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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을 다녀와서
지난 10월 4일부터 8일까지 4박5일 동안 「야자수」 회원들이 부부 동반(14명)하여 중국 서안을 다녀왔다. 서안은 중국 역사, 문화의 고도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시이다.
고대 주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약 1,100여 년 간 수도였으며 장안(長安)이라고 불려오다 명나라 때 와서 수도가 베이징(北京)으로 옮겨지면서 서안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중국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유적지로는 ‘만리장성’과 ‘병마용’을 꼽는데 ‘진시황능’을 비롯한 진시황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도시이기도 하다.
올해 6월에는 우리나라의 박 대통령이 이곳을 다녀오기도 해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지금 중국의 실권자인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고향으로 소개되고 특히 우리나라의 삼성전자가 반도체 건설에 75억불을 투자한다고 하여 이래저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도시이다.
□시내관광(서안성벽, 문서거리, 비림)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침 8시 반에 출발한 비행기는 3시간 반 가량 날아온 후 현지시간(1시간 느림) 11시 경 서안공항에 도착하였다.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와는 달리 후덥지근한 날씨와 마치 타작마당의 북데기 속을 걷는 것처럼 희뿌연 하늘에 스모그현상이 엄습해왔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일 년에 강수량이 600미리 정도로 비가 적고 위쪽의 고원에서 부는 황사 때문에 별로 날씨 좋은 날을 구경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곳에 천 여 년이 넘도록 수도로 정했는지 물었더니 중국대륙의 중원지방이고 그 때 당시는 산림도 울창하고 땅이 비옥하였으나 인구가 늘면서 지나친 남벌의 영향이라고 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공장들과 대형공사로 인한 연기, 먼지 등으로 더욱 공기가 좋지 않다고 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고속도로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우리나라 8,90년대의 아파트 건설 붐이 일 때와 마찬가지로 고층 아파트 건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이 많은 아파트들이 다 분양되느냐 물으니 입주는 하지 않는데 다 분양된다고 한다. 돈 있는 사람들이 살지도 않으면서 1층에서 꼭대기 층까지 또는 가로 층 한 줄을 통째로 사 놓기도 하는데 매년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내에 진입하면서 수원 화성처럼 생긴 성곽이 시내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안성벽’이라고 한다. 황궁이 존재했던 시내중심부에 약 14km의 장방형으로 높이와 폭이 12-14m 정도 인데 성벽위에는 자전거와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당나라 때는 48km의 장안성벽이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의 성벽은 지금부터 650여 년 전 명나라 때 축성된 것이라 했다. 이것도 도시발전에 저해된다고 하여 철거하려 했으나 고향이 이곳인 ‘시중쉰’의 반대로 원형으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성벽 위에 올라가려면 돈을 내야하고 그 위에서 자전거나 전기차를 빌려 타는데도 돈을 내야 하니 지금은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한번 타보려고 별 수단을 다 썼지만 원체 타려는 사람들이 많아 타보지 못하고 내려 왔다.
