 모양이다(웃음).”
의리 때문에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던 대우행. 그로 인해 김종부 감독은 고려대에서 제명 당한 것은 물론 선수 생활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한국 축구사에 남을 만한 스카우트 파동이었다.(사진=조석연 PD 헤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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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고려대 스카우트 파동
고려대 4학년 때 벌어진 스카우트 파동이 김종부 축구 인생을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나. 만약 예정대로 현대에 입단을 했었다면 아무 문제없이 순항했을 텐데 하는 생각 말이다.
“그놈의 정이 뭔지…. 당시 현대와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 내 대리인이었던 매형이었다. 물론 나도 매형이 도장 찍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대우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고려대 출신인 이차만 감독님이 대우 코치로 계셨고, 평소 많은 도움을 받은 터라 의리를 배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선 현대로 가길 바랐다. 현대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날 영입하겠다고 나섰고 당시 계약과 관련된 법률 문제에 지식이 없던 우리로선 매형이 도장을 찍은 그 계약서가 나중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현대 입장에선 당연히 계약이 된 걸로 알고 있다가 내가 대우로 가겠다고 하니까 난리가 난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고려대 축구부에서 제명까지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포항제철에 입단했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그 후 대우-일화-대우를 거쳐 은퇴 수순을 밟았다.”
(1985년부터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렸던 김종부는 1987년 한·일 프로 친선전에서 대우 소속으로 뛰었다는 이유로 1년간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다. 그 일로 1년 넘게 무적 선수로 지내면서 또다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1988년 1월 포항에 입단했다가 1990년 ‘감격스런’ 대우행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미 나이도 먹은 데다 몸도 이전같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95년 은퇴했다. 프로 통산 성적이 81경기 6득점 8도움. 한때 ‘축구 천재’로 불린 김종부로선 프로에서의 성적이 창피할 따름이었다.)
그 일 이후로 김종부 하면 ‘비운의 스타’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소문도 무성했다. 정작 사고 한 번 안 친 내게 술만 먹고 돌아다닌다느니, 축구를 포기했다느니, 잠적했다느니 하면서 말들이 많았다. 모교인 거제고 코치로 들어갔다가 일찌감치 감독 생활을 하면서 많은 걸 내려놨다. 언론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더라. 지도자 생활하는 동안 또 다른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당시의 스카우트 파동은 잊고 살았다. ‘한때 잘나갔던 김종부’란 생각도 버렸다. 옛날 생각을 떠올리면 내 자신이 자꾸 외골수가 되는 듯 했다.”
잠시 83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 당시 한국은 준결승전에서 브라질과 맞붙었다. 김종부 감독은 전반전에 첫 골을 터트렸고, 이후 두 골을 허용하면서 역전패를 당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브라질에는 프로에서 뛰는 선수가 8명이나 됐고, 그중에는 ‘브라질의 전설’로 꼽히는 베베토도 포함돼 있었다고 하더라.
“우린 상대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전력분석?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철저하게 우리 것만 준비했다. 당시 박종환 감독은 멕시코 고지대에서 지치지 않고 뛸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줬다. 태릉선수촌에서 마스크를 쓰고 훈련하며 강한 체력을 완성시켰다. 그게 큰 효과를 본 것 같다. 워낙 정보가 없다보니 브라질에 어떤 선수가 뛰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김종부 감독은 담담한 목소리로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멕시코 4강 신화, 고려대 스카우트 파동, 그리고 일찌감치 현역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되짚어가면서 ‘자신의 인생은 쉽게 가는 걸 허용하지 않는 팔자인 모양이다’라고 말할 때는 어떤 울림이 전해져왔다.
이런 그도 지도자의 마지막은 프로 경험을 해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사명감을 갖고 ‘음지’에서 활약했다면, 50대 중반 이후부터는 프로 감독으로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순탄치 않았던 축구 인생이지만, 그 마지막은 봄날이었음 좋겠다. 아주 따뜻한 봄날 말이다.
<챌린저스리그 우승팀 화성 FC 김종부 감독과의 '라이브 톡'>
말주변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진실과 소신으로 살아온 축구인생. 김종부 감독한테 곧 봄날이 오길 바란다.(영상 촬영=조석연 PD 헤럴드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