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소망은 가족이 화목한 것이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나 家和萬事成 같은 고사성어를 걸어놓고 가족이 화목해야 다른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신앙이 있다.
뭐가 잘 안 되는 집을 보고 쉽게 집안이 저러니 저꼴이지 하며 잘 화합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고 콩가루 집안이라 한다. 잘 화합한다는 것은 가족끼리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져 합의를 잘 한다는 것과 가족 안에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어 일사분란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에게서 화목한 가정에 대한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는데 그 내용들은 대부분 효자인 주인 공이 늘 부모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함으로써 나중에는 모든 부귀영화를 얻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나는 그 주인공처럼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즉시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자주 했고 그래서 초등학 교에서부터 중학교까지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학생, 성격이 원만한 사람이라는 말이 트레이드 마크처럼 붙어다녔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지독한 말썽꾼으로 변신을 했다가 수녀원에 들어가면서 다시 예전의 그 우직한 순명자로 되돌아갔다. 장상들에게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는 자매들을 비판하면서 시체처럼 순명하라 는 이냐시오의 가르침이나 준주성범의 수도자의 길을 깊이 깊이 새기며 살아갔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수도자의 순명에는 참으로 여러 차원이 있다는 것을 25년의 세월을 통해 배웠고 가장 일상적인 순명이란 유기적 순명으로서 자신의 자유의지와 온전한 동의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족의 화목함 역시 엄격함이나 위계적 질서에서 오는 일사분란함이 아닌 다양한 의견, 다양한 성향들이 살아 있을 수 있는 환경에서의 일치됨 혹은 합의함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20세기는 공동단위로 살아가던 인간들에게 개개인의 중요성과 독자성을 인식시킨 시대였다.
개인의 삶이 무시되고 가족 혹은 마을 단위로 살아가던 즉 공동체로서만 의미가 있던 인간들에게 개개인이 의미가 있고, 역사가 있음을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고 21세기를 맞이 하면서 우리는 개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공동체로 화합하기를 갈망하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복고풍으로 돌아가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인간의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기계론적 사고방식이 인간사 안에서 그 빛이 퇴색되었을 뿐이다.
이분법적이고 환원론적이 아닌 생태적이고 유기체적인 사고가 이제 21세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유기체적이고 공동체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의 의미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개체의 독자성을 가장 완전하게 지닐 수 있는 곳은 가정일 것이다. 가정은 공동체라는 의미없이 형성될 수 없으면서 동시에 현대의 가정은 개별적 생활리듬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 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정이 어떠해야 한다는 정의는 아직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본당의 미사 강론에서 신부님은 대희년을 준비하며 특히 가정을 성화하는 한 해가 되자고 강조했다. 가정 성화를 위해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은 성화에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며 이 가정기도가 잘 이루 어지기 위해 주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 일찍 돌아와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라는 충고를 했다. 이 강론에서도 나타나지만 교회는 아직 오늘의 가족들의 삶의 리 듬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학생들은 방과 후에도 갖가지 과외수업으로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 오고 직장인들도 자신의 업무 리듬에 따라 귀가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또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사회 에서는 늘상 모임은 넘치게 마련이다.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명화에서만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정말 가족이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만 가족이 성화될 수 있다면 우리는 구조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인 문제점으로는 ▲결혼한 여성이 모두 전업주부는 아니다 ▲가족들은 가족관계 이외에도 다각적인 차원에서 관계를 맺는다 ▲가정기도에 대한 개념의 변화가 필요하다.
종교생활을 교회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교회제도에 이상기류가 발생했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이에 대한 대안으로 ▲가족 이 모여 함께 생활표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다각적인 각자의 사회적 연결망에 대해 공동으로 합류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본다 ▲교회중심의 종교생활에서 가정중심의 종교생활에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오는 신자를 맞아 사목자의 홈그라운드에서 사목할 것이 아니라 사목자의 홈그라운드 자체를 열린사목으로 전환 시켜야 한다.
김현옥 수녀(미리암·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