성벽문 안으로 들어와서 처음 들른 곳은 ‘문서거리’라는 곳이었다. ‘문서거리’라는 이름이 생소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도로표지판에는 삼학가(三學街)로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흡사하였다. 고서적을 비롯한 옛날그림, 문방사우필기구 등을 판매하는 판매상들이 즐비하고 행상들로 붐볐지만 야바위꾼들의 호객행위와 소매치기들의 천국이라고 가이드가 단단히 주의를 주기에 엄숙한 옛날 분위기를 느끼기보다는 바짝 긴장하며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어 문서거리 가운데에 ‘비림’이라는 사당 비슷한 곳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문 위에 한자로 ‘秘林’이라고 써진 글자를 보고 대충 이해가 되었다. 즉 비석들이 숲을 이룬 곳이라 하니 무슨 비석들인가? 이곳에 전시된 비석은 약 3천 여 개 정도가 있는데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당나라 때 만든 것으로서 전시된 비석의 종류는 다양했다. 하긴 종이가 없을 때는 비석이 유일한 기록이고 비석만한 확실한 기록도 없을 것이다. ‘왕휘지’ 필체를 조각한 비석도 있으며 눈길을 끈 것은 ‘조조’가 ‘관운장’을 회유하는 편지를 보내자 관운장이 거절하는 내용을 대나무 그림으로 그려서 답장을 보낸 내용이 새겨진 비석도 전시되어 있었다. 흔히 비석이라고 하면 무덤 앞에 세워둔 비석만을 연상케 했는데 비석은 돌로 만든 교과서라며 많은 학자나 학생들이 찾아온다고 하니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사라진다.’ 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
□회족거리와 종루
서둘러 문서거리를 나와 ‘회족거리’로 향하였다. 회족(回族)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아랍)에서 무역 온 사람들이 한족(漢族)과 결혼하여 하나의 소수 민족으로 정착한 사람들이라 하는데 이들이 모여 사는 회족거리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회족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들어서니 초입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엄청난 인파에 어깨가 부딪혀 도저히 앞으로 나가기 곤란할 정도였다. 항상 이런 것이 아니라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이 나라의 국경절 연휴 때문이란다. 여하튼 이것 또한 훌륭한 관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 와중에도 자전거와 인력거가 빵빵대며 지나가질 않나, 청소차가 길 가운데를 가로막고 만만디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길 양편의 상점에서는 양 꼬치 냄새와 연기가 진동하고 전갈, 순대, 닭발, 개구리다리 등 희한한 음식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두, 주먹만 한 대추, 석류, 사과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뻘건 불판에서 호떡을 구어 내는 ‘히잡’을 뒤집어 쓴 여인과 땀을 뻘뻘 흘려대며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연신 국수 가락을 건져내고 있는 하얀 빵모자를 눌러쓴 건장한 회족청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에 밀려 끝에 까지 올라오니 성벽의 종루가 보였다. 성벽꼭대기의 고풍스런 팔작지붕에 있는 이 종루(鐘樓)에서는 매시간 종을 쳐 시간을 알려 준다고 한다. 멀지 않은 곳에 이와 비슷한 고루(鼓樓)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북을 친다고 한다. 둘 다 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로서 일종의 시계탑인 것이다. 인근 야시장의 유명하다는 전통 중국요리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니 종루의 야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화려한 빛깔의 야경이 생활화 된 것 같다.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둘째 날 오후 시안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진시황릉(秦始皇陵)’과 ‘병마용갱(兵馬俑坑)’을 관광하였다.
중국역사상 진시황만큼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2,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시황을 주제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 DVD등이 넘쳐나고 있다.
권력의 화신이요, 폭정의 아이콘으로, 불로장생의 허망한 꿈을 꾸다 50세도 못살다 (BC259-210) 죽은 그가 지금에 와선 그의 리더십을 얘기하고, 15억 인구를 먹여 살리는 관광 컨텐츠로 활용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진나라 제31대 왕으로 사분오열돼 있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하여 스스로 ‘최초의 왕’이라는 뜻의 ‘시황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짧은 생애에 만리장성과 아방궁, 왕릉과 병마용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의 건설 업적이 있는 반면에 자기를 비판한 학자들을 무차별 극형에 처한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은 그의 양면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13세부터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자신의 능과 병마용을 건설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의 전체넓이는 211만㎡규모라 한다. 왕릉을 들어가기 위해 전 대장님 내외와 함께 길 양편에 심어놓은 나무를 따라 계속 걸어도 입구가 나오지 않아 물어보았더니 들어 갈 수 없고 다만 광장가운데에 큰 비석만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둘레에 나무를 심어 쉽게 알 수 있지만 야산처럼 되어 있어 처음엔 누가 봐도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2천여 년이 넘도록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1974년 어느 농부가 하도 가물어 밭에 우물을 파다가 병마용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발굴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일곱 곳을 발굴하였지만 세 곳만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제 1,2,3전시관을 만들어 따로 공개 하고 있었다.
