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종소리와 귀신들
옛날 경주 땅 어떤 민가에 얼굴이 곱고
자태가 아름다운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너무 예뻐 도화녀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집에 대궐서 왔다는 장수 몇 명이
들이닥쳐 어명이라며 그녀를 궁궐로 데리고 갔다.
뜻밖의 왕의 부름을 받아 궁에 들어간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임금이 계신 은밀한 방으로 안내됐다.
임금은 그녀를 보는 순간 눈빛이 달라졌다.
『음, 오느라 수고했다. 네가 도화녀냐?』
『그러하옵니다.』 『과연 소문대로 네 미모가
출중하구나. 오늘부터 내 곁에 있도록 하여라.』
『황공하오나 그리할 수 없사옵니다. 예부터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인 줄 아옵니다.
남편이 있는데 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비록 만승
〔天子〕의 위엄을 지녔다해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내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차라리 여기에서 목이 베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딴 남자를 섬기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갈수록 자세가 꼿꼿해지는 여인 앞에 주색을
즐기는 왕은 더욱 재미를 느꼈는지 희롱하는 투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아무 말없이 순순히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해, 주색에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던
진지왕은 나라 사람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 후 2년이 지나 도화녀의 남편 또한 죽었다.
장례를 치르고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 폐위된
진지왕은 어디서 들었는지 갑자기 도화녀의 방에 나타났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을 잊지 않았으렷다.
지금 네 남편이 없으니 내 뜻을 허락하겠느냐?』
도화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모님께 고하고 오겠습니다.』
여인은 총총걸음으로 안방에 다달았다.
자다 말고 찾아온 딸을 보고
놀란 부모는 자초지종 사연을 듣고 딸을 달랬다.
『비록 지금은 폐위됐으나 임금님의 명인데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느냐. 어서 임금이 계신 방으로 들어가도록 해라.』
임금은 그곳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그 동안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방안에는 향기가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은 갑자기 사라졌고,
그로부터 이내 여인에겐 태기가 있었다.
다시 열 달 후 해산을 하는데
느닷없이 천지가 진동하더니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도화녀는 아이의 이름을 비형이라 불렀다.
진평왕은 돌아가신 선왕의 아기 비형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대궐에 살게 했다.
비형이 15세가 되던 해. 진평왕은 그에게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다.
비형은 맡은바 일을 잘 처리해 임금의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대궐에 파다했다. 비형이 밤이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새벽녘에야 돌아와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울산 울주군 영묘사>
이상히 여긴 왕은 장수들을 시켜 비형의 행동을 살피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대로 비형은 밤이 되니 성을 날아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서쪽 황천 언덕 위에 다다르더니
한무리의 귀신들을 데리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장수들이 엎드려서 엿보니 귀신의 무리들은 새벽녘 여러
절에서 울려오는 범종소리를 듣더니 각각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비형도 대궐로 돌아왔다.
상세히 보고받은 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네가 밤마다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비형은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비형에게 뜻밖의 부탁을 했다.
『네가 귀신들과 그렇게 친하다니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개천에 돌다리를 놓도록 해라.
그곳은 모량내와 기린내, 그리고 물개내 세 물줄기가
합치는 곳이므로 홍수때면 물살이 거칠어 나무다리는
견디지를 못하느니라. 그곳에 돌다리를 놓으면
그쪽 행인들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날 밤, 비형은 왕가숲 귀신들을 불러 임금님의 청을
이야기했다. 귀신들은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돌을 나르고 한쪽에선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아름답고 튼튼한 다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오자 귀신들의 일손은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신원사 범종소리를 비롯 경주 곳곳 사찰에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다리는 완성되었고, 귀신들은
종소리를 들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모두 제각기 흩어졌다.
그 후 사람들은 사람의 재주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는 훌륭한 다리를 귀신들이 놓았다
하여 이 다리 이름을 귀교라 불렀다.
지금은 탑동 오능 부근 신원사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약간의 석재가 남아 옛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왕은 「반은 귀신이고 반은 사람」이라고 여기저기서
쑤군댈 만큼 비형이 일을 잘해내자 또 물었다.
『귀신들 중에 사람으로
출현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 길로 길달을 데려다
집사 벼슬을 주니 그는 충성스럽고 정직했다.
그 후 길달을 시켜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고
밤마다 길달이 그 문루 위에서 자니 그 문을 길달문이라고 했다.
귀신들은 그 후 왕가숲 입구에 영묘사
절터를 골라 하룻밤 사이에 절을 지었다 한다.
얼마 전 흥륜사 터로 불리던 경주시 사정동에서
영묘사(靈廟寺), 영묘사(令妙寺)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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