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변명기/ 윤희경
내가 고향을 기억하는 한
고향은 곧 출간될 책이다
강 속에 모르는 강으로 흐르는
고요한 수면 아래 잠긴 사람 살던 동네
다슬기를 줍고 반딧불을 쫓던 강가의 뒷이야기가 바닥에 흐르는
강 머리말에는 자갈돌 밟는 소리가
강 후기에는 치열했다 쓰려고 한다
이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이유도 표4에 넣을 것이다
내가 그대를 기억하는 한
그대는 첫 번째로 출간될 책이다
보이지 않아도 그 손바닥에는
지글거리는 태양의 질투를 쥐고
사막을 걷는 은둔의 미소가 흐르고 있다
초승달 같은 첫 장에는 제목을 굵게 잡고
나와 달라도 몹시 다름이여 라고 쓰고
마지막 장까지 같은 말만 하려고 한다
고향이나 그대는 나의 본체를 밝히는 근거
주제는 오직 한 가지
우리는 왜 근거 있는 행동만 하며 살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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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금강(南金剛) 어느 방하승의 기억만이/ 고형렬
추수철이 되면 산에서 꼭 그 방하승이 내려오셨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을 해드렸다
춤을 추고 경(磬)쇠를 치고 독경을 읽는 한 달이 가면
어느 해는 피가 터지기도 하셨다
관객들은 값을 조금 내고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끝내 아이는 그를 따라 영을 넘지 않았다
서울을 지나가는 질풍노도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돌아오지 않는 것에도 영원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그가 산에서 혼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쳐다볼 사람이 없는 도시를 떠나
사람들을 찾아 떠났던 그 끝으로 다시 돌아간다
문득 피 터지는 가을볕의 노래가 들린다
자리를 들고 따라다니던 그 아이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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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암/ 박분필
하늘길 벼랑에 구름 한 채 걸려 있다
한 층 또 한 층 돌계단을 거슬러 올라가며
내 몸을 지나가는 물과 불과 바람을 만난다
저곳으로 가는 길이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는 듯
등 뒤에서 낮아지고 낮아지다가 침묵에 든 계단들
밤에는 별이 쏟아지고 아침에는 운해가 출렁이고
저녁에는 노을이 가슴 안으로 다 밀려든다는
천년 넘은 침묵의 푸른 뿌리들이 울울창창한
자연의 침묵,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물결로,
떨리는 나뭇잎으로 오고 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건널목일까
바위가 푸른빛을 뿜어내도 그저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구름골짜기
한 점 티끌 없이 투명한 달이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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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등이/ 박재홍
아비의 등이 굽은 곱등이 등처럼 휘었다 쉼이 없는 노동과 스스
로의 분노를 메치는 담금질과 용광로를 들락거리는 현실 속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화살처럼 과녁을 향해 떠났다.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의 등이 굽어진다는 것을 모른다 스스로 화살로 다듬어져
과녁을 향한다는 것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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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함성/ 이명우
중심을 잡아주는 힘은 흔들리는 발이 있기 때문이다.
외줄에서 균형을 잡는 그녀,
빈손으로 외줄에 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입은 옷에 붙은 공기, 펄럭이는 치마에 붙은 공기, 두 팔에 매달
린 공기, 관중들의 박수 소리 30db, 불안한 함성 80db, 부채 1개, 긴
장감 듬뿍
그 많은 것들을 입고 들고 외줄에 오른다. 두 팔이 파르르 떤다.
두 팔로 중심을 잡으면서 한 발이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부채에 몸을 의지한 몸이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불안한 함성이 외줄에 매달린다.
제집처럼 오가던 그녀의 몸이 펄쩍 뛰어오른다.
허공을 흔드는 박수 소리에
밀린 월세가 확 달아난다.
그녀가 허공집에 주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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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 인장/ 김창근
상장 맨 밑 표창 수여자 이름 옆에
여봐란듯 찍혀있는 큼지막한 붉은 인장
굵직한 사각형 글씨체에 위엄 잔뜩 서려 있다
아무나 수장을 맡는 것이 아니고
아무에게나 무턱대고 상 주는 게 아니라는 걸
폼나게 보여주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저 도장 손에 쥐고 힘깨나 써보려고
저 인장 받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던
사람들 뻘게진 눈동자가 인장 위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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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출 변명기'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