병마용 건설은 전국에서 장정 70만 명을 차출해 무덤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이 무덤에 딸린 병사와 전차, 말, 곡예사, 악사 등 8천여 개의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흙으로 모형을 만들어 묻은 것이다. 도용들이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다양한 색깔로 채색되었으나 발굴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어 몇 시간 만에 색이 바래 버렸다고 한다. 특히 도용들이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특이한 것은 무기를 든 병사의 손에 무기가 없는데 이는 진나라에 이은 한나라의 ‘항우’가 무기를 전부 빼앗아 갔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무덤을 전부 파헤쳐 내면 모를까 정말 불가사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74년 발굴당시 2,200여년 지하에서 잠자던 진시황의 호위군단이 깨어나자 세상은 그 위용에 압도됐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빼어난 조각솜씨와 기술에 감탄 했다고 한다.
진시황 능원이라는 지상 최대프로젝트가 당시 어떻게 가능했으며, 누가 주도했고, 공사에 쓴 돌과 나무는 어디서 가져왔으며, 동원된 70만 명이 생매장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가당키나 한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봉분아래에는 지하궁전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온갖 귀중한 보물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아직도 능은 발굴 않고 있는데 아직 발굴기술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후세를 위해 발굴하지 않고 있다고 하니 그들의 대륙근성과 만만디정신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했고 영원불멸을 꿈꿔왔던 진시황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으니 그가 건설한 거대한 능원도 역사 앞에서는 무상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며 전시관을 나섰다.
□양귀비(楊貴妃)와 장한가(長恨歌)
오전에는 시안에서 약 40㎞떨어진 행정구역이 린퉁(臨潼)구에 있는 당 현종의 별궁인 ‘화청궁(華淸宮)’을 관광하였다. 당시에는 온천수가 흘러나와 ‘화청지(華淸池)’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당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욕을 즐기면서 사랑을 나눴다는 약 1,000여 년 전의 목욕탕을 복원하여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다. 매표소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안내판에 설명문을 읽으니 1982년 4월 발견되어 1990년 9월 목욕탕건물만 복원했다가 1997년부터 현재모습의 별궁까지 건축했다고 한다.
화청궁 입구에 들어서자 7-8미터쯤 되는 벽면에 당 현종이 양귀비를 황궁으로 데려와 처음 만나는 모습의 대형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그 그림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해당탕(海棠湯)’이라는 이름의 양귀비 전용목욕탕이 내려다 보였다. 천 여전에는 얼마나 화려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투박한 콘크리트바닥의 형태로 형체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건물마다 용도가 다른 ‘성진탕’, ‘연화탕’, ‘태자탕’ 등 여러 개의 목욕탕이 있었으나 전부 보지 못하고 인파에 떠밀려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리도 아파오고 난간에 기대어 앉아 마당 쪽을 보니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놓고 매우 고혹적인 자세로 분수에 몸을 적시며 서있는 양귀비조각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당 현종이 첫눈에 반했을 때의 모습도 이랬을까 생각하며 자리에 일어서니 양귀비가 목욕 후 젖은 머리를 말렸다는 사각정자모양의 누각이 올려다 보였는데 당시 형태 그대로라고 한다.
그리고 당 현종과 양귀비가 침실로 사용하던 건물을 복원한 ‘비상전(飛霜殿)’과 그 앞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이날 밤 ‘장한가’라는 뮤지컬공연 시 다시 와보니 비상전 앞은 관람객석으로 변모했으며 연못은 뮤지컬의 수중무대로 변신했다. 또한 그 앞의 ‘여산(麗山)’이라는 산의 전체를 무대로 활용하여 엄청난 스케일의 조명과 음향으로 달과 별들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실제 그 위에 떠있는 밤하늘보다 더 실감나기도 했다. 마치 장한가를 공연하기 위해 복원한 것처럼 야외무대 공연장소로 너무 완벽해 보였다.
저녁때는 이곳에서 하루에 두 번 공연되는 ‘장한가’라는 뮤지컬을 관람하였다. 당 현종과 양귀비와의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그린 장한가는 원래 당나라 대시인으로 일컫는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지은 장편서사시를 북경올림픽 개,폐회식을 연출한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연출하였다고 한다.
