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떤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습니까?(마르 14:1-15:47)
박재원 아타나시오 신부 / 전주교회
오늘은 성지주일이자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에 호산나를 외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군중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성지주일이자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고난주일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군중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며 3년 동안 제자의 삶을 살았던 유다와 푼돈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인물이 상황에 따라서 다른 행동을 하였습니다. 인물은 같지만 행동은 다릅니다. 초막을 짓고 살자던 베드로와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한 베드로는 모두 같은 베드로이자 다른 베드로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다름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참뜻을 알기 전 베드로와 예수님의 참뜻을 알고 변화된 베드로는 분명 다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참뜻을 알고 변화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주일과 성금요일에는 수난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셨는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했던 대사제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법정에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본티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니케아신경이나 사도신경을 통해서 매번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공관복음서라 불리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복음이 모두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유독 루가복음만 달리 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직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고통 가운데에서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왜 예수님의 처형을 허락했나요? 예수님께 죄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기득권층과의 관계, 군중심리 등이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상황에 굴복한 것입니다.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합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십자가의 처형을 예고하신 나약한 모습에 실망했습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께 초막을 지어 살자고 했습니까?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보았는데 십자가의 험한 길보다는 그들과 함께 평안하게 살기를 바랬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다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예수님을 처형하고, 고발하고, 배신하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이 악인이기에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른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못박았습니다. 몰랐어도 분명한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전부인 줄 압니다. 나는 사랑하시고, 내가 싫어하는 아무개는 싫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예수님을 만들고, 자신만 소유하고자 합니다. 자기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혹시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찬양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의 장담이 얼마나 쉽게 무너졌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일 잘 지키고, 헌금 잘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얻고, 하느님의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나와 하느님을 가로막는 자색보를 제거하고 하느님의 참뜻을 깨달아 영광의 부활을 맞이하며, 하느님과 진실로 마주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