공연내용은 대체로 화려한 수중무대를 배경으로 무희들이 춤추며 양귀비가 처음 궁궐에 입성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당 현종과 사랑을 나누다 급기야 ‘안록산(安祿山)’ 장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목매어 죽는 장면, 당 현종이 양귀비를 잃고 난후에 양귀비를 그리며 방황하는 생활 그리고 죽어서 한 마리의 새가 된 양귀비와 당 현종이 천상에서 오작교를 건너 다시 재회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화려한 조명과 음향이 압권이었다.
당 현종의 실정(失政)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로맨스를 스토리텔링화하여 서양식기획과 중국식 오페라극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날도 2회 공연인데도 불구하고 1천5백석의 객석도 모자라 통로에 앉거나 서서보는 사람도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장료가 무려 중국 돈 298위안(한화 약 5만5천원)이었다. 낮에 화천궁 입장할 때도 110위안(한화 2만원)을 내고 들어 왔으니 그 돈이 얼마인가? 장한가를 보려면 어쩔 수 없이 화청궁 입장료를 별도로 내야 하는 것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챙긴다’더니 죽은 양귀비가 알면 펄쩍 뛸 일이다.
그러면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 685-762)’를 꼼짝 못하게 한 양귀비(楊貴妃)는 어떤 인물인가? 현지가이드(김광휘)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 4대미인중의 하나로 본명은 ‘양옥환(楊玉環 719-756)’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가무방면에 능력이 뛰어 났다고 한다. 17세의 나이에 현종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가 죽자 ‘무혜비’를 대신할 미녀를 중국전역에서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현종은 며느리인 양귀비를 보고 한눈에 반하자 환관(내시)인 ‘고력사’의 설득과 회유로 마침내 745년 61세의 현종은 27살의 양옥환을 비로 맞아들인다.
양귀비에 흠뻑 빠진 현종은 매일 춤과 노래로 연회를 즐기는데 이때 양귀비 또한 현종이 총애하는 돌궐족 출신인 ‘안록산장군’과 눈이 맞는다. 현종이 정사를 멀리하자 이틈에 양귀비의 사촌오빠인 ‘양국충’이 국정을 농단하게 된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자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양귀비를 흠모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어떻든 이는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생긴 일로 피신하던 중 호위하던 병사들마저 양귀비와 일족을 사사시킬 것을 강요 하였다. 이들의 요구에 불응할 경우 자신의 목숨마저 부지할 수 없게 되자 양귀비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고 양귀비는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귀비가 죽은 후 장안에 돌아온 현종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내다 그가 죽은 지 6년 후인 762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러한 양귀비와의 로맨스를 ‘백거이’가 장한가라는 장편의 서사시를 쓰고 1,200년이 지난 지금 ‘장이머우’ 감독이 뮤지컬을 연출하여 떼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화산(華山)등정
오늘은 시안관광의 마지막 일정인 ‘화산’을 등산하는 날이다.
호텔(軍安王朝飯店)에서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화산으로 향하였다. 호텔에서 화산까지는 120㎞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시내를 나와 고속도로로 이동하면서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것은 끝없는 대평원인데 이 평원에는 온통 옥수수와 석류나무라 한다. 하긴 시안은 양귀비가 석류를 먹고 예뻐졌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어디를 가나 석류로 넘쳐난다. 중원(中原)이란 말은 많이 들었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보면서 그 실상을 느낄 수 있었다. 해발500미터 내외의 끝없는 대평원이 중원이며 이 중원 땅은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먼지가 쌓여 땅이 비옥하다고 한다.
약 2시간가량 차를 타고 달리니 서서히 높이 솟은 산들이 닥아 온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화산은 중국5악(五嶽) 중에 하나이며 동, 서, 남, 북, 중봉까지 해서 모두 5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한다. 해발 2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들로 밑에서 바로 등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고 한다.
우리일행들도 케이블카를 타기위해 버스에서 내려 다시 케이블카 승강장까지 가는 전용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마치 강원도 한계령고개를 넘듯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약15분정도 올라가니 승강장이 나왔다. 여기서 케이블카 승차권과 화산 입장권을 나눠주는데 150위안과 180위안이었다. 전용버스 왕복료 40위안까지 합치니 무려 370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약 7만 원 정도다. 하기야 과거 금강산입산료로 100달러(11만원)를 지불한 걸 생각하면 별것 아니다싶지만 가령 설악산 입장료로 그만큼 받는다고 하면 가당키나 하겠는가?
입장권에 그려져 있는 오봉들이 대개 해발 2천에서 2천백미터 내외인데 실제 케이블카에서 내린 지점이 1,615미터이니 4, 5백 미터정도 오르는 것이다. 국경절 연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한산하였다. 일행들이 도중에서 휴식도 하고 하산하는 분도 있어서 고사장님 내외와 함께 암벽능선을 타고 올랐다. 바위틈사이로 때론 돌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갔더니 ‘금쇄관(金鎖關)’이라는 통관문이 나왔다. 이문을 지나니 얼마 안가 중봉과 동봉 그리고 서봉, 남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안내판을 보니 중봉이 가까운 거리였다. 중봉에 오르니 꼭대기에 사당 비슷한 암자가 하나있었다. 넓은 바위위에서 앞을 내다보니 서봉과 남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였다,
이제 그만 내려갈까 했더니 동봉까지만 더 올라가자고 하여 철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니 정상이 나왔다. 제법 울창한 소나무 그늘아래서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사진 몇 컷을 찍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직절벽의 암벽과 계곡이 장관이었다. 중국의 명산이라는 산은 대개 이런 모습이다. 몇 년 전 가보았던 중국 오악중 하나인 ‘태산(泰山’)이 그러했으며 지난해 다녀온 ‘장가계(張家界)’와 별반 다름없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서 내다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계곡과 구름 속에 잠긴 산봉우리가 신비스런 정도다.
지금쯤 붉게 물든 설악산을 상상해 본다. 신흥사 쪽에서 ‘비선대’를 지나 ‘양폭산장’을 거쳐 ‘희운각’을 오르며 대청봉에 다다르기까지 물감을 풀어놓은 듯 형형색색의 단풍을 이곳에서는 구경하기 어렵다. 단풍대신 암벽능선 길 철제가드레일 좌우측에 빨간색 리본을 단 자물쇠가 가득히 채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흰색과 검은색 일색인 화산에서 유일하게 컬러를 볼 수 있다면 이것뿐이다. 자물쇠를 사서 철제가드레일에 채우고 열쇠는 낭떠러지 밑으로 내 버리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민속신앙을 믿는 중국 사람들의 오랜 관습이라고 한다.
등산을 마치고 다시 내려왔던 길로 하산하였다. 산은 언제나 인간에게 겸허한 마음을 가르친다. 그래서 공자님도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먼 곳까지 와서 높은 산의 정기를 받고 가니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려오니 케이블카 승강장 앞에서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시내공원을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그동안 여행의 피로도 풀 겸 발마사지 업소로 향하였다. 이것으로 시안 관광일정도 마치게 된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4박5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즐겁고 보람 있는 여행이었다.
우리 ‘야자수회’가 지난 2001년 해외여행으로 맺은 인연이 벌써 12년이 흘렀다. 모두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앞으로도 이런 여행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발마사지를 마치고 나오려니 마사지 집 벽면구석에 걸린 족자가 눈에 띄었다. ‘천리지행시어족하(千里之行始於足下)‘라, 천 리길도 발바닥부터 시작한다는 내용이 애교스럽기 그지없다.
이제 야자수회도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왔지만 이제 처음을 되돌아보고 초심을 잊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해외여행동안 수고하신 ‘이병철’회장님 내외분을 비롯한 회원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야자수회」 화이팅! 끝 (2013,10,)
첫댓글 황 교수 여행기 수필가 답게 잘 쓰셨습니다.가이드 설명을 자세히 귀닮아듣고 상세히 쓰셨습니다.
야자수회가 나날이 단결되고 화목한 모습 입니다.감사 합니다.건강 하세요.
참 좋은 모임이라 다시한번 새겨 봄니다. 우리는 먹고 보기만 해도 이렇게 자세한 설명과 역사적 사실를 다시 접 할수 있다니 그 보다 좋은 모임이 또 있을까? 다시 서안을 다녀 온 듯 합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 합니다. 내내 건강 하세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읽어보면 기억이 새로워 지겠죠. 해